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이랬다.


미짜 풀리고 알게 된 대학친구A가 자기의 친구 B,C를 데려와서 소개시켜줬고 B,C와 생각보다 죽이 잘 맞아서 금방 친해졌다.

그리고 5년간 잘 놀았고. 중간에 군대도 다녀왔는데 중간중간 휴가 나와서도 곧잘 놀았음. 어쩌다 보니 A와는 조금 소원해지고 B,C와 더욱 친해졌다.


전역 후 진로, 갑작스런 경제적 문제 등으로 몇 달간 이래저래 고달픈 와중 B와 C가 얼굴 한번 보자며 불렀다. 

이래저래 술도 한잔하고 놀다가 중고딩시절 이야기가 나왔고, B가 자연스레 과외선생 이야기를 했음. 그러다가 너랑 잘 맞을것같으니 다음에 그 과외선생이랑 다같이 보자는 거야. 내가 과외선생이랑 아직도 연락하느냐 하니까 사이가 좋아서 그렇다더라. 그런가보다 했지.


과외선생 만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게 말이 잘 통할수가 없더라. 가벼운 얘기부터 무거운 이야기까지 몇 달간 여러 번 만나면서 별 소릴 다 했다.

어느 순간 자연스레 인문학, 철학, 종교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다가 성경 이야기까지 나왔고 어느새 카페 구석탱이에서 그 과외선생과 성경책 펴놓고 읽고 있었음. 그리고 시간이 다시 몇주 흘렀고, 놀랍게도 이 얼빠진 병신새끼는 이름모를 어느 상가 2층의 강의실에서 PPT를 보면서 20여명의 수강생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다. 


강사가 첫 시간에 OT를 진행하면서 '디지털 디톡스'라며 교육 과정 6개월이 끝날 때까지 인터넷과 SNS를 피하라고 했고 이 한심한 새끼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던 것이다. 충실하게 씹지털좆톡스를 지키며 살아가던 어느 날, 하늘이 나를 도왔는지 나는 무심코 구글에 강의 시간에 배운 성경의 비유를 검색해 보았고


아.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장장 1년을 이 씨발년들의 농간 속에서 놀아났던 것이다. B, C, 과외선생은 애초에 신천지였으며 그 강의실에서 수상할 정도로 친절하던 20여명의 수강생 중 과반수 이상은 이미 신천지 신도였던 것이다. 강사년은 말할것도 없고.


나중에 알아본 바 이들 십수 명은 나와 다른 두세 명의 희생자를 위해 최소 2년 넘게 텔레그램 단톡방을 운영하며 내 신상정보와 취향, 성향, 정치적 이념까지 분석해가며 치밀하게 말을 맞췄고, 최소 1년 이상 작업하여 나를 환상 속의 세카이로 끌여들였던 것이다.


난 대가리가 뜨끈해지는 것을 느끼며 현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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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었으면 넌 얼탱이가 없을거다. '그래서 니가 멍청한 병신인게 지금 이 런어스 사태와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는거냐?'


내가 이 치부를 드러내며 말하고 싶은 것 두 가지가 있다.




1. 치밀한 계획을 세워놓은 사기꾼이 평범한 사람들을 타겟으로 잡았을 때, 평범한 사람이 이를 인지하고 피하는 것은 매우 매우 힘들다.


니가 모자란거지 병신아. 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근데 너도 당해보면 알거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의 무서움을. 제대로 된 사기꾼은 오랫동안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희생자를 상대로 아주 조금씩 중장기간에 걸쳐 유대관계를 쌓는다. 그 과정에서 너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호의를 베풀며 이는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모든 진실을 깨닫고 돌이켜보면, 너무나 구멍이 많이 보이고 내가 왜 저런 간계에 속았던거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지만 그때 당시에는 모른다. 정말 모른다. 


또한 사기꾼은 타겟을 상대로 무턱대로 돌진하지 않는다. 먼저 타겟의 수요, 정확하게는 타겟이 아쉬워하는 것을 파악한다. 나는 그 때 진로, 경제, 가정불화로 인해 정신적으로 많이 힘든 상태였고 내 삶의 기준과 버팀목을 세우고자 하는 욕구가 들끓었다. 친구들에게 이런 내 고민을 간혹 말했는데 이게 그들의 레이더에 걸린 것이었다. 솦붕이들 상대로는 더 쉽다. 솦붕이들은 누가 안 물어봐도 국건의 횡포와 불합리한 규제를 항상 성토하기에 사기꾼 입장에서는 챈 눈팅 한시간만 해봐도 바로 계획의 초안이 잡히는 것이다.


예비 희생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주 빠르게 파악했을 사기꾼은 계획을 세웠을 거고, 파격적인 조건으로 귀순하여 수많은 솦붕이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솦붕이들이 병신이었고 멍청했는가? 아니다. 솦붕이들은 그냥 보통 사람이었을 뿐이다. 작정하고 속이는 놈은 보통 사람이 못 피한다. 




2. 소개해준 놈은 죄가 없다.


내가 속았음을 안 후 감정적으로 매우 격앙되었지만, 바로 신천지를 탈퇴하는 대신 며칠 더 속아줬다. 

그리고 그 동안 A를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본격적으로 추궁하기에 앞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뒷조사했다. 그리고 A를 따로 만나 모든 사실을 말했고 떠보았는데, A의 말은 놀라웠다. 사실 B,C는 A에게 먼저 접근한 후 평소 종교를 매우 혐오하던 A가 아주 빠르게 컷하자 손절하고 며칠 후 내게 접근했던 것이다.

나는 왜 내게 미리 말하지 않았냐고 따지려다가 지난 몇 년간 A와 내 관계가 소원해져 있었음을 알고 그냥 말았다.

그런데 한번 속고 나니, 이 A도 사실 신천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몇 년간 더 추적조사했지만 A는 신천지가 아니었다. 또속냐 병신아?가 아니라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암튼 얘는 아니다. 지금은 A랑 다시 그럭저럭 잘 지낸다.


A에게 굳이 잘못을 묻자면 신천지 B,C를 내게 소개시켜준 거다. 근데 그게 진짜 잘못은 아니다. 

애초에 A도 속았을 뿐더러 나와 함께 5년+a친구인 B,C를 잃은 피해자인 것이다. A가 친구를 사귈 때 인사청문회를 거쳐 사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마찬가지로, 파딱들도 제도권에 속해 있는 책임관리자가 아니라 그냥 무급봉사자이자 파편화된 개인에 불과하다. 개인의 검증 시스템에는 한계가 명확하고 귀순하려는 업자가 설령 악의를 가졌더라도 위장막을 덮어쓰고 귀순을 신청한다면 파딱은 도라에몽 주머니에서 초법적인 권한을 꺼내들고 샅샅히 뒷조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애초에 이 챈에 오는 모든 인간들은 그것을 알고 있고, 그것에 동의하여 챈질을 하는 중이다.





나는 이번 러너스 사태의 피해자가 아니다. 금전적인 손실이 없다. 하지만 사람에게 속고 내 호의가 배신당하며 끝내 사람을 잃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속는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뒤짚어엎는 일인지 알기에 피해자들에게 공감한다.


그리고 이 챈 안에서, 러너스 이외에 그 누구도 비난받고 책임져야 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힘들겠지만 내일을 위해 뜨거워진 머리를 조금 식히길 피해자들에게 권하며 이번 사기극으로 인한 피해의 최소화를 기원한다. 잘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