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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론인가.” 


“네. S.W.E.E.P.의 그 매복자 오퍼레이터분이요.” 


“그러니까 박사는 처음부터 아스카론에게 틈을 만들어 주기 위해 네게 접근했던 거군?” 



사리아의 의문에, 로렌티나는 피식 웃었다. 

 


“글쎄요, 그건 박사님만 알겠죠. 처음부터 그런 판짜기를 하신 건지, 아니면 그냥 때맞춰 아스카론 씨가 거기 도착한 건지.” 


“...아무튼, 그래서 그 이후로 어떻게 됐지?” 


“...그렇게 기절하고, 깨어난 이후…저는 박사님께서 찾아주신 그 거울 조각을 이리저리 짜맞추는 데 집중했어요. 깊은 바다, 파도, 로렌티나. 그 키워드들을 되새기며 과거를 반추할수록 점점 광증이 잠잠해지는 걸 느꼈거든요.” 



사리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사리아가 봐 왔던 로렌티나, 아니 스펙터는 얌전하고 순종적인 사람이었으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은 둘째치고서라도. 



“그리고 얼마 뒤, 범고래와 글래디아 대장을 비롯한 제 동료들이 로도스에 도착했고…저는 그들을 따라 이베리아로 향했죠.” 


“...스툴티페라 나비스.” 


“네. 그 배에서, 저는 마침내 제가 누구였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런 이해할 수 없는 광기조차, 곧 가라앉았다. 


이베리아 황금 함대의 잔재, 스툴티페라 나비스 호. 


에기르와 교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그 배를 찾기 위해 원정을 나선 어비셜 헌터즈 멤버들은, 하나를 잃고 하나를 얻었다. 


그들의 고향, 에기르를 잃었으며. 


그들의 오랜 동료, 로렌티나를 되찾았다. 



“원정에서 돌아와, 박사님을 마주했을 때…제 눈빛을 본 박사님의 첫 마디가 뭐였게요?” 


“...글쎄.” 


“만나서 반가워, 로렌티나. 아직도 파도 소리가 들리니?” 


“...하, 박사답군.” 


“그래서 저는 대답했죠. 오랜만이에요, 박사님. 바다는 정말 고요해요.” 



여기까지가 제 이야기예요, 라며 방긋 미소짓는 로렌티나. 


그런 그녀를 보며, 사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먼저 긴 이야기 들려줘서 고맙다. 궁금한 게 몇 개 있는데, 괜찮겠나?” 


“얼마든지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솔직히 말해, 그녀는 방금 로렌티나가 털어놓은 이야기의 반 정도밖에 이해하지 못했다. 


미쳐 본 적이 없기 때문일까. 


로렌티나가 이야기하는 광기에 대한 단상도, 그녀의 이야기 속 박사의 전혀 낯선 모습도. 


사리아의 냉철한 이성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 뿐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사리아가 끙끙대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는 왜 박사에게 반한 거지? 그가 너를 이해해 줬기 때문인가?” 


“아하, 좀 달라요. 타인이 이해해 줬다고 해서 꼭 그 사람에게 반하는 건 아니잖아요. 박사님 얼굴에 그만큼 개연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씨발, 말이 심하군.” 



우리 독타 얼굴이 어때서. 


잘생기기만 했는데.


…아닌가? 


느닷없는 내적 갈등에 사리아가 고민하는 사이, 로렌티나가 깔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일종의 동질감이라고 해 둘게요. 함께 저 심해의 밑바닥까지 떨어져 본 사람들 간의 동질감. 애초에 제가 지금 박사님께 느끼고 있는 감정이, 육지에서 통용되는 ‘반했다’의 의미에 부합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요.” 


“그럼 로렌티나 넌 박사를 어떻게 생각하지?” 


“음, 되게 복합적인데요. 차 한 잔만 더 주시겠어요? 고마워요.” 



차를 한 모금 들이킨 뒤. 


로렌티나의 눈빛이 조금 진중해졌다. 



“음…제가 박사님을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우선 감사하죠. 한없이. 그 동기가 뭐였든, 박사님은 미쳐 있던 저를 헌신적으로 돌봐 주셨으니까요.” 


“...음.” 


“그래서 이번엔 제가 박사님께 헌신하고 싶어요. 적어도 박사님이 제게 주신 만큼, 저도 돌려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첫 번째고요.” 


“첫 번째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복합적이라고. 사랑의 형태는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에요, 사리아 씨.” 



그 말대로였다. 


사리아와 박사의 관계가 단단한 신뢰 위에 기반한다면. 


니어의 마음은 친우에 대한 우정과 일그러진 집착이 뒤섞인 결과물이었고. 


칸타빌레의 경우에는 의존과 경애가 복잡하게 얽힌 것이었다. 


그 사실을 일깨워 주는 듯한 로렌티나의 말에, 사리아가 침음성을 삼키는 사이. 



“두 번째는 믿음이죠. 아, 이 사람은 내가 어디까지 떨어지든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주겠구나. 자신의 뼈가 부서지고, 정신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더라도. 나와 함께 저 깊숙한 바다로 가라앉는 한이 있어도, 나를 향해 뻗은 손을 거두지 않겠구나 하는.” 


“...흐음.” 


“마지막으로, 친숙함이에요. 그런 박사님이니까, 제 모든 걸 보여줘도 괜찮겠다는. 에기르에 대한 것이든, 로렌티나에 대한 것이든, 아니면 ‘스펙터’에 대한 것이든요. 박사님이 저를 더 알아 줬으면 좋겠고, 저도 박사님을 더 알고 싶은 그런 마음이에요.”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는 로렌티나. 


그 모습에 문득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와, 이마를 짚는 사리아였다. 

    

육지에서도 그런 감정을 반했다고 한다, 로렌티나. 


아니, 에기르에서 뭐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기분은 틀림없는 사랑이군.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하고 싶지?” 

     

“저요? 이대로도 충분한데요?” 


“...?” 


“가끔 그런 망상도 하긴 해요. 박사님께 제 마음을 고백하고, 박사님과 이어지는 망상이요.” 


“......”


“하지만 박사님께는 사리아 씨가 있잖아요. 에기르에서는 법적으로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를 허용하기는 하지만, 굳이 강요하고 싶지는 않네요. 그냥 박사님이랑 친구처럼 지내기만 해도 즐거운걸요.”  

 


이건 또 의외였다.  


자신들의 감정이 보답받길 바라는 건, 감성이 있는 생물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는 본능에 가깝다. 


사리아도 그랬고, 니어도 그랬기에. 


당연히 눈 앞에 있는 에기르인 소녀도 그럴 거라고, 사리아는 생각하고 있었다. 



“저는 이미 박사님께 충분히 수고를 끼쳐 드렸으니까요. 제 욕심 때문에 더 머리 아프게 해 드리고 싶지 않아요. 그냥 박사님을 위해 싸울 수 있고, 힘들어하실 때 곁에서 노래를 불러 드릴 수 있다면. 그리고 가끔 술 한잔 걸치면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해요.” 



그런데 실상은 전혀 달랐다. 


로도스에 체재하는 어느 에기르인이 항상 강조하는 ‘에기르의 고상함’때문일까. 


아니, 분명 그런 건 아니겠지. 



“...정말, 그거면 된다고?” 


“그럼 뭐, 박사님 걸고 멱살잡이라도 하실까요?” 



질 자신은 없는데요, 라고 장난스럽게 웃는 로렌티나를 보며, 사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박사와 특별한 경험을 공유했고, 그 누구보다 박사를 생각하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그를 존중해 주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그녀의 모습은….


어쩐지 사리아 자신의 과거와 닮아 있었다. 


그 탓일까. 


원래라면 박사에게 접근하지 말라 엄중히 경고하고 물러섰어야 했는데. 



“...로렌티나. 너도 알겠지만, 박사의 인간관계는 굉장히 극단적이다.” 



그 대신 항상 생각하고 있던 고민을 로렌티나에게 털어놓고 말았다. 



“네.” 


“한쪽에는 그를 찢어죽이지 못해 안달난 원수들이 도사리고 있고, 다른 한 쪽에는 그를 소유하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지. 중간은 없다.” 



리유니온, 카즈델의 왕정들을 비롯한 로도스의 적들과. 


그를 싫어하는 로도스 내부의 사람들. 


그리고 여전히 박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전 강간범 연합까지. 



“나는 항상 그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혼자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금처럼 본의 아니게 박사의 곁을 떠나야 하는 경우도 있고 말이지.”  


“알아요, 사리아 씨.” 


“그래서…네게 도움을 청하고 싶다. 내가 없는 동안, 그의 비서가 되어 박사의 곁을 지켜다오.” 



박사를 완전히 망가뜨릴지도 모르는 그런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라면, 내키지 않더라도…. 


자신의 욕심보다 박사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 


즉, 사리아 자신과 닮은 이와 공동전선을 펴야 한다. 


적어도 박사가 사명을 완수하고, 사리아와 정식으로 결혼해 로도스를 떠날 때까지는. 


사리아의 말에 함축된 그 의미를, 로렌티나는 곧바로 이해했다. 


한껏 진중해진 그녀의 눈에서 핏빛 안광이 뿜어졌다.



“...사리아 씨, 다음 말을 신중하게 고르시는 게 좋을 거예요. 저도 두 분을 위해서 참고 있는 거지, 욕심이 없는 게 아니거든요.” 


“알고 있다. ” 


“그런데요? 사리아 씨, 당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이해는 하시나요? 이건 필라인한테 린수 가게 맡기기라고요.” 


“가게를 비워 뒀다가 강도를 당해 린수와 가게 금고까지 싹 다 털리느니, 차라리 린수 몇 마리를 내어주더라도 필라인을 세워 두는 게 낫다.” 


“제가 그 강도라면요? 사리아 씨가 없는 일주일 사이, 제가 당신이 있을 자리까지 전부 빼앗아 버린다면 어떡하실 건데요?” 



사리아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고 되묻는 로렌티나. 


오히려 그런 모습에, 사리아는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지금 로렌티나가 저렇게 격정적으로 반응하는 이유는, 결국 사리아를 걱정해서일 테니까. 



“그게 박사의 선택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 


“안 돼요.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전 그 부탁 못 받겠어요. 박사님은 사리아 씨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해하신단 말이에요.” 



그 말에, 사리아는 용맹하게 웃었다. 


한사코 그녀를 만류하던 로렌티나가, 그 미소를 본 순간 멈칫하고. 



“어디까지나 결정권자는 박사다. 나는 그저 곁에서 제안을 할 뿐이야. 어느 날 그가 갑자기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말한다면, 나는 울면서 물러나는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단, 이것만은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말해두마. 어디 빼앗을 수 있다면 빼앗아 보도록. 그가 나를 내치기 전까지, 그는 내 것이다.” 


“그럼, 그럼요. 만약에 박사님이 사리아 씨와 저, 둘 모두 포기할 수 없다고 하시면….” 


“글쎄. 의외로 강단이 있는 남자이니, 그럴 걱정은 적지만….”  


“...?” 

“뭐, 그럼 같이 에기르로 이민이나 가야겠지.” 



뒤이은 사리아의 진담 섞인 농담에, 송곳니를 드러내며 살풋 웃는 로렌티나.



“...후후, 아하하. 그러네요. 이제야 좀 사리아 씨 다워요.”      


“그래서, 대답은?” 


“좋아요. 돌아오시기 전까지, 제가 박사님 곁을 지킬게요. 그 다음 일은, 복귀하신 후에 다시 의논하도록 하죠.” 


“좋다. 잘 부탁하지.” 



사리아가 내민 손을, 굳게 잡는 로렌티나. 

  

이 밀약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두 사람 모두 전혀 알지 못했다. 


어차피 당장의 안녕을 보장받기 위해 급하게 맺은 협약이니만큼, 그런 걸 고려할 틈조차 없었다. 



“그럼 박사님 따먹어도 돼요?” 


“...하, 그의 동의를 구했을 때에 한해서 허락하지. 단, 내가 이런 말을 했다고 멋대로 그를 강간하거나 한다면, 말린 건어물이 될 때까지 쥐어패 주마.” 


“후후, 그런 품위없는 짓은 안 해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두 사람 사이에 박사에 대한 연정이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하는 이상….


당분간 이 신뢰관계가 깨질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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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사리아가 떠나고 난 뒤. 


한껏 차려입은 로렌티나는 들뜬 마음으로 박사의 사무실을 향했다. 


박사님, 박사님 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뭘 어떻게 도와드리면 박사님이 가장 기뻐하실까. 


박사님이랑 무슨 이야기를 나누면 가장 즐거워하실까. 


그리고…어떻게 하면 박사님과 야스각을 볼 수 있을까. 


그렇게 온갖 기대를 안고 춤추듯 박사의 사무실에 도달한 로렌티나. 


 

“명붕이, 친구 없다…왜? 사리아? 페데리코? 엔시오데스? 스카디? 니엔? 제이? 나 왜 친구 없어짐?” 



문 앞에 서자, 방에서 새어나오는 음울한 중얼거림이 로렌티나의 귓가를 두드렸다. 



“시발, 남는 거라고는 당나귀랑 좆같은 녹단또년밖에 없네. 잠깐 눈 붙이면 당나귀가 쉬지 말라고 지랄할 거고, 녹단또년은 또 의료부 일 덩크치고 도망가겠지. 안 그래도 요새 털박이 새끼들이 끈적하게 쳐다봐서 세상 기분 더러운데. 진짜 엿같은 인생-”  


“......” 


“라테라노 병신들도 문제야. 뇌에 우동사리만 그득그득 들어차가지고는, 디저트 기계 하나를 처리 못 해서 제약회사한테 sos치는 게 말이 돼? 보안파견은 지랄, 보지파견이겠지. 이게 다 안도아인 그 새끼 때문이야. 그 좆같은 종교다원주의자 게이새끼가 교황한테 총기난사 갈겨서 안 그래도 딸피인 교황 아예 맛탱이가 가버렸잖아. 저번에 만났을 때 피아메타 말대로 불알을 뜯어버렸어야 하는데. 아 씨발 사리아보고싶다사리아정수리냄새맡고쭈쭈만지면서사리아와이번아가방쥬지로큥큥두드리고싶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절망과 천박함이 끈적하게 묻어난다. 


아마 전문의가 지금 박사의 말을 들었다면 심각한 사리아 중독증이라고 진단을 내렸으려나. 


듣기만 해도 마음이 아파 오는 그 넋두리에, 로렌티나는 서둘러 모자를 고쳐 쓰고는 노크를 했다.  



“박사님, 저랍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들어가도 될까요? ” 


“...어, 상어야? 씨발, 왜 하필 지금…일단 들어와!” 



로렌티나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귀신같이 밝아진 목소리에 살풋 미소지으며, 로렌티나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방 안은 빛 한 점 없이 어두컴컴했다. 


창문에는 굳게 커튼이 쳐져 있었고,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서류의 윤곽이 어렴풋이나마 보였다. 


어두컴컴한 기운이 감도는 방 한구석에서, 박사는 사리아의 조각상을 끌어안고 웅크려 있었다.  



“...박사님, 왜 그러고 계세요?” 


“어, 아냐. 그냥 괜히 센치해져서. 차라도 마실래?” 


“감사합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황급히 불을 켜고 자리에 앉는 박사. 


부끄러운 걸까, 바이저 아래로 보이는 그의 볼이 살짝 빨개져 있었다. 


좀처럼 보기 드문 그의 허술한 모습에 웃음지으며, 로렌티나는 그가 권하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내가 뭐 도와줄 일이라도 있어?” 


“아뇨, 오늘은 제가 박사님을 도와드리러 왔어요.” 


“잉?”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다. 


사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걸까. 


뭐, 내가 직접 이야기하라는 거겠지. 


딱히 상관은 없다. 



“사리아 씨가 저한테 부탁하셨거든요. 당신이 안 계신 동안 박사님의 비서를 좀 맡아 달라고요.” 


“아하, 그래? 상어 너라면 믿을 수 있지.” 


“감사합니다. 그럼 뭐부터 하면 될까요, 박사님?” 


“응? 일은 더 없는데. 사리아가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도와주고 가서.” 



애초에 일이 밀려 있으면 그렇게 속 편하게 쭈그려 있지도 못해, 라며 고개를 젓는 박사. 


뜻밖이었다. 


오늘만은 정말 사리아 씨를 대신해 성심성의껏 도와드리려고 했는데. 


약간 의기소침해진 로렌티나에게, 박사가 키득키득 웃었다. 



“애초에 너랑 내가 모이면 할 일은 정해져 있잖아. 업무는 무슨.” 


“...그 말씀은, 박사님, 설마….” 


“그래. 그 설마야. 오랜만에 같이 놀자, 로렌티나. 나 심심해.” 



그 말에, 로렌티나의 동공이 사냥감을 포착한 필라인처럼 가늘어지고.



“...호오, 제 관심을 끄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잘 아실 테고. 그만큼 흥미로운 계획이 있으시다는 거겠죠?” 


“계획? 있지.” 



그에 대답하듯, 박사가 흉악하게 미소지었다. 



“그럼 어디 한 번 들어볼까요?” 


“간단해. 먼저 쏜트와 엘트를 찾아.” 


“...벌써부터 마음에 드네요. 그리고요?” 


“식당에서 2단 서빙 카트 두 개를 긴빠이친 다음, 간이 로켓 추진기를 달아서 개조하는 거지.” 


“헤에.” 


“그리고 2대 2로 경주를 하는 거야. 로도스 지하 복도에서. 지는 팀은 하루 동안 스타킹 쓰고 살기. 어때?”  


“정말 병신같은 계획이네요.” 


“?” 


“당장 하죠.” 


“이궈궈던~”  



그날.


쏜즈와 엘리시움이 탄 카트는 통제불능이 된 끝에 클로저의 구매센터에 처박혔으며. 


박사와 로렌티나가 타고 있던 카트는 공중제비를 열두 바퀴쯤 돌긴 했지만 간신히 결승선을 넘었다.  


켈시는 깊은 한숨과 함께 얼굴에 스타킹을 뒤집어쓴 쏜트와 엘트에게 구매센터 수리 작업을 맡겼고, 구매부에 지시해 값싸고 품질 좋은 임시 사내 상점을 열었다. 


더 이상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상품을 팔지 못하게 되어 넋이 나간 클로저를 제외하면,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었다. 


그와 동시에, 로도스 전원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로렌티나의 은은한 광기가 박사의 괴팍함과 만나면 화학반응이 일어난다는 것을. 


거기에 쏜트와 엘트가 더해진다면, 그날이 로도스가 망하는 날이라는 것을. 



“아, 재밌었다.” 


“스타킹을 뒤집어쓴 성게의 표정이란. 덕분에 정말 좋은 구경 했어요. 감사합니다, 박사님.” 


“나야말로 덕분에 살았다, 상어야. 너 운전 잘하더라.” 


“기본이죠. 그나저나 박사님, 괜찮으신가요? 구매센터 수리비, 전부 박사님 월급에서 깐다던데요.” 


“응? 아, 뭐. 로도스가 업무 강도는 높아도 페이는 세니까. 딱히 돈 쓸 데도 없고.” 


“저도 같이 낼게요.” 


“아냐. 타향살이 하는 애가 뭔 돈이 있냐. 어차피 내가 하자고 꼬신 거니까, 그냥 내가 낼게.” 



켈시에게 호되게 야단을 듣느라 저녁 시간을 놓쳤는데도 후련하기 짝이 없는 박사의 표정. 


그런 그의 얼굴에, 로렌티나는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사리아는 분명 자신을 믿고 박사님을 맡긴 건데. 


그걸 알아서 열심히 도와주려고 박사님을 찾아온 건데. 


도와주기는 커녕 그의 주머니만 거덜을 낸 꼴이 되었다. 


그런 미안함을 담아, 로렌티나는 살며시 박사에게 말을 붙였다. 



“그럼, 박사님. 제가 저녁이라도 해 드릴게요.” 


“오? 너 요리도 잘해?” 


“엣헴. 이래봬도 에기르 있을 땐 요리가 취미였답니다.” 


“이건 못 참지. 드가자~” 



그리고 로렌티나와 박사는 누가 더 화려하게 불 쇼를 할 수 있는지 대결하며 볶음밥을 만들다가 로도스 주방에 불을 냈다. 


스프링클러가 터져 엉망이 된 주방을 어찌어찌 치운 뒤.  



“씨발, 상어야. 요리 잘한다매. 개맛없잖아.” 


“박사님 볶음밥은 그냥 탄밥인데요? 쳐먹다 암걸리겠어요.” 



물에 흠뻑 젖은 자라크 꼴로 서로를 디스하며 볶음밥을 꾸역꾸역 주워먹은 두 사람은, 이내 또 로도스 안을 싸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앗, 저기 아기 새가!” 


“진짜네? 아이린! 틱택토 하자!” 


“바, 박사님? 에기르인? 왜, 왜 그렇게 쳐다보시는 건데요?” 


“괜찮아! 이 상어는 안 물어!” 


“이 박사님은 물지도 몰라요!” 


“크르르르릉…컹! 컹!” 


“끼야아아아아악! 조르디! 조르디! 도와줘!” 



눈에 띄는 오퍼레이터를 쫓아다니면서 장난치기도 하고. 



“그러니까 술 내기 하자고요, 호시구마 씨. 어차피 당신 또 밤새 술 퍼마실 거잖아요.” 


“음, 저는 상관없는데 감당 되시겠습니까?” 


“네. 호시구마 씨가 이기면 술값의 세 배를 드릴게요. 대신 제가 이기면 꿍쳐두신 술 몇 병만 주시면 되고요. 저랑 박사님이랑 먹게요.” 


“흐음, 그런 겁니까.” 

“쫄?” 


“...하, 이 새끼가.”  



누군가의 술부심을 건드려 좋은 승부를 하기도 했다. 



“푸헤헤헤, 제 간은 99퍼센트의 해사와 1퍼센트의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답니다! 알코올 분해 따위는 일도 아니죠!” 


“잘한다 로렌티나! 확 찢어버려!” 


“...딸꾹. 어우, 졸려. 내가 졌어. 가져가고 싶은 대로 가져가라, 독한 년.” 


“예이, 피스!” 



그렇게 민폐도 좀 끼치고. 


그 뒷처리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 장난을 치는 걸 반복하다 보니, 하루가 다 갔다. 



“...아, 진짜 재밌었다. 이렇게 시원하게 놀아 본 게 얼마만인지도 모르겠어.” 


“저도요, 딸꾹. 방에서 조각하는 거나 노래 부르는 것도 좋지만, 히끅, 이렇게 정신없이 노는 것도 정말 좋아해요.” 



두 사람은 박사 사무실 창문가에 걸터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사람이 없어진 로도스 함내는 더없이 고요했고. 


활짝 열린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 바람이, 로렌티나의 길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살며시 흔들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마치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요.” 



취해서 딸꾹질을 하던 로렌티나가 문득 꺼낸 이야기에,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 바보배 갔다 돌아오고 나서, 한동안 둘이 이렇게 많이 놀았었지. 켈시랑 글래디아가 강제로 격리시켜 놨지만.” 


“아뇨. 그때 말고요. 제가 아직 스펙터였던 시절이요.” 


“...왜?” 


“저는 사고치고, 박사님은 수습해 주시고. 저는 마음 어딘가에서 죄송하다고 생각하면서 표현도 못 하고.” 


“오늘은 나도 같이 사고쳤는데.” 

“에헤, 네. 그건 확실히 다르네요.”  



실없이 키득거리는 로렌티나. 



“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아요. 저기, 박사님. 혹시 박사님은 예전의 제가 더 마음에 드셨던 거 아닌가요? 그때의 저는 최소한 순수했던 것 같은데.” 


“뭔 끔찍한 개소리야 시발. 당연히 지금 네가 훨씬 더 좋지.” 


“...헤.” 



헤실거리는 로렌티나의 볼을 잡아 쭉 잡아당기며, 박사는 피식 웃었다. 



“뭐, 네가 쭉 ‘스펙터’로 살았더래도 내가 널 버리는 일은 없었겠지만.” 


“그건 왜인가요? 그때의 저, 솔직히 박사님한테 엄청 성가신 존재 아니었어요?” 


“그렇긴 해. 그래도 임마, 환자를 버리는 의사가 세상 천지에 어딨냐.” 



망해가던 초기 로도스에서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가드 오퍼레이터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가 맡은 첫 번째 중증 광석병 환자였는데. 


어떻게 포기하겠어. 


신념에 가득 찬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로렌티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 말이 괜히 아쉬웠다. 


그의 말투에는 거짓 한 점 없었기에, 더더욱. 



“결국 신념이었네요.” 


“...응?” 


“저 말이에요, 예전에 잠깐 그런 생각도 한 적 있답니다. 혹시 박사님이 저를 헌신적으로 보살펴 주신 게, 뭔가 다른 마음이 있어서가 아닐까, 하고요.” 



툭, 로렌티나가 손에 들린 술잔을 떨어트렸다. 


쨍, 맑은 소리와 함께 깨진 유리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그 조각에 비친 수많은 로렌티나들이 박사를 향해 밝게 미소지었다. 



“저기, 박사님. 혹시 기억하세요? 제가 로렌티나로 돌아온 뒤, 박사님께서 제게 하신 첫 마디가 뭔지요.” 


“만나서 반가워, 로렌티나. 아직도 파도 소리가 들리니? 였나.” 


“그리고 제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오랜만이에요, 박사님. 바다가 정말 고요해요. 그거였지.” 


“정확히 기억해주셨네요. 기뻐요.” 



천천히 박사의 곁으로 다가와, 무릎을 끌어안고 앉는 로렌티나. 


그녀의 은은한 미소에 달빛이 서렸다. 



“하지만 사실 그때, 제가 진짜로 드리고 싶었던 대답은 좀 달랐어요.” 


“그래? 뭐였는데?” 


“...오랜만이에요, 박사님. 아직도 파도 소리가 들려요. 하지만 방향도 좀 바뀌었고요. 예전과는 다르게 정말 따스하네요.” 



그 말에, 박사는 침음성을 삼켰다. 


스펙터와 오랜 기간 소통하며, 그녀의 대화 방식을 어느 정도 터득한 박사였기에.


지금 눈 앞의 로렌티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지금의 박사로서는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처음에는 제지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전부 들어주기로 결정했다. 


니어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최소한 그녀가 모든 걸 털어놓고 후련해지기를 바라면서.  


그런 낌새를 눈치챈 건지, 로렌티나의 표정이 약간 서글퍼졌다. 



“...저요, 정말 이대로도 괜찮아요. 그냥 박사님이랑 같이 장난치고, 웃고, 떠들고. 가끔 힘들어하시면 노래도 불러 드리고요. 오늘처럼요. 그렇게만 해도 정말 즐거운걸요. 그렇죠?” 


“당연하지.”   


“하지만 오늘 사리아 씨와 이야기하고 나서…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도, 조금은 더 욕심을 부려 봐도 되지 않을까.” 


“응. 그래도 돼, 로렌티나. 넌 그럴 자격 있어.” 


“정말 그래도 되나요? 제 마음을 받아 주시지 않더라도…당신은 여전히 제 친구로 남아 주실 건가요?” 


“뭘 당연한 말씀을.” 



마음을 품는 건 자유다. 


그 마음을 고백하는 것 또한 자유다. 


그리고 전해 받은 소중한 마음을 정중히 돌려보내는 건,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의 책임이다. 


박사는 이미 책임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런 박사이기에, 로렌티나가 반했던 것일지도. 



“박사님, 아, 박사님. 당신과 공유하고 싶은 게 정말 많은데, 말로 잘 정리가 안 돼요. 어떻게 하면 당신께 제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스펙터한테 물어보는 건 어때?” 



그의 그 말에, 로렌티나는 슬쩍 웃으며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역시 당신은, 약간이나마 그때의 스펙터를 그리워하고 계시네요. 


그건 왜일까요. 


함께 고생하고, 같은 광기의 바다에 발을 담갔던 강렬한 체험 덕분일까요. 


박사님, 박사님. 


전 모르겠어요. 


지금의 저는 로렌티나이자 스펙터이지만, 그때의 저와 같은 사람은 또 아니에요. 



“글쎄요. 스펙터라면 아마 이렇게 얘기했겠죠. 오래 전부터 당신을 데려가고 싶은 장소가 있었답니다. 아주 은밀한, 비밀의 장소로요.” 



그래서일까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조금이나마 질투가 나네요. 


싫어요, 박사님. 


이 마음만큼은, 온전히 로렌티나로서 고백할래요.  



“...하지만 로렌티나의 결론은 이래요.” 


“응. 듣고 있어.”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