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직구사태로 나라가 미쳐 돌아가는 가운데 우리가 알아두면 좋은 역사 사례가 있어서 소개해봄


앞으로 들려줄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35년전, 민주화와 혁명의 바람이 동유럽을 휩쓸던 시기 한 나라에서 일어난 이야기임


1945년 05월 09일, 독일과 소련의 기나긴 전쟁은 총통이 자살하고 독일이 항복하며 소련의 승리로 끝이 났음 전쟁이 끝나고 소련은 앞으로 대립할 자본주의와 서방세계를 견제하기 위해 자신들이 점령한 동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동유럽 국가들을 자신의 위성국으로 만들기 시작 함


그리고 이는 동유럽 국가인 '루마니아 왕국' 도 피해갈 수 없었음 1947년, 루마니아에도 사회주의 혁명의 바람이 부는데 이를 주도한 자가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였음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1911. 11. 08 ~ 1965. 03. 19


그는 1930년 루마니아 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하던 사람으로 루마니아 공산당은 당시 불법정당이라 경찰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투옥 상태였음


그러나 1944년, 소련군이 동유럽에 독일군을 몰아낼 때 탈옥에 성공하였고 이후 소련의 지원을 받아 루마니아 왕정을 국민투표로 몰아내고 '루마니아 인민공화국' 을 세워 초대 서기장이 됨


그렇게 소련의 위성국으로 들어가 '스탈린 주의' 에 입각한 정치를 펼치며 독재를 이어감 이때 게오르기의 뒤에서 그를 보좌한 한 인물이 있었음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1918. 01. 26 ~ 1989. 12. 25


그는 1932년 루마니아 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하던 자로 1936년 06월 06일, 반란 모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가게 됨 그때 게오르게와 만나게 된 차우셰스쿠는 그가 주장하는 스탈린 주의에 깊게 심취하며 그의 심복이 됨


그리고 공산정권이 수립되고 1948년 05월 13일, 농무부 장관을 시작으로 국방부 차관, 육군 고등정치국장 등 주요 요직을 맡았고 1954년 루마니아 공산당 정회원이 되는 등 정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게오르게의 무한한 신임을 얻음


게오르게는 말년에 점점 의심병이 심해져 차우셰스쿠만 신뢰하였고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의 서열 2위까지 올라 옴 


그렇게 1965년 게오르게는 사망직전 자신 다음 서기장을 차우셰스쿠로 임명하였고 그가 사망하자 자연스럽게 다음 서기장은 차우셰스쿠가 됨 그리고 이때까지 아무도 그 누구도 몰랐음 


차우셰스쿠가 루마니아를 지옥 밑바닥까지 떨굴거라곤...



나같은 지도자는 500년에 한 명씩밖에 나오지 않는다.

- 1970년대 초 보건장관에게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1974년 03월 18일, 헌법에 명시되지 않은 대통령 직을 만들어 그 자리에 앉으면서 서기장보다 더 많은 권력을 얻게 됨


1956년 10월 말, 스탈린 사후 헝가리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인 '헝가리 혁명' 에서 바르샤바 조약군이 혁명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모습을 본 게오르게는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주장하며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했음


게오르게 사후 차우셰스쿠도 이러한 노선을 그대로 따라감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인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은 헝가리 혁명 때 처럼 바르샤바 조약군 20만명을 투입시켜 진압시키려 하는데 이때 같은 회원국인 루마니아군의 파병을 요청 함


그러나 차우셰스쿠는 소련이 내정간섭을 한다며 반발, 파병을 거부하고 오히려 소련과 국경분쟁을 하며 사이가 안좋아진 중국 그리고 미국 등 자본주의 진영과의 교류를 하며 서방세계에 좋은 공산주의자라는 인식이 생김


그리고 서방세계의 기술력을 받고 풍부한 석유자원을 바탕으로 석유화학과 중공업등에 모조리 투자, '다치아' 자동차를 만들어 수출까지 하는 등 경제적으로도 좋은 성과를 내며 국민들에게 신임을 얻음



그러나 명이 있으면 암이 있는 법





1978년, 북한을 방문한 차우셰스쿠



1960년 ~ 1970년대, 차우셰스쿠는 북한과 중국에 여러차례 방문하는데 이때 김일성의 개인우상화를 보고 뭔 영감을 받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북한을 벤치마킹하기 시작 함


자신을 '카르타피아 산맥의 천재' 라 지칭하며 자신과 영부인 '엘레나 차우셰스쿠' 에 대한 우상화 작업에 열중하기 시작 함


그리고 말도 안되는 정책등을 펼치며 무리수를 두기 시작하는데


여성에게 가장 고귀한 명예는 바로 출산과 양육이다. 여성에게는 어머니가 되는 것 말고 다른 인생의 목표가 있을 수 없다.
-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저출산으로 인해 인구가 감소하자 출산 강제 정책을 시행해서 피임, 낙태를 금지하고 애를 4명이상 안 낳은 여성에게는 세금을 부과해버리는 미친 정책을 시행 함


이로인해 이 시기 영아 사망율, 산모 사망율, 고아가 기하급수적으로 급증하였음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은 전부 비밀경찰이자 자신의 개인 친위대인 '세쿠리타테' 에서 거둬가 써먹음


그리고 루마니아는 동유럽국가중에서 농업이 상당히 발달한 나라였음 그러나 '농촌 체계화 사업' 이라고 도시에서 거주중인 퇴직한 노인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 시키고 반대로 농촌에서 거주중인 청년들을 도시로 강제 이주 시키는 정책을 펼쳐 루마니아 농업 생산량이 급격하게 떨어지게 됨


이렇게 되니 슬슬 중공업 몰빵의 폐해가 드러나기 시작 함


1980년대, 슬슬 일본이나 서독 등다른 나라에서도 좋은 품질의 공산품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루마니아의 공산품이 경쟁력을 잃음 그렇다고 소련에게 팔자니 소련과는 사이가 안좋고 다른 공산권 국가도 눈치보며 서방제품 쓰기 바쁘니 점점 잉여제고가 쌓임


이걸 해결하겠답시고 제3세계에 헐값으로 넘기거나 외상, 물물교환등으로 처리해버림


이렇게 경제가 나락으로 가면 다른 산업에 투자를 하는 등 활로를 찾아야하는데 차우셰스쿠는 무조건 중공업이 맞다며 중공업에 계속해서 무리한 투자를 이어 감, 이로인해 나라의 부채가 끊임없이 늘어 남


한 미치광이의 공상 속에서 2천만명의 국민이 살아가는 나라

- 알렉산두르 이바시우크


그리고 이 부채를 갚겠답시고 수입을 막아버리고 수출만 하는 17세기에나 볼법한 정신나간 정책 을 내놓음 그리고 덤으로 나라의 돈을 아껴야 한다며 하루에 빵은 1개만 구매 제한, 자동차 운행 금지, 세탁기나 냉장고 등 가전제품 금지, 난방 금지 등 온갖 곳에서 금지와 규제를 때려버리며 행복추구권등은 ㅈ까라를 시전 함


이런 정신나간 방법으로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의 부체를 전부 갚는데 성공함 그러나 국민의 생활수준이 나락으로 떨어졌고 전국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튀어나오기 시작 함


1989년 12월 14일, 차우셰스쿠 정권을 반대하던 인권운동가이자 목사인 '퇴케시 라슬로' 가 국외추방이라는 판결을 받자 루마니아 서부북부 티미쉬주의 티미쇼아라에서 1000여명의 신도가 모여 판결에 대한 항의 집회가 열림


그러나 마리아 광장에 모인 시위대의 규모가 점점 불어나기 시작하며 심상치 않은 조짐이 보이기 시작 함 


항의 집회가 점점 정권 타도 시위로 격화되자 12월 17일 차우셰스쿠는 티미쇼아라에 루마니아 군 투입시켜 시위대에서 발포 명령을 내림


그러나 현장에 있던 루마니아군은 시위대에게 발포하기를 주저했고 결국 세쿠리타테가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하며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 이 진압으로 2세 영아부터 66세 노인까지 최소 66명 사망 , 300명 사상이라는 끔직한 결과를 낳음


거기에 영부인 엘레나는 티미쇼아라의 시위대 중 사망한 사람들을 비밀리에 화장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실제로 시위 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43명과 병원에서 처형된 부상자들의 시신은 영안실에서 도난당해 강제로 부쿠레슈티로 운송된 후 화장되어 쓰레기통에 버려진 후 그 재는 운하 입구에 버려짐


12월 18일, 티미쇼아라에 계엄령이 떨어지고 전국에 정보통제령이 떨어졌으나 이미 해당 소식을 접한 서방언론을 통해 루마니아 국민들은 티미쇼아라에서 벌어진 비극을 알게 됨


그러나 티미쇼아라 시민들은 포기하지 않았음 그들은 정부의 발포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시위를 벌였고 노동자들까지 총파업하며 시위에 동참, 10만의 가까운 시민들이 결집하여 티미쇼아라 오페라 하우스를 향해 행진 함


당시 오페라 하우스를 지키던 루마니아군은 발포하겠다는 위협과 함께 시위대 해산을 요구했지만 10만명의 시민들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 점점 뒤로 물러남


오히려 시민들은 자신들에게 발포 위협을 가했던 군인들에게 빵과 음식을 나눠주는 행보를 보이는 등 평화 시위를 하는데 이때 투입된 진압군이 시위대에 합류를 해버림


여기서 잠깐 알아둬야하는게 루마니아군은 차우셰스쿠 정권을 좋게 보고있지 않았음 나라를 지키는 건 자신들인데 정작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친위대인 세쿠리타테만 편애했고 이로인해 보급이나 예산 등 모든 분야에서 대우가 뒷전으로 밀린 상황이었음


즉 차우셰스쿠는 군대마저 자신의 적으로 만들어버린거임


그렇게 1989년 12월 20일, 오페라 하우스를 점거한 시위대와 진압군은 '루마니아 민족전선' 을 출범하고 티미쇼아라를 루마니아 최초의 민주도시로 선포 함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루마니아 전국에서 민주화 시위가 확산 됨


차우셰스쿠는 시위 초때만 해도 무력진압으로 시위대를 충분히 해산 시킬거라 생각하고 안일하게 대처하며 18일 이란을 방문한 상황이었음 그러나 전국적으로 민주화 시위가 열렸다는 소식에 급하게 귀국함


1989년 12월 21일 그는 수도 부쿠레슈티에 모인 10만명의 시위대 앞에서 시위해산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으나 시위대는 "차우셰스쿠여 우리도 사람이다!" "학살자를 타도하자!" "루마니아는 잠에서 깨어났다!" 등 을 외치며 야유를 퍼부었고 위에 영상처럼 급기야 차우셰스쿠는 야유를 퍼붓는 시위대를 향해 욕설과 고성을 내질렀고 이 장면이 방송으로 전국에 생중계 되면서 불타는 집에 기름을 부어버림


당시 시위 영상


이후 시위 외곽에서 두번의 폭발음이 들렸고 세쿠리타테가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하며 무력진압을 시도 함 문제는 시위대를 향해 로켓포를 쏘고 전차로 깔아뭉갰으며 시위에 참여안한 무고한 사람은 물론 노인, 임산부, 어린아이 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총을 쏘고 대검을 휘두르는 만행을 저지름


이렇게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자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바실리 밀레아' 는 이건 선을 넘었다며 루마이나군에게 진압금지 및 철수 명령을 하달함


그리고 다음 날 머리에 의문의 총상을 입은채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며 루마니아군의 불만이 폭발, 루마니아군 전체가 시위대에 완전 합류하며 루마니아는 내전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들어 감


루마니아군과 경찰등은 시민들에게 총을 난사하는 세쿠리타테에 맞서 시민들을 보호하고 교전을 벌였고 시위대의 압도적인 규모에 점점 밀려난 세쿠리타테는 결국 하나 둘 항복하기 시작 함


결국 차우셰스쿠 부부는 헬기를 타고 국외망명을 시도함 그러나 당시 부부가 탑승한 헬기의 조종사는 차우셰스쿠 정권에 대한 반감과 부부를 극도로 싫어했고 시위대의 공격의 받고있다 핑계대며 차우셰스쿠 부부를 허허벌판에 버리고 도망쳐버림


결국 23일, 시민들의 신고로 체포된 차우셰스쿠 부부는 간단한 심문후 대량학살, 국가권력 및 국가 경제 훼손 등 온갖 죄목으로 사형이 판결되고 판결이 이뤄지자마자 바로 형 집행이 이뤄짐


!주의 다음 사진은 유혈, 폭력 등의 내용이 담겨있음 시청에 주의 바람!


1989년 12월 25일, 재판이 이뤄진 초등학교 담벼락에서 집행에 자원한 장교 5명 모두가 자동소총을 연발로 갈겨 형이 집행 되었음 그들은 죽기전 "자유롭고 독립적인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만세!" 를 외쳤고 차우셰스쿠의 독재는 그렇게 막을 내림


이후 루마니아는 민주화에 성공하여 오늘날에 이름


이렇듯 차우셰스쿠는 말도 안되는 정책으로 루마니아라는 나라를 지옥도로 보내버렸음 


물론 현재의 직구사태가 이정도라는 말은 아니지만 말도 안되는 정책이 어떻게 한 나라를 몰락시켰는지를 알 수 있는 반면교사라고 생각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