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하늘에 더는 볼 풍경이 없었다. 힘주어 눈을 감은 박사는 무덤 사이를 낮고 빠르게 지나가는 듯한 바람 소리를 들었다. 당장 치열했던 교전이 중단되어 밖으로 나온 박사는 단순한 로도스의 리더가 아니었다. 죽어갔던 이들, 소중한 오퍼레이터의 비석이었다.


***


해가 진 후 시계는 8시 30분을 가리켰다. 네모 칸에 열심히 체크 표시를 하던 박사가 아미야에게 무전을 했다.

"아미야, 제 방에서 바이올린을 켜줄 수 있나요?"

"무슨 일로요?"

"그냥, 기분전환 하고 싶어서요. 9시부터는 조용히 해야 하니까 지금 말씀드렸어요."

잠깐의 침묵을 두고 박사의 무전기에서 음성이 들렸다.

"박사님, 습기 먹었는지 바이올린 상태가 안 좋아요…죄송해요. 플루트 연주 쪽에 달인이신 샤이닝 씨를 모셔올게요."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리고 얼마 안 되어 노크가 들렸다. 흰 머리카락을 흘려 놓은 샤이닝이 옅은 미소를 띠며 플루트 상자를 세로로 쥐고 들어왔다. 악수를 건넨 박사는 비교적 낯선 오퍼레이터 앞에서도 털털하게 웃어 보이려 노력했다.

"샤이닝은 참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오랜만이란 말은, 시간이 지나도 기억하고 있을 때 나오는 말이죠.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나치게 환상적이지도 않은, 약간의 신비로움으로 분위기를 잡은 연주가 박사의 고막에 붙었던 음산함을 날렸다. 플루트라는 악기가 낼 수 있는 본연의 소리에 더없이 충실한 연주였다.

"아주 좋아요! 5분 새에 분위기를 바꿔놨어요."

"과찬입니다. 여기서 제일가는 음악가 아미야 씨 대신, 박사님 앞에 나온 것도 영광입니다."

악기를 정리하고 박사에게 정중히 묵례한 샤이닝이 유유히 방을 빠져나갔다. 박사는 샤이닝이 연주한 노래를 마구 흥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아미야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무전기를 들었다.

"덕분에 음악 잘 들었어요.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막귀인 저도 노래를 곧잘 외웠어요!"

"박사님께서 즐겁다고 하시니, 다행이에요."

"가끔 이럴 때마다 음악가가 부러워요."

그러나 이 송출 뒤엔 답이 오지 않았다.


***


다음 날 박사는 켈시한테 끌려갔다. 소음 규제는 아슬아슬하게 지켰어도, 박사의 위치를 이용해서 오퍼레이터에게 철없이 악기 연주를 시킨 게 이유였다. 아미야가 불만을 품고 이른 건 아닐까 하며 박사는 약간 배신감이 들었지만, 어제 '음악가가 부럽다'는 말에 답장을 안 했던 일도 떠올랐다. 이런 사안을 허투루 다루기 싫었다. 박사는 상담하려고 집무실에 아미야를 불렀다.

"요즘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두리번대다가 조용히 가방에 손을 넣은 아미야는 뭔가 주섬주섬 찾다가 얇은 책 하나를 건넸다.

"…이거, 맡겨주실 수 있나 해서요."

박사는 몇 초간 제목을 유심히 살폈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였다.

"한 달 뒤 사일런스 씨랑 함께, '로도스 정기 축제'에 바이올린 주자로 깜짝 등장하고 싶어서 몰래 연습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최근에 이것만 건드리는데, 누구라도 연주를 듣는다면…"

아미야에게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당황할 고민도 아니었다.

"알았어요. 연습할 때마다 몰래 주면 되죠?"

"그렇게 해주세요."

고개를 들고 머리카락을 휙 넘긴 박사는 다정하게 물었다.

"곡이 궁금하긴 한데, 찾아도 되나요?"

"네? 그건 좀…"

"제가 누구겠어요? 박사잖아요!"

"…허락할게요. 비밀은 지켜주세요."

손 인사를 한 박사는 아미야가 문을 닫자마자, 바로 곡의 제목을 입력해서 검색하고 음원을 찾았다. 그 곡은 편안하면서도 강인했다. 손에 든 악보를 숨기려던 박사는 멈칫하고 다시 책상으로 돌아왔다. 이걸 보며 곡을 연주하는 게 기본적인 원리였다. 박사는 신기해서 그 책을 폈다. 그러나 직접 그 악보를 본 박사는 음원을 즉시 끄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머리가 슬슬 아파지기 시작했다.


이런 이상한 기호들을 난생처음 보았는데, 머릿속에서 노래가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


이틀 만에 10분이 넘는 멜로디를 완전히 외워버린 박사는 어안이 벙벙해서 일도 손에 안 들어왔다. 욕조에 온수를 받아놓고 들어갔는데, 피어나온 안개에서 그 악보란 녀석이 그려질 정도였다. 목욕을 마치고 다시 업무를 준비한 박사는 계속 콧노래를 부르다가 초인종에 놀라서 사레가 들렀다.

"콜록! 누구…누구세요?"

문을 열더니 눈앞에 추가 서류를 들고 있는 아미야가 머리카락을 느리게 긁고 있었다.

"익숙한 노래가 박사님 방에서 들렸는데, 기분 탓인가요?"

"기분 탓이에요."

아미야는 팔을 붙들고 박사의 눈동자를 맑은 시선으로 구석구석 닦으며 보았다. 외워서 노래 부른 걸 들킬까 봐 박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박사님, 악보 읽을 줄 아세요?"

"계이름도 모르는데…."

아미야는 잽싸게 문을 닫고 악보를 펴서 박사에게 내밀었다.

"다시 노래 불러보세요."

갑자기 들이대는데, 자신감이 샘솟을 리 없었다.

"그럼 저기 미 플랫, 아니지. 저 음표의 음은 뭔가요? 목소리라도 내 줘요!"

마지못해 박사는 입을 열고 오선지에 그려진 음 중 아미야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을 그대로 내뱉었다. 그렇게 실험 몇 번을 행한 끝에 아미야는 제자리에서 마구 뛰었다.

"박사님, 박사님은 어쩌면…"

아미야는 문을 박차고 나가서 박사의 손을 이끌고 로도스 아일랜드 내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언니! 아니, 박사님!"

그녀가 박사를 껴안고 빙그르르 돌았다. 몇십 명의 다른 오퍼레이터가 그들을 일제히 보았다.

"이러다가 혼나요!"

"혼나든 말든 상관없어요. 박사님에게 이런 소질이 있었다니…"

아미야는 감격에 겨워서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소질은 무슨 소질이에요? 자자, 어서 돌아와요. 훈련 어떻게 준비할지 회의해야죠."

박사는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아미야는 오해의 절정에 달하는 발언을 선포하듯 질렀다.

"박사님…아니, 저 언니는 제가 키울 거예요!"


****


박사는 켈시한테 다시 끌려왔다. 이번엔 아미야도 옆에 있었다.

"아직 교전이 끝난 게 아닐 텐데?"

"죄송합니다."

"그래. 박사는 그렇다 치자. 아미야, 이번엔 네가 해명할 차례야."

켈시는 양 눈썹 바깥쪽을 번갈아가면서 튕겨냈다.

"켈시 선생님, 절대음감이라고 아시나요?"

"…절대음감? 저 계이름도 모르는 문외한에게 음감이 있다고?"

"네. 어쩌다가 악보를 보여 드렸는데, 박사님께서 단 이틀 만에 노래를 다 외워서 불러냈어요. 그것도 정확한 음높이로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듣는 자세로 별 미동이 없던 켈시는 아미야의 얘기를 전부 들었다. 그리고 박사를 흘겨보았다.

"박사, 음악을 배운 적이 있나?"

"…떠오르지 않습니다."

박사의 기억에 그런 일은 없었다. 박사는 동면으로 기억을 잃은 사람이었고,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 사건이 많았다.

"그런 복잡한 악보를 읽을 정도면 어렸을 때부터 배워야 했지 않나?"

"그저 악보를 어쩌다가 봤는데 노래를 부를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켈시는 피식 웃고 아미야에게 손사래를 쳤다.

"아미야, 들었지? 그냥 장난이고 우연이야."

"…."

아미야는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연이 아니에요. 박사님께서 숨길 수 없는 근원적인 본능에 가까워요. 지휘 능력에 맞먹는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자신 있게 의견을 피력하는 아미야를 보면서, 박사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실감이 영 안 났다, 어떻게든 박사에게 음악적 능력이 있다고 설명하는 아미야가 기특하면서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선생님, 박사님의 능력은 무시할 수 없어요. 광석병의 정신적 치료에 보탬이 되기는 물론, 좋은 취미이자 큰 협상의 무기가 될지도 몰라요."

켈시는 펜을 들고 휙휙 돌리다가 내려놓았다. 이윽고 한숨을 두세 번 쉬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박사, 네게 새로운 임무를 추가로 부여한다. 음악을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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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독타는 여자임.

많이 부족할지 모르겠는데, 암튼 첫 화 읽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