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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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저 산맥이 보여? 저곳이 테라 서부에서 중부까지를 잇고 있는 산맥, 알프스야. 쉐라그의 신성한 산인 칼란이나 우르수스의 엘브루스에 비하면 별거 아니지만, 테라 전체에서도 손꼽는 대형 산맥으로 유명하지. 저 산맥을 가로지르면 라이타니아 국경도 통과하게 될 거야. 

산맥을 지나가다 보면 절벽 위를 달리는 코스가 있을 텐데, 그 너머로 희미하게 시라쿠사나 라이타니아의 작은 도시들이 보일 거야. 이 열차의 최고의 볼거리 중 하나지. 다만 지금이 밤중이 아니라는 게 좀 아쉽네. 밤에 보이는 지평선 너머의 야경이 괜찮은 볼거리거든. 나중에 연인이랑 볼 기회가 생긴다면 그땐 와인 한 병쯤은 준비해둬. 

흠... 딱히 할 일도 없으니 말 나온 김에 시라쿠사에 대한 이야기라도 해줄게. 박사는 시라쿠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 피자와 파스타, 그리고 젤라또의 고향?  유구한 역사? 마피아들의 본거지? 확실히 박사가 말한 것들 전부 시라쿠사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지. 하지만 시라쿠사의 매력은 그것 뿐만이 아니야. 

어디 보자... 잠시 내 수첩을 볼래? 예전에 시라쿠사 북부에 갔을 때 찍은 사진들이야. 바다 위에 둘러싸여 있는 상인들의 마을. 오페라와 스포츠, 그리고 패셔니스타들의 삼중주가 이뤄지고 있는 예술가의 마을. 와인과 사이프러스 나무로 유명한 농민들의 마을. 그 외에도 여러 마을들. 장소마다 분위기가 많이 다른 게 보이지?

시라쿠사는 유구한 역사를 가져온 만큼 다양한 민족들의 정신이 여러 곳에 잠들어 있어. 예술, 상업, 기술, 의학, 관광. 그들이 무엇을 지향해왔느냐에 따라 각자의 장소에 그들의 색이 물들여졌지. 각자의 개성이 살아있는 다양한 마을과 그들의 문화. 시라쿠사의 명물을 말해보라면 개인적으론 역시 이거라고 생각해.

북부만이 아냐. 그 아래로 내려가면 색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마을이 많아. 예를 들어... 그래, 여기. 시라쿠사의 중심에 있는 이 국가. 바로 산크타들의 고향인 라테라노야. 내 고향이기도 했지. 종교도시라는 특징도 있지만 제과쪽으로도 상당히 유명해. 라테라노 공민이라면 디저트 30개쯤은 기본으로 알아야 한다는 농담도 나올 수준인걸.

학생 시절에 자주 갔던 애플파이 전문점이 정말 맛있었지. 지금도 운영하고 있으려나. 생각해보니 라테라노를 떠난 지도 벌써 몇 년일까. 역시 내가 기억하고 있던 풍경은 진작에 다 바뀌었겠지?

한 번 돌아가 보면 되지 않냐고? 불행히도 그건 힘들 거 같네. 나에겐 고향 땅을 밟을 자격은 진작에 사라졌거든. 그래. 아주, 아주 먼 옛날에... 내가 총을 겨눈 그 순간부터.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자. 잠시 혼자 있고 싶네.



[그럼 박사님. 언제나 몸조심해주세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주시고요.]

“응. 그럼 그때까지 고생 좀 해줘, 아미야. 끊을게.”

화면 너머 토깽이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기념품으로 컬럼비아산 당근 케이크를 사 오라니. 역시 어른스러워 보여도 결국은 그 나이대 소녀구나. 무심코 그 아이가 케이크를 받고 웃는 걸 생각하니 자연스레 입가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볼일이 끝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휴게실 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알프스 젬머링 철도. 테라의 서부를 감싸는 알프스 산맥을 꿰뚫고 빅토리아까지 운행하는 고속 열차. 봄과 겨울이 공존하는 것 같은 자연경관이 최대의 매력이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들었다. 그 평가가 헛된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처럼, 햇살과 함께 창밖의 산맥과 초원, 구름이 뛰어노는 푸른 하늘이 날 반겨왔다. 분명 오는 내내 비슷한 장면을 몇 번이고 봐왔을 것이다. 하지만 휴게실을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볼 정도로, 알프스의 자연은 몇 번이고 봐도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열차 여행 6일째. 현재 우리는 우르수스의 설원을 통과해서 현재 라이타니아를, 정확히는 알프스를 횡단 중이다. 덜컹덜컹 움직이는 기차 위를 걷는 느낌은 뭐라 형용할 수는 없지만, 이제 와선 꽤 익숙해졌다. 생활 방면 역시 만족스러웠다. 1등칸이라는 말이 허세는 아니었는지, 예전에 스와이어씨가 초청해준 용문 최고급 호텔을 생각게 만든 극상의 품질이었다. 

내일 오후쯤이면 우리는 빅토리아에 도착할 예정이다. 거기서 곧바로 컬럼비아행 열차에 환승하면 이 짧은 열차여행도 끝이 보이겠지. 나름대로 힐링이 충분히 되는 여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승객 여러분. 1시간 후에 이 열차여행의 백미인 젬머링 협곡을 지나갑니다. 알프스의 아름다운 경관을 두 눈에 새기는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멍하니 있던 나보고 정신 차리기라도 하라는 것처럼, 천장의 스피커에서 안내 음성이 들려 왔다. 젬머링 협곡. 분명 좀 전에 모스티마가 나에게 설명해준, 절벽 너머로 여러 도시의 풍경이 한 번에 보이는 최고의 절경. 이 협곡의 이름을 따서 열차의 이름을 지었을 정도로, 해당 열차의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한다. 지금까지 봐온 풍경도 아름다웠는데, 대체 얼마나 아름다운 걸까? 

“일단 화장실부터...”

식당칸에서 산 애플파이 모양 젤리가 주머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쉽게도 애플파이를 팔지 않아서 꿩 대신 닭으로 산 간식이다. 그 파란 머리 산크타도 엑시아 녀석처럼 애플파이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 이거라도 기뻐하지 않을까? 평소처럼 은은하게 짓고 있는 미소가 싹 사라지고 우울해져 있는 모습을 보니 내버려 둘 수가 있어야지.

모스티마의 대한 정보는 밝혀진 것이 1년이 지났지만 거의 없다시피 하다. 다만 적어도 그녀와 함께해오면서 그녀의 포커페이스가 무너지는 순간들을 조합해 보면, 적어도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느 정도의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우인에서 보여줬던 그녀의 모습. 방금 전 라테라노를 언급하며 서서히 미소를 잃어가는 표정. 거기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의문스러웠던, 산크타라면 절대 가질 수가 없는 살카즈의 뿔과 검은 날개. 라테라노의 교리. 이것들을 조합하면 분명...

“준비는 잘 되었지?”
“물론이다. 다른 분대 녀석들이 기관실에 설치 완료했어.”

화장실에서 볼일을 다 보고 세수를 하고 있던 와중에, 문 너머로 남성 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으로 걸어오면서 말하는 건지 그들의 대화가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승객들이 반항하거나 하면 어떡하지?”
“걱정할 필요 없어.”

승객? 반항? 일반적이진 않은 대화에 무심코 얼굴을 문에 맞대었다. 화장실 문 바로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기라도 한 건지, 문 너머로 그들의 목소리가 크고 확실하게 들려왔다.

“어차피 젬머링 협곡은 양쪽이 가파른 낭떠러지다. 거기서 폭탄이 터지면 어떻게 될지는 어린애라도 알겠지.”

콱, 하고 누군가가 내 심장을 움켜쥐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가슴이 쥐어짜이면서 숨이 막히고 위에서 방금 먹은 점심이 역류할 거 같았다.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본능이 덮쳐오면서 자연스레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일단 젬머링 협곡에 들어가고 나서 열차를 멈출 거다. 그리고 휴게실에 승객들을 모아서...”
“말만 잘하지 말고 폭탄 관리나 잘해. 나까지 죽긴 싫으니까.”
“하여간 재수 없는 녀석이야 넌.”

저벅. 저벅. 남성들의 발걸음이 아주 천천히 사라져가는 것이 들려왔다. 이윽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철도 위를 활주하는 기차의 요동과 터질 것 같이 크게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만이 날 감싸고 있었다. 멎을 것 같던 호흡도 간신히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잘못 들었을 리가 없다. 바로 앞에서 이야기하는 걸 똑똑히 들었으니까. 설마 열차에 테러리스트가 타고 있었을 줄이야. 

“환장하겠네 진짜.”

조금 전 테러리스트로 추정되는 남자가 말한 것처럼, 젬머링 협곡은 철도가 올려진 다리를 제외하면 좌우 양쪽 다 최소 높이 50m의 가파른 낭떠러지다. 만약에 거기서 폭탄이 터져버린다면 폭탄으로부터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추락으로 인해 전원 사망은 확정이다. 하필이면 오퍼레이터도 1명밖에 안 데려온 상황에서 이런 일이 발생할 줄이야. 괜히 비싼 돈 들이지 말고 차라리 그 비용으로 다른 오퍼레이터들도 대동했으면 됐을 텐데, 라고 속으로 여기 있지도 않은 켈시 녀석을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진정하라고 스스로를 다그치면서 몇 번이고 숨을 골랐다. 불평해봤자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 저들이 말한 한정된 정보들을 취합해 보면, 기관실을 우선 습격해서 젬머링 협곡에서 열차를 멈추게 한 뒤, 폭탄으로 승객들을 협박하려는 것으로 추정된다.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죽기 싫으니까' 같은 말이 나오는 걸 봐선 자살특공 같은 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인질을 잡아 인근 국가인 시라쿠사나 라이타니아랑 협상을 하려는 거겠지. 혹은 승객 중에 정치적으로나 사회적 거물이 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저들을 막아야 된다. 인질로 삼는다고 해도 테러리스트의 성향에 따라선 승객 하나둘 정도는 본보기로 숙청당할 수 있다. 우선 로도스에 연락해서 아미야에게 비상소집을 부탁하고, 그다음에 기관실로 가서 폭탄을...

“박사. 안에 있어?”

생각의 나래를 펼치고 있던 와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설마 테러리스트가 내가 있는 걸 알고 다시 돌아온 건가 싶어 가슴이 철렁했지만, 곧바로 들리는 모스티마의 목소리에 안심하고 문의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오늘따라 심장이랑 유독 밀당을 많이 하는 게 분명 기분 탓은 아닐 거다.

문을 열자마자 모스티마의 푸른 머리카락이 형광등 아래에서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언제나 보이는 그녀의 은은한 미소가 오늘따라 천군만마를 얻은 심정과도 같이 유독 든든하게 느껴졌다.

“모스티마, 긴급사태야. 열차에 테...”
“열차에 테러리스트가 있다는 거지?”
“맞... 잠깐, 어떻게 알아차린 거야?”
“어쩌다가 우연히. 그것보다 너에겐 지금 더 중요한 게 있지 않아?”

뭔가 대답하는 걸 회피하는 것 같아 신경 쓰이지만, 모스티마 말대로다. 젬머링 협곡까지 도달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얼추 40분. 그 이내에 계획을 세우고 저 테러리스트들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어떡할래? 열차에서 지금이라도 탈출할래?”
“무슨 소리야. 테러리스트를 저지해야지.”
“우리 둘이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승객들을 버릴 수는 없잖아.”

모스티마는 그런 내 말에 아무 대답 없이 몇 초간 날 바라보았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 안에 담겨 있는 ‘무언가'의 기백이, 무심코 침을 꿀꺽 삼키게 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박사. 그 선택은 다 구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는 승객들을 위해 스스로 위험에 빠지는 길이야.”
“다 구할 수는 없을 수도 있지만 구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할 수는 있어.”
“네 목숨이 위험할 수 있는데도?”
“목숨으로 줄타기하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닌데 뭘.”
“제정신으로 말하는 거야?”
“내가 언제는 제정신이 아니었냐?”

그런 내 말에 더 반론을 할 생각은 없는 건지, 모스티마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이 벽에 기대면서 팔짱을 낀 채 날 응시했다.

“그래. 그럼 어떻게 할 건데?”
“녀석들은 젬머링 협곡에서 기관실의 엔진을 멈추고 승객들을 인질로 잡을 생각이야. 타개할 방법이야 있기는 있어.”
“그 방법이 뭔데?”
“테러리스트를 제압하는 것.”
“당연한 말을 당당하게 말하는 것도 뭐라 반응해주기 그런데.”
“끝까지 들어봐.”

벽에 기대면서 작전의 브리핑을 계속했다. 듣는 내내 그녀의 눈이 점점 크게 떠지고 어깨가 들썩이더니, 어이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웃겼던 것일까. 이윽고 조용했던 복도가 모스티마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이마를 탁 치면서 한참 웃다가 목이 마르기라도 한 건지, 그녀는 코트 주머니에 있던 생수병을 들이켰다.

“역시 넌 소문 그 이상으로 굉장히 별난 녀석이구나.”
“할 거야? 말 거야? 답이나 해줘.”

창밖의 산봉우리가 햇살을 가로막은 건지, 모스티마의 몸에 그림자가 드리웠지만, 그녀의 얼굴의 두 푸른 불꽃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동굴에 들어온 먹잇감을 반기는 짐승과도 같이. 검은 날개의 천사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당장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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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브루스는 실제 러시아에 있는 해발고도 6000미터대의 산.

@ 상인들의 마을 = 베네치아, 예술가의 마을 = 밀라노, 농인들의 마을 = 토스카나. 각자의 모티브는 이럼.

@ 젬머링 철도 역시 실제로 존재. 다만 실제 철도는 오스트리아만 횡단함.


좀 힘든 일이 많아서 올리는 게 늦어짐. 미안.


이 시리즈도 어느새 50편 넘겼네. 읽어줘서 언제나 ㄱㅅㄱㅅ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