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욕데레 독타와 사리아, 그리고 날개 꺾인 페가수스 


0. 이전 글 모음은 요기: https://arca.live/b/arknights/103156508?target=all&keyword=%EC%86%8C%EC%84%A4+%EB%AA%A8%EC%9D%8C&p=1


1. 이전의 칸타타, 사리아 야설과 이어지는 내용이기에 스토리 이해를 원하는 명붕이들이라면 그쪽을 읽고 오는 걸 추천해. 


2. 미안해. 원래 어제 올리려고 했는데, 표현 기법을 바꿔서 그런지 내 안에서 스토리라인이 바뀌어서 그런지 내용이 계속계속 늘어나더라. 이 글도 그냥 깡으로 올리자니 4만자가 넘어서, 3개로 쪼개서 올릴 생각이야. 1, 2화는 야설이 아니고 3화만 야설이니까, 스토리 이해 좆까고 야한 거 내놔! 하는 명붕이들은 바로 그쪽으로 가면 됨. 


3. 일단 다음 주제으로 예정된 오퍼레이터는 니어(이번글)->로사->언펙터->글래디아->뮤뮤(확정 아님)이야. 오퍼레이터 추천은 언제나 환영이지만, 내 취향이나 컨디션에 따라 작업 속도가 널뛰기할 수 있는 점 이해바람. 


5. 추천을 누르고 댓글을 써 주면 29포인트가 공짜로 생김미다. 댓글도 추천도 아카콘도 전부 환영해. 


6. 오늘 글은 정말, 상당히 어두울 거야. 대놓고 구원순애였던 칸타타 글이나 어느 정도 가벼운 분위기였던 사리아 글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BSS요소나 강간, 멘탈붕괴 같은 게 들어가 있으니까 이런 거 싫어하는 명붕이들은 뒤로가기 누르는 걸 추천할게. 그리고 이번 글에 등장하는 니어는 이격 니어가 아니라 디펜더 니어니까, 그것도 참고하고.  


7. 이 단상에는 4번이 존재하지 않음. 


그럼 오늘도 즐겨줘. 



—---  



“사리아, 오늘따라 표정이 밝군. 어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오늘도 정시에 맞춰 의료부로 출근한 사리아는, 켈시의 한 마디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매만졌다. 



“내…표정이 밝다고?” 


“그래. 무슨 첫사랑에게 고백이라도 성공한 십대 소녀 같은 얼굴이다. 꽤 의외로군, 네가 그런 표정도 지을 수 있을 줄이야.” 



희한하다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켈시. 


어제…그래, 무슨 일이 있긴 있었지. 


아, 안 돼. 


평소의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일부러 그 일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어제 박사와 보낸 시간을 떠올리면 또 비질비질 웃음이 새어나온다. 


히죽거리고 싶어 안달이 난 입꼬리를 내리려고 애쓰는 사리아. 


그런 그녀를, 켈시가 망측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도대체 뭔데 그러나.”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승부에서 승리했을 뿐.” 


“승리 따위, 지금의 네게는 드문 일도 아닌 텐데.” 


“글쎄, 그것도 상대 나름이겠지. 자세한 내용은 알려주지 않겠다.” 


“...내 말버릇을 따라하는 건 그만두도록. 아무튼, 좋은 일이 있었다니 축하한다. 이제 일하러 가라.” 


“그러지.” 



켈시가 등을 돌리자마자 귀신같이 실실 웃기 시작한 그녀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의료부 곳곳에서 작은 속삭임이 새어나왔다. 



“사리아 씨, 혹시…남자친구 생기셨나?” 


“에이, 설마. 그 사리아 씨인데. 웬만한 남자는 복상사로 안 끝날걸.” 


“아니면 박사라도 강간한 거 아냐? 다른 오퍼레이터들처럼.” 


“...그것도 상상하기 힘든데. 사리아 씨만큼 규범에 철저하신 분이 상사를 강간할 리가 없잖아.” 



너희들의 모자란 상상력에 유감을 표하지, 의료부 제군. 


왜 내게는 남자가 안 생길 거라고 생각한 거냐? 


또, 왜 나는 상사를 강간할 리가 없다고 결론을 내는 거지? 


너희가 원하는 답을 주마. 


어제, 나는 박사를 따먹었다. 


그리고 남자친구가 생겼지. 

 

 

“거기 너희, 다 들린다.” 



꼬리를 흔들며 뛰어가 그렇게 마음껏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사리아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용솟음치는 비틱의 기운을 억눌렀다. 


그저 평소의 엄격한 상사로서, 한 마디를 툭 던질 뿐.



“앗, 사리아 씨...죄송해요.” 

“그렇게 밝게 웃으시는 걸 본 게 처음이라 신기해서 그만….” 


“됐다. 이 일은 불문에 부치지.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니지 말도록.” 


“아, 알겠습니다!” 



좋아, 이 정도면 최대한 평소 같았겠지? 


멸균실에 들어가 몸을 소독하고, 방호복으로 갈아입고, 연구실에 들어가는 와중에도 사리아는 철석같이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돌아가면 박사와 함께 운동해야지. 처음부터 무게를 들라고 시키는 건 너무 가혹하니, 가벼운 유산소부터 시작해야겠다. 천국의 계단 정도면 딱 알맞겠군. 박사의 식사 또한 내가 직접 챙기는 게 낫겠어. 식습관이 영 좋지 않은 남자이니. 그 이후 그의 밀린 업무를 함께 보고, 그 다음에는…헤헤, 으헤헤.’



자신의 입가가 방호복 너머에서도 확연히 들어날 만큼 풀려 있었으며. 


차가운 이성과 강철보다 단단한 의지로 무장해 있던 오렌지빛 눈동자가, 누가 보면 하트가 떠오른 걸로 착각할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별 수 없었다.


평소의 박식하고 냉정하며 강인한 모습에 잊기 쉽지만, 그녀 또한 한 명의 여성이며. 


연애 경험이 극도로 적기에, 더더욱 이런 종류의 자극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것을. 


그렇게 그녀는 앞으로 펼쳐질 박사와의 일과를 기대하며, 들뜬 마음으로 평소의 일과를 시작했다. 


아니, 시작하려 했다. 



“사리아! 썩 기어나와라!” 



사리아가 시험관에 손을 가져간 순간. 


문이 박살나는 듯한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오퍼레이터들이 의료부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용문의 호시구마, 박사의 호위 그라벨, 고대 살카즈 머드락, 암살자 칸타빌레, 전 아머레스 유니온 플래티넘을 비롯한 로도스의 여성진들. 


전부, 적어도 한 번씩 박사를 강간한 전적이 있는 이들이었다.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사리아는 방호복을 벗으며 실험실을 빠져나왔다. 



“...그 대자보를 읽은 모양이군.” 


“이게 무슨 폭거지? 우리는 암묵적인 합의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강간범 연합 대표라도 되는 걸까, 니어가 군중을 헤치며 앞으로 나섰다. 


찬란한 광휘를 깃들인 눈빛이 이글거리는 분노를 담아 사리아를 올려다본다. 


사리아는 피식 웃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건 사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마가렛 니어. 


박사를 처음으로 강간했고, 누구보다 많이 범한 주제에.


다른 색녀들 사이에 섞여 대장놀이나 하고 있군.  


기가 차다 못해 웃음이 나올 정도야. 



“합의? 너희들이 내게 그런 걸 요구했던 적이 있었나? 아니, 박사에게는? 그런 짓을 하기 전에 박사에게 최소한의 동의라도 구했나?” 


“...관련 없는 문제를 끌어들이지 마라. 이건 네 횡포에 대한 이야기다.” 


“관련이 없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화가 나다 못해 우스울 지경이로군.” 



사리아는 아직 몸에 반쯤 걸쳐진 방호복을 그대로 찢어버렸다. 


어차피 그녀도 눈 앞의 도둑고양이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던 바.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너희들 전부, 링으로 따라와라. 정신이 번쩍 들 때까지 두들겨주마.” 


“바라던 바다. 오늘 너를….” 



니어와 사리아가 서로를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던 그때, 의료부 안쪽에서 켈시가 황급히 뛰어나왔다. 


그녀의 시선이 여성 오퍼레이터들, 사리아,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진 방호복이었던 것을 차례로 흝었다. 



“사리아, 이게 도대체 무슨.” 



그런 켈시를 돌아보며, 사리아는 미리 준비해 뒀던 유급휴가 신청서를 툭 던졌다. 



“반차를 쓰지. 잠시 다녀올 데가 있어서 말이다. 거절은 거절하겠다. 아, 방호복 비용은 나중에 따로 청구해라. 두 배로 지불하겠다.” 


“...신청 사유는?” 


“교통 정리다. 요즘 밤에 귀찮게 구는 암고양이들이 너무 많아서 말이야.” 



우드득, 눈 앞의 여성진을 노려보는 그녀의 손가락 마디에서 흉악한 소리가 났다. 



“자신들이 감히 누구 집 부뚜막을 오르락내리락했는지, 그 몸에 좀 새겨 주고 와야겠다.” 



꿀꺽, 그 흉폭한 기세에 여성 오퍼레이터들 중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 날. 


로도스 병동은 개원 이래 처음으로, 광석병 환자가 아닌 이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보는 대로다, 켈시.” 


“전쟁이라도 난 건가?” 



정말 보기 드물게 얼이 빠진 켈시의 물음에, 안 그래도 하얀 피부가 밀가루마냥 허옇게 뜬 와파린이 이마를 짚었다. 


의료 차트를 든 흡혈귀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오퍼레이터 그라벨, 뇌진탕 및 하악골 골절. 오퍼레이터 호시구마, 장시간의 산소 차단으로 인한 의식불명 및 오른팔 탈골. 오퍼레이터 카넬리안, 전신 타박상 및 안와골절.” 


“...카넬리안? 그게 누구였더라. 아무튼 더 해봐라.” 

“오퍼레이터 머드락, 다발성 장기 손상 및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친구’가 산산조각이 났다느니 어쩌니 하더군. 오퍼레이터 플래티넘…이하동문이다. 뭐라고 말을 걸어도 나는 껌젖이 아니라 슬렌더라고만 대답하던데. 이하 심각한 외상 및 정신적 피해를 호소하는 인원이 도합 15명이다.” 



대단하군, 대단해. 


일주일 내내 야근해도 일이 끝나질 않겠어. 


실성한 듯 낄낄 웃는 와파린을 보며, 켈시는 깊디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단체로 무기까지 챙겨 들고 사리아를 찾아온 여성 오퍼레이터들의 대다수가 반죽음을 당해 이곳에 누워 있다. 


그렇다면 이 사태를 초래한 원인은 달리 생각할 필요도 없겠지. 



켈시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와파린, 사리아는 어디 있나.”   



플래티넘의 활을 그녀의 면전에서 반으로 접어 버리고. 


그라벨의 보호막을 단 세 방으로 박살내고 넉다운시켰으며. 


머드락의 골렘을 칼슘 두른 주먹으로 가루가 될 때까지 짓이긴 뒤, 날아든 그녀의 망치를 잡아 부숴버린 끝에, 로도스를 제약회사에서 종합병동으로 업종변경시킨 원흉.


사리아. 


그녀는 지금 로도스 갑판에 나와 있었다. 



“바람이 차군.” 



거센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흔들고, 손에 들린 담배 연기를 허공에 흩었다. 


오늘따라 괜히 바람의 손길이 성가셔 머리카락을 질끈 묶어버린 그녀는, 담배를 입에 물고 뒤를 돌아보았다. 



“계속 거기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을 건가?” 


“......” 


“대화가 하고 싶다더니, 이제 와서 묵비권을 행사하는 거냐. 이거, 내가 다 민망해지는군.” 



그곳에는, 사리아에 결코 뒤지지 않는 장신의 여성이 서 있었다. 


풍성한 꼬리털.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귀와 머리카락. 


그리고 분함과 답답함으로 가득한 눈동자. 


빛의 기사, 마가렛 니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리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뭘 말이지?”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거지. 박사와 우리의 관계는 진작에 알고 있었던 거 아니었나?” 



하, 사리아가 비웃듯 짧은 숨을 토해냈다.  

 

그 오랜 침묵 끝에 어렵게 꺼낸 첫 마디가 겨우 그거라니. 


역시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이 여자와는 링 위에서 결판을 냈어야 했는데. 


사리아에게 당한 다른 사람들이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것처럼 깔딱대고 있지만 않았어도, 그녀가 싸움을 멈출 일은 없었을 텐데.


그렇게 열 명이 넘는 오퍼레이터들은 전부 의료부로 옮겨놓고 나니, 싸울 생각이 싹 가셔 버렸다. 


타이밍 좋게 니어가 대화를 요구했고.  


아쉬움에 연초 필터를 잘근잘근 씹어대며, 그녀는 니어를 돌아보았다. 



“알고야 있었지. 네가 로도스 최초로 박사를 강간한 그 날부터. 그래서. 내가 언제까지고 참고만 있어야 했다, 그런 말이냐?”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박사를 연모하는 이들이 그를 덮칠 때는 아무 말 않고 있다가, 이제서야 나서는 이유가 궁금했을 뿐.” 



니어의 말에, 사리아가 씁쓸한 표정으로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염세적이고 초탈한 그녀의 표정이 어딘가 박사와 닮아 있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니어는 가슴이 조금씩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를 존중해 주고 싶었다. 그가 아무리 많은 여자들과 문란한 관계를 맺는다고 해도, 그것이 그의 선택이라면. 나는 인내하고 기다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나를 바라봐 줄 때까지.” 


“...그런 거였다면.” 


“뭐, 그런데 내가 생각을 잘못해도 한참 잘못하고 있었더군.” 


“...?” 

“나는 말이다, 니어. 내 예상보다 아득히 나약한 인간이었다. 박사를 위해서 참아야 한다고 몇 번을 되뇌어도, 그가 다른 여자의 품에 안겨 있는 걸 볼 때마다 속에서 천불이 나더란 말이다.” 


“...그 심정만은 이해하지만.” 


“그래서 결국 어제 그에게 내 감정을 고백했고, 대답을 들었다. 내가 오늘에서야 너희들에게 손을 댄 건, 그의 마음을 받은 자로서 행해야 할 의무 때문이었고. 궁금증은 해소되었나?”  



사리아가 피식 웃었다. 


니어의 표정이 꽤나 볼 만 했기 때문. 


긍지와 자부심으로 가득하던 금빛 눈동자는 갈피를 잃은 듯 사정없이 흔들리고. 


바싹 마른 입술이 쉼없이 옴짝거린다.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흘러나오려 발버둥치는 격렬한 감정을, 차마 말로 조형할 수 없어 답답해하는 것처럼. 


검은 장갑 아래에서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의 손을 보며, 사리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답이 되었다면, 이제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라. 나는 여기서 죽치고 있을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원래라면.”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니어의 말문이 천천히 열렸다. 



“너와 박사를 공유해도 좋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려 했다.” 


“글쎄. 그 리베리 여자아이…칸타빌레라고 했던가? 그 아이라면 모를까, 너는 안 된다. 마가렛 니어.” 



용기 내 제안한 자신의 말을, 다 탄 꽁초와 함께 갑판 너머로 던지는 사리아.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니어는 이를 앙다물었다. 


이제는 로도스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풋내기와 자신을 비교하는 건가. 



“이유가 뭐지?” 


“진짜 몰라서 묻나?” 


“...부탁한다. 비꼬지 말아다오. 나는 그저 알고 싶을 뿐이다. 너와 칸타빌레, 그리고 나의 차이가 뭔지. 왜 나는 박사에게 다가가면 안 되는지.” 


“...흠.” 


“적어도 우리는 한때 친우였잖나. 그 정을 생각해서라도 알려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뒤이은 니어의 한 마디에, 사리아가 눈을 치떴다. 



“너는 그래서 안 되는 거다.” 


“...뭐?” 


“내가 한때 네 친우였다고? 그럼 박사는? 박사야말로 네 가장 친한 친구 아니었나?” 


“......” 


“그를 강간함으로서 우정을 저버린 건 너다. 아무리 변명해도,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아. 백 번 양보해서, 그게 한 순간의 일탈이었다면. 그 이후 박사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죗값을 받았다면. 나도, 박사도 네게 이렇게까지 무심해지는 일은 없었을 거다.” 



격정에 치민 사리아의 목소리에, 니어가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사, 리아.” 


“나는 알아. 박사를 범했던 다른 오퍼레이터들은 최소한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라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박사를 위해 더 노력하고, 그에게 민폐 끼치지 않기 위해 불철주야 몸을 불살랐다. 그래서 두들겨패는 정도로 끝낸 거였어.” 

“......” 


“그런데 너는? 너는 어땠지? 상황을 수습하려는 의지는 있었나? 누구보다도 자주 찾아와 생체 딜도마냥 박사를 겁탈하기 바빴으면서. 박사의 인격을 짓밟고, 그의 감정을 쓰레기더미 속에 처박았으면서. 그에게 제대로 된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았었지, 아마?” 


“...나, 는.”  



사리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니어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반박하고 싶었다. 


아니라고. 


어색해서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을 뿐, 박사를 볼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은 적이 없다고. 


이미 꼬일 대로 꼬여버린 이 관계를 어떻게 풀어 볼까 고민하며 지새운 밤이 수백 시간을 넘어간다고. 


하지만 그런 항변은 말이 되지 못했고, 사리아가 그녀의 마음까지 알아 줄 이유는 없었다. 



“네가 누군가에게 빛의 기사일지는 모르지. 실제로 다른 이들이 보기에, 너는 눈부신 사람일 수도 있고. 하지만 조금만 가까이 가 봐도 알 수 있다. 네 빛은 사막의 태양처럼 독선적이고 이기적이다.” 


“...그만, 그만해.” 


“닿는 것을 전부 태우고, 쥐어짜내 말라비틀어지게 만들지. 상대방의 심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네 광휘만을 강요한다. 자신을 상처 입히면서까지 타인을 끌어안으려는 박사와의 상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최악이지.” 



부드득, 사리아가 이를 갈았다. 


금방이라도 니어를 갑판 너머로 내던져버리고 싶다는 듯, 그녀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냉혹하고 손속에 자비가 없는 라인 랩의 주임 사리아였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했겠지.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달랐다.


아니, 달라졌다. 


깊게 심호흡을 한 사리아는, 이내 최후통첩을 입에 담았다. 



“마가렛 니어, 네가 카시미어에서 어떤 일을 하든 그건 네 자유다. 하지만 박사에게 다가가는 것만큼은 더 이상 허락할 수 없군.”


“...아.” 


“다른 오퍼레이터들과는 내가 직접 이야기하고, 박사에게 데려가 제대로 사과하게 시키겠다. 그리고 향후의 일을 논의하지. 하지만 넌 예외다. 그의 곁에서 떨어져라, 괴물. 한 번만 더 박사 근처에서 얼씬거린다면, 그땐…” 



오늘 사리아가 뱉은 그 어떤 말보다 독하고 날카로운 비수를. 



“너와 나, 둘 중 하나는 죽는다. 주지하도록.” 



그대로 니어의 가슴에 단단히 꽂아 넣었다. 


니어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해지고, 눈동자에서는 침착함이 사라졌다. 



“사, 사리아.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라.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럼 이만.” 



힘없이 내뻗은 그녀의 손을 무시하고, 사리아는 해치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강풍이 휘몰아치는 갑판 위에 홀로 남겨진 니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꾹 깨무는 그녀의 눈가에 작은 이슬이 고였다. 


엉망진창이다.



“사리아, 박사…나는….” 



도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분명히 처음부터 이런 관계는 아니었을 텐데. 


그래, 박사.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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