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모음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선운사에서>, 최영미



"어기여차 저기여차 신나게 길을 건너네."

오늘은 기분이 그저 그런 날이다.


"길들 사이 꽃이 피어 버들가지 춤을 출세. "

그래서 모처럼 거나하게 취한 척을 해보았다.

걸음을 비틀비틀, 눈은 짝짝이로. 종종 시라쿠사에 있을때 이런 놀음을 즐겼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당시 나와 함께 비틀비틀 걸었던 디민, 부끄러워하며 말려댔던 티, 맨 뒤에서 허허로이 지켜보던 가토, 이런...영 좋지 못한 기억이다. 빠르게 잊자.


"해묵은 시간을 다 벗어던지고 나는 개나리들 사이로 실컷 놀아나고야 마는구나~"


나는 근처에 보이는 꽃밭에 다이빙- 할까면서도 그건 너무 갔나 싶어 그 주위를 빙 둘러 걸어갔다. 
꽃밭의 모양은.... 정무한각형. 모서리를 따라 원주하다보니 어느새 한 마리의 호접(蝴蝶)이 되어 있었다.  모순이었다.

"참으로 재미난 일이로구나~"

그런 모순조차도 내게는 웃기기 그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모순적이지 못하면 웃을 수 없었다.

그렇게 혼자 재미나게 걷다보니 태양이 옆에 끼어 자꾸만 나도 같이 놀아보세 놀아보세 한다. 나는 그에 대고

"아서라 아서. 당신이랑 놀기에는 허리가 너무 굽었어."

이러고는 행여 짖궂은 빛이 나를 태울까 부리나케 도망치고 말았다. 창피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달려나간 끝에 숨을 고르고 있자니 머리에 땀이 흘렀다. 나는 뜀박질을 좋아하지 않는 그저 그런 사람이었다. 

"헉....헉...헉.."

이마까지 타고내려온 땀을 닦자니 손이 더러워져 싫고, 냅두자니 목까지 적셔내려올까 두려워서 싫고, 그저 싫은 것 투성이일 뿐인 결과를 누가 좋아할까?


"........"

그렇기에 도망치는게 좋았다. 내 손이 더럽지 않고 내 목에 흐르지 않는다면야 무엇이든 좋았다.
비참해도 좋았다. 서러워도 좋았다. 



나는 그저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웃음이 멈췄다.

"........"


깊은 수면의 위로 침몰한 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다시금 그날을 머리에서 잊는다. 


세상은 돌아버렸다. 다른건 몰라도 이 표현이 맞을것이라. 그렇다면 언제부터 그 세상이란 놈이 미치기 시작한 것인가. 광석병이 처음 정의된 날? 가울이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린 날? 둘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발생한 일이니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대관절 무슨 상관일까.

내가 아는 것이라곤....이 길을 뚜벅- 뚜벅- 걷고 있다는 사실일 뿐. 어딜 향하는지 어디에 도착할지조차 모르는 나는 가히 멍청이라 불릴만 한 사람이다.

멍청이는 할줄 아는게 걷고 뛰는것 밖에 없군. 그것밖에 못하니 멍청이라 부를테지. 



그렇게 걷고-



걷고-




걷고-



걷고-



걷다보니 눈앞에 약방이 보였다. 


"......."

잠시 들러 무어라도 받아볼까 고민이 들었지만 병이란 놈은 약을주면 계속해서 들러붙는다는 근거 없는 미신이 무서웠기에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어쩌면 이 순간에도 나는 지나온 시간 속 한 명의 나를 잃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지금의 나 또한 상실되는 날이 있지는 않을까. 새삼 현재의 나는 20년이 넘는 시간 속에 퇴적된 무수한 나들 위에 서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다보니 실존에 대해 고민한다.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무엇이 나를 존재하게 하는가.

....'관계'일까?

객체의 개념은 관측자의 정의와 인식에 따라 나눠진다.

그러므로 타인의 존재는 개인의 존재를 가장 선명하게 만든다.

노래에게 있어서 그 타인은 청자가 될 것이고

소설에게 있어서 그 타인은 독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를 봐줄 사람이 과연 있을까?



"과연 있을까..."

답을 찾지 못한채 터벅 터벅- 다시 돌아와 이 길을 원주하고 있을때,

마침 누군가 꽃으로 장식된 공원을 돌고 있었다. 나와 같이.

그에게 묻는다면 답해줄까?

....

나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가...그대로 내렸다.

같은 자리를 뱅글뱅글 돌고있던 탓일까 잠시 지능까지 호접이 된 것이 맞지 않으려나. 다시금 먹먹한 현실감이 나를 잠식한다.


나를 잠식한다. 눈을 감았다.


제1의 아해가 골목을 질주하였다.

제2,3,4의 아해는 하염없이 질주하는 아해를 차마 붙잡을 수 없었다.

아해는 끊임없이 내달린 끝에 벗어날 수 있었는가? 

껍데기는 긍정, 그 외에는 부정.

아해는 이제 둘로 나뉘어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아해를 따라가야 하는가.

끝끝내 껍데기를 따라가버린 나였어야 하는가.
아니면 알맹이를 따라가야 했었나.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존재는 그 자체로 안쓰럽지만...그렇지만...

내 알맹이를 버리는 것만이 내가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


나는....

투둑- 툭-


"........"

깜박- 또 깜박-

나는 비로소 머리가 개운해짐을 느꼈다.

필히 머리뿐만은 아니다. 몸 전체가 붕 떠있는 부유감에 휩쌓인 것은 내가 꽃밭에 누워있기 때문이었다. 아련한 꽃향이 느껴졌다.

나는 그 꽃의 이름을 알 수 없다. 내 생각마저 기억하지 못하는데 무엇을 알 수 있으랴. 난 그저 멍청이일 뿐이다.

나의 감각이 다시 회복되는것이 느껴진다. 


자연스레 허공을 보았다. 모르는 새에 해는 저버리고 달이 빛났다.


한숨이 차올랐다. 언제는 아니었나만, 오늘의 난 처음부터 끝까지 한심했다. 한심했음에도...


달은 어지간히도 밝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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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디민티가토(dimenticato):이탈리아어로 잊음,망각을 뜻함


히히히 글카스 발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