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The Witness


어느 날 나는 우연히 한 가지 주제에 사로잡혔다. "바람에 의한 파도의 발생" 나는 유체역학과 관련된 권위 있는 논문을 꺼내 읽었다.


만약 외부의 힘 p'yy, p'xy가 주어졌을 때 e^(ikx + at)의 배수, k와 a가 규정되어, 문제의 방적식은 A와 C로 결정된다. 따라서 (9)에 의해 eta값은... 등등이 두 페이지 정도 이어졌다. 끝 부분에 시속 0.5마일(약 0.8km)보다 약한 바람은 파도를 만들지 못하는 것으로 명확히 쓰여 있었다. 시속 1마일(약 1.60km)일 때는 방해 원인이 없다면 바로 약해지는 표면장력파에 의해 수면에 잔물결이 인다. 시속 2마일(약 3.2km)일 때 중력파가 등장한다. 저자가 겸손하게 결론 짓듯이 "우리의 이론적인 조사는 파도 발생초기 단계에 주목할 만한 통찰을 제공한다"


다른 때에 나는 "바람에 의한 파도 발생"이라는 동일한 주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책이 더 적합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변화무쌍한 바람에 수면은 웃음을 터트리네. 그리고 풍요로운 하늘에 온종일 반짝이네. 이후 동장군이 손짓하여 춤추는 파도와 떠도는 사랑스러움을 채우네. 그는 흰 색의 온전한 영광, 주름진 광채, 관대함, 빛나는 평화를 밤 아래 남기네.


마법의 어휘들이 광경을 되살린다. 다시금 우리는 우리 곁에 다가와 우리와 하나되는 자연을 느낀다. 햇빛 속에 춤추는 파도의 기쁨과 얼어붙은 호수를 비추는 달빛에 대한 경외감으로 충만할 때까지. 이는 우리가 퇴보하는 순간이 아니다. 우리는 되돌아 보며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멀쩡하고 냉철한 감각과 과학적 이해를 갖춘 사람이 그런 식으로 자신이 기만 당하도록 두는 것은 수치이다." "다음 번에는 램의 유체역학을 가져 가야지."


우리에게 그러한 순간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물리학자의 도구로 측정될 수 있는 또는 수학자의 기호로 설명될 수 있는 것들 너머 존재하는 우리 주변의 세계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위축되고 옹색해질 것이다.


물론, 그것은 환상이다. 우리는 우리를 장난을 건 다소 어설픈 속임수를 쉽게 폭로할 수 있다. 다양한 파장의 공기 진동은 공기와 물 사이 불안정한 경계면으로부터 다양한 각도로 반사되어 우리 눈까지 도달하고 광전자 활동에 의해 적절한 자극이 시신경을 따라 뇌중추까지 전달된다.


여기에서 시자극으로부터 인상을 엮어내기 위해 의식구조가 작동한다. 수신되는 물질은 빈약했지만 마음은 뼈대에 살을 붙일 수 있는 거대한 연합작용의 보고이다. 인상을 만들어내면서 마음은 그 동안 만들었던 모든 것을 점검하고 매우 좋았던 것을 결정한다. 주요 기능들은 소강 상태이다. 우리는 분석하기를 중단하고 인상 전체만을 의식한다. 공기의 따스함, 풀의 냄새, 산들바람의 부드러운 움직임이 시각 장면과 합쳐져 우리 외부세계와 내면을 아우르는 초월적인 인상으로 통합된다. 창고에서 솟아나는 연상은 점점 대담해진다. 어쩌면 우리는 "물결치는 웃음"이라는 구절을 떠올린다.


파도-잔물결-웃음-기쁨. 생각들은 서로를 밀치며 나타난다. 아주 비논리적으로 우리는 기쁘지만 일련의 공기 진동에 기뻐할 만한 무언가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지 합리적인 사람은 설명할 수 없다. 조용한 기쁨의 분위기가 전체 인상을 뒤덮는다. 우리 내면의 기쁨은 자연 속에, 파도 속에 그리고 모든 곳에 있다. 이렇게 작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환상이다. 그렇다면 오래 붙잡고 있을 필요가 있는가? 진실을 추구하는 성실한 연구자들이라면 엄격하게 통제 하에 두지 않을 때 우리 마음이 외부 세계로 투영하는 이런 비현실적 공상에 관심을 두지 않아야 할 것이다. 순수한 물질의 세계로, 바람의 압력 아래에서 이동하는 액체라는 물질로, 그리고 유체역학의 법칙에 조응하는 중력의 힘의 세계로 돌아가라.


그러나 순수한 물질이란 또 다른 환상이다. 그것 역시 마음에 의해 외부 세계로 투사된 공상인 것이다. 우리는 순수한 물질을 좇아왔다. 액체에서 원자로 원자에서 전자로. 그리고 거기에서 길을 잃었다. 하지만 최소한,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추적의 결과 양자와 중성자에 다다랐다고. 혹, 새로운 양자 이론이 이런 이미지들은 지나치게 구체적이며 일관성 있는 이미지를 제공하지 못한다고 비난한다면, 적어도 우리에게는 qp-pq가 ih/2π과 같다는 것을 확증해주는 상징 좌표들과 운동량 그리고 해밀턴 함수들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강좌를 통해 그 속성상 우리는 환경의 부분적인 표현이 될 수밖에 없는 순환적 도식을 보여주려고 했다. 이는 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뼈대이다. 급박한 추격으로 인해 우리는 "실제"를 잃어버렸다. 처음에는 환상에 빠져버리는 마음을 거부했으나 결국 다시 우리는 마음으로 돌아가 이렇게 말한다. "여기 당신들의 공상보다 안정된 토대 위에 훌륭하게 구축된 세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 세계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없다." "하나를 골라 당신의 상상력 넘치는 이미지를 짜 넣어라. 그걸로 그것은 실제가 된다."


우리는 환상 아래 놓인 현실에 닿기 위해 마음 속 환상을 없앴다. 그리고 결국 환상 아래 놓인 현실은 이런 환상을 일깨울 가능성과 밀접한 관계임을 알았을 뿐이다. 그것은 마음은 환상을 꾸며내는 존재인 동시에 현실의 보증인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언제나 환상의 기저에서 찾아지기 때문이다. 환상과 현실의 관계는 연기와 불의 관계와 같다. 


나는 "불 없이 연기가 나지 않는다." 같은 거짓을 강요하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신비한 환상에 그 아래 깔려있는 현실이 투영되지 않았는지 알아보는 것은 합리적인 것이다.


아서 에딩턴, 192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