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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실종된지 일주일 만에 다시 돌아왔다는 거군.”


내 사정을 듣고 한숨을 푹 쉬더니, 눈앞의 필라인 여성이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미도리 사워를 입힌 것 같은 그녀의 연한 초록빛 머리칼이 형광등 아래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위로 보이는 동물 귀가 옆으로 향해 곤두선 것이, 딱 봐도 지금 그녀의 심기가 심히 불편하다는 것을 알렸다.


“저... 켈시? 화났어?”

“너 같으면 어떨 거 같아?”


짐승의 조용한 울음소리가 방을 부들부들 떨게 만들었다. 근원지는 내 눈앞에 있는 기괴한 형태의 검은 괴수였다. 켈시의 척추에서 태어난 자동방어시스템인 인공생명체, Mon3ter의 검은 기백은 방을 꽉 채워서, 지금 당장이라도 사람 한 명을 죽일 것 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네가 실종됐다는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로도스에 비상이 걸렸어. 아미야가 이성을 잃어버릴 뻔한 걸 제지하는 데 얼마나 힘을 들였는지 알아?”

“그건...”


휙, 하고 켈시는 내 앞으로 신문 하나를 던졌다. 주워서 보니 1면에 젬머링 협곡에서의 테러 사건이 큰 글자로 인쇄되어 있었다. 그 때 구했던 기관장과 승객들이 한 입으로 모아 그들을 구한 ‘검푸른 천사’에 대한 찬사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나에 대한 말은 없는 게 살짝 불만이긴 하지만, 지금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아주 영웅이 나셨네. 안 그래?”

“내가 한 게 아닌...”

“그 ‘검푸른 천사'에게 명령을 내린 건 결국 너잖아?”


정곡을 찔려서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 켈시는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참고 참아왔던 일주일치 잔소리를 속사포로 내뱉었다. 중간중간 *카즈델 욕설*을 시작으로 온갖 지역의 욕설이 섞여 있는 건 덤이다. 


일단 켈시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는 거다. 우선 첫 번째로, 내가 열차에서 뛰어내린 이후로 일주일 정도 시간이 지났다는 점. 두 번째로 내가 실종된 직후로 아미야를 비롯한 여러 오퍼레이터가 단독 행동으로 알프스로 오려고 해서 그걸 제지하기 위해 수뇌부가 상당히 애먹었다는 점. 그 외에도 내가 실종된 것 때문에 각종 협력 업체에서 문의랑 클레임이 걸려와서 상무부 쪽이 애먹었다는 점 등. 그 외에도 언급 안 한 여러 사고가 있었을 거다.


그러니 켈시의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썩어도 준치라고 내 위치는 지도자다. 지도자가 사라지면 집단에 혼선이 오고 붕괴하는 건 당연한 이치. 그 공백의 일주일 동안 대부분의 일을 켈시가 처리했을 거다. 눈 아래로 진하게 묻은 다크서클이 그녀가 고생했다는 증명서가 되어주고 있다. 다만...


“애초에 그냥 비행선으로 보냈으면...”

“뭐?”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옙.”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어른이라면 가끔은 의지를 굽혀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것이 사회생활의 윤활유가 되는 법이니까. 결코 Mon3ter에게 곤죽이 되도록 맞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다. 절대로.


“...박사.”


쌓아둔 말을 다 쏟아붓고 좀 후련해진 건지, 켈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좀 전이랑은 다르게 그 숨결의 무게가 가볍게 느껴졌다.


“넌 모르겠지만, 많은 오퍼레이터가 널 정신적 지주로 생각하고 의지하고 있어. 너 하나의 존재가 여러 사람의 목숨을 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걸 절대로 잊지 마. 알겠어? 언제나 너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응... 미안. 켈시.”


서서히 방을 옥죄여 오던 위압감이 사라져갔다. Mon3ter도 천천히 그 규격이 줄어들더니 어느새 주인의 몸속으로 돌아갔다. 


“일단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다시 일로 복귀하도록 해. 블랙스틸이랑 있을 회의가 미뤄졌으니까 다시 준비해야 할거야.”

“좀만 더 쉬게 해주면 안 될...”

“오늘부터 일하게 해줘?”

“죄송합니다.”


긴장이 풀린 건지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모처럼 돌아왔으니 샤워부터 해야 하나. 아니, 그 이전에 문너머로 기다리고 있을 대원들 상대부터 해야겠군. 


“박사.”


버튼을 누르던 찰나, 켈시가 날 부르는 게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미 그녀의 시선은 손에 쥐고 있는 서류뭉치로 갔었다.


“여행에서 네가 원한 건 얻었나?”


듣는 순간에 뭔 소린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바로 머릿속 기억의 단편이 급부상하여 의식의 표면 위로 나타났다. 그렇구나. 이 모든 건, 처음부터 켈시가 기회를 준 것이었다. 내가 직접 진실을 찾아낼 찬스를. 


“...고마워. 켈시.”


듣는 사람이 뭐라 답하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이 열리자마자, 대원들이 소란을 피우며 너도나도 내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각자의 걱정, 근심, 환영, 기쁨 등 여러 반응에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 대답하며, 문득 느끼게 되었다. 


아아. 드디어 집에 돌아왔구나.



그로부터 어언 수개월. 로도스는 언제나처럼 여러 작고 큰 사건을 겪으면서도 그럭저럭 순탄히 흘러갔다. 


시간이 많이 흐른 게 느껴졌다. 예비 오퍼레이터 팀은 하나둘 승진하면서 어느새 어엿한 베테랑 오퍼레이터가 되었다. 리사... 서포터 오퍼레이터 스즈란은 지난달에 드디어 키로 아미야를 추월했다. 우르수스의 학생 녀석들도 올해를 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가 된다. 37세라고 놀렸던 가드 오퍼레이터 첸이 얼마 전에 진짜 30대가 되었다. 혼기가 슬슬 걱정되는지 결혼의 ‘결'자만 나와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영 안쓰럽다. 


그 외에도 스나이퍼 오퍼레이터 아르케토쪽에서 제안해왔던 맥주 사업의 계약이 체결됐다든지. 뱅가드 오퍼레이터 백파이프가 함내 옥상에 지은 감자밭이 올해 와서 풍년이라든지. 영원할 것 같던 내가 알던 그들의 모습도 하나둘씩 추억이 되어 기억 한편에 저장되었다.


“일단 이 정도 해둘까.”


업무를 어느 정도 끝내고 시계를 보니 얼추 30분쯤 쉬어도 문제 없어 보였다. 펜을 내려놓고 선반으로 가서 티 포트를 꺼내 물을 부어 가열했다. 향이 좋은 티백이랑 간단한 디저트를 접시에 담아, 손님용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오늘자 비서 오퍼레이터인 에이야퍄들라를 위한 간식은 따로 있다. 이것은, 언젠가 돌아올지 모르는 한 ‘친구’를 위한 것이다. 원할 때 돌아와서 편히 쉴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이렇게 차랑 과자를 준비해놓는 것도 어느새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티백 낭비가 심하다고 종종 몇몇 대원들에게 핀잔받기도 하지만, ‘친구’를 위해서라면 아까울 게 뭐가 있겠는가.


“잠시 책상 정리라도... 우왓!”


갑자기 창문 너머에서 바람이 매섭게 들이닥쳐왔다. 기껏 정리해두었던 서류뭉치들이 꽃잎처럼 흩어져 사무실 전체를 활강하더니, 이윽고 바닥은 종이들로 난잡하게 뒤섞여있었다. 위에다가 필통 같은 거라도 올려둘 걸 그랬다며 막대한 후회를 꿀꺽 삼키며, 몸을 숙여 재빨리 정리하기로 했다. 황금 같은 쉬는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도와줄까?”

“됐... 어?”


서류뭉치에 손을 대기 직전이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이. 

누가 문 열고 들어오는 소리도 없었다.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라면 열려 있는 창문 외엔 있을 리가 없었다. 하물며 내 사무실의 위치는 로도스의 전함에서 최상층. 지상 정박 중인 지금이더라도 그 높이는 10m는 거뜬히 넘길 것이다. 특수 장비를 곁들여 밖에서 올라오는 게 아닌 이상, 지금 내 방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이론상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이미 이 상황을 작년에 겪어봤다. 무엇보다, 이 익숙한 목소리를 잊을 리가 없었다.

 

사파이어빛 머리카락과 수정 같은 두 눈. 검은 헤일로와 날개. 뿔과 꼬리. 언제나처럼 여유로운 미소.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려보니, 창가엔 그토록 기다려왔던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서류들은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테이블로 돌아왔다. 꽤 성대한 서프라이즈 덕에 피식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똑같은 기분인 건지 내 눈앞의 여성 역시 작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평소의 가면을 쓴 공허한 웃음이 아닌,  기쁨이 담긴 진실한 미소. 그녀의 유일한 ‘친구’라 할 수 있는 나만이 볼 수 있는 특권일 것이다.


“어서 와. 모스티마.”

“돌아왔어. 박사.”

“차랑 과자는 준비해뒀어.”

“그럼, 난 이번 여행에 있던 이야기를 들어주면 되겠네.”


이윽고 향긋한 기운이 방 전체에 퍼지며, 우리 두 사람의 티 타임이 시작되었다.


시간은 냇물처럼 끊임없이 흐른다. 즐거운 이 순간도, 언젠간 있을 슬플 일도. 모든 것은 지나가겠지만, 사람과 사람이 엮어 만들어낸 추억은 영원히 가슴에 남을 것이다.


그러므로 난 언제든지 모스티마의 미소를 이렇게 표현할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햇살 속에 화사하게 피어있는 한 줄기의 수선화와도 같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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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의 꽃말은 '신비'. 미스터리어스한 모스티마에게 딱 맞는 꽃이라 생각해 넣어봄.


완결내는데 5개월 걸렸다... 내 실력의 한계를 다시금 느낄 수 있는 기회였는듯. 글 봐준 모두에게 감사... 압도적 감사...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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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다음 히로인은 스와이어. 시리어스한 이번 편에 비해 가볍고 달달하게 가볼거임. 테에엥 스와마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