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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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돌아왔다 리씨빙

가능하면 니엔이랑 시 배경스토리 + 화중인 스토리 읽고 오는걸 추천함 




시 그녀는 얀데레다 5장  "상념, 그리고 목소리"

 


 

“니엔 그 갈갈이 찢어죽일년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텐데.”

 

내기에서 졌으니 일전에 약속한대로 로도스라는 곳으로 오긴 했다만 지금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골을 울리며 염국에 있던 안식처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박사라는 인간 때문에 통 집중을 할 수가 없다. 딱히 일을 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공간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방해다. 게다가 원래도 숙면은 잘 취하지 못했지만 로도스에 오고 나서는 더 심해져 이제는 한숨도 통 잘 수가 없다. 

 

“왔어?”

 

회색톤의 업무책상에서 이쪽을 잠시 보며 짧게 한마디 건네고는 다시 서류작업에 몰두하는 박사. 그저 보기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간 있었던 일들을 겪고도 어찌 그렇게 태연히도 있을 수 있는 건지 하다못해 천지신명에게 묻고 싶을 정도다. 저런 뻔뻔한 인간이 너무나도 싫다

 

“싫어도 와야지. 어쩌겠어.”

 

어깨를 넘어와 가슴을 덮은 머릿결을 한손으로 쓸어넘기고 착석. 벼루와 먹, 그리고 화지 모두 어제 두고 간 제자리 그대로다. 이제 남은 것은 영감. 영감이 필요한데 정말이지, 이 칙칙하고 곰팡내 날 것 같은 방은 도무지 창작활동에 도움이 되질 않는다. 눈앞에 어른거리던 푸르른 산천초목도 다양한 인간군상들도 이 방 안에 있으면 자취를 감추어, 가느다란 실오라기 같은 빛 한줄기도 들지 않는 구천을 홀로 떠도는 듯한 느낌이 든다. 박사는 항상 이런 시궁창 속에서 매일 한나절 동안 업무를 보아왔던 것인가. 박사를 보자마자 치솟았던 울화가 가라앉자 이제는 호기심이 살포시 고개를 든다. 박사는 도대체 뭐하는 인간이길래 이런 고통을 자처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니야.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이 없어. 그 날이 오기 전까지 한 폭의 그림이라도 더 남겨야 해.'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 고개를 조금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뜬다. 그리고 혹시나 모를 상념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크게 심호흡 한번. 늘 하던 버릇처럼 심호흡을 한 후 턱을 괴고 있으면 새로운 구상이 제 발로 찾아와 창조의 숨결을 그리는 손을 살포시 떠밀어 준다.

 

‘이번에는 극동의 바람인가.’

 

염국 남부 해안가 절벽에는 이따금씩 바람의 방향이 바뀌곤 한다. 그곳에 가본지는 매우 오래 되었지만 운이 좋아 풍향이 바뀌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지. 항상 대륙의 산맥을 타고 내려와 새들을 실어 나르던 내풍이 잠시 외풍에게 길을 터주는 그 순간, 어디에서 온 어떤 이든 간에 청명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자부할 수 있다. 먼 길을 달음박질해 온 극동의 바람에게 염국의 내풍이 수줍게 길을 터주는 모습이 자아내는 흥취는 결코 난폭하지 않으며, 귀빈을 대접하는 듯한 그 움직임은 우아하고 고풍스러우면서도 온화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그 둘의 만남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절벽을 우악스럽게 깎아내리던 파도도 그 순간 만큼은 잔잔한 노랫소리로 바뀌어 귀를 살랑살랑 간지럽혔다.


 


‘아직 뭔가 부족한데…’

 

기대하고 있던 감상이 불현듯 찾아와 손을 밀어주어 그 움직임을 음미하고 있던 찰나, 다소 흐릿한 기억이 이것으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붓이 절벽의 끝에 다다랐을 때 어렴풋한 기억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시상을 건네주었다.

 

‘그래… 그 어리석은 늙은이랑 이곳까지 함께 했었지.’

 

내 호수를 쓰다듬는 바람을 바꾸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호수의 표면에 파문을 일으키기엔 충분한 가르침을 주었던 땡중. 그녀의 스승과 절벽에서 경치를 함께 감상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 어렴풋한 기억에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는 것이 느껴진다. 즐거웠던 것일까? 오래 되기도 했고 도중에 헤어져 기억이 색이 많이 바랬지만 이 장면 만큼은 아직까지도 머리속에 남아있는 모양이다. 

 

절벽의 아래 강과 바다가 만나는 어귀에 매어 둔 일엽편주, 그리고 그 어리석은 늙은이를 그려 넣는다. 쾌청한 하늘아래 두 바람의 연회를 보며 평온한 감상에 잠기는 둘은 당시에는 별 감흥이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제 와서 돌이켜 보니 다소 신선한 감상을 준다. 그리고 이제 배경을 그리고 여백에 간단한 글귀를 적어 넣으면 또 하나의 기억, 나의 존재의의가 완성된다. 혹자는 명화라고 칭송할 것이며 혹자는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풍경화라 폄하하겠지. 하지만 심안이 없으면 진면목을 꿰뚫어볼 수 없으며 그림과의 완전한 공감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마치 군맹무상 같구나. 그런 인간은 무시하면 그만이다. 다만, 나는 나의 정신을 그려낼 뿐. 세간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화가야 말로 거장이 아닌가.

 

똑똑.

 

마침 붓을 손에서 놓는것과 동시에 노크소리가 들렸다.

 

“박사님.”

 

매일마다 홍차를 들여오는 박사의 경호원이다.

 

“이런 곳에서 주무시고 계시다니 실론님과 마찬가지로 전혀 경계심이 없는 분이시군요.”

 

필라인은 잠시 박사를 보더니 단잠에 빠진 것을 발견하고는 뭐라 뭐라 중얼거리더니 다기세트를 소파 테이블 위에 두고는 박사가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외투를 집어들고 박사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로도스 기지에 있더라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박사님.”

 

업무책상에 쓰러져 꿈나라에 가 있는 박사에게 외투를 덮어주고는 이쪽으로 눈길을 주며 고개를 끄떡 한번 하고는 다시 방을 나갔다. 아마도 인사를 한 것이겠지.

 

다시 박사를 바라보니 잠에서 깰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까 까지만 하더라도 업무에 열중이던 그가 어느새 잠들어버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잡념이 머리속을 비집고 들어오는구나. 꿈은 인생과도 같고, 두루마리에 그리는 것 과도 같지. 나도 한숨 자고 나면, 얼마나 긴 세월이 흐르게 될까.

 

‘박사, 너는 면(眠)과 몽(夢)이 두렵지 않은 건가. 나는 두려워서, 그리고 초조해서 잠조차 제대로 청하지 못하는데 너는 개의치 않는 모양이구나.’

 

제대로 잠을 청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존재론적 위기감에 눈꺼풀을 편히 붙이지도 못하고 늘 초조함과 불안감에,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회의로 밤을 지새우는 것이 익숙해진지 오래. 니엔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아직 크나큰 숙제로 남아있다. 겉으로 보건대 달관한 것 같지만 언니 성격을 생각해보면 포기한 것은 절대 아니란 말이지. 어쩌면 나를 로도스로 부른 것과도 관계가 있을지 모르겠다.

 

쾅!

 

그렇게 좋을대로 생각에 잠겨있자니 별안간 문이 세차게 열리며 방 안을 가득 메운 상념을 산산히 깨뜨렸다.

 




“박사! 뭐야. 또 자냐. 좀 일어나아~!”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상념의 주제가 눈 앞에 등장했다.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바로 박사한테 직행. 그리고는 팔을 잡아당기며 억지로 깨우려 한다.

 

“어음…. 으으… 어? 니엔? 여긴 무슨일로…”

 

박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니엔을 바라보며 눈을 비볐다.

 

“뭐긴 뭐야. 같이 쇼핑하러 가자. 자, 빨리!”

 

“벌써 쉐라그에 도착한거야?”

 

“잔말 말고 빨리 나와 박사.”

 

박사가 완전히 잠에서 깨자 따라오라며 의기양양하게 발을 내딛는다. 썩을년. 항상 엉뚱한 시간에 생뚱맞은 이유로 항상 나를 방해했었지. 박사는 갑작스러운 언니의 내방에 어리둥절한 모양인데 따라가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혼자 있으면 나야 편하지.

 

“가봐.”

 

완성한 화지를 두루마리로 말아 보관통에 넣으면서 대충 손짓했다.



 


“시 너는… 안가?”

 

“널 부른거잖아. 애초에 저년이랑 같이 가고싶지도 않고.”

 

“그래도 오랜만에 도시에 정박하는건데 모처럼…”

 

귀찮게 계속 권유해 오는 것을 딱 잘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그러니까 밖에는 안 나간다니까. 안 불러도 된다고, 절~대로 밖에 안나갈거야. 바깥세상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

 

“사람 구경도 좀 하고 그래야지. 밖에 나가는 게 그렇게나 싫어?”

 

완곡하지만 또한 완고히 거절의사를 표명했는데도 거듭 물어보는 그가 짜증난다. 적당히 권했으면 알아서 나갈 것이지 그 고집이 참 대단하다. 그래도 싫은 것과 질문에 답해줄 의향은 별개. 조금은 더 어울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입을 열었다.

 

“싫어하냐고? 좋아하는게 당연하지.”

 

“그러면…”

 

“내가 몇 년을 살았다고 생각하는거야? 화조풍월, 산천초목, 재장윤여, 남녀노소, 다 그릴 수도 없고, 다 볼 수도 없어. 그리고 그걸 뛰어넘을 수 없어서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거야. 난 이미 질릴만큼 충분히 맛보았다고. 흥이 떨어졌어.”

 

저번처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방을 나서는 박사. 조금은 이해했나 싶었는데 전혀 아닌 것 같다. 기대한 내가 바보지.

 

박사가 방을 나가자 전에 없던 적막이 고요를 때리며 같은 방에 있던 이의 빈자리를 실감하게 한다. 종이가 팔락거리며 넘어가는 소리, 박사가 만년필을 놀릴 때 서걱서걱하며 종이에서 나는 메마른 마찰음이며, 가끔은 부산스럽게 다리를 떨어서 나는 리드미컬한 울림, 그리고 커피를 호로록 하며 마시는 소리. 그 모두가 사라진 칙칙한 방은 창조활동을 위한 모태가 되리.

 

“음?”

 

커피하니까 생각난건데 그 경호원이 들여온 홍차가 자신을 마셔달라는 듯 목을 빼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물론, 그 주인은 헐레벌떡 밖으로 나갔지만, 주전자 스툴 밑에 작은 촛불이 스러져가는 홍차의 온기를 아직까지도 보전해주고 있다. 곧 있으면 사그라들 그 온기가 안타까워 아름아름 다가가 주전자에 손을 댔다.

 

‘아직도 따듯하네.’

 

박사가 늘상 하루의 마무리를 함께하는 찻주전자와 찻잔에 다가서니 언제 그랬냐는듯 방금 전까지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향긋한 홍차의 향이 코를 자극해 마성을 발휘한다. 얼그레이. 그 중에서도 상등품. 그리고 벌꿀쿠키. 나도 모르는 새에 어느새 손은 벌꿀쿠키를 집어 입으로 운반하고 있다. 마치 홀린 것처럼, 남의 것을 몰래 뺏어먹는다는 배덕감이 맛을 배가시켜 끊을 수 없는 중독성이 몸을 물들여간다.

 

이번에는 홍차.

 

마지막 생명을 쥐어짜내려는 듯 강하게 타오르는 촛불에 달궈진 차를 호호 불어 입술을 살짝 적셔본다. 재미없으리 만치 담백한 가면 뒤에 숨겨진 깊은 바디감. 역시 상등품의 얼그레이답다. 시장기가 없어 한동안 굶주리다가 어쩌다 한번 국수 한 젓가락을 먹으면 쌓여있던 허기가 엄습한다 했던가. 밀려드는 욕구에 연거푸 손이 간다.

 

“맛있어…”

 

얼마만에 맛보는 차와 디저트인가. 그저 혀를 통해 뇌에서 인지하는 공(空)과 다를 바 없는 색(色). 하지만 혀를 자극하는 그 감상만큼은 진짜다. 그저 꿈과 같은 허상이라 부정하려 해도 당장에 느껴지는 미각만큼은 거부할 수 없는 법.

 

그렇게 한참을 있기가 잠시 상념을 흘려보낸 시간처럼 짧게 느껴진다. 일각이 세번의 가을과 같이 느껴졌던 지난날들에 비하면 쏜살같이 지나간 고독속의 다과회 시간이 야속하기만 하네.

 

“이제 벌써 시간이…”

 

쨍그랑

 

“헉! 허억…”

 

벽에 걸린 시계를 보는데 갑자기 심장이 죄여오는 고통에 그만 찻잔을 놓치고 말았다. 전에도 한번 겪은 적이 있다. 늦가을 아침 서리보다도 더 차가운 냉기가 몸을 감싸고 도는 듯한 이 감각.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나의 아이야. 『우리』의 목소리가 들리느냐. 너를 찾아 몇백년을 헤메었다. 이제 때가 도래했나니 『우리』의 품으로 돌아오거라.”

 

“그렇게… 쉽게 굴복할줄… 커헉!”

 

각혈을 보니 고통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이 실감된다. 이것 때문에 그 방을 나서기 싫었는데. 그간 꼭꼭 숨어 철통같이 나 자신을 가둔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되고 만 것인가.

 

제기랄! 옘병할!

 

“곧 너희 모두를 접하러 갈 것이니 채비를 서두르도록 해라. 그리고 서생원을 방불케 할 실력으로 시궁창 속에 숨어 부름을 거부한 너에게는 특별한 선물을 하나 주도록 하지.”

 

“닥쳐! 꺼져! 누가 그런걸 원한댔나?”

 

나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에 대한 자조와 ‘그것’의 오만방자하고도 안하무인격의 태도에 분노가 치밀어올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모두 허사.

 

“아아아아악! 아파! 그만!”

 

겉으로는 피부가 얼어붙을 정도의 한겨울이 도래한 듯한 추위, 속에서는 화산의 심장부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는 고통이 몸을 안팎으로 찢어발긴다. 이 모든게 내 실책이다. 내기에서 졌다고 니엔과 한 약속을 들어주면 안됐어…

 

아프다.

 

격통이 온몸을 달리며 생명을 꺼뜨리려는 듯 아주 지랄 발광을 한다. 그 피로감에 없던 수면욕구도 다시 고개를 들어 몸을 잠식해간다.

 

언니… 도와줘…



                                                                                           


여담


이번 편은 시의 입장에서 좀 진행해 봤다

어제 새벽에 3시간동안 뇌까리던거 대충 끄적거려서 짧게 검수하고 올림

그리고 원래는 시가 슈바르츠 말 못알아듣는걸 독어로 표기해서 표현하려 했는데 좀....


 아무거나 댓글좀 써줘


다음편은 다시 독타의 입장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돌아옴


어렵다 어려워....




간단한 설정 설명


땡중 = 사가

땡중의 스승 = 사가의 주지스님


로도스 본함은 실버애쉬 가문과의 무역 때문에 정기적으로 쉐라그를 방문한다.


슈바르츠는 박사가 외투를 소파에 걸쳐두고 일하다 책상 위에 쓰러져 잠들면 외투를 덮어준다.






그림 주소


오늘거는 pixiv에서 가져온게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