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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에 퍼퓨머도, 정신을 차린 글로리아도 아미야와 포덴코의 감시 하에 내게 사과를 했다.


글로리아가 의도하고 내는 일은 아니니 더 이상 화낼 생각도 없었다. 어쨌든 최대한 서류 안 망치고 들고와 준 것만으로도 이 소심한 필라인 여자아이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거니까. 나이트메어가 작정하고 날뛰면 글로리아로선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기도 하고. 증세가 좀 안정되면 다시 로테이션에 넣도록 켈시를 설득해 보겠다고 말하고서야 한 시간 동안 연신 허리 숙여가며 사과하는 글로리아를 내보낼 수 있었다.


다만 나이트메어가 글로리아의 몸으로 나를 덮치려 했다는 이야기는 레나에게도 글로리아에게도 하지 않았다. 물론 언젠가 나이트메어가 떠들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때 생각하기로 하자.


레나를 다시 만나러 간 건 나이트메어가 사고를 치고 열흘 정도 지난 후의 일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내가 아니라 레나가 날을 잡았고, 일도 웬일로 저녁 전후로 끝났다. 식사도 정시에 했고.


"어서 와, 박사."


"안녕하세요, 레나."


열흘 전에 왔던 것처럼 레나의 방 한가운데에 침대와 스툴이 놓여 있고, 그 옆에는 또 끌차가 세워져 있다. 다만 오늘은 이미 방에 지난번과 같은 향이 퍼져 있고, 바이올렛은 레나의 선실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다.


"저녁 먹고 얼마나 지났어?"


"두세 시간 정도 지났을 거에요."


"샤워도 했지?"


"네."


"그럼 이걸로 갈아입고 오렴."


레나에게서 얇은 옷을 받고 욕실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은 달콤한 사과향이 나는데 과일로도 아로마테라피가 되던가.

물론 레나라면 어떤 향이든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지만.


"이거 뭐에요? 사과 냄새가 나는데."


"이거? 캐모마일이랑 허브 조합한 거야. 진정 효과가 있어서 불면증이나 스트레스 완화에 좋아. 냄새 달지?"


"그러게요."


"알아챌 정도였으면....매번 옷 냄새 맡는 거야?"


"아....네."


잘못한 것도 아니고, 호기심에 시작한 것이었지만 레나에게 들켰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하지만 레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침대를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후후, 마음에 들었나 보네. 방향제로 하나 만들어 줄까? 그러고 보니 방향제를 만들어준 적이 없구나."


"저는 좋죠."


"그래. 그럼 이거 다 하고 만들어 줄게. 와서 누우렴."


왠지 모를 성취감을 억누르며 레나의 옆으로 갔다. 오늘도 나긋한 손길 덕분에 기분좋게 잘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품고, 스툴에 앉은 레나의 옆을 지나가려던 그때.


"어....?"


무심결에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침대에 누우려던 그때 무언가 익숙한 향기가 레나의 주변에서 나는 것 같았다. 방 안에 희미하게 퍼져 있는 것과는 다른 꽃의 향기다. 아니, 이건 꽃이라기보다는....


"왜 그러니?"


"아니요. 누우면 되는 거죠?"


깊이 생각하지 않고 수건으로 만들어진 간이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가 하는 감상도 잠시, 얼른 힐링받고 돌아가서 푹 자야겠다는 생각으로 레나가 의자를 끌고 다가오는 것을 멍하니 보았다.


그렇게 테라피가 시작되고, 평소와 같은 수순으로 레나의 손길이 내 몸 위를 노닐기 시작했다. 향기와 손길에 멍하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때.


"그러고 보니 열흘 전에. 나이트메어 때문에 고생 많았지."


"아....뭐, 가끔 있는 일이니까요. 글로리아는 기억 못 하죠?"


껄끄러운 이야기일 텐데도 레나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최대한 오퍼레이터들에게 입단속을 시켜둔 덕분에 글로리아는 나이트메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른다. 하물며 사무실에서 내게 했던 짓은 더더욱. 글로리아 말로는 일을 하나 끝내놓고 까무룩 졸았는데, 눈을 떠 보니 자신은 내책상 근처에 서 있었고, 반대쪽 벽에 의자랑 내가 처박혀 있다고 했다던가.


뭐....셔츠가 풀어헤쳐져 있던 건 그냥 나이트메어가 깽판 부리다가 성질 못 이기고 한 걸로 치자. 내가 한 짓도 아니니.


"치료를 시작해 주고 나서 나이트메어가 덜 뛰쳐나온다지만 오히려 나왔을 때 더 난리를 치는 것 같아. 다른 방법이 필요할까 싶어도 글로리아가 좀 더 적극적인 치료를 해 달라고 하진 않으니, 강요할 수도 없고."


"시간이 해결해 주겠죠. 광석병이 어떻게든 해결되면 가장 좋겠지만요."


"그렇지.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거고."


이 아가씨가 아무렇지 않게 광석병 감염자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아로마테라피를 해준다지만 어쨌든 광석병 감염자이기도 하다. 자신도 광석병 때문에 많은 것을 잃었을 텐데.


"그러고 보니 레나도 감염자잖아요. 증상 같은 게 따로 있어요? 대원 기록에도 없던데."


"나는 아직. 처음 왔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게 병이 진행된게 아니니까. 켈시 선생님이 잘 봐주고 있고, 나도 뭘 해야 할지 알고 있으니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이 상태로 한 3, 40년 정도 있어도 괜찮을걸? 2~3년 정도만 지나도 큰일날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내가 우는 소리 하면 안 되지. 글로리아도 그렇고."


"그렇다는 건 레나도 뭔가 있다는 거네요."


내 말에 레나의 손이 처음으로 멈추었다.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가느다란 손가락이 종아리 위에서 일정한 리듬으로 닿고 있다. 컴퓨터가 중간에 멈췄을 때 기다리는 동안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처럼.


"광석병 때문에 잃어버린 거? 그것도 있겠지. 근데 덕분에 나는 집 밖으로 나왔으니까 아주 잘못된 것도 아니야."


한참만에 레나의 목소리가 들렸고, 멈추었던 손길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요?"


"대원 기록에 내 과거가 어떻게 적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어렸을 때 미노스에 있는 본가 밖으로 나간 적이 없어. 가정교사가 있었고, 커서 하고 싶던 일이 굳이 전문교육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으니 학교에 간 적도 없고. 조향사가 되고서부터는 필요한 걸 사러 시장에 나가곤 했지만."


그야말로 온실 속 화초라는 말이 딱 맞을 사람이다. 그런데도 사람을 낮잡아본다거나 하지 않는 걸 보면 집 안에 있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을 만난 모양이다. 편견이라면 편견이지만 있는 집안 자녀들은 무의식중에 아랫사람을 내려본다거나 하는 일도 있으니.


"그럼 글로리아는 어떻게 만난 거에요?"


"여기서 처음 만난 거야. 감염자가 되고 나서 여기에 지원한 건데, 그러고 얼마 되지 않아서 만난 거지. 처음 만났을 땐 더 불안정했어. 의료부에 있는 기재를 부수고, 글로리아일 땐 눈앞에서 상상도 못 할 심한 말도 하고. 지금은 많이 나아진 거지."


"주치의가 환자 이야기를 그렇게 쉽게 해도 돼요?"


"어머, 그렇구나. 이건 글로리아한테 비밀로 해 줘. 자, 돌아눕자."


레나의 말에 따라 천장을 보고 누웠다. 희미해진 조명 아래에서 자리를 옮기는 레나가 눈에 들어왔다.


"수건 덮어줄까? 눈부시진 않아?"


"괜찮아요."


머리 쪽으로 온 레나의 손가락이 차분하게 두피를 훑기 시작했다. 어느 곳에서는 그 여린 손에서 나올 수 있나 싶은 힘으로 누르기도 하고, 때로는 민감한 식물을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때 레나가 자세를 고쳐앉으며 일순간 내 머리와 가까워졌다. 그리고 익숙한 무언가가 코끝을 스치듯 지나갔다.


"어?"


"음? 미안해. 아팠니?"


"아니요. 괜찮아요. 지금 해 주는 정도로 해 주세요."


레나는 안심했는지 작업을 계속했다. 그 잠깐 이야기하며 멈춘 것 말고는 중간에 끊어지는 일 없이, 조향사는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나갔다.

그렇지만 방금 그걸로, 오늘 아로마테라피를 시작하기 전 내가 느낀 게 뭔지 확실해졌다.


ㅡ캐모마일이랑 허브 조합한 거야. 진정 효과가 있어서 불면증이나 스트레스 완화에 좋아. 냄새 달지?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아로마테라피용 옷에서 나는 달콤한 사과향. 아까 침대에 눕기 전 레나 주변에 둘러쳐져 있던, 꽃과는 사뭇 다른 향기.

익숙하다고 느껴진 데엔 이유가 있었다.


착각이 아니다. 레나에게서도 지금 캐모마일 향기가 나고 있다.


"아아, 그래. 그때 혹시 나이트메어가 박사한테 무슨 말 했었니? 알아두면 나중에 글로리아 치료할 때 도움될 것 같은데."


"네?"


두피마사지를 끝내고 아래쪽으로 내려간 레나의 말에 당황해서 바로 대답이 안 나왔다. 한참 조용했던 데다가 레나에게서 나고 있는 향기에 정신이 팔려 있던 차였으니.


"그냥....글로리아랑 레나가 자기를 못 나오게 하는데 좋아할 수가 있겠냐고. 어느 정도 심한 말도 했구요."


"어떤 말?"


"어...."


이건 말하기가 좀 거북하다. 아무리 그래도 대놓고 레나를 저속한 말로 욕한 건데.


ㅡ어차피 그 여자도 한 마리 암여우인걸. 그런 호의를 괜히 베푸는 거 같아? 다 목적이 있는 거야. 좋은 종자 받아서 새끼 치는 거. 


아니야. 이 말은 아무리 있던 일을 그냥 전달하는 거래도 못 하겠다.

차라리 나를 까내리는 게 낫지.


"저한테 그....못 하냐고."


"뭘 못 해? 나는 박사가 뭘 못 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로도스에 여자가 그렇게 많은데 여자한테 손 안 댄다거나 한다고....고자냐고."


그 말에 레나가 갑자기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옷 위로 허벅지를 마사지하던 손이 멈춘 것도 모자라 떨리고 있을 정도였다.


"웃지 마세요. 남자한텐 좀 그런 거라."


"아아....미안해. 걔가 그런 말도 하는구나. 근데 상상이 안 되네. 글로리아 목소리로 그런 말이라니."


"글로리아가 하는 말도 아니고, 그냥 그러려니 하려구요."


"그렇지. 그게 맞아. 아무튼 딱한 아이니까, 너무 뭐라고 하진 말아줘. 그 애도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고. 나을 수 있을 때까지 살펴주고 기다려 줘야지."


자기한테 그런 폭언을 했다는 걸 알아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이건 말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알겠지? 글로리아한테도 이 이야기는 하지 말고. 약속하자."


"네. 레나도 말하지 마요."


"후후, 그럼."


그렇게 가벼운 약속에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도장이 하나씩 찍히고, 레나는 멈추었던 마사지를 계속하기 시작했다. 다만 방금 레나하고 글로리아ㅡ나이트메어 이야기를 한 것 때문에 그날 나이트메어가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재생되기 시작했다.


ㅡ남자는 여자애가 처음이라고 하면 막 흥분하는 거 아니었어? 막 이 여자애를 더럽히고 싶고, 정복하고 싶고.

ㅡ자기 환자가 당신이랑 하고 있는 거 보면 그 여자는 어떤 얼굴로 당신을 볼까.


ㅡ알아챌 정도였으면....매번 옷 냄새 맡는 거야?


옷 냄새.

레나에게서 나는 같은 향기.


나이트메어의 저속한 말과 글로리아를 이끌고 내게 한 행동.


ㅡ박사한테선 좋은 향기가 나네.


"...."


허벅지를 마사지하는 레나의 손길.

레나에게서 나는 같은 향기.


ㅡ후후, 마음에 들었나 보네.


어어, 큰일났다.

아랫도리가 눈치 없이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두꺼운 옷이면 몰라도 얇은 옷이라 금방 눈에 들어올 텐데.


아니 서는 것 자체는 오히려 나쁜 건 아니고 자연스러운 일이니 상관은 없지만, 하필 레나 눈 앞에서.


"저기, 레나. 잠깐만요."


더 세워지기 전에 레나를 불러세웠다. 조명이 희미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까 레나에게 옷 냄새 맡는다는 걸 들킨 것보다도 얼굴이 더 뜨겁다. 조금이지만 숨쉬기도 힘들어졌고.


"음? 왜?"


"그게....잠깐만 쉬면 안 될까요."


"왜? 몸이라도 안 좋아?"


레나의 말과 동시에 의자가 빠르게 이쪽으로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따듯하고, 매끄러운 피부 감촉이 내 이마를 덮듯 했다. 그와 동시에 짙은 향기가 이마 쪽에서 코로 내려오는 것 같았다. 아로마오일이겠지.


"미열이 있네. 아니면 편두통인가? 약 필요하니?"


"아뇨. 오히려 너무 좋아서 문제인데요. 그게...."


미치겠네. 여섯 번을 왔는데도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너무 좋아서....? 아."


레나도 깨달았는지 내 하반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분명 처음 누웠을 때랑은 달라져 있을 거다. 더구나 속옷 위에 그대로 얇은 바지를 입고 있으니, 윤곽도 잘 드러나겠지. 몸 돌리고 숨고 싶을 정도다. 아니, 숨을 데도 없구나. 그럼 욕실로 가거나 아예 나가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신경쓰지 마. 남자니까 그건 어쩔 수 없지. 맘대로 못 하잖아?"


아까 내가 고자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웃었던 것 때문에 당황할 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레나의 대답은 사무적이었다. 조명이 이러니 레나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좀....그, 부끄러운데."


사람 앞에서 이렇게 텐트를 칠 수 있다는 것도 굉장히 생소하다. 물론 일하다가 가끔 그런 일이야 있지만 책상 때문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모른 척 하고 시간 죽이다 보면 원래대로 돌아오니 신경쓸 것도 아니었고.


"애초에 난 메딕이야. 이런 거 신경쓰면 일 못 해. 그리고 오히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뭐....뭐가요?"


"박사가 내 손길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거잖아? 그리고 나이트메어가 말한 게 틀렸다는 것도 증명됐고. 남자로서 문제가 없다는 거 아니겠어? 괜찮아, 괜찮아. 그럴 수 있어."


레나는 정말 괜찮다는 듯, 이미 제대로 세워진 하반신 텐트는 신경도 안 쓰고 마사지를 계속했다. 레나 말대로 메딕, 내지는 의사에게 이런 꼴을 보여도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 괜찮아질 터다. 일단 사람 몸 보는 직업이기도 하니까.


"정 부끄러워서 견디기 힘들면, 수건이라도 한 장 더 덮어줄까? 아니면 가라앉게 어디 기도문이라도 읊어볼래?"


"아니요. 괜히 더 신경쓰일 것 같아요."


"그러려니 하면 돼. 오히려 긴장이 풀렸다는 거니까. 릴렉스하고."


레나 말대로 릴렉스를 하려 했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계속해서 몸에 닿는 자극에 기세가 죽지를 않는다. 당황하는 기색도, 잠깐 멈추는 기색도 없이 아로마테라피는 계속되었다. 신경쓰지 말라고 하니까 더 신경쓰인다.


ㅡ박사.

ㅡ이런 향이 좋니?


"박사. 이제 일어나야지?"


달콤한 목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울렸고, 깜짝 놀란 것처럼 눈을 떴다.

언제부터 잠들었지? 하는 걸 생각하기도 전에 하반신을 확인했다. 다행히 가라앉았다. 곤란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대신 좀 큰 수건이 이불처럼 몸에 덮여져 있었다. 이건 레나가 해 준 모양이다.


"좋은 꿈이라도 꾸었던 걸까. 푹 자고 있어서 깨워야지 하는 생각도 안 들었어."


"어어....얼마나 잤어요? 지금 몇 시에요?"


"열두 시 조금 안 됐어. 지금 방에 가면 잘 수 있겠어?"


"네. 몸이 많이 가벼워진 것 같아요."


"그럼 잘 됐네."


그날과 똑같은 가벼운 손뼉 소리 한 번이 실내를 울렸다. 잠이 달아나는 것과 동시에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레나가 옆에 다가와 끌차에 작은 상자 하나를 내려놓았다.


"이게 뭐에요?"


"캐모마일 방향제. 오늘 박사가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고, 베이스가 좀 남아있었으니까."


"고마워요, 레나. 일부러 이런 것까지 만들어 주시고."


"자, 옷 갈아입고. 들어가야지."


욕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레나는 끌차를 구석에 밀어놓고 있었다. 침대는 그 위에 깔아두었던 수건과 내가 덮었던 수건만 치워져 있었다. 레나가 만들어준 방향제를 챙기고 문 앞에 서자, 다른 일을 하던 레나가 나를 따라와 섰다.


"잘 자요, 레나."


"잘 자렴. 좋은 꿈 꾸고. 안에 유리병이니까 조심해서 들고 가렴."


평소와 같은 나긋한 이 인사로 오늘도 끝이 났다.

손에 들고 있는 이 작은 상자에 몇 시간 동안 있던 이 방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니 오늘은 아쉬움없이 문을 열고 나설 수 있었다.


방에 돌아오자마자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보니, 레나가 직접 쓴 설명서와 캐모마일 향료가 담긴 유리병, 그 병에 꽂아둘 수 있는 막대 한 묶음으로 되어 있다. 설명서를 눈으로 천천히 훑자 레나의 목소리로 읽어주는 것 같았다. 그 말에 따라 막대를 꽂은 유리병을 머리맡 적당한 자리에 세워놓으니 서서히 사과 향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욕실에 가서 한 번 샤워를 하고 나오니 침대 주변에 이미 향기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경계 안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기 전, 오늘 있던 일들이 떠올랐다.


레나하고 글로리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잠깐 사고가 있었지만 레나는 아무렇지 않게, 내가 곤란하지 않도록 넘겨주었다.

오늘 레나에게 받아 갈아입었던 옷에서, 그리고 레나의 몸에서 똑같은 캐모마일 향기가 나고 있었다.


같은 것을 함께 쓰고 있었다는 묘한 희열과 더불어, 레나에게 나는 그저 아로마테라피를 받으러 오는 사람 중 한 명 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잿빛 구름이 한구석에서 피어났다. 


ㅡ아니야? 그 여자하고 짝짓기 안 해?


그때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레나에게 흑심이 있었다면 레나가 나를 부를 일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부정했던 그 말이, 이제는 실현되었으면 하고 있었다. 

단 열흘 만에. 악몽을 풀어놓는 여자아이가 한 말은 이미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박혀 버렸다.


서서히, 레나의 품에 안겨 있다는 착각에 잠겨들며 눈이 감겼고, 그 뒤로 있던 일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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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 정도 수위로 쓰면 창작(19)에다 넣어야되나?

중간중간 이런 식이라던지 언어적으로 수위 있는게 좀 있을 예정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