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한 채널
일부는 제국에 평화로운 왕국을 추구했다. 유럽을 떠나는 것은 영웅적이고 진취적인 행위로 여겨졌다.

 

이런 이유로 제국들은 기존 전통을 파괴하는 동시에 혼합 공동체, 혼성 문화, 새로운 생활 방식을 만들어냈다. 계층과 교육 수준을 막론하고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살롱에서 인쇄매체를 통해 국가의 문제를 의논하고 분석했다.

 

한국인들은 제국주의가 악이라는 착각과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근대 초 유럽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의 도덕적인 공동체에서 그리고 전쟁을 제한하고 규제하는 원칙을 준수하는 문명국가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럽이 일으킨 전쟁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언제나 공개적인 발언과 글을 통해 자국이 정당한 전쟁을 치르고 있음을 입증하려 했다는 것이다.

 

유럽인이 장거리 해운을 지배한 터라 당대의 데이터 은행들은 서양에 몰려 있었다. 근대 초 전체 이주민의 85%는 유럽인으로 추정된다. 나머지는 동남아로 이주한 중국 노동자와 만주와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중국 농민, 대서양을 횡단한 흑인 노예들이 있었다.

 

흑인 노예들은 새로운 생활 방식을 고안해냈다. 새로운 종교,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냈다. 탈주한 노예들은 여러 왕국을 건설했고, 백인이 통치하는 제국들에 둘러싸인 고립영토 국가의 독립을 수세대 동안 지켜냈다.

 

인도 항구들에서는 유럽인이 늘어나고 서로 다른 공동체의 개인들이 통혼을 하면서 인도-포르투갈인, 인도-네덜란드인, 영국-인도인같은 새로운 공동체들이 생겨났다. 포르투갈 남성은 상대가 무슬림이든 힌두교든 인도 여성과 자유롭게 결혼했다. 아시아까지 길고 혹독하고 위험천만한 항해를 떠나겠다는 유럽인 여성이 거의 없었던 만큼 이민족 간 결혼은 불가피했다.

 

서양은 19세기 이후 군사력에서 우위를 점했는데, 산업화를 이루어 화력을 대폭 강화했기 때문이다. 또한 산업화 덕에 서양은 수송의 속도를 높이고 열대 지방에 적합한 물자와 약물을 갖출 수 있었다. 동양에 상인으로 도착한 네덜란드인은 인도네시아 요리를 먹는 지주로 변모했다.

 

18세기 말에 인도의 무슬림 셰이크는 카바신전따위 집어치우고 런던에 가야 한다고 설교했다. 셰이크는 카바같은 신의 집을 안보고 런던 같은 신의 영광을 봐야한다고 썼다. 잉글랜드에서 런던을 목격한 그는 당시 인도의 가장 번화한 러크나우와 비교하며 이렇게 썼다. "러크나우는 런던의 혁신적 능력, 장인의 기술에는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산업혁명과 관련해서는 "영국은 철제 대포, 총, 검, 종이, 직물 등을 만드는 각종 기계를 가지고 있고 순식간에 똑같은 물품 수천개를 생산한다. 인도에는 그런 발명품에 관한 일말의 실마리라도 가진 사람이 전혀 없다"라고 썼다.

 

서양의 산업화로 인해 전통적인 인도 산업 태반의 맥이 끊겼다. 유럽 밖에서는 미국과 일본이 유럽과 경쟁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