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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가 지나는 사이에 계절이 한 번 바뀌어 겨울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냉난방이 잘 되는 선실이고 복도지만 한낯 지상함선이 대자연을 이길 수는 없는 법. 모두에게 물자로 주어졌지만 평소엔 꺼내지도 않는 로도스 아일랜드제 외투를 겉에 걸치고 다니는 오퍼레이터들이 늘어났다. 그 사이에도 일상은 이어졌고, 빈도는 조금 줄어들었지만 레나를 찾아가 아로마테라피를 받는 것도 계속되었다.


더 추워지기 전에 방 대청소를 할 생각으로, 오늘은 쉬는 날이지만 방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다. 쌓여 있던 묵은 먼지를 닦고, 깊숙한 곳에 처박혀 있던 쓰레기나 벌레 시체를 찾아 쓰레기봉투에 버리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책상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소도구들과 오래된 서류를 정리하고 한 번 더 먼지를 닦아낸 다음 전장을 침대로 옮겼다.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창문에 이불을 널어놓고 머리맡의 먼지를 닦으려는 차에 막대가 꽂힌 빈 병을 발견했다.


"아....이거 다 떨어졌네."


당연하다는 듯 방에 두었고, 가끔 레나의 방에 찾아가 아로마테라피를 받다 보니 익숙해졌나 보다. 다 떨어지도록 몰랐다니. 언제 다 썼는지 감도 안 온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한 허전함에 조금 기운이 빠진다.


혹시 한 번 더 만들어 달라고 하면 만들어 주려나. 생각해 보니 전에 받아왔을 때도 아무것도 주지 않고 그냥 받았는데, 이번엔 매번 아로마테라피라던가 해 주는 감사의 의미까지 해서 뭘 선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똑똑똑.


"네. 열려 있어요."


대답하며 돌아서자 문이 천천히 열렸고, 금색의 긴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예쁘게 한 군데로 갈무리한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어 한 번에 크게 문이 열리고 아홉 개의 꼬리가 살랑이며 따라들어왔다.


"박사님, 안녕하세요!"


불포족 여자아이가 고개를 꾸벅, 꼬리가 전부 보일 정도로 깊이 숙여 인사한다. 극동에서 많이들 하는 손윗사람을 향한 인사를, 이렇게 어린 아이가 깍듯이 하니 귀여운 인형을 보는 것 같아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선내에 마련된 어린 감염자들을 위한 아츠 교실에 다니면서 후방의 간단한 작전에 투입되는 서포터 오퍼레이터 스즈란이다. 올해 가을에 부모님 손에 이끌려 로도스 아일랜드에 맡겨졌다.


"스즈란이구나. 웬일이야? 오늘 아츠 교실은 쉬는 날일 텐데."


스즈란은 바구니에 넣어두었던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목이 긴 병이나 큰 시험관 같은 게 들어있을 것 같은 길쭉한 상자다.


"아, 지금 온실정원에서 오는 길인데요. 퍼퓨머 선생님이 박사님한테 이걸 갖다달라고 하셔서요. 나이트메어....아, 아니지. 글로리아 언니한테도 갈 거에요. 그리고 낮에는 샤마르랑 바느질하러 갈 거구요, 안젤리나 언니가 온다고 마중하러 나갈 거에요. 그리고....그리고...."


레나가? 일부러 스즈란한테 시켜서까지 나한테 갖다줄 게 있었던가. 설마 미노스에 나가는 작전이 생긴 건 아니겠지.

그래도 얇은 봉투가 아닌 걸로 봐선 작전 문서 같은 건 아닌 모양이다.


"고마워. 나중에 퍼퓨머 선생님한테도 고맙다고 말할게."


일단 그대로 놔두면 하루 종일, 오늘 일정이 아니라 이번 주 일정을 쉴새없이 떠들 것 같아 적당한 데서 끊으며 상자를 받고 감사를 표했다. 


이렇게나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 같은 예의바르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미워할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표정도 행동도, 마음 쓰는 것도 그 나이대 순수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대원들이 이 아이의 기록을 개판으로 만들어놓는 건 자제했으면 싶다. 다들 아끼고 귀여워하는 마음에, 그리고 그걸 다른 대원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 한 짓이겠지만. 나중에 켈시한테 말해서 대원 기록을 좀 고치게 해야겠다.


"준비한 게 없어서 뭐 따로 줄 건 없네. 방 정리 중이었고."


"정말요? 그럼 제가 도와드릴...."


"글로리아한테 가야 한다고 했잖아. 기다리겠다. 얼른 가 봐."


혼자 떠들게 두면 자기가 해야 할 일도 잊어버리고 바로 앞의 일에 달려들려 하니, 이렇게 가끔 방향을 잡아줄 필요가 있다. 방향만 정해주면 그 뒤로 어느 정도까지는 스스로 걸어가니까, 그 뒤는 다른 대원에게 맡겨두도록 하자.


아무튼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갖다준 거니 나중에 쿠키 같은 거라도 사서 쥐여줄까.


"네. 박사님도 휴일 잘 보내세요."


왔던 때와 똑같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한 스즈란이 문 밖으로 나갔다. 잠깐 화사해졌던 방 안 분위기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래서 레나는 뭘 보낸 거지.


"어...."


상자를 열자마자 개미떼가 달콤한 향기를 물고 흩어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향이 퍼져나온다. 어떻게 손써볼 새도 없이. 하지만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그렇게나 바라고 있던 것이어서일까. 자신도 모르게 괜히 숨을 크게 들이마셔 보았다. 안에 든 것은 유리로 된 시험관을 신문지로 감싼 것이었다. 단단히 밀봉되어 있어 깨지지 않는 이상 안에 있는 내용물이 흘러나올 일은 없을 것 같다.


시험관 말고도 종이쪽지도 들어 있었다. 이번에도 편지나 설명서일까 싶어 열어보았다.


ㅡ휴일 잘 보내고 있어? 지금쯤이면 전에 줬던 방향제 떨어지지 않았나 해서. 혹시라도 병이랑 스틱 버렸으면 나한테 이야기해 주고, 시험관은 버리지 말고 나중에 다시 갖다줘. 


그렇게 편지를 시작으로 방향제를 다시 채워넣는 방법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챙겨준 걸로도 모자라서, 혹시라도 모르는 사람이 실수로 잘못 쓸까 걱정해 쪽지까지 써주었다니. 


속으로 레나에게 몇 번이고 감사를 표하고, 손에서 놓칠새라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시험관을 들고 침대 머리맡으로 갔다. 설명서에 적힌 대로 방향제를 다시 채워넣는 데에는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몇 시간 지나면 다시 향의 장막이 펼쳐질 것이다.


편지는 서랍에 넣어놓고, 빈 시험관은 깨지지 않게 다시 상자에 넣어 책상에 잘 올려놓았다.

아주 잠깐, 청소 중이었다는 것도, 지금 창문을 열어 환기 겸 이불을 말리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멍하니 방향제를 바라보았다.


레나에게 답례로 뭐가 좋으려나. 레나가 어떻게든 얻을 수 있는 것 말고, 필요한 걸 주고 싶은데.




시험관을 갖다줄 겸 온실 정원에 가 보기로 했다. 방 청소도 그럭저럭 끝났고, 점심 먹을 때까지 할 일도 없으니까. 나온 김에 볼일 보고 점심 먹고 들어오면 되겠지.


온실에 들어오니 바깥과는 다르게 향기와 온기로 가득 차 있어서 훨씬 따뜻하다. 오히려 여기 안에서면 외투를 입으면 더울 것 같다.

쉬는 날이지만 오히려 이런 날 향기 치료를 받고 싶어할 감염자 대원들이 있을 수 있으니, 온실도 쉬는 날은 거의 없는 셈이다. 식물 관리에도 휴일이 없으니까.


"어? 박사님. 온실엔 어쩐 일이세요?"


레나를 찾아서, 이름모를 각양각색 꽃밭을 헤매다니다가 자기 키보다 긴 빗자루를 들고 다니는 페로족 오퍼레이터 한 명과 마주쳤다. 모퉁이를 돌았을 때 바로 안 보여서 부딪힐 뻔했지만.


퍼퓨머와 더불어 요양정원의 관리자로서, 어쩌면 꽃에 대해선 퍼퓨머보다 더 잘 알고 있을 원예가.

코드네임 포덴코.


"휴일에 고생 많네. 퍼퓨머는 오늘 쉬는 날인가? 아니, 아까 스즈란한테 뭘 줬다고 했지."


"퍼퓨머 선생님 조금 전에 나가셨어요. 아마 의료부에 가셨을 거에요. 무슨 일이세요?"


"돌려줘야 될 게 있어서. 전해 줄 필요는 없고 자리만 알려주면 내가 갖다놓을게."


포덴코가 알려주는 방향으로 가니 책상 몇 개가 놓인 공간이 있었다. 그 안에서 이것저것 많이 놓여 있는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조향에 관한 책, 식물에 관한 책들 몇 권보다도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이 나름대로의 질서를 갖고 빼곡하게 놓여 있는 게 특이했다.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세공한 것 같은 금속 장식부터, 세밀하게 만들어진 여우 인형, 어린아이의 손으로 만들어졌을 종이 공작물까지.

포덴코에게서 설명을 들었을 땐 설마 했지만 이게 레나의 책상이라고 한다.


자기 방 책상에 꽃병 두어 개 외의 소품이 없는 것에 비교하면 생각외로 어수선하다는 느낌이다. 그래도 비어 있는 공간이 있어 그 자리에 상자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볼일이 끝났는데, 마침 레나가 없으니 포덴코한테 자기 상사의 취향에 대해 물어봐도 되려나.


"포덴코. 지금 바빠?"


나가는 길에, 꽃들 사이에서 쫑긋거리는 귀와, 그 위로 솟아오른 빗자루 손잡이를 발견했다. 뭘 하는 건지 빗자루를 들고 돌아다니고만 있는데.


"네? 아뇨. 다니면서 죽은 잎이라던가 있는지 보고 있는 거에요. 막 바쁜 건 아니고 간단한 점검 같은 거구요. 뭐 시키실 거라던가 있으세요?"


다행히 일을 방해한 건 아닌 모양이다.


"퍼퓨머가 특별히 좋아하는 거라던가 있어? 얼마 전이랑 오늘 아로마디퓨저를 받았는데, 받고 입 닦고 가만 있을 순 없으니까 뭐라도 선물할까 싶어서. 아니면 필요한 거라던가."


레나가 몇몇 오퍼레이터들에게 방향제를 준다던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내가 그걸 받았다 하더라도 특별한 건 아닐 것이다. 개중에는 레나에게 답례를 한 사람도 있을 거고.


일을 시키려는 줄 알고 주머니에서 수첩을 찾던 포덴코가 손을 멈추고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귀가 쫑긋거리고, 꼬리가 이쪽 저쪽으로 천천히 흔들리는 게, 괜히 한 번 머리를 쓰다듬고 싶어진다. 말 잘 듣는 얌전한 강아지를 보는 것 같다.


"글쎄요. 선생님이 뭘 이렇다하게 하나를 집어서 좋아하는 건 없으세요. 저희가 뭘 갖다드려도 항상 몇 번이고 고맙다고 인사하시고요. 퍼퓨머 선생님 자리에 아무것도 없는 걸 본 게 엄청 오래 된 것 같아요."


"그래? 그런데...."


거기서 말실수임을 알고 입을 멈추었다. 레나의 방에는 이렇다하게 선물이라거나 보관되어 있는 걸 보진 못한 것 같았는데, 그걸 포덴코에게 말할 뻔했다. 레나는 다른 대원들에겐 내가 자기 방에 오는 걸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


"퍼퓨머 선생님은 어떤 선물이든 온실의 자기 자리에 갖다놓으세요. 과자나 음료 같은 건 어떻게든 같이 있는 사람들이랑 나눠드시려 하시고, 소품 같은 건 버리는 일 없이 전부 서랍이나 책상에 두시니까요. 그래서 저희보고는 서로 책상에 쓰레기라던가 있으면 치워 주라고 하시는데, 선생님 책상만큼은 치우지 못하게 하세요."


그래서 레나의 자리에 그렇게 뭐가 많았구나. 잡동사니가 아니라 하나하나 의미가 있는 선물일 줄은.

그리고 여기저기서 받은 선물이라곤 해도,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이게 그냥 잡동사니인지 레나가 일부러 놔둔 건지 모르니 책상에 손대지 못하게 하는 모양이다.


"화분은 사실 여기선 관리할 게 하나 늘어나니까 선물로 주고받진 않고, 꽃차 같은 건 선생님도 만드실 수 있으셔서 굳이 드리진 않구요. 아....그러고 보니까요."


그제야 포덴코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 귀를 쫑긋거리며 말했다.


"선생님은 술은 절대 안 드세요. 아무리 약한 술도요."


"정말?"


포덴코의 말을 듣고 생가해 보니 레나가 사람들하고 어딘가에 모여서, 혹은 혼자서 술을 마시는 것을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레나 방에도 술이 있다거나 하는 건 못 봤고. 가끔 차를 마시는 것은 본 것 같지만.


"저희가 한 번 꽃술을 준비해서 승진 선물로 드린 적이 있는데요, 자신은 술을 마시면 안 돼서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셨어요. 정말 미안하다고 몇 번이고 사과하시면서요. 결국 플레임브링어랑 저랑....의료부 오퍼레이터 몇 분 불러서 한 잔씩 마시는 걸로 끝났어요."


"마시면 안 되는 이유라던가 이야기했었어?"


"아무래도 냄새를 맡거나 하는 데에 지장이 생겨서가 아닐까요. 후각은 쉽게 피로하잖아요. 더구나 퍼퓨머 선생님은 하루에도 수십 가지 꽃이나 향초 냄새를 구분하시는데, 술 때문에 밸런스가 망가지면 일을 못 하게 되시니까요." 


반대로 이 페로족 여자아이가 하루 일을 빠지면 퍼퓨머가 곤란해지는 걸까, 싶었다. 어쨌든 퍼퓨머의 조수 중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고.


"저도 수십, 수백 가지 꽃 향기를 맡아봤어도 퍼퓨머 선생님 정도로 상세하게 구분하거나 원하는 향을 만들어내지는 못 하니까, 퍼퓨머 선생님이 하루 일이 안 되시면 그 날 환자분들한테 아로마테라피는 절대로 못 해드려요. 제가 이것저것 하고는 있지만 대부분은 선생님도 하실 수 있는 일이기도 하구요."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원에 상주까진 아니어도 일을 도와주는 오퍼레이터들이 몇몇 있기야 할 것이다. 그래도 그 안에서 어느 정도 일이 나누어져 있는 걸 생각하면 레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사람들이 못 하겠지. 아까 왔던 어린 스즈란은 할 수 있는 일이 더 적을 테고.


그런데 이 온실, 관리자는 레나로 되어 있었던 것 같지만서도 포덴코가 맡고 있는 실무도 많았을 텐데.


"그러니까 뭘 줘도 퍼퓨머는 좋아하지만, 술은 안 된단 말이지."


"네. 저도 선생님을 오래 뵀지만 그런 취향이라던가는 잘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아니, 나도 몰라서 물어본 거니까. 그래도 뭘 선물하면 안 되는지는 알았으니 아무것도 모른 건 아니지. 고맙다."


"네. 휴일 잘 보내세요."


포덴코의 배웅을 받으며 온실을 나오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사정없이 온몸에 달라붙기 시작해서 외투를 껴입어야 했다. 그렇다 해도 복도라 그런지 완전히 따뜻해지진 않아, 종종걸음으로 식당으로 향했다. 역시 저 안은 계절이라던가 곧잘 잊어버리게 된다.




오늘 점심은 우르수스식 스튜 메인에 디저트는 시에스타 제철 과일로 만든 생과일주스였다. 이 추운 날씨에 스튜로 속을 데우고 얼음 갈아넣은 과일주스로 다시 온몸을 얼린다니, 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 식단일까 싶었다. 보나마나 한 끼에 든 영양성분만 문제없으면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눈에 안보이는 모 살카즈 메딕이 한 짓이겠지만.


"그래도 맛있네."


두 그릇째 스튜와, 같이 곁들일 빵을 받아와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평소 먹는 따뜻한 음식이랄 게 주로 인스턴트다 보니 겨울을 버틸 만한 식단이 나오면 조금 더 먹어두는 게 습관이 된 모양이다. 점심 충분히 먹고, 속도 든든히 데웠겠다 모처럼이니 저녁 시간까지 좀 자 둘까.


"안녕, 박사. 앞에 자리 없지?"


입에 두 숟가락째 스튜를 먹으려는 차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에 방금까지 데우고 있던 속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드니, 몇 주 전 사무실에서 깽판을 놓은 필라인 여자애가 스튜 그릇과 빵 접시를 들고 서 있었다.


"너, 너...."


말도 제대로 안 나온다. 어떻게 이렇게 뻔뻔한 걸까. 비무장인 사람 하나를 아츠로 벽에 처박아놓고, 아무렇지 않게 겸상을 하자고?

여기서 너 때문에 무슨 일이 터질지 어떻게 알고. 당장 메딕 오퍼레이터 몇 명이 식사하다 말고 이쪽을 흘끗흘끗 보는 게 벌써 눈에 보인다.


"그렇게 멀리하지 말라고. 그 여자도 없고, 나도 밥 먹을 땐 사람 안 건드리니까. 아무튼 앉는다?"


"너 눈치라는 게 있으면 저쪽 좀 봐라."


슥 하고 메딕 오퍼레이터들이 있는 곳을 건성으로 본 나이트메어가 고개를 까딱이고는 대꾸했다.


"안 한다고. 내가 식당에서 난리치는 거 봤어?"


물론 그런 일은 없었지만. 그리고 식당에서 깽판쳤다간, 메딕이 아니라 한 손으로 방공호 문짝 들 수 있는 여자애가 가만 안 있을 거다.

그렇다 해도 가해자가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피해자 앞에서 밥을 먹겠다고 할까. 이건 로도스 안에서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닐 텐데.


"뭐, 맘대로 해라. 사람 쥐어패진 말고."


될 대로 되라지. 일부러 찾아온 사람 쫓아낼 정도로 야박하진 못 하겠다. 생각해 보니 글로리아였으면 자기가 한 게 아니어도 나하고 대놓고 밥 먹자고 하진 못하겠구나.

몰라. 뭐든 일어나면 누구든 해결해 주겠지.


"그랬다간 내가 흠씬 얻어맞고 오늘 점심도 못 먹게 될 거니까. 그럼 앉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 맞은편에 앉은 나이트메어는 간단히 식사 기도를 올렸다. 그 호전성과 성깔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신앙심이나 먹을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있다는 건 또 생각 외다. 거의 굼이 밥을 남겼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헛소리지 않을까.

거기다가 기도를 끝내자마자 손에 빵을 올려 아츠로 산산조각내는 것도 상당히 깬다.


"...."


영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 달아서 지나간 건 차치하고 잠깐 마술 같은 광경에 식사하는 것도 잊고 하는 짓을 보게 된다. 이번에는 빵 조각을 스튜에 부숴 넣고 같이 나온 잼을 그대로 퍼서 스튜에 털어넣는 것이 아닌가.


"왜?"


내가 보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는지 잼 그릇을 내려놓던 나이트메어가 볼멘소리로 물었다.

지긋이 보고 있던 건 미안하지만 하도 신기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 와서 얘한테 미안할 게 있기는 할까.


"스튜를 그렇게 먹는 방법도 있구나 싶어서."


딸기잼을 스튜에다 집어넣는 건 몰라도, 빵을 부숴서 넣는 건 생각도 못 했다. 기껏해야 찍어 먹는 정도로 생각했지.

나중에 써먹어봐야겠다.


"이 빵 너무 부드러워서 아츠로 잘 안 부서져."


"손으로 찢어도 되는 거 아냐? 나이프도 받아올 수 있고."


"난 나이프 쓰지 말래. 그리고 좋은 게 있으면 써야지."


그제야 스푼을 집어든 나이트메어가 식사를 시작했고, 나도 불안한 눈으로 앞을 보며 스튜를 퍼서 입에 넣기 시작했다. 나도 겨우 식사를 계속하려고 숟가락을 놀리기 시작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앞에 두고 있는 판이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소화는 되는지 알 수가 없네.


"그러고 보니까 그 여자한테 말했어?"


"뭘?"


"내가 그 여자에 대해서 말한 거."


순간 뱃속에 집어넣은 게 넘어올 뻔했지만 어떻게든 눌러참았다. 몇 주 전 일인데도 아직도 꿈에 나올 정도고, 더구나 퍼퓨머를 의식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인 차인데.


"....아니."


"응? 의외네."


"차마 내 입으로 말해주진 못하겠더라고."


미치겠다. 스튜 괜히 더 받았다. 

그냥 한 그릇만 먹고 떴으면 이 미친 고양이 볼 일도 없었고, 먹은 걸 게워낼 뻔한 일도 없었을 텐데.


"음? 진짜로 그 여자가 좋아진 거야?"


"모르겠다."


애매하게 대답했다. 괜히 긍정했다간 이상한 데서 난리칠지도 모르고,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얘가 레나를 인질로 잡을지도 모르니.


"뭔 생각 하는지 모르겠는데, 난 그 여자랑 그 여자가 만드는 향이 싫어도 죽일 정도는 아니야. 최소한 선이란 건 지킨다고. 그때 너 어디 안 부러지고 끝났잖아?"


말은 맞지만 네가 할 말이냐.


"그러고 보니 그 여자가 당신한테 방향제 줬지? 그래서 어떻게 그 여자한테 보답할지 고민 중이고."


"....뭐?"


어찌저찌 집어넣은 스튜가, 생각도 못한 말에 또 넘어올 뻔했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애초에 레나가 나한테 방향제 줬다는 것도 포덴코만 알고 있는 걸텐데.


"그 불포족 여자애 있잖아. 당신한테 뭘 줬다고 하더라고. 그 여자가 누구한테 줄 만한 거라면 자기가 만들 수 있는 거겠지. 그리고 당신 성격이면 받은 걸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거고. 그걸로 추측한 거야. 흐음. 그 정도 관계인 건가."


"...."


범인은 스즈란인 모양이다. 글로리아 만났던 그 잠깐 사이에 나이트메어가 튀어나왔나 보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어린 애한테 해코지를 할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역으로 그 애한테서 내 이야기를 들었을 줄은.


어째 얘는 갈수록 기분나쁘다. 다 됐고 그냥 메딕 오퍼레이터든 굼이든 불러서 얘 자리를 옮기게 해 버릴까 싶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고 식사 중이니 쫓아내 달라곤 못 하겠고.


"그 여자, 휴일도 없이 환자를 봐 주고 있어."


내가 깨작깨작 먹고 있는 사이, 스튜를 다 비운 나이트메어가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하며 나이트메어의 얼굴을 보니, 너무 차가운지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있다. 한참 따뜻한 거 먹다가 바로 차가운 걸 집어넣으니 그렇겠지.


"다니다 보면 당신도 휴일이 없는 것 같지만 그 여자도 휴일이 없다고. 그 뒤론 알아서 생각해. 말동무 되어줘서 고맙고, 난 간다. 그러고 이 추운 날에 어떤 정신나간 사람이 이런 걸 만든 거야."


말동무고 뭐고 자기 혼자 떠든 것 같은데 말이지. 그리고 나는 밥도 제대로 못 먹었고.

나이트메어는 주스를 도저히 못 먹겠다고 생각한 건지, 싹 비운 스튜 그릇에 주스를 들이붓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퇴식구 쪽으로 갔다.


식당에서 나가는 나이트메어를 멍하니 보고 있자니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불안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던 메딕 오퍼레이터들도 그제야 식사를 계속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쪽을 보며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자, 메딕 오퍼레이터들 중 몇 명이 그걸 보고 대답으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어쨌든 나 때문에 저 사람들이 식사도 못하고 마음고생 한 거니까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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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퓨머 패러독스에서 뽀댕이가 퍼퓨머를 부르는 호칭은 중섭 기준 '언니'였는데, 사실 상사/부하 내지는 스승/제자 가 맞지 않나 싶어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설정했음. 스즈란이 다른 사람들을 언니라고 부르는 시점에서 아마 한국서버로 넘어오면서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상사/부하인데도 형/언니 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를 그렇게 칭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해석은 각자 하기 나름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