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 - 레드 머큐리


이본은 실제 사건과 실존 인물에 허구의 이야기를 교묘하게 섞어 풀어내기로 유명한 소설가로, 대표적인 단편 소설로는 《레드 머큐리》가 있다. 이는 움브라톤 상회의 수장이었던 머큐리 부인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다룬 소설로, 여러 번 재판되었는데, 그중에서도 2쇄의 편집자는 독자와 교감하기 위해 이야기 속 인물과 사건을 고증해 후기에 기록했다.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은 수십 년 전 움브라톤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콜로세움(1)

친구와 '나'는 움브라톤의 콜로세움에서 싸움을 지켜봤다. 실력 차이가 현격한 가운데, 열세에 처한 것은 뜻밖에도 상회 쪽 사람이었다. 상회 사람이 평범한 사람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단장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나'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움브라톤에 가는 이상, 콜로세움 관전은 일종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무대 가장자리에 매달린 묵직한 쇠사슬이 팽팽히 늘어나면서 무대 위의 사람과 물건이 조명 속으로 떠올랐다. 무대를 중심으로 겹겹이 늘어선 관중석은 나란히 펼쳐진 채 높이 서 있었다. 귀족들은 투기장 격투가 양성에 열을 올리며, 정성껏 키운 격투가를 무대에 올리곤 했다. 하루 동안 목숨을 부지하고 가장 많이 승리한 격투가는 허리에 '밤의 제왕'이라는 벨트를 찰 수 있었다. 하지만 관례대로 낮에만 두를 수 있을 뿐, 콜로세움에 밤이 찾아오면 다시 돌려줘야 했다. 


 목숨을 건 승부가 치열하게 펼쳐질수록 환호성도 커졌다. 사람들이 무대 위로 던지는 금화 소리는 마치 소낙비처럼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날이 밝을 때까지 나는 그곳에 머물렀다. 분위기가 점점 가라앉자 구경꾼들이 지친 기색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콜로세움에서 무대를 치우기 시작하자, 물에 씻긴 돌계단 가장자리에 불그스름한 핏물이 고였다. 시종들은 무대에 쌓인 금화를 승자에게 가져다줬는데, 물로 핏물과 먼지를 깨끗이 닦아낸 금화를 양철 상자에 담아서 두 사람이 번갈아 실어 나르곤 했다. 


 3년 전에 본 대결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했던 싸움이었다. 그중 한 명은 연승을 거둬 이례적으로 '밤의 제왕' 벨트를 두른 채 무대에 올랐다. 반질거리는 두 개의 놋쇠 뿔이 달린 이마, 터질 듯 팽팽하게 긴장된 거친 근육이 쉬지 않고 일렁거렸다. 그의 상대는 더러운 옷을 걸친 애송이였다. 시퍼런 멍이 온몸에 가득한 걸 보니 무대에 오르기 전에 큰 부상을 입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이 함께 무대에 오르자, 관중석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하인들은 쟁반을 든 채 관객석을 오가며, 덩치에게 돈을 걸라며 사람들을 꼬드기고 있었다. 날 초대한 친구에게 시종이 쟁반을 내밀자, 친구는 덩치가 작은 애송이에게 가지고 있는 돈을 몽땅 걸었다. 내가 의아해하며 그 이유를 묻자, 망원경을 거꾸로 든 친구가 무대 위 애송이를 가리키며 녀석이 머큐리 부인의 부하라고 알려줬다. 


 움브라톤에 자주 오는 편은 아니지만 머큐리 부인에 관한 소문은 나도 알고 있었다. 움브라톤에는 밀수가 횡행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거친 사업이 무기 밀수라고 들었다. 일이 잘 풀리면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목이 떨어질 일이었으니 말이다. 밀수 거래, 비밀 경매, 그것도 아니면 대규모 인수에 이르기까지, 이들 사업 중 대부분이 한 상회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그 상회를 이끄는 사람이 바로 머큐리 부인이었다. 나는 무대 위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봤다. 밤의 제왕이 주먹을 힘껏 휘두르자, 루미나틱스의 힘에 무대가 박살 나며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애송이는 비틀거리며 공격을 피하려 했지만, 순식간에 날아오는 파편을 피하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고,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한 채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도망치기 급급했다. 


 “자기 부하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머큐리 부인은 관심도 없는 건가?” 


 내 질문에 친구는 고개를 젓더니, 어두운 구석을 잽싸게 쳐다보곤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부인은 지금 이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다고.”


콜로세움(2)

예상대로 싸움에서 밀린 애송이를 관객들 모두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가운데, 휘슬이 울렸다. 애송이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는 동안, 머큐리 부인이 앉아있던 관중석 구석에서 예상치 못한 소동이 벌어졌다.

  뜨겁고 건조한 새하얀 빛이 쏟아지는 무대, 그늘 속에 숨은 관중석, 터져나오는 환호성... 친구를 따라 어두운 구석을 힐끗 쳐다보던 나는 그곳의 어둠이 유난히 고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는 가운데, 가장 안쪽에 한 사람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진한 그림자 탓에 상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그저 그곳의 어둠이 녹슨 것처럼 검붉게 느껴졌다. 무대 위 애송이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상대의 옆구리를 향해 일격을 날리자, 무대가 삽시간에 달아올랐고, 애송이의 공격을 받은 밤의 제왕이 토한 괴성에 관객들의 환호성도 점점 열기를 띠었다. 격투가에게 돈을 건 사람이 툴툴거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지만, 어두운 구석은 여전히 고요했다.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친구에게 또 질문을 던졌다. 


 “머큐리 부인은 왜 자기 부하를 무대에 올린 거지?” 


 움브라톤 사람들은 투기장 격투가를 키우는 일이 드물었다. 또한, 자기 부하를 장난감처럼 다루는 상회의 단장이 있다는 말은 더더욱 들어보지 못했다. 


 친구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저자는 배신자야. 외부와 손을 잡고 상회의 물건을 훔치려 했다고.” 


 그 말에 멍해진 것도 잠시,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또다시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너 돈 잘못 건 거 아냐? 머큐리 부인은 배신자를 구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인데.” 


 그 말에 친구가 웃음을 터뜨리더니, 망원경을 집어 들고는 무대를 계속 살폈다. 


 애송이에게 일격을 당한 밤의 제왕은 화를 참지 못하곤 애송이에게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불꽃이 일어나는 일격을 가하느라, 애송이는 힘이 빠진 듯했다. 그는 상대의 공격을 힘겹게 피하며 무대 가장자리까지 밀려났다. 격투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애송이의 가슴 한복판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그 위력에 애송이는 무대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환호성이 울려 퍼진 것도 잠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애송이는 쇠사슬을 붙잡은 채 매달려 있었다. 격투가가 기세를 올려 다시 공격하려는 순간, 심판의 휘슬이 울렸다. 격투가가 아쉬운 표정으로 물러서자, 애송이는 쿨럭거리며 무대 위로 기어올랐다. 


 새하얀 빛이 단상을 떠나더니 가운데 관객석을 천천히 비추기 시작했다. 근처의 어둠이 일렁거린다고 느끼지는 순간, 피투성이가 된 포로가 끌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손이 뒤로 묶인 포로는 빛과 어둠 사이의 경계에 비스듬히 꿇어앉았다. 그 모습에 소름이 끼친 것도 잠시, 무대 위에서 들리는 고함에 허겁지겁 다시 고개를 돌리자, 방금 전까지 바닥에서 숨을 헐떡거리던 애송이가 보였다. 심판과 시종들 때문에 피가 맺힌 그의 입가에서는 욕설이 드문드문 쏟아져 나오는 게 들렸다.


콜로세움(3)

관중석의 포로들은 애송이에게 보이지 않는 격려를 보내는 듯했다. 애송이는 싸움에서 이겼지만, 상회를 이끄는 머큐리 부인 앞에서 그의 운명은 여전히 어두워 보였다.

휘슬이 울리며 휴식 시간이 끝나자, 조명이 무대 위로 돌아오며 대결이 다시 시작됐다. 나는 참지 못하고 관중석 사이에 꿇어앉은 포로를 곁눈질했다. 푹 숙인 고개, 머리카락에서 핏물과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 외에 그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다시 무대를 올려다보자, 전반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애송이의 양팔이 불길로 뒤덮인 가운데, 내밀은 열 개의 손가락이 인두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몸을 이끌고 천천히 상대에게 다가갔다. 무대 위에는 돌조각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는 여전히 몸을 피해가며 움직였지만, 전처럼 목숨을 부지하려는 몸부림 대신 돌에 맞아 생긴 상처를 참으며 나아가고 있었다. 격투가는 애송이의 기세에 눌려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지만, 결국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그 순간, 갑자기 불길이 크게 일어나더니 눈부신 빛과 함께 애송이가 상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삽시간에 연기가 사방으로 치솟았고, 격투가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이어서 애송이의 주먹이 갈고리처럼 튀어나오더니 상대의 복부를 정확하게 찔렀다. 환호성이 터져 나온 가운데, 내 뒤에 있던 사람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욕설을 내뱉었고, 시종들이 무대 위로 달려들어 애송이를 격투가에게서 떼어냈다. 


 배신자라던 애송이가 내 눈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무대 위에는 새로운 도전자가 서 있었다. 예복 차림에 나비넥타이, 셔츠까지 갖춘 모습이었다. 셔츠는 새로 갈아입은 것 같았는데 얼마 못 가서 핏물이 베고 말았다. 그는 몸을 가볍게 떨고 있었고, 방금 전의 사투에서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한편 어둠 속에서는 누군가 바닥에 꿇어앉은 포로를 발로 툭툭 찼고, 묵직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왜소한 체구의 배신자에게 그의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다. 


 배신자는 손수건으로 입가의 핏자국을 닦으며 쉰 목소리로 한 별명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여자는 나지막이 웃으며 또 다른 이름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진짜 이름도 모르면서 그자의 말을 믿었던 건가?” 


 배신자는 힘겹게 말귀를 쥐어 짜냈다. 


 “부인, 제 동생은...” 


 “당신 여동생이 아직 살아 있다면, 그자의 거짓말이 이렇게 오랫동안 통할 수 있었을까?” 


 나지막한 상대의 말에 배신자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고, 억눌린 듯한 울음이 그의 목구멍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천천히 무릎을 꿇더니 머리를 어둠 속에 파묻었다. 


 갑자기 가늘지만 서늘한 은빛의 빛줄기가 포로의 가슴에서 터져 나왔다가 이내 사라졌고, '윽' 하는 소리와 함께 포로가 바닥에 쓰러지면서 검붉은 피가 그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울음이 잦아들더니 배신자는 몸을 일으키곤 자신의 발치에 있는 시신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의아한 듯, 혹은 원망스러운 표정이었다. 옷깃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 앉아있던 자는 마침내 얼굴을 드러냈다. 


 삽시간에 사방이 고요해졌다. 어깨와 팔뚝까지 흘러내린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은 붉은 침묵의 강물처럼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발치에 꿇어앉은 배신자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녀는 다른 곳을 보지 않았지만, 그녀의 시선이 몹시도 추운 흐린 날의 뿌연 햇빛처럼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이에 그 눈을 다시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고, 그녀의 옷깃에 꽂혀 있는 백합만 간신히 힐끔거릴 뿐이었다. 싱그럽고 연약한 백합은 꽃잎에 맺힌 이슬이 당장이라도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그녀는 배신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배신자는 결심한 듯 그녀의 손끝을 가볍게 쥐더니 자신의 이마에 손등을 가져다 댔다. 


 그것은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이었다.


레드 머큐리

콜로세움의 여정이 끝난 후, '나'는 지체없이 친구에게 머큐리 부인에 관한 조언을 구했다. 머큐리 부인에 관한 소문을 항간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지만, 믿을 수 있는 사실은 매우 적었다. 그럼에도 신분과 결혼 문제에 있어서 그녀가 보여준 결단은 그녀를 전설적 존재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친구는 이번 경기로 돈을 잔뜩 땄고, 내게 한잔 사겠다고 했다. 우린 술을 마시며 머큐리 부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는 머큐리 부인의 상회와 여러 번 거래한 덕에 그곳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머큐리 부인을 본 것은 딱 한 번뿐이라고 했다. 이야기 도중에 친구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부인은 눈에 띄는 타입이거든. 얼굴을 자주 보이면 괜한 소문이 돌기 마련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브라톤에서 떠도는 머큐리 부인에 관한 소문은 결코 적지 않았다. 내가 들은 것만 해도 제법 되는데, 대부분이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중에서 머큐리 부인의 출신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인 게 분명했다. 놀랍게도 부인은 백야성 출신이며, 본명은 '머큐리'가 아니라 끝에 '나'가 붙은 이름으로, 가장 표준적인 백야성 귀족의 이름이라고 했다. 백야성의 귀족이 움브라톤의 상회 단장이 된 사연은 한 마디로 미스터리였다. 


 “머큐리 부인은 움브라톤으로 시집을 온 거거든.” 


 친구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내게 수군댔다. 


 “아무튼 참 기괴한 러브 스토리라니까. 어린 시절에 움브라톤의 무기 밀수 상인과 아는 사이였는데, 어떻게 된 건지 그 사람과 결혼을 결심했다고 하더라고.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머큐리 부인이 교회 사람에게 주례를 부탁하려고 하니까, 가문에서는 그녀를 쫓아내겠다고 했다지. 그런데도 머큐리 부인은 뜻을 꺾지 않았다더라고.” 


 “그때는 아직 어렸던 거겠지.” 


 “그런 결정을 하는 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설사 어리다고 해도 원래의 삶을 버리고 불투명한 미래를 선택한 대가는 누구나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냐.” 


 나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고, 다시 친구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남편은 지금 어디 있는데?” 


 “죽었어.” 


 “죽었다고? 어쩌다가?” 


 “백야성의 귀족과 트러블이 있었다고 해. 하메스 가문이라고 알아? 아마 사업이나 뭔가 말할 수 없는 일이 있었던 거겠지... 그 잘난 귀족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누가 알겠어?” 


 친구는 비웃었다. 


 “그리고는 끌려가서 죽었다고 하더라고. 그 뒤로 머큐리 부인이 상회를 관리하기 시작한 거야.” 


 “부인은 남편의 복수를 하지 않는 건가?” 


 “하메스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지 너도 들어봤을 텐데. 머큐리 부인이 원래 속했던 가문조차 상대가 안 될 거라고.” 


 술기운이 올라오는 바람에 친구가 무슨 말을 더 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머릿속에서 머큐리 부인 같은 사람이라면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여관에서의 만남(1)

드디어 '나'는 백야성에 들어갈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중립 지구의 여관에서 출입 서류 심사를 기다리던 중, '나'는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났다.

  그 일이 있고 나서 2년이 흘렀다. 한 자작이 내 소설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고, 친구들에게도 나눠주고 싶다며 백야성의 출판업자에게 탁본을 의뢰했다. 출판업자는 이번 일에 대해 상의하고 싶다며 내게 백야성으로 와 달라고 했다. 백야성을 둘러볼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나는 약속한 시간보다 먼저 출입 허가서를 제출했고, 심사가 통과될 때가지 계속 중립 지구의 여관에 머물고 있었다. 


 그곳의 여관은 다양한 건축 양식을 사용했고, 움브라톤과 백야성의 스타일이 뒤섞여 있었다. 내가 묵은 여관은 백야성의 한 평민 가문에서 지은 것으로, 무려 100년의 역사를 자랑했다. 입지도 좋았고, 나란히 늘어선 객실에서 발코니로 나가면 신선한 새벽 햇살을 만끽할 수도 있었다. 나는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글을 썼고, 이따금 초저녁 때 홀에 나가 저녁을 먹거나, 불이 꺼질 때까지 신문이나 잡지를 읽기도 했다. 홀의 책장에는 내 소설도 꽂혀 있었다. 날마다 나와 가장 많이 이야기를 나눈 것은 가게의 하인들이었다. 그들은 전날 손님들이 갈아입은 옷을 헝겊 자루에 담고, 내 방으로 아침 식사를 가져다줬다. 옷을 세탁실에 전달하고 나면, 이튿날에 깨끗이 세탁한 옷을 아침 식사와 함께 들고 찾아왔다. 


 그날은 날씨가 흐린 탓에 하늘은 온종일 어둑어둑했다. 해가 질 무렵, 중립 지구에 자리 잡은 수많은 가옥의 벽과 난간 사이로는 찬 바람이 불었다. 우울했던 나는 기분 전환 삼아 홀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여관 안에는 손님이 많은 편이 아니었던 탓에, 꽤 오래 머물렀던 나는 여러 사람들과 얼굴을 익힐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우연히 낯선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움브라톤 사람 특유의 옷차림, 가죽 부츠와 두툼한 코트, 섬세한 바느질이 돋보이는 검은 스카프, 구릿빛 두건 속에 숨겨진 머리... 상대는 카운터에 기댄 채 나지막한 말투로 여관 주인에게 뭔가를 재빠르게 묻고 있었다. 자세한 내용을 들을 순 없었지만, '출입', '심사'와 같은 단어만 드문드문 들렸다. 백야성에 대해 묻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익숙한 목소리에 그 사람이 돌아설 때까지, 나는 자신도 모르게 계속 그 사람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검은 스카프로 입과 코를 반쯤 가리고 있었지만 내 눈은 정확했다. 그 사람은 머큐리 부인이 틀림없었다.


여관에서의 만남(2)

머큐리 부인에게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던 '나'였지만, 호기심은 두려움을 이기고 말았다. '나'는 그녀를 모른 척하며 가까이 가서 말을 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카운터에 기댄 채 하인이 트렁크를 객실로 옮기는 것을 지켜보다가, 눈에 띄는 붉은 머리카락을 이따금 두건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고, 그저 태연한 척하며 홀을 둘러보며 인파 속에서 그녀의 시종이 따라왔는지 확인하려 했다. 아쉽게도 시종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스카프를 콧날까지 다시 끌어올린 뒤, 고개를 숙인 채 재빨리 방 안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으로 나는 그녀가 몰래 이 여정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발자국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나는 천천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런 엄청난 인물이 혼자 중립 지구의 여관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깨닫자, 왠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잠시 앉아있던 나는 무심결에 그녀가 떠난 방향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기를 여러 번,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내 모습을 깨닫고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나는 그녀가 나타날 때까지 무작정 홀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웨이터에게 리필을 부탁한 맥주를 절반 정도 마셨을 무렵, 그녀가 객실 복도의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두건을 벗은 채, 페도라를 쓴 모습이었다. 길게 땋은 머리를 스카프와 코트에 숨긴 그녀는 주변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어두컴컴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아무도 없는 구석에 앉았다. 그녀가 고른 테이블은 책장 근처에 있었는데, 마침 내게는 10시 방향인 곳이었다. 긴장되면서도 은근히 즐겁다는 생각도 들었다. 


 웨이터가 음식을 가지고 올 동안 그녀는 별생각 없이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골랐는데, 그것은 내가 몇 년 전에 쓴 소설인 게 분명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등을 떠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땀으로 젖은 손으로 맥주가 담긴 나무 잔을 쥔 채, 그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나는 마침내 그녀의 앞에 섰고, 쭈뼛거릴 새도 없이 술잔을 쥔 채로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을 가리키며, 상대를 전혀 모른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책이 마음에 드시나요?” 


 “책 제목이 마음에 드네요.” 


 그녀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은 채 날 올려다보며 손끝으로 도금된 제목을 매만졌다. 


 “멋진 걸 생각나게 해 주거든요.” 


 그녀의 아름다움에 압도된 나는 숨을 쉬는 것조차 곤란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얼음물 속에 얼굴을 담그거나 매서운 찬 바람을 고스란히 맞는 기분이었다. 이빨이 달달 떨릴 정도로 긴장했다는 것을 상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나는 힘겹게 숨을 골랐다. 


 “좋아해 주셔서 다행이군요. 제가 그 책의 작가거든요... 거기 쓰여 있는 게 바로 제 이름입니다.”


여관에서의 만남(3)

마침내 '나'는 머큐리 부인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대화를 나누던 중 머큐리 부인은 중립 지구에 나타난 이유, 자신의 꿈과 친구에 대한 그리움에 대한 사연을 들려줬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을 때, 나는 셔츠의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소설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말을 했는지 한 마디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유일하게 기억나는 것은 낯설다는 감정뿐이었다. 온몸이 호수 속에 푹 잠긴 듯한, 호수의 기슭에서 또 다른 세상의 모습을 지켜보는 듯한 무척 이질적인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내가 그녀의 방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베란다에 앉아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녀와 마주 앉았다. 테이블에는 안주와 술잔이 놓여져 있었고, 테이블 한가운데에는 가는 목의 꽃병이 세워져 있었다. 꽃병에는 꽃받침이 푸르스름한 백합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어둠이 완전히 깔리기 전이었지만, 짙은 구름 탓에 사방은 어둡고 음침했다. 점점 매서워지는 찬 바람에 나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제서야 나는 홀에서 하인이 막 음식을 가져오던 때, 그녀의 갑작스러운 제안을 받고 그녀의 방에서 식사를 하게 됐던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녀는 모자와 목도리를 벗은 후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아무렇게나 던졌고, 코트와 부드러운 의자의 팔걸이가 그녀를 감싸 안았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는 게 민망해진 나는 시선을 돌렸고, 점점 느슨해지며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당신처럼 저도 백야성에 가려는 참이에요.” 


 그녀는 웃으며, 젖은 휴지에 손가락을 쓱쓱 문질렀다. 그제야 나는 우리가 방금 전까지 각자의 여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전 백야성에 살았어요. 그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도 전부 백야성에 남아 있죠.” 


 “그러다 나중엔 움브라톤으로 오게 됐는데, 모든 게 마음에 들었어요. 다만 떠날 때 친구와 싸우긴 했지만요...” 


 “왜 싸운 거죠?” 


 그녀의 말에 나는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나질 않네요. 당장이라도 터질 듯 두근거리는 심장이 느껴질 만큼 화가 났었다는 것 외엔 말이죠.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유치한 일이었을 것 같네요.” 


 그녀는 깨끗해진 손으로 머리카락을 천천히 빗어 넘겼고, 땋은 머리를 가볍게 풀어 헤쳤다. 


 “그런데 요즘 그 친구가 다시 생각이 나기 시작했어요. 꿈에서부터요.” 


 “꿈이요?” 


 “네, 꿈이요. 꿈속의 전 여전히 원래 살던 집에서 지내고 있었어요. 새하얀 벽, 갈색 문, 눈앞에는 예전에 썼던 화장대와 거울이 놓여 있었죠.” 


 “거울 속에는 제 머리를 빗겨주는 친구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어요. 강물 같은 제 머리를 매만지는 친구의 눈빛은 저를 보는 것 같으면서,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죠.” 


 “친구는 전보다 훨씬 더 예뻐진 것 같았어요. 잠에서 깬 뒤로 전 며칠 동안 계속 친구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더군요.” 


 “백야성에 가시려는 건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인가요?” 


 “친구를 「만난다」기보다는...” 


 말을 멈춘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친구를 만날 수 있다면 물론 좋겠지만, 쉬운 일은 아니에요. 직접 만나지 못한다면 멀리서라도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중립 지구의 여관들이 하나둘 불을 밝히자, 축축하고 뿌연 안개 속에서 여러 크기의 불꽃이 반짝거렸다. 술잔을 들고 날 쳐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사라졌던 두려움이 또다시 슬금슬금 고개를 드는 게 느껴졌다. 그녀의 얼굴에는 표정이 서서히 사라지고, 고요하면서도 흐릿한 달처럼 숙명을 암시하는 듯한 부호만 남겨진 것 같았다. 어둠이 짙게 깔리자 그녀의 얼굴은 깃발처럼 긴 그녀의 머리카락과 함께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고, 깊은 어둠은 또다시 서늘한 검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여관에서의 만남(4)

이튿날 정신을 차린 '나'는 머큐리 부인이 여관을 떠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관 주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백야성의 비공정이 그녀를 데리러 왔다고 한다. '나'는 몹시 실망한 채 방으로 돌아왔다가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정신을 차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침대에 멀쩡하게 누워있는 내 모습에 나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숙취로 욱신거리는 머리를 달래며 나는 창밖을 보았고, 아직도 하늘이 어둑한 걸 보니 평소 일어나던 시간보다 이른 것 같았다. 하인들도 방문을 두드리지 않을 만큼 이른 시간이었다. 머리를 감싼 채 방문을 나선 나는 머큐리 부인이 있는 방을 바라봤지만, 방 안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낙담한 채 복도를 따라 홀까지 내려오다가, 여관 주인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저기... 혹시 그 부인은...” 


 목이 쉰 탓에 나는 뒤에 있는 빈방을 가리키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부인은 떠났나요?” 


 “새벽에 떠났습니다.” 


 주인은 하던 일을 멈추곤 흥미로운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말했다. 


 “백야성 사람들이 비공정을 보냈더군요. 제 사람 보는 눈은 틀리는 일이 없습니다. 그 사람, 귀족이죠?”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고, 왠지 모를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 뿐이었다. 가게 주인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처음 왔을 때부터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운 분이었죠.” 


 말을 하던 가게 주인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런 분한테 선뜻 말을 걸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목구멍이 갑갑해진 느낌이 든 나는 오던 길로 천천히 돌아갔고, 방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았다. 잠시 뒤 하인이 아침 식사와 세탁한 옷을 가져왔다. 창밖의 햇살이 눈부시게 빛날 때까지 나는 책상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처럼 깨끗이 세탁된 옷을 옷장에 넣으려고 침대에서 옷을 개기 시작했지만,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옷을 집고 몇 번 털었을 때, 갑자기 옷에서 얇은 무언가가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그것을 집어 든 나는 엄청난 선물을 받은 것처럼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책갈피처럼 납작하게 눌러서 말린 백합이었고, 백합은 그녀의 상징이었다.


살인 사건

심사가 차일피일 미뤄지자, '나'는 초조한 나머지 백야성에 관한 소식을 수소문하다가 백야성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백야성에 들어선 뒤 '나'는 망설임 없이 살인 사건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후 사나흘을 더 기다렸지만 예상과 달리 출입 심사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초조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자작과 출판업자에게 약속했던 날이 눈앞까지 다가왔고, 나는 여관에서 나와 백야성의 소식에 대해 수소문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약속 시간에 늦지 않도록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했다. 


 그러던 나는 최근 백야성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하메스 가문의 장남이 운 나쁘게도 숨을 거둔 탓에, 백야성의 경계가 삼엄해지면서 출입 심사가 지연되었던 것이었다. 불안을 가까스로 가라앉힌 채 여관으로 돌아온 나는 머큐리 부인이 들려줬던 이야기를 떠올렸고, 그 이야기 중에는 왠지 이번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사연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자작과 만나기로 한 사실을 까맣게 잊을 만큼 나는 얼이 빠지고 말았다. 


 여관에서 빨래 일을 하는 사람들도 한 마디씩 거들 만큼 사건을 둘러싼 소문이 요란하게 들끓었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그 분위기에 휘말리지 않았다. 나는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리고 그 비밀을 지켜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풍파가 가라앉기 전까지는 진실이 새어 나가선 안 된다. 며칠이 또 지난 뒤에야 출입 허가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고, 심사 문서가 발급되면서 살인 사건의 결과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백야성은 이미 범인을 체포했으며, 곧 교수형에 처할 것이라고 했다. 


 불안한 기분에 휩싸인 채 나는 자작을 만나러 갔다. 책에 관한 상대의 감상을 끊고, 살인 사건에 대해 자세히 묻고 싶다는 충동을 여러 번 참아내야 했다. 즐거운 듯 이야기에 집중하는 상대의 모습에 나는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살고 있는 세상에서 두 사람의 목숨이 사라진, 그리고 사라지게 될 상황에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고, 특히 나 같은 이방인에게는 설명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작은 출판업자에게 나를 데리고 백야성을 둘러보라고 말한 뒤 자리를 떠났다. 


 자작이 떠난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출판업자에게 형장을 돌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황혼 무렵이었다. 


 “교수형이 아직 집행되지 않은 겁니까?” 


 나는 희망을 품은 채 물었다. 


 출판업자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내게 되물었다. 


 “하메스 가문의 사건 말입니까?” 


 “네, 맞아요.” 


 “이미 끝났답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내 표정을 확인한 출판업자가 몇 마디 덧붙였다. 


 “처형식은 이미 집행됐답니다. 바로 어제 말입니다.” 


 교수대는 평소에는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탓에, 나는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형장 주변에는 인적이 드물었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비둘기만 뒤뚱거리며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직접 보셨습니까?” 


 “물론이죠.” 


 “범인은 누구였습니까?” 


 “그게 궁금하시면 심판소에 가서 물어보시죠.” 나는 점점 의구심이 들었다. 


 “범인은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습니까?” 


 출판업자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죄수들은 전부 낡아빠진 죄수복을 입고 있어서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습니다. 머리에도 천을 뒤집어써야 하죠. 중죄를 지었다면 눈만 보이는 철 가면을 써야 합니다. 교수형에 처하는 범인의 얼굴은 드러나면 안 되니 말이지요.” 


 “어째서죠?” 


 “끔찍하잖아요.” 


 출판업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에 나는 바닥으로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얼굴을 가렸다고 끔찍하지 않은 건 아닐 텐데요.” 


 “그래도 그 쪽이 더 재미있지 않습니까?” 


 출판업자는 여전히 웃으며 대답했다.


에필로그

움브라톤에서 머큐리 부인의 부하를 우연히 만난 '나'는 그녀에 관한 소식을 물었다. 비보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는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예상과는 전혀 다른 현실을 마주해야만 했다.

 나는 도망치듯 백야성을 떠났고. 움브라톤에 묵으라던 친구의 초대도 황급히 거절했다. 움브라톤을 다시 찾은 것은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친구는 평소처럼 날 술집으로 데려갔다. 술집은 사람들로 가득한 탓에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술에 반쯤 취한 친구는 술잔을 뒤집더니 잔 바닥을 들곤 인파의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봐, 콜로세움의 배신자야.” 


 고개를 돌리고 검은 옷차림의 상대를 발견하고서야 나는 몇 년 전에 봤던 싸움이 기억났다. 그러자 머큐리 부인에 관한 기억도 절로 떠오르게 되었다. 만약 몇 달 전에 저 상대를 만났다면 난 분명히 서둘러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 마음도 차분해져 있었는지, 나는 술잔을 든 채 상대에게 다가갔다. 


 나는 술기운을 빌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 기억이 나는군요. 전에 콜로세움에서 봤었죠.” 


 순간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옆에 있던 동료와 눈빛을 교환했다. 진작에 두려움을 잊어버린 나는 그들의 흉악함도 잊은 채 그저 이야기를 꺼내 놓기에 바빴다. 


 “저는 여러분을 이끄는... 머큐리 부인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말에 그들의 표정이 마침내 부드러워졌다. 


 “안부 좀 전해주십시오. 중립 지구의 작가라고 하면 기억하실 겁니다.” 


 나는 내 추측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들의 눈빛을 살피며 슬픔의 흔적을 찾아내려 했다. 하지만 오래전에 생긴 상처를 간직한 풋풋한 얼굴 위로는 그저 담담한, 뜻을 알 수 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잘 지내고 계시죠?” 


 떠보는 듯한 내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곤 시선을 서로 교환하더니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다만 더는 상회의 단장은 아니십니다.” 


 “그럼 단장이 없다는 얘깁니까?” 


 그 말에 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누군가 사라지면 또 누군가 그 자리를 채우는 법이죠. 상회에 어떻게 단장이 없을 수가 있겠어요?”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그 뒤로 나는 머큐리 부인을 더는 볼 수도 없었고, 그녀에 관한 소식도 더는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뒤로도 움브라톤과 백야성에서 그녀에 관한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퍼진 탓에 나도 소문을 듣긴 했지만, 단편적인 이야기만으로는 그날 백야성으로 간 머큐리 부인이 원수에게 죽음의 서한을 보냈는지, 아니면 꿈속의 친구를 그저 멀리서 바라보았을 뿐인지는 알 수 없었다.


편집 후기(상)

《레드 머큐리》 2쇄 편집자는 후기에 움브라톤의 무기 밀수 상회, 백야성의 살인 사건과 재판에 관한 기록을 남겨 독자들에게 전해주었다.

 독자 여러분, 이본 여사의 소설집을 통해 여러분께 인사드릴 수 있어서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희는 이번 소설집의 제목을 《레드 머큐리》라고 정했습니다. 부디 여러분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레드 머큐리》가 이본 여사 최고의 작품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분량이 적은 단편 소설이니 말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가장 뜨거운 논쟁이 예상되는 작품일 것입니다. 저도 이본 여사의 충성스러운 독자로서, 전설적인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난 뒤 실존하는 '머큐리 부인'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움브라톤에서 무기 판매를 벌이는 상회도, 입장료가 1천 나이티움이나 되는 콜로세움도 직접 방문했습니다. 게다가 백야성 심판소의 서류를 열람하기도 했고, 하메스 가문의 하인들을 직접 만나 그해 떠들썩했던 살인 사건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제가 발품을 팔아 확보한 증거와 결론을 독자 여러분께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이본 여사의 소설은 '진실'을 담아내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여러분은 항상 '분명히 그런 일이 있었다'는 증거를 찾아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움브라톤의 무기 판매상 같은 것이 되겠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움브라톤에는 무기를 판매하는 상회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부 상회는 다른 물건도 취급하고 있지요. 10년 전에 쓰인 탓에 당시 움브라톤에 모든 무기 거래를 관리하는 상회가 있었는지를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움브라톤의 복잡한 상황은 의지만으로 밝힐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백야성 살인 사건이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사건의 당사자가 백야성에서 유명한 하메스 가문의 장남이었기 때문입니다. 라치온 님의 큰아들이 살해된 데다, 흉기로 사용된 가늘고 긴 금속 무기는 머큐리 부인의 무기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콜로세움에서 포로의 숨통을 끄는 '가늘고 날카로운 빛줄기'와 딱 맞아떨어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살인 사건의 범인에 관한 기록은 문서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아마 범인은 극형에 처해졌을 것입니다. 백야성에서는 그 사건에 대해 쉬쉬한 것도 모자라, 범인의 얼굴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속상해하진 않으셔도 됩니다. 그것은 백야성과 귀족들이 늘 쓰는 수법이니까요. 진실은 언제나 밝혀지기 마련입니다. 어쨌든 죽지 않는 사람이란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편집 후기(하)

편집자는 후기에 '머큐리 부인'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기록했다. 그는 독자들이 《레드 머큐리》의 실제 주인공을 직접 찾아갈 필요가 없다고 여겼는데, 이는 이본 여사가 글을 쓴 목적이 결코 그런 것을 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독자 여러분이 가장 궁금해 하시는 것은 '머큐리 부인은 대체 누구인가?'겠지요. 하지만 제 고증에 따르면 머큐리 부인은 허구의 인물에 불과합니다. 그녀의 미모에 관한 과장된 이야기가 바로 그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10년 전, 로맨스 소설이 한창 인기를 끌었을 때(물론 지금도 여전히 잘 팔리고 있지만), 당시 여주인공들은 대부분 믿기 어려운 미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본 여사가 머큐리 부인에게 '두려울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부여한 것은 순전히 당시 유행을 따른 결과입니다. 사랑을 위해 귀족 신분도 버렸다는 이야기 역시 풍자임이 분명합니다.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하나가 된 연인은 로맨스 소설의 흔한 클리셰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야기 속에서 이본 여사는 머큐리 부인에게 어떤 운명을 선사했을까요? 에필로그에 나온 것처럼 머큐리 부인이 백야성에 간 것은 복수 때문일까요, 아니면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였을까요? 상당수의 귀족이 사형을 당했거나 추방(그 이유조차 우리는 알 수 없지만)됐다는 백야성의 유언비어를 떠올리면, 이본 여사의 설정 속 사랑은 그저 허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머큐리 부인이 움브라톤으로 시집간 진짜 이유는 사실 피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본 여사의 글짓기 습관을 잘 아시는 독자라면 '말할 수 없는 일'을 거짓말로 교묘히 덮는 그분의 실력도 아실 겁니다. 


 그렇다고 머큐리 부인이 그저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백야성에 간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요? 아니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여관에서의 만남이라는 챕터에서 이본 여사는 진실하고, 효과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데 인색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자신의 눈앞에 흐르는 강물에서 물을 손으로 뜨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것만으로는 강 전체를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불쌍한 희생자는 그녀가 벼르던 원수이거나, 그저 그리운 어릴 적 친구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두 가지 모두 그녀의 목적일 수도 있겠지요. 그중 일부만 '나'라는 작중 인물에게 알려준 것일지도 모릅니다. 


 독자 여러분, 어쩌면 제 결론에 실망하셨을지도 모르지만, 《레드 머큐리》는 탐정 소설이 아닙니다. 이본 여사도 '진실'에 관한 책을 쓰려던 게 아니고, 그저 우리에게 '진실'의 단초를 보여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전설에 의해 가려진, 진실한 생명에 관한 이야기 말입니다. 이본 여사가 싱그러운 백합, 예리한 검, 경탄이 절로 나올 만큼 빼어난 외모를 머큐리 부인에게 선사한 것은, 어쩌면 인물과 만나는 순간, 찰나의 '진실'을 놓치지 않도록 우리에게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말해주려던 게 아닐까요? 진실은 손바닥에 담긴 한 움큼의 물에 불과하지만, 그 어떤 대단한 전설을 더한 것보다 귀중한 것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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