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 가운데에는 …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다."

(2) "깨달음도 없고, 깨달음이 없음도 없다."


(1)은 조계종 표준 한글 반야심경에서 발췌한 문장이고 (2)는 선불교 텍스트에서 자주 발견되는 문장 형태임. 구체적인 출처를 지목해서 인용하고 싶었는데 찾을래니까 잘 못 찾겠음 내가 공부가 얕아서ㅠ..


"□도 없고 □이 없음도 없다" 형태의 문형이 내가 생각할 때에는 공(空) 개념에 대한 대중적 오해를 넘어서서 한 단계 더 바른 이해로 넘어가기 위한 디딤돌이 아닌가 싶음. 공에 대한 대중적 오해라고 말한 것은 이 문장의 앞부분만 잘라놓은 것, 이를 테면 "□은 없다."만 떼어 놓고서 이것이 곧 공이고 대승불교다, 대승불교는 허무를 말하는 종교다 하고 이해하는 것을 말함.


선사들이 "□는 없다" 명제 뒤에 바로 이어서 "□이 없음도 없다"를 덧붙이는 이유는 이 문장이 설명하고자 하는 개념이 "있다"의 상대어로서의 "없다"가 아니라, '있다'와 '없다' 사이의 구별을 넘어서는 한 단계 더 위쪽 범주에 있는 더 큰 의미의 '없다'이기 때문임. "□는 없다"라는 문장이 참인 이유는 □ 자리에 그 무엇을 넣은들 그것은 자립적 실재가 아니라 조건적, 의타적,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임. 우리가 보고 만져서 감각할 수 있는 모든 대상들은 지금 당장은 '있다'라고 생각되지만 그것이 '있'게 해주는 조건들과 인연들이 끝나면 언제든 흩어져서 사라질 일시적인 현상들에 불과하다는 것은 일상적인 경험들로부터도 쉽게 유추하여 납득할 수 있을 것임.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없음'이라는 말조차도 다시 이 □의 자리에 넣어서 지양해버려야 함. 만물이 다 인연이 다하면 쇠하여 사라진다고 하지만, 사라져서 무(無)로 향해가는 운동의 한 방향만 보는 것은 실상의 반쪽만 보는 것임. 회자정리라는 것은 또한 거자필반이기도 하다는 뜻임을 알아야 함. 가을이 되면 나무에 낙엽이 지고 잎이 다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생(生)은 유한하여 시간이 지나면 다 멸(滅)하는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또한 멸(滅)의 상태조차도 영원하지 않고 유한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다시 새 잎이 나고 생(生)이 시작되기도 한다는 것까지 보아야 함. 오온(五蘊)이 모여 있는 상태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 진리의 한 쪽 측면이지만, 오온이 흩어져 있는 상태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 또한 진리의 다른 한 쪽 측면임.


여기서 우리는 두 단계의 지양을 볼 수 있음. 첫 번째 단계에서 수행자는 눈으로 보고 듣고 감각할 수 있는 온갖 사물들이 실상이라고 믿고 그에 의존하며 살아가던 이전의 삶이 실은 무상(無常)한 것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끊임없는 불안과 실망, 상처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온 삶이었음을 비추어 보고, 사물들을 떠나서 적막한 무(無)의 세계를 추구하게 됨. 그러나 "만물은 무(無)다! 오로지 무(無)다!" 라고 하는 한 생각이 고정된 진리라고 생각하고서 그 한 생각을 붙들고 그에 의지하고자 해봤자 불안과 고통은 끝나지 않는데, 왜냐 하면 무(無) 또한 고정 불변하지 않기 때문에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그 무엇도 無의 상태에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의지할 만한 것이 못 되기 때문임. 그리하여 두 번째 단계에서 수행자는 "없다!"고 하는 생각조차도 벗어나서, '만물도 없고, 만물이 없음도 없다', '만물이어도 상관 없고, 만물이 없음이어도 상관 없다', '만물이기도 하고, 만물이 아니기도 하다'라고 하는 상태를 마주치게 됨.


이 두 단계의 지양을 살펴 보면, '있음'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없음'도 고정되어 있지 않으니,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하는 이것만큼은 '있음'과 '없음'을 관통하는 공통의 원리라는 점을 납득할 수 있을 것임. '있음'과 '없음' 속에 모두 '고정되어 있지 않음'이 있으며, 반대로 말하면 '있음'과 '없음'이 모두 '고정되어 있지 않음' 속에 있음. 또한 '고정되어 있지 않음'은 '있음'과 '없음'을 포함하는 상위 범주일 뿐만 아니라, '있음'과 '없음'이 모두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함으로써 '있음' 속에서 '없음'을 만들어내고 '없음' 속에서 '있음'을 만들어내는 운동이자 원천이기도 함.


이제 슬슬 '고정되어 있지 않다'라는 말이 담고자 하는 그 대상 개념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라고 하는 말에 담기기에는 너무 커져버려서 말의 의미를 떠나 그 자체의 고유한 의미 세계를 가져버리고 있다는 느낌이 올지 모르겠음. "'고정되어 있지 않음'은 실은 '고정되어 있지 않음'이 아님. 그렇기 때문에 이름지어 부르기를 '고정되어 있지 않음'이라 하였음." (금강경의 문체를 흉내낸 문장임)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고정되어 있지 않음'이라고 말하면 그건 아까 말하려고 했던 그 본래 의미의 '고정되어 있지 않음'은 아님." (이건 도덕경 첫 문장을 흉내냈음) 


그렇기 때문에 조계종에서 반야심경을 번역할 때 '공'을 '비어 있음'으로 번역하지 않고 그냥 '공'으로 냅둔 거임. 어차피 '빌 공(空)'이라는 글자의 음, 뜻, 쓰임은 '공'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마치 비행기 바퀴처럼 처음에만 잠깐 도움될 뿐 금방 그냥 장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 돼버리는 언어 기호에 불과하니까. 앞 문단에서 나는 공을 서술하는 데 있어서 '원리이다', '원천이다', '만들어낸다' 등의 언어를 동원했음. 사실은 이런 언어들 역시 쓰이는 순간에 '공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하는 고정된 어떤 이미지(相)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이 이미지들에 대해서도 다시 '없다'를 적용해서 지양함으로써 아마 공의 실상에 점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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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참선) 수행의 방법론 측면에서 볼 때 반야심경, 금강경, 도덕경의 모순 화법은 공통적으로 생각이 길을 잃게 만드는 것에 목적이 있음. "이것도 아니고, 이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라고 하면 생각이 "이것"에도 가서 머무르지 못하고, "이것이 아닌 것"에도 가서 머무르지 못하니 어쩌란 말인가 하고 황망해 하다가, 더러는 우두커니 멈춰서 멍한 상태가 될 것임. 선사들이 이 상태를 일컬어 "생각 이전의 마음 자리"라고 하였음.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첫 생각을 일으키기 전에도 내 의식은 이미 깨어 있는데, 이 상태의 의식은 아직 언어의 분별의 세계에 갇히지 않은 자유로운 상태임. 이 상태에서 만나는 마음이 곧 세계의 실상이라는 게 명상 철학의 발상이고, 선불교에서 말하는 화두나 선문답이라고 하는 것도 언어가 모순된 자리로 의식을 몰아넣어서 의식이 언어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방법론임.


이 생각이 멈춘 자리에서 만나는 마음의 상태를 일컬어 고려시대 지눌이 쓴 수심결에서는 "공적영지지심(空寂靈知之心)"이라고 표현했음. 아무 것도 없이 사방이 텅 비어있고(空; 여기서는 비어 있다는 뜻이 맞음) 고요하지만(寂) 신비로운 느낌이 있으며(靈) 의식이 깨어 있는(知) 상태라고 풀이되는데, 이 묘사가 시사하는 바는 명상 중에 공(空)을 만나는 자리는 그저 아무 것도 없기만 한 텅 빈 자리가 아니라 어떤 신비로운 힘에 대한 감각과 알아차림이 있는 자리라는 거임. 불교에서 공 개념을 이해하고자 할 때 머릿속에서는 이런 명상 경험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접근해야 한다는 게 내가 지지하는 견해임.


사실 어찌 보면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텍스트로 고증되는 논리의 영역만을 철저하게 파고 들어야 되는 게 맞을 수도 있는데, 한편으로는 동양도 그렇고 서양도 그렇고 일정 시점 이전의 철학자들이 쓴 텍스트를 연구할 때는 그 텍스트를 저술한 저자가 종교적으로라든지 어떤 식으로든 수행 활동을 하면서 사상을 전개했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또 무시할 수 없게 되는 지점이 있으니까, 특히 또 이런 동양 철학 쪽 텍스트 읽을 때는 이 텍스트가 어떤 명상 체험과의 연관성 속에서 서술된 텍스트는 아닌가 하는 측면을 고려해야 하는 경우가 좀 있음.


더군다나 불교는 또한 명상의 종교이기도 하니 특히 더 수행의 측면을 제껴놓고 논리로만 접근할 때 부딪히게 되는 한계가 있을 수 있지 않나 싶어서, 사족인가 싶어서 지울까 말까 하면서도 뒷부분 글을 덧붙여 썼음. 암튼 내가 배운 불교는 이거고, 여기 적은 게 내가 배운 불교에 관한 지식의 거의 전부이다ㅇㅇ라는 게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