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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만큼 분량 낭낭하게 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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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 젬머링 철도. 테라 중부에서 서부를 횡단하면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구경하는 명소 중의 명소. 그중에서도 젬머링 협곡을 지날 때 볼 수 있는 풍경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열차의 승객들 모두가 보는 것을 기대할 만큼의 절경이었다. 경이. 감탄. 환희. 휴게실 안은 카메라 셔터의 연속적인 소리와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대화로 가득 채워졌다. 적어도 10분 전, 기차가 갑자기 정지하기까진.

오후 2시 30분. 협곡 한가운데 정지한 열차. 그 안에 싸늘한 정적이 주변을 맴돌았다. 창문 밖의 아름다운 경치가 무색하게 열차의 휴게실은 흉흉하고 어두운 살기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안에 있는 건 좌석이 아니라 바닥 한가운데에 앉아 움츠리고 있는 승객들과 그런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헬멧과 방탄조끼로 무장한 정체불명의 괴한들. 

“얌전히 있어!”

키가 2m에 근접한 거한이 쩌렁쩌렁 큰 목소리를 외치며, 쇠뇌를 휴게실 가운데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겨눴다. 헬멧을 뚫고 나온 곡선형의 거대한 뿔. 가죽바지 뒤로 뻣뻣하게 펴져 있는 얇고 긴 갈색 꼬리. 얼굴이 가려져 보이지 않아도 그가 포르테 남성인 것을 추정할 수 있었다. 

“걱정 마. 너희들을 해칠 생각은 없어. 우리 말만 잘 따르면 돼.”

우두머리인 그의 손짓에 따라 헬멧을 쓰고 방탄조끼를 입은 남성들이 승객들을 감싸며 총구를 겨눴다. 자신들의 목숨이 갑자기 나타난 테러리스트들의 손가락 움직임 하나로 결정된다는 절망적인 사실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숙이며 명령에 복종하는 것뿐이었다. 

협곡에서 갑자기 멈춘 열차. 난입해서 목숨을 위협하는 테러리스트들. 인생 최고의 한순간으로 각인되었어야 할 그들의 경치는 공포와 불안, 공황과 불행으로 덧칠되어버렸다.

“아, 혹시나 구조를 바란다면 꿈 깨시지. 사전에 방지해뒀으니까.”

들고 있던 쇠뇌를 땅에 나뒹굴고 있는 열차 내 통신기들의 잔해를 향해 겨누며, 포르테 남성은 말했다. 자신의 풍채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딱 벌어진 어깨를 자랑하며, 케이지 안의 생쥐를 보는 시선으로 승객들을 노려봤다. 철저한 계획이 성공한 것에 기반한 희열과 자신감에, 헬멧 너머로 그의 얼굴은 보기 흉한 웃음으로 물들여져 있었다. 

남은 고비는 인질들을 이용해 도시의 높으신 분들과 협상을 해서 돈을 뜯어내는 것뿐. 이미 포르테 남성의 머릿속에는 새 땅에 정착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미래까지 상세하게 설정되어 있었고, 그의 부하들도 그들의 두목과 별 다를 바 없었다. 총구를 승객에게 들이댄 채 서로 자신의 향후 계획을 이야기하며, 고의로 승객들을 발길질하며 농담 섞인 웃음꽃을 피웠다. 

“그나저나 대장, 높으신 그 양반들이 요구를 안 들어주면 어떡하죠?”

헬멧을 벗은 채 승객이 마시고 있던 위스키병을 호쾌하게 들이키고 있던 대장은 부하의 등을 두들기며 씨익 웃었다. 흉터로 얼룩진 시선이 휴게실 중앙으로 향하자. 승객들은 남성이 내뿜는 기백에 숨죽이고 바닥을 바라보았다.

“어쩌기는. 그땐 인질 하나둘 정도 본보기로 죽여야지.”

죽인다. 간단하면서도 묵직한 한마디가 휴게실 안의 모든 사람의 귀를 꿰뚫었다. 대장의 담백하면서도 확실한 대답에 테러리스트들은 너도나도 그들의 우두머리에 대한 칭송과 찬사를 연주했다. 그러면서도 조금 전 부하가 던진 질문에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토의 주제가 그들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승객들을 절벽에 떨어트릴지, 총살할지, 참수할지, 혹은 그 외의 방법이 없는지에 대해, 오늘자 점심 메뉴를 정하듯이 가볍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말 나온 김에 이건 어떨까요? 인질들 몸에 폭탄을 붙여서 협박하는 건. 높으신 분들도 마음대로 못 움직일걸요?”
“이야, 너 제법인데. 제법 악당 같은걸.”
“대장만 하겠습니까. 하하하.”

제대로 미쳤다. 승객들 모두가 공통된 생각을 속으로 읊었지만, 그걸 입 밖으로 뱉어낼 용기를 가진 자는 없었다. 그저 이 지옥 같은 상황을 타개해주길 바라며, 돌아가신 조상님이건, 믿고 있는 신이건, 가족이건 가리지 않고 목소리가 닿지 않는 구원을 갈망할 뿐이었다.

“이봐.”

공포와 불안으로 난잡하게 뒤섞인 수렁 한가운데,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왓다. 조금 전까지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던 테러리스트들은 옆에 두었던 무기들을 황급히 잡으며, 한창 달아오르던 흥을 깨트린 자를 향해 몸을 틀어 언제든지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슬슬 그만하지 그래.”

승객들의 한가운데에서 앉아있던 여성이 후드를 벗으며 일어났다. 머리 위 헤일로나 등 뒤의 날개를 보아 산크타였지만, 머리 옆 뿔이랑 다리 아래에서 살랑이는 꼬리를 보아선 살카즈. 하지만 종족이 상관없다는 듯, 테러리스트나 승객을 가리지 않고 너도나도 여성의 사파이어빛 아름다움에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몇 초 뒤. 상황이 판단되었는지, 권총을 들고 있던 테러리스트 중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가며 큰소리로 외쳤다.

“너 뭐야! 자리로 들어가!”

아무런 대답 없이 담담한 모습으로 여성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으로 둘러보아 권총을 가진 사람 4명이 전후좌우로 한 명씩. 그리고 그들을 보조하는, 칼이나 창 등의 날붙이를 들고 있는 사람이 총합해서 10명. 그리고 그들로부터 조금 뒤에서 느긋하게 새 위스키병을 열고 있는 대장 한 명. 여성은 상황에 대한 판단을 끝마치고 승객들 사이를 지나가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당장 저기로 가버려! 죽여버린다!”

그런 그녀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해, 테러리스트는 권총을 조준한 채 여성에게 재빨리 다가갔다. 

“죽여버린다고? 나를?”

위협하는 레서 판다를 보는 것처럼. 가소롭다는 듯이 들려오는 조소. 테러리스트의 삿대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푸른 머리의 산크타 여성은 성큼성큼 강도에게 다가갔다. 겁먹지 않고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에, 테러리스트는 무심코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1m. 세 걸음. 두 걸음. 눈앞. 어느새 여성과 테러리스트 사이의 간격은 60cm도 나지 않았다. 그 후의 상황은 1초도 걸리지 않았다. 휙 날아오는 여성의 손에 어느새, 테러리스트가 잡고 있던 권총의 총구는 여성의 이마를 입맞춤하고 있었다.

“자. 쏴봐.”

이해할 수 없는 여성의 행동에 테러리스트의 몸이 용수철처럼 수직으로 살짝 튀어 올랐다. 인질의 돌발 행동에 다른 동료들의 무기가 여성에게 향했다. 주눅 들지 않는 배짱인가. 혹은 이런 건 수없이 경험해 봤다고 어필하는 관록일까.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내에 벌집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여성의 담담한 표정은 햇살 아래에 빛나고 있었다.

“쏴보라고. 죽인다며? 총을 뽑았으면 그 각오를 보여야지.”

총을 떨구지 않도록 여성은 강도의 손목을 움켜잡으며 나지막이 눈앞의 남성에게 말했다.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심연과도 같은 그녀의 푸른 안광에, 테러리스트는 태어나면서부터 느껴본 적이 없는 부류의 위압감을 느꼈다. 

당겨라. 당겨야 한다. 손가락을 조금만 움직이면 되는데. 대체 왜. 테러리스트는 움직이지 않은 자신의 검지를 향해 여러 가지 욕설을 내뱉었다. 관절에 철사를 박은 것처럼 그의 손가락은 방아쇠를 누르는 간단한 행위를 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여성의 악력이 강하다거나 한 게 아니었다는 것쯤은, 제대로 된 교육 없이 빈민가에서 살아온 그라도 알고 있었다.

“이봐. 설마 진짜 죽을 거라 생각해서 못 당기는 거야?”

여성은 직감했다. 눈앞에 있는 남성에겐 방아쇠를 당길 정도의 용기 따윈 없었다. 그저 무기 하나만을 믿고 강자를 연기하는 ‘미물’에 불과했었다.

“제대로 겨눠. 사람은 그리 쉽게 죽지 않는다고.” 

한낱 ‘미물’ 주제에 같은 미물들 위에 군림하려 들다니. 여성에게 있어 그 모습이 건방지고, 혐오스러우며, 가소로웠다. 

그와 동시에, 여성의 안에 있는 어떠한 ‘존재’는 짓굿은 웃음을 지었다. 생쥐를 가지고 노는 호랑이와도 같이. 이 어쭙잖은 만용을 어떻게 짓밟아줄까. 자신이 강자라고 생각하는 오만으로 만들어진 가면이 부서지면 절망한 채 어떤 추한 모습을 보여줄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욕구가 무심코 여성의 양손에 힘을 주게 했다.

“다 아는 듯이 이래라저래라 하지마. 네가 뭘 아는데!”

기어오르는 광기와 공포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테러리스트는 남아있는 용기를 쥐어짜네 허세 섞인 대답을 외쳤다. 

“매우 잘 알지.”

안 돼. 아직 나오면 안 돼. 간지러워지는 가슴팍을 견디면서, 여성은 입가가 올라가려는 충동을 억제했다. 참고, 다시 참고, 다시금 참아보지만---

“해봤으니까.”

뚝.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은,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연 안에 잠들어 있던 어떠한 ‘존재’의 자물쇠가 풀린 것을 암시하는, 절망의 신호탄이었다.

“으아아아아악!!!!!!!”
 
열차가 흔들릴 정도로 크고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린 승객들의 시야 저편엔, 조금 전까지 멀쩡히 서 있던 테러리스트가 고통을 호소하며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어이! 무슨 일이야?!”
“손이... 내 손이...! 아아아악!!!!”
“손이 어쨌... 허억?!”

몸을 뒤틀고 있는 테러리스트를 향해 동료 두 명이 황급히 다가왔다.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오른손의 장갑을 벗겨내자, 그들은 믿을 수 없는 장면에 떡 벌어진 입을 닫을 수가 없었다.

비쩍 마른 나뭇가지. 동료들이 보자마자 떠오른 이미지였다. 햇볕에 탄 그의 구릿빛 피부보다 더욱더 검고 볼품없게, 엄지로 추정되는 말라비틀어진 육포 덩어리가 피를 흘리며 움찔거리고 있었다. 멀쩡한 나머지 네 손가락과 달리 혼자 시간이 지나버린 것처럼, 혼자 50년을 더 산 엄지는 세월의 비명을 외치고 있었다. 

“어때? 안 죽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잠시 멍해져 있는 와중, 테러리스트들 뒤로 여성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수법을 부렸는지 몰라도 동료의 손을 이렇게 만들었다니. 그것도 조롱하는 듯이 도발하는 것 같은 저 어조로. 당황함을 찍어누를 정도의 분노가 그들의 몸을 자동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이게...!”

고개를 돌려보니 테러리스트들을 맞이한 건 먹잇감을 노려보고 있는 포식자의 기백. 당장 무기를 들고 달려들려 했던 의도와는 다르게, 그녀의 눈빛에 테러리스트들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몸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리고 그들의 전신을 휘감는 불쾌하고 혼란스러운 감각. 두피를 갈가리 찢어버리는 것 같은 고통과 열기. 붉게 변해가는 시야. 

“커헉...”

3. 2. 1. 콰직. 방금 전에 공격하려 했던 테러리스트 두 명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바닥에 고꾸라진 채 혐오스러운 붉은 액체를 사방팔방 뿌리고 있는 분수 두 대만이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우리 팀 3명이 쓰러졌다고?!”
“대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큭... 대체 저 산크타는 뭐야!”

한 명의 손가락이 갑자기 으스러지고, 두 명은 사지에서 피를 토하며 기절. 순식간에 전력의 3할이 전투 불능이 되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테러리스트들은 우왕좌왕하면서 몇 걸음 뒷걸음질하기 시작했다.

“뭐해! 저 계집을 쏴! 당장!” 

다급한 대장의 명령과 함께, 남아 있는 권총 사용자 3명이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그 동시에 뒤에서 같이 날아오는 대장의 특제 쇠뇌 화살 두 자루까지. 전후좌우에서 발사된 4개의 투사체를 이 좁은 휴게실에서 피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 어느 쪽이던 한 발이라도 맞으면 게임 오버. 예상외의 상황이긴 하지만 그래도 처리 가능한 수준이었기에, 대장은 마음속 한쪽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

하지만 그 행동을 철회하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직선의 궤적을 그리며 돌진하던 탄환과 화살은 중간에서 투명인간이 잡기라도 한 것처럼 허공에서 정지했다. 이윽고 목표를 향해 전진할 힘을 잃은 얇은 쇳덩어리의 무리는 낙엽처럼 땅에 허무하게 떨어졌다. 하나하나가 고가인 라이타니아산 특제 오리지늄 탄환과 쇠뇌가 눈앞에 있는 여성의 손짓 하나에 허무하게 막히는 광경에, 대장은 숨이 턱 막혀 왔다.

“내가 조언 하나 해주는데.”

코트에 붙은 먼지를 털어내며, 여성은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그녀를 둘러싼 테러리스트들을 둘러보았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아보다가 최종적으로 그녀의 시선을 향한 곳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그들의 대장이었다.

“객기 부리지 말고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어때? 지금이라도 멈추고 자수하면 감옥행으로 끝날 거 같은데.”
“뭐...?”

봐주는 것처럼 자신감이 넘치는 게 느껴지는 여성의 어조는 대장의 마음속 한 쪽에 있는 어떤 스위치를 건드렸다. 그만두라고? 이제 와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일확천금의 기회만을 노려온 지금까지의 행적들이 영화 필름처럼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난 너희들같이 약자를 가지고 강자 소꿉놀이하는 녀석들이랑 놀 시간이 없어. 나뿐만이 아니라 여기 타는 승객들까지 말이야.”

실패. 좌절. 공황. 각종 부정적인 단어들이 대장의 머릿속을 좀먹어갔다. 허파가 잡아당겨지고, 심장이 쥐어짜이며, 사지 끝이 서서히 마비되어가는 감각이 덮쳐오면서, 그는 바싹 말라가는 입술을 깨물었다.

“너희들이 폭탄을 기관실에 넣어두고 그걸 근처 도시들이랑 협상할 계획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포기해. 이미 지금쯤이면 내 일행이 그 폭탄을 해체했을 거거든.”

싱긋 웃으며 여성의 말에 주머니에 들어가려는 대장의 손이 움찔거렸다. 안에 있는 기관실의 폭탄 작동 버튼이 있는 걸 알아차린 걸까? 아니면 심리전을 위한 블러핑? 마치 답을 구하려는 것처럼 주위를 황급히 둘러보았지만, 그가 볼 수 있는 건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부하들뿐이었다.

“어? 뭐야?”
“지금 열차가...?”

지반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저 앞에 있을 터인 기관실에서 엔진이 가동되는 소음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테러리스트들과 그들의 대장에게 있어 저승사자의 울음소리와도 같이 느껴졌다. 분명 기관사를 협박해 열차를 정지시킨 후, 포박해 화장실에 가뒀을 터이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그 앞에 막내 한 명도 보초로 세워뒀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기관실의 잠금장치도 부숴서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그런 기관실에, 누군가가 침입해 열차를 재기동했다.

수천만 용문폐와 몇 달의 시간을 쏟아부으며 준비된 계획이었다. 시뮬레이션도 여러 번 해냈고 인원 배치도 몇 번이고 뜯어고쳤다. 변수 하나 남기지 않을 거라 자부할 수 있던 완벽한 플랜은, 어디선가 난입한 여성의 손짓 몇 번에 휴짓조각처럼 너덜너덜해진 헛된 망상이 되어버렸다.

“웃기지 마...”

들고 있던 쇠뇌가 바닥에 떨어졌다. 자신의 무기를 팽개쳐도 분이 풀리지 않은 건지, 대장은 옆에 있던 위스키병들도 바닥을 향해 내리쳤다. 가빠지는 호흡과 붉어진 얼굴. 방금 전까지의 여유는 온데간데 없이 남성은 붉은 천을 본 투우와도 같이 길길이 날뛰었다. 

“웃기지 말라고!!!”

격앙된 어조와 함께 대장은 입고 있던 조끼를 여성에게 집어던졌다. 조끼에 붙어 있는 주머니의 단추가 풀리더니, 그 안에서 주렁주렁 매달린 붉은색 실린더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계획이 어긋나 도주할 때 시간 벌이로 사용하려 했던, 자신의 구호에 반응하는 특제 다이너마이트.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그 용도가 달라졌다.

“뒤져버려!!!!”

휴게실을 뒤흔들 정도로 우렁찬 고함에 뒤이어, 찰칵, 하고 무언가가 기동되는 소리가 조끼에서 흘러나온 다이너마이트에서 들려왔다. 비록 기관실의 것보다는 훨씬 약하더라도, 눈앞에서 폭발하면 근처에 있는 사람들 따윈 가볍게 저승으로 보낼 수 있는 위력. 공포에 떨며 고개를 숙인 인질이건, 죽고 싶지 않다고 울부짖는 부하건, 그림의 떡이 되어버린 부귀영화건 지금 그에게 있어선 아무래도 좋았다. 몇 년간 쌓아 올려 만들었던 계획을 단 몇 분 만에 망쳐버린 눈앞의 계집을 짓밟아 버리는 것. 그 한 가지 목적만이 이성을 잃어버린 한 남자를 이끌고 있었다.

“끝까지 해보겠다는 거구나.”

대장과 여성 사이의 거리는 길어봤자 7m. 두꺼운 팔로 던지는 물체의 속력은 야구선수의 투구와도 비등할 정도로 빨랐다. 하지만 다시 한번 들리는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날아오는 폭탄의 속도는 하늘에 흩날리는 민들레 씨보다도 느릿하게 여성에게 다가왔다. 이윽고 여성의 손에 닿자마자, 폭탄은 매우 빠른 속도로 빛이 바래더니 한 줌 먼지가 되어 허공에 흩뿌려졌다. 

“말도... 안 돼...”

마지막 남은 수단마저 불발. 다 타오르고 난 뒤 남은 잿더미처럼, 대장의 몸은 덧없이 바닥에 털썩하고 쓰러졌다. 눈앞에 있는 어찌할 방도가 없는 ‘괴물’에게서 도망치려고 안간힘을 써봤지만,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다리는 100 kg이 넘는 그의 체구를 움직일 힘따윈 없었다. 

“발버둥은 끝난 거지?”

여성은 한숨을 쉬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지면에 닿을 때마다, 마치 천둥이 근처에 내리치는 것만 같은 굉음이 테러리스트와 승객을 가리지 않고 들려와서, 휴게실 안의 모두가 본능적으로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너희들에게 이 녀석을 쓰긴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스륵.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여성의 등 뒤의 가방에 있던 무언가가 자연스레 그녀의 손에 들어왔다. 머리 부분이 가운데가 비어 있는 두 개의 원으로 감싸여져 있는 흑색의 스태프. 마치 자물쇠를 긴 막대기 위에 꽂아둔 것과도 같은 형상을 한 이 스태프는,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맹견과도 같이 조용하고 섬뜩한 울음소리를 외쳤다.

---[stultus agnus]

스태프를 반 바퀴 회전시켜 머리 부분을 땅에 맞닿게 한 채, 여성은 나지막이 그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을 읊었다. 철판을 긁는 것 같은 기괴한 소음. 결코 인간에게서 나올 수가 없는 부류의 소리였다. 

-----[hic venit hora judicii]

푸른 스파크가 바닥에서 피어올라 허공을 날뛰어 스태프의 머리에 모여들었다. 마치 주변의 전기를 잡아먹는 것처럼, 휴게실을 비추는 전등의 무리가 깜빡깜빡 점멸했다. 동시에 바닥이 사라진 것과도 같은 공허감이 휴게실 안의 모든 사람과 사물을 덮쳤다.

-------[obediunt terminus ad extra deus]

이윽고, 광기 어린 푸른 빛이 사람들을, 열차를, 산맥을 감싸며 강렬하게 빛났다. 






[저들의 핵심은 협곡에서 열차를 정지시켜서 지원이나 탈출 경로를 막으려는 거야. 결국 ‘협곡에 도착한다'가 기본적인 전제가 될 수밖에 없어.]
[흠... 그렇다는 건 열차가 협곡에 도착하기 전에 테러리스트를 잡겠다는 거야?]
[마음 같아선 그게 제일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힘들어. 승객 중 누가 테러리스트인지 모르니까.]
[그럼 어떡하려고?]
[열차가 정지하면 분명 저 녀석들은 승객들을 휴게실에 모을 거야. 많은 승객들을 통제해야 하니까.]
[아하. 이해했어. 일망타진을 노린다는 거지?]
[맞아. 그리고 그걸 모스티마, 너에게 맡길게.]
[박사 넌 어떡할 건데? 같이 휴게실에 있을 거야?]
[난 기관실에 가볼게. 기차를 다시 기동시켜 보든지 해야지.]
[너 혼자서? 가는 길에 잔당들이 있으면 어쩌려고?]
[승객들을 통제해야 해서 다른 칸에 동료들을 배치할 일은 없을 거야. 아까 말한 것처럼 고작해야 기관실에 한두 명 정도가 최선이겠지.]
[그럼 기관실에 있는 녀석들은? 네가 직접 해치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잖아.]
[여차하면 널 부르면 되지 뭐. 서로 간에 무선 통신은 되잖아?]
[날 너무 믿는 건 좋은 선택이라 할 수 없는데? 수십 명이 될 수도 있는 테러리스트를 나 혼자 상대하라고?]
[할 수 있잖아? 너라면. 용문에서의 ‘그것’처럼 말이야.]
[...이거 참. 너란 녀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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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엔 삽화도 그려서 넣어봄. 평소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리더라. 


@ 청독이 스킨 이쁘게 나왔더라. 한섭 대체 언제 나오냐.


@ TMI)

[stultus agnus]-어리석은 어린 양아
[hic venit hora judicii]-심판의 시간이 도래했다
[obediunt terminus ad extra deus]-경계 밖의 신에게 복종하라

모스티마 모티브가 크툴루 신화의 요그 소토스란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 있어서 만들어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