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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링크


깊은 곳에서 그들이

인스머스의 사람들이라면 모두들 알고 있을 법한 곳이 바로 '깊은 곳'이다. 깊은 곳은...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어떤 곳인지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깊은 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을까? 가끔씩 이런 위화감이 들곤 한다. 


"일어나."

  목소리다. 꿈 속에서도, 그리고 유령선에서도 들었던 그 목소리..그렇다면 여기는 또 어디인가? 나는 금새 정신과 감각이 어느 정도 돌아왔고, 곧 목덜리를 차갑게 적시는 동굴의 축축한 바닥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유령선 아래의 동굴에 있던 것이다.


"으윽..."

일어나려고 하자 몸이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결국 일어서는 것은 포기한 채 앉아서 이곳을 둘러보았다. 허리가 마치 잘렸다가 다시 붙은 것처럼 아팠다.

어둠, 그리고 젖은 바위들이 이 동굴을 구성하는 전부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보였지만, 멀쩡한 상태이든 지금의 몰골으로든 그 곳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내 옆에 그것이 앉아 있었다.

 해파리의 시체가 '앉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완전한 사람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것은 은백색 머리를 한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이었다. 나와 나이가 엇비슷해 보이는 여자가 이 어두운 동굴에 혼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넌 방금까지 내 허물을 깔고 앉아 있었어. 그건 우리들에겐 상당히 모욕적인 일이야."

축축하지만 또 끈적하게 느껴지는 기이한 음성으로 그녀가 말했다. 그녀가 말할 때마다 내뱉는 숨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무슨...말이야? 허물이라니?"

나는 어리둥절한 태도로 바닥을 더듬어 보았다. 과연, 물컹한 껍질 같은 것이 내 뒤에 쌓여 있었다. 마치...해파리의 점막 같은 것이 아주 역겨운 감촉이었다. 나는 조금 질색하며 손을 뗐다.

"반말을 하고, 허물을 더러워 한다라. 넌 다른 신을 만났더라면 꼼짝없이 '죽음'을 맞이했을 거야. 하지만 나는 널 죽이지 않을 거야. 난 널 이 곳까지 불러온 신이니까."

내 태도를 보고 불쾌하다는듯 그녀는 눈을 찡그렸지만, 말한대로 날 해치려는 듯한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반면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공포감에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기묘한 음성, '허물', 그리고 자신을 신이라 자칭하는 것까지, 그녀가 기이한 존재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가 실제로 신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실제로는 바닷속에 사는 식인 괴물일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나는 실체를 모르는 무서운 존재에게 홀려 내 무덤을 직접 파고 말았고, 나는 이 사실이 두려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난 널 해치지 않을 거라고 분명히 말했어. 그리고 이 동굴은 깊숙히만 가지 않으면 안전할거야. 네 몸이 나으면 네가 돌아갈 수 있게 도와줄테니 걱정하지 마." 그녀가 말했다. "그것보다 궁금한게 많지 않아? 어차피 시간은 많아. 무엇이든지 대답해줄게."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이 신이라고 말했어요. 그뿐아니라 '다른 신'이라는 것을 언급하기까지 했죠. 당신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주세요."

내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가 나를 해칠 낌새는 보이지 않았고, 어차피 하반신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지금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녀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알 만한 것은 다 알아내 보기로 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조금 말아올리다가, 내 질문을 듣곤 말했다.


"신이라고 말했어. 단지 네가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미지와 우릴 대조하고 있을 뿐이야. 우린 보통 어떤 개념을 수호하며 그 개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에 머무는 존재들이지. 나는 '물고기의 신'이야. 네가 꿈에서 봤던 그 모습이 나의 진짜 모습이야. 이 모습은 '변장과 화장의 신'이 우리에게 부여해 준 인간의 모습이고. 널 이 곳에 불러왔을 때, 네가 놀라선 안되잖아? 그래서 미리 이 모습으로 변해 있었어. 남은 허물을 치우진 못했지만..." 그녀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미안해. 이 모습으로 

변한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거든. 인간의 모든 것은 아직 익숙하지 않아.. 난 아직도 두 발로 걷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음, 별로 재미 없어나 봐. 네가 웃으라고 한 농담이었는데, 재미가 없었다면 미안해." 

그녀는 혼자서 마치 오랫동안 준비해 온듯한 말을 내뱉고는 혼자서 자신이 생각한 농담을 하더니 아무 반응이 없는 나를 향해 미안한듯 조금 울먹거리는 소리를 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상황에서 풍부한 감정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대배우라고 부르고 싶다. 하지만 인스머스의 모든 남자들은 연기에 그렇게 재능이 있지 않다. 나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따라서 그녀에게 최소한의 반응만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말씀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나는 이렇게 말하곤 슬쩍 천장을 쳐다보았다. 혹시 내가 떨어진 구멍이 보이나 싶어서였다. 구멍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해 낸다면 그녀 몰래 이 곳에서 탈출할 계획이었다. 정말 악의가 없어보이는 그녀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물고기 잡는 일만 하며 살아온 거친 어부는 아직 물고기의 신과 담소를 나눌 준비가 되지 않았다.

"어디 봐? 넌 지금 나랑 대화하는 중이야. 이런건 신과 대화할 때 지키는 예절이 아니라, 인간들도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거 아냐? 심지어 나는 너를 직접 부른 장본인인데...." 갑자기 그녀가 내 몸을 당겼다. 깜짝 놀란 나는 그녀를 쳐다보았고, 그녀는 아주 소름 끼치는 모습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눈은 우주와 닮아 있었다..마치 밝기가 약한 별만을 머금은 검은 우주. 검은 색이 끝없이 퍼져 나가면서도 밝은 빛이 보이지 않는 것이 날 두렵게 했다. "도...도대체 원하는 것이 뭡니까? 신께서 평범한 어부는 왜 보려 오신거죠?" 


"음, 넌 평범하지 않아, 에이런. 난 널 알고 있어. 넌 날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네 부모님은 깊은 곳에서 돌아가셨지. 하지만 넌 깊은 곳이 무엇인지 기억하지조차 못해. 깊은 곳이 무엇인지, 넌 알아내야 해. 널 돕고 싶어. 그래서 널 부른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나는 살짝 감았던 눈을 뜨며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이전의 무서운 모습이 점차 사라졌고, 이제 조금 미소를 띠며 날 보고 있었다. 여전히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위험천만한 존재였지만, 부모님... 부모님이 깊은 곳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단순한 사고가 아닌 무엇인가 내가 알고 있어야만 할 무서운 진실이 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난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인간과한없이 비슷한 아름다운 얼굴, 그렇지만 인간이 아님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기묘한 오오라가 느껴졌다. 그녀는 계속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나는 살짝 웃어 보였고, 그제서야 그녀는 활짝 웃었다. 


"신이란 걸 믿지 못하겠지? 인간 같지는 않은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말이야. 난 그렇게 엄청난 신은 아니거든..그렇다고 무시할 만 한 신도 아니고. 너희 인간들은 우리 앞에서 거만하게 굴어서도 안되고, 너무 비굴하게 구는 것도 좋지 않아." 그녀가 말했다. "궁금한게 있어. 혹시 고래에 대해 알고 있어?"


"고래라, 알죠. 우리 어부들 중에서도 거칠다고 소문이 난 포경선의 선원들은 인스머스에서도 유명하니까요. 고래는... 크흠, 이런 말을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죽이고 해체하면 여기저기에 쓸 만한 것들이 많이 나오죠. 하지만 고래를 잡으려면 고래만큼 커다란 심장이 필요해요. 고래가 한 번 꼬리를 잘못 휘둘러도 배가 박살이 나니까요. 포경선에는 딱 한 번 타봤어요. 3년 전, 그러니까 제가 15살이었을 때 였죠. 그 때 고래를 잡는 것을 도왔었는데..."


그 날의 밤을 똑똑히 기억한다. 나는 당시 포경선의 사실상의 심부름 소년이었다. 보통은 깜둥이들이 그런 역할을 하지만, 난 당시 선원으로 승선했음에도 별 경험이 없는 초짜 취급을 받았고 결국 빠르게 배에서 잡역부 수준으로 입지가 빠르게 줄어들고 말았다. 그들은 내가 일반 선원의 배당을 받으면서 편한 일만 한다고 비아냥거리곤 했다. 당시 배의 심부름 소년은 어린 깜둥이 소년이었는데, 나보다 키가 머리 두 개쯤은 작았던 것으로 보아 아직 10살도 채 되지 않았었으리라. 녀석은 자신의 이름을 잭이라고 소개했다. 난 나와 비슷한 처지인 녀석에게 동정심이 생겼고, 가끔 밤에 갑판을 청소할 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전 말이죠, 언젠가 혼자 여행을 하고 싶어요. 유색인이 배를 가지는건 다들 불가능하다고 여기지만 난 꿈이 있어요. 언젠가는 포경도, 어업도 아닌 훌쩍 떠나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로 내 배의 키를 잡고 갑자기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에이런, 당신의 꿈은 뭐죠?" 잭이 그 밤에 내게 말했다. 그 날의 밤하늘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신은 야속해서, 항상 인스머스에는 뿌연 하늘과 물만을 부어대면서 좀 떨어진 다른 곳에서는 천공에서 빛나는 별을 후하게 뿌려주곤 한다. 그 하늘은 신이 아무도 못 보리라고 생각하곤 장난 삼아 벌인 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별, 마치 바다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와 견줄 수 있을 만큼 수많은 별들이 엄청나게 밝게 빛나고 있었다. 어쩌면 저 별 하나를 훔치더라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 잭. 너는 언젠가 이런 밤하늘을 보면서 배를 몰고 있을 테지. 난 아마 늙은 선원이 되어, 술집에서 허풍을 떨며 용돈이나 벌어먹고 살고 있지 않을까. 이번 항해에서 큰 고래나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당시 내가 타고 있었던 포경선은 잡이가 신통치 않아 조그만 돌고래 몇 마리만을 잡고 겨우 버티고 있었다. 모두들 슬슬 커다란 고래가 모습을 보일 만 한 항로로 가고 있다고 기대하고 있었고, 항해사도 상당히 간절한 태도로 열심히 지도를 보며 육분의를 들여다보곤 했다. 잭은 내게 너무 비관적인 태도는 좋지 않다고 말했지만, 난 오히려 잭의 낙관적인 태도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잭의 얼굴에 그림자가 져있던 것은 보지도 못했다. 그 때 잭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홀로 머물던 그림자를 발견하곤 외쳤다. "고래...? 고래? 고래에요, 에이런! 큰 놈이라고요! 내가 선장님을 깨울게요. 키를 잡고 있는 선원을 깨워줘요." 잭은 그 그림자가 고래라고 확신하는 듯 외쳤다. 나는 설령 고래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선장을 깨운 것은 잭이기 때문에 나까지 혼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고, 그를 도와주기로 했다. 얼른 키로 가보니 키를 잡고 졸고 있던 선원이 보였다. 내가 그를 흔들어 깨우자 그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내가 고래가 나타났다고 하자 그는 잭만큼이나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뒤에서 잭과 선장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선장님, 고래가 보였답니다. 저거, 저 그림자가 고래라는군요." 키를 잡고 졸고 있던 선원이 말했다.

[내가 좀 보도록 하지.]

선장은 천천히 품에서 비싸게 생긴 접이식 망원경을꺼내 그의 눈에 가져다 댔다. 그가 조용히 그것을 지켜보는 동안 잭과 나는 안절부절하면서 그를 지켜보았다.

[음, 고래가 확실해. 자고 있는 얼간이들을 깨워! 빨리빨리! 저 놈을 잡는다!]

마침내 선장은 소리를 질렀고, 기다렸다는듯 우리는 튀어나가 선원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모두들 고래라는 말을 듣자 마치 처음부터 잠들지도 않았던 것처럼 금새 활기를 되찾아 몇 분 만에 갑판에 모여 고래에게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내가 저 놈의 눈에 작살을 꽂아 주겠어."

"그럼 내가 놈의 혀를 뽑아 보여주지!"

그들은 고래가 아니라 골리앗조차 때려 눕힐듯한 기세로 선장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좋다, 이 얼간이들아. 당장 저 놈을 죽여버리도록.

세 보트에 나눠 탑승한다!]

그들은 일사분란하게 보트에 앉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내다운 호쾌함으로 노를 저어 빠르게 놈에게 접근했다...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됐어?" 그 신은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내 곁에 바짝 붙어서 말을 듣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아름다웠지만 기이했고, 이상하리만치 입은 옷이 끈적거렸는데 나는 이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신을 내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아무런 티도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끔찍했어요. 고래는 컸고 우리는 싸웠습니다. 한 30분 동안은 실랑이를 벌였던 것 같아요. 운좋게 지친 고래의 눈에 내가 던진 작살이 박혔고, 결국 내가 고래를 잡은 것이 되어 모두의 환호를 받았죠. 그 때 조금 떨어진 본선에서 비명이 들렸습니다."


선원A:도대체 무슨 소리지?


선원B:저것보게, 저것 보라니까! 선장이 칼에 찔렸어!


선원C: 선장을 찌른 얼간이가 누구란 말이야?


선원 A,B: 바로 잭이야! 잭이 몰래 그를 찔렀어! 선상반란이다!


에이런: 오, 이런...


진짜 심부름꾼 소년이었던 잭은 사냥에 참가하지 않았고, 선장은 본선을 지키면서 우릴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잭이 선장에게 접근해 그를 찔렀던 것이다. 선장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곤 차가운 바다 속으로 빠졌고, 추측컨대 그 몸은 깊은 곳을 향해 흘러갔을 것이다. 아무도 그를 찾지 못했으니 말이다. 잭은 배를 돌려 홀로 도망치려 했지만 배를 조종하는 법조차 몰랐고, 결국 분노한 선원들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이후 우리는 항해사의 선로 변경에 동의한 채 겨우 고래 하나만을 잡고 초라한 모습으로 귀항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이후 고래를 잡았다는 어린 내게 어울리지 않는 타이틀 덕분에 이것저것 하며 살아왔고, 그렇게 3년을 버텼다. 하지만 아직도 잭이 죽기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대로 살아가고 싶어하지만, 대개 그들의 운명이 그것을 허락치 않는다고.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배반하고 삶을 쟁취하기 위해 저지른 것 뿐이라고. 잭이 날 노려보며 했던 말이 아직도 떠오를 때마다, 나는 소름이 끼쳐 잠을 설치곤 한다.


"끔찍한 이야기네. 정말 슬퍼. 그래도 내가 잭과 만났더라면 난 잭을 정말 좋아했을 거 같아. 넌 이해하지 못 할지도 말이야." 그녀가 좀더 끈적하고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슬픔을 표현한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이시여. 당신은 어째서 날 좋아한다고 말하시는겁니까? 날 부른 것이 날 좋아하기 때문입니까?" 내가 조금 의문스럽다는 듯 쏘아붙이자 그녀는 내게서 살짝 떨어져 앉으며 말했다.

"맞아. 난 널 사랑해. 좋아하는 정도보다 훨씬 더. 인간들을 사랑하는 다른 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걸. 사랑하는 인간이 아무것도 모른 체 살아가는게 안타까워서 부른거야. 그렇지만..." 그녀는 돌연 내게 달려들어 얼굴에 자신의 볼을 비비기 시작했다. 끔찍하리만치 차갑고 축축했지만, 난 버둥거리면서도 밀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네가 슬퍼하는걸 보기 싫어. 계속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아가고 싶다면 나랑 여기서 살아주면 안될까...? 저기 위 인스머스는 조만간 끔찍한 일을 겪게 될거야..." 그녀의 목소리에서 이번에는 확실하게 절망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마음이 저려오면서도 나는 그녀를 떼어냈고, 계속 그녀의 고백 아닌 고백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하찮은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라, 그리고 인스머스에 닥칠 재앙...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사실대로 말씀해 주시리란 기대는 접겠습니다, 신이시여. 당신은 마치 짖궃은 어린아이처럼 비밀스러운 암시와 허울뿐인 농담을 오가는 도통 종잡을 수 없는 태도를 보이는군요. 신께서 어찌 저같은 평범한 선원을 딱하게 여기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당신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반말 안해?" 그녀가 말했다. "네?" "처음 만났을 때는 반말 해주지 않았어? 존댓말은 그만둬. 우리 사이가 멀어지는 것 같단 말이야...." 그녀는 그렇게만 말하곤 조금 애처로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사실 어처구니 없는 것은 나였다. 그녀는 뻔뻔하게도 마치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같이 가까운 사이를 요구했다. 어쩌면 괴물 혹은 마녀가 속셈을 가지고 내게 접근했으리라는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녀의 기묘한 행보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실 그녀가 수상쩍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왜인지 그녀가 자신과는 동떨어진 존재라는 것을 느낄수록, 그녀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마음 속에서 울려퍼지는 경고가 좀더 커졌다. 내가 눈을 피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입을 벌리고 꾸르륵 거리는 기이한 소리를 내고는 내게서 천천히 떨어졌다.

"내일 다시 올게. 혼자 지낼 수 있을거야, 여기는 안전하니까."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네 다리 말인데, 3일은 걸릴거야. 온전히 낫는데 말이야."

그리곤 뒤에서 철퍼덕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굳이 뒤돌아 보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어디론가 가는 소리임이 분명했다. 이 동굴에 혼자 남겨지는건 미친듯이 두려웠지만 그녀가 내게 '위험하다'고 말한 동굴 내부로 기어가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쯤 저녁대일 것이다. 아침에 온다고 하면 8~9시간은 혼자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혹시 몰라서 신을 찾아보았지만, 원래 신은 필요한 순간에 찾아주지 않는 법이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누군가 말하기를, 신을 죽였다

그날 밤은 외롭고 무서웠다. 유령선의 선실 복도 천장이 부서진 바닥 구멍을 통해 살짝 보였다. 얼핏 보면 금새 올라갈 수 있는 높이 같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지금 내 다리가 말해주고 있었다. 그 신은 무엇일까. 물고기의 신? 터무니 없지만 난 그녀가 날 응징하기 위해 부른 것이라는 착각도 했었다. 도대체 그 신이 날 사랑하는 이유도, 날 인스머스에 돌려보내는 것을 주저하는 이유도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날 인간의 대표로써 사랑해 주는 것은 아닐까 싶었지만,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는 음성을 듣고 그 생각은 버렸다. 소년이라면 소년이라 할 수 있을 내 순진함이 그녀의 음성에 섬세하게 떨렸으니까. 좋다, 조금 심장이 뛰었다는 말을 고상하게 했음을 인정한다. 그 신은 꽤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때 그녀의 음성에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녀와 내가 연인이 된다는 멍청한 생각도 해보았지만, 금새 그 위험한 생각을 털어냈다. 그녀는 신이었다. 인간 소년에 불과한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찰나에 불과했지만 그녀의 눈에서 보였던 공허한 우주를 난 기억하고 있었다. 당혹스러움과 두려움으로 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끼던 나는 어느샌가 잠들었다.

다리가 욱신거린다든가 하는 자잘한 것은 신경 쓰지도 않은 채 말이다.


"에이런, 당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는건가요?" 꿈에서 잭이 나타났다. 당황스러워 하는 내게 그는 말했다. "그 여자는 악신이에요. 당신을 이용만 하다 잡아먹어 버릴거라고요." "에이런, 그 신을 조심하거라. 우린 깊은 곳에서 죽임을 당했어. 분명 그 사악한 신이 무엇인가 숨기고 있을 거다." 아버지? 아버지까지 꿈에서 나타나는 건 이상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저기 먼 곳에서 누군가가 더 오고 있었다. 어머니? 선장님? 당신은 누구지? 꿈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 때, 검은 물이 어디선가 밀려들어왔다. 순식간에 그들은 녹아버리고, 내겐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듣지 마, 에이런. 내 목소리를 기억해."


누군가가 물 아래서 계속 울부짖었다. 곧이어 수많은 아우성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모든 비명을 덮으려는 듯 계속 속삭였다.

"듣지 마, 에이런. 내 목소리를 기억해."

"듣지 마, 에이런. 내 목소리를 기억해."

"듣지 마, 에이런. 내 목소리를 기억해."

.

.

.

"허억..." 


"나쁜 꿈을 꿨나 보네. 하긴 인간들은 이런 환경에서 푹 쉬긴 힘들겠지. 이틀만 더... 기다리자."

어느샌가 그녀가 내 옆에서 앉아 있었다. 내가 자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듯 했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할래? 항해 하다가 본 야만족 이야기는 어때? 아니면 아름다운 풍경을 봤던 경험도 좋아. 어서 말해줘." 내가 일어나자마자 기다렸다는듯 그녀는 달라붙어 내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순순히 이야기를 해줄만큼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꿈이 계속 걸렸다. 

"그 전에 확실하게 말해주십시오, 신이시여. 당신은 날 해치려는 생각이 정말 없겠죠?" 내가 조금 심각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자, 그녀는 겁이 난듯 차갑고 따끔거리는 숨을 내뱉었다.


"없다고 했어. 도대체 몇 번이나 묻는거야? 그리고 해치는건 오히려 네가 더 잘할거야. 신은 오로지 인간만이 죽일 수 있으니까.그녀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인간이 신을 죽일 수 있다는 말에 놀란 나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되물었다.


"넌 고래를 기억할거야. 고래는 엄청나게 크고, 힘이 세서 고래를 잡으려면 고래만큼 큰 심장이 필요하다고 했지. 신도 마찬가지야. 신은 강하지만, 인간의 공격에 영원한 상처를 입지. 그리고 인간에 의해 죽으면.. 그 신은 다시 태어나. 더 위대한 신으로 말이야. 기존의 신을 쫓아내며 엉덩이를 걷어차 줄 수 있을 정도로. 난 말이야..." 그녀가 숨을 고르더니, 내게 바싹 붙어 왔다. 그러곤 내 귀에 차가운 숨을 불어넣더니, 더없이 끈적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날 죽여줬으면 좋겠어. 아주 잔혹하고, 확실하게..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난 지금까지 내가 이 곳에 끌려온 이유를 계속 찾을 수 없어 고민했다. 그런데 이제 너무 확실히 밝혀진 이유에 어처구니 없다고 해야 할지, 조금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힘없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항의하고 말았다.


"결국 나는 손에 피를 묻혀야 해서 끌려온 것이군요! 심지어 신의 피 말입니다. 꿈 속에서 날 유혹해 여기까지 이끌어 오시다니, 신의 잔혹함이 참 무섭습니다." 내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태도로 말하자 그녀는 내게서 살짝 떨어졌다. 슬쩍 얼굴을 보니 그녀의 예쁜 얼굴도 울상이 되어 있었다.


"미안해... 하지만 네게도 좋은 일일 줄 알았어. 신을 죽이면 한동안 그 신과 관련된 행운이 계속 찾아오거든.. 인스머스는 계속 그런 식으로 물고기를 잡아왔어. 날 죽여주면, 그 사람들에게도 좋고 네게도 좋을거야. 내가 '깊은 곳'에 대해 알려줄게."

그녀는 당연한듯 무서운 소리를 했다. 인스머스에서 신을 죽였다니! 산더미 같은 물고기 더미가 사실 신을 죽이고 그 피와 살을 취한 흔적이었다니! 구역질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녀가 괜찮냐고 물으며 내게 가까이 왔지만, 난 밀쳐내며 꺼지라고 소리쳤다. 그녀가 신인것도 잊은 것처럼 난 그녀에게 사라지라고 욕설을 했다. 그녀가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죄책감을 무시하며 그녀에게 소리를 질렀다. 철퍼덕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그녀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에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나는 인스머스를 떠올렸다. 그 끔찍하고 불결한 항구와 냄새나는 물고기들, 소름끼치도록 잘 정리된 작샬들이 머릿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설정 정리

1. 신은 어떠한 개념을 수호함. 그녀는 물고기의 신이다.

2. 신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다. 신은 죽으면 더 위대한 이명을 가진 존재로 환생한다.

3. 어떤 신을 죽이면 그 자와 그 자가 속한 지역은 한동안 그 신이 수호한 개념의 축복을 받는다. 인스머스는 어떻게 한 것인지 물고기의 축복을 계속 받아왔다.

갑자기 정공이 되버린 소설 사실 시리즈 구상했다가 단편따온거라 어쩔 수가 없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