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링크

https://arca.live/b/hypergryph/31992304?p=1


이번화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이긴 한데 중간중간 바뀌어서 브금 갈아끼워 들으시면 됩니다.


실버애쉬 가문 스토리 읽고 오는걸 추천함








시 그녀는 얀데레다 7장  "내막"

 


굳게 닫혀있던 개인 숙소의 문이 열리고 켈시가 생각에 잠긴 채, 복도 바닥을 바라보며 걸어나왔다. 켈시가 뭔가 생각을 할때 항상 하는 버릇대로 귀를 쫑긋거리기도 하고 좌우로 팔랑거리자 녹차를 금빛으로 물들인듯한 그녀의 털이 그 움직임에 따랐다.


“어때?”

 

“단순한 독감 증세이긴 하나 니엔이 일반적인 병은 아니라고 했듯이 특정 병명을 집어내지는 못하겠어. 광석병과도 전혀 관계가 없고 현재로서는 그저 경과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으니, 걱정된다면 옆에서 간호해 주도록 해. 박사.”


켈시가 업무 일정이 빼곡히 적힌 서류 뭉치를 건네며,

 

“다만, 지금은 진정을 취하고 있지만 언제 또 심해질지 모른다. 그리고, 이걸 아미야가 대신 전해달라고 하더군. 엔시오도스 실버애쉬의 내방을 차질없이 준비하라면서.”

 

“이번에는 아미야도 함께 내방에 응하는 건가 켈시? 대외협력은 항상 아미…”

 

질문을 던지자 켈시가 말을 끊어먹었다.

 

“그건 나도 모른다. 만약 중대한 협정체결이 목적이거나 아미야가 시간이 난다면 함께 하겠지. 아미야의 소관에 따라서 해.”

 

아미야 없이 무역이나 협정체결 같은 대외협력 프로젝트 회의에 홀로 참석하는 것은 아직까지는 좀 버겁다. 석관에서 깨어나고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도록 로도스와 함께 했지만 아직도 인사업무 이외에는 아미야의 도움이 필요한 구석이 많다. 게다가 아미야의 판단과 일처리를 너무 신뢰하는 켈시도 문제다. 최선을 다 하긴 하겠지만,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긴다면 어쩔 셈인가.

 

“정말로 이번 내방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모르나? 켈시. 혹시 추가적인…”

 

“지금 당장은 알 필요 없다. 그가 오면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되겠지. 단지 이번에는 무역협정 이외에도 박사… 너 본인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것 같더군. 그럼…”


 


아직도 일정이 많이 남아있는지 바쁜 걸음으로 수술실 쪽을 향해 걸어가는 켈시를 저지하지 못했다. 남의 말 잘라먹고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는 저 여자를 바쁜 와중에 불러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답답하다. 결국에는 엔시오도스를 만나야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인가. 로도스와 실버애쉬 가문이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고는 하지만 로도스 내부회의에서는 실버애쉬가(家)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렵다며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전히 많이 나오고 있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군.’

 

그래도 일단 그 이전에 간호가 먼저다. 아무리 밉상이라고는 하지만 내 어시스턴트가 아파서 죽으려고 하는 꼬라지는 못 본다.

 

“여전하구나 박사. 노크도 안하고.”

 

“미안. 시. 몸은 좀 어때?”

 

“지금은 좀 나아. 이깎짓 고통으로… 으윽!”

 

내 숙소 침대 위에서 자세를 고쳐 누우려던 시가 아픔에 신음하자 말보다도 손이 먼저 마중나가 움직임을 제지한다.

 

“아직 무리하지마. 이건 주치의로서의 경고야.”

 

“간병인이 아니고?”

 

시가 피식 웃으며 되받아쳤다.

 

“켈시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도 의학지식 정도는 있어. 근데, 니엔이 너의 그 증세는 병이 아니라면서 할 얘기가 있다던데, 혹시 짐작이 가는게 있어?”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이름 ‘니엔’을 듣자 급격하게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그년이 하려는 말이랑 뭔 상관이야.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이딴건 금방… 털어내 버리고… 크흑… 한 폭이라도 그림을 더…”

 

만류에도 아랑곳 않고 일어서려는 시를 팔로 감싸는 동시에 몸으로 막아세웠다. 그리고 그녀가 내켜하든 안하든 다시 한번 니엔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니엔한테서 너희 형제 자매들 이야기를 좀 들었어. 너가 왜 예술 창작활동에 집착하는지도 알고 있고. 다만 지금은 좀 휴식을 취해.”

 

“니 녀석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

 

순간적인 충동에 언성을 높이던 시가 도중에 입을 꾹 닫아버렸다.

 

“미안해… 순간 너무 화가 나서. 너한테 이러면 안되는데.”

 

“훗. 그래도 사과할 줄은 아네? 그동안 신경질적이었던 ‘시’ 씨는 어디간거야?”

 

침대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은 시가 고개를 떨구었다. 다소 생기를 찾은 흑발이 늘어진 사이로 투명한 액체가 똑 똑 떨어졌다. 그리고는 전등 빛을 받아 반짝이다가 이불에 스며들어 작은 자국들을 남겼다. 아플 때는 웃음이 약이라는 말이 떠올라 좀 웃었으면 해서 반쯤 농담을 섞어 빈정거렸는데 역효과가 난 것 같다.

 



“무서웠어.”

 

불로불사의 몸을 가졌으면서도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그녀와 그 일족들이다. 아무리 일반인에 비해 우월한 지고의 존재라 하더라도 감정은 있다. 광석병 환자와 같은 인생을 강요당한 그녀의 감정이 지금 터지기 일보 직전인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도화선이 불이 붙은 채 타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 그런 당신의 인생은 주변 사람들에게서 수도 없이 봐 왔다. 아니, 지금 당장에 로도스에도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다만, 그녀의 터널은 몇 천년을 파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오리지늄 광산 갱도일뿐.

 

“난… 나는… (훌쩍). 어떻게 해야…”

 

“괜찮아. 옆에 있어 줄께.”

 

살포시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자 이내 봇물이 터진 것처럼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흐아아아앙. 끄윽. 끅. 히끅. 흐으윽.”

 

“마음껏 울어. 여긴 너랑 나 둘 밖에 없으니까.”

 

어깨를 빌려주자 옷이 차츰 젖어가는 것이 피부로 느껴진다. 가녀린 소녀가 자신의 운명에 절망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뭐라도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떤 짓이든 할 텐데, 도무지 방법이 없어서 더욱 애달프다. 어제 밤에 처음 집무실에서 발견했을 때 부터 밤 동안 간호를 해서 그런지, 아니면 그 짧은 며칠 사이에 벌써 미운정이라도 들었는지, 그렇게나 표독스럽고 까탈스러우며, 밉게만 느껴지던 그녀가 지금은 지켜주고 싶게 만드는 존재로 바뀌어 어느새 마음 한켠에 자리잡은 것 같다.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께. 내가 도와줄께.”

 

아무래도 니엔은 뭔가 알고 있는 듯하니 찾아가서 물어보면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긍정적으로 생각했을 때, 아마도 문제의 해결까지도 바라 볼 수 있지 않나 싶다. 아니, 반드시 해결할 것이다.  아직까지 니엔 쪽에서 먼저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이쪽에서 직접 찾아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

 

머지않아 통곡에 가까운 그녀의 울음소리가 그쳤다. 아마도 슬픔에 지쳐 잠든 것이리라. 이제는 눈물 대신 새근새근 잠자는 소리가 어깨를 부드럽게 자극하며 그녀의 숨결이 목덜미에 불어와 작은 바람으로 깨져간다.

 

“흣-! 하.”

 

시를 편한 자세로 다시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나중에 깼을 때는 뭐라도 좀 먹을거를 가져다줘야 할 듯싶다. 어찌되었든 환자도 잘 먹어야 기력 회복을 할 수 있으니.

 


“흐이익!”

“에러 발생.”

 

놀래라! 문을 열고 나오자 프틸롭시스도 소스라치게 놀랐는지 삐죽 튀어나온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으며 들고 있던 쟁반도 덩달아 요동쳤다. 잠시 경직되어 있다가 연산을 수정하자 노오란 눈이 다시금 반쯤 감긴 채로 돌아와 단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박사님. 안에 계신 여성분은 괜찮으신가요. 닥터 켈시의 요청대로 물과 추가로 투여할 진통제를 가져왔습니다.”

 

“아 오퍼레이터 프틸롭시스. 지금은 잠깐 저대로 둬. 방금 잠든 참이야.”

 

“알겠습니다. 박사님. 프틸롭시스는 경과를 보고 차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이제서야 딱 한 번 눈을 깜빡이고 의료실로 향하는 프틸롭시스.

 

“그러면 이제… 어디보자…”

 

환자의 편의를 위해 빌려준 어깨가 뻐근해 기지개를 한번 펴고 다음 할 일을 생각한다. 실버애쉬의 내방은 오후로 내정되어 있으므로 잠깐 니엔을 볼 시간이 날 것 같다. 일단은 그 무례한 식객을 먼저 만나보고 실버애쉬와의 회담을 진행하면 될 듯하다.

 

 




 

 

“니엔? 안에 있어?”

 

“들어와.”

 

문이 열리자 염국 전통가옥 풍으로 개조된 숙소가 반겼다. 그리고 그 방의 주인은 방 한가운데에 있는 탁자 앞에 앉아서 초조한듯 손톱을 물어뜯고 있다. 매우 심각한 일인가 걱정되는 가운데 니엔이 여전히 땅바닥을 응시하며 손짓했다.

 

“하… 이거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단 말야.”

 

“뭐가?”

 

사람이 맞은편에 앉아도 여전히 손톱을 마구 물어뜯는게 멈추질 않는다. 한 손톱을 무자비하게 정리하면 또 다음 손가락으로 넘어가며 차례차례 애꿎은 손톱만 괴롭히고 있다. 그것도 잠시, 왼팔을 탁자에 올리면서 혼잣말에 가까운 말을 중얼거렸다.

 

“방법은 아는데… 장소가 기억이 안나. 분명히 가본적이 있는데… 으아아아! 기억이 안 나아아아!”

 

이번에는 손톱이 아니라 머리카락이 대신 희생양이 되었다. 양 손으로 본인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리더니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쭈욱 내려당겨 좀 못생기면서도 웃긴 얼굴이 되었다.

 

“푸흡!”

 

“지금 이게 웃겨? 박사?”

 

돌연 정색하고 이쪽을 바라보는 니엔.

 

“아… 아니, 미안. 근데 아까부터 무슨 소리야? 도통 알 수 없는 소리만 늘어놓으면서 혼잣말만 하면 내가 뭘 아나? 그리고 어제, 할 얘기가 있다면서.”


니엔이 잠시 고개를 돌려 딴 곳을 바라보다가 다시 이쪽으로 시선을 돌려 흔들리는 눈동자로 이쪽을 응시한다. 그리고는 이내 마음을 정한 듯, 짧은 침묵으로 분위기를 차분히 가라앉힌 다음 어느때보다도 더 심각한 얼굴로,


 

“박사. 이건 우리가 알고 지낸지 꽤 되기도 했고, 너를 믿을 수 있는 친구라고 생각해서 말해주는 거야. 염국의, 아니… 어쩌면 세상의 반 이상이 파괴될 만한 사안이니 집중해서 들어.”

 

역시나 어려운 얘기인지 니엔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으며 심호흡을 하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너, 시가 왜 자신의 능력으로 만든 골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지 알고 있어?”

 

“…”

 

“천지신명은 지금 비록 육체가 없고 가느다란 한 가닥의 정신만이 남아있다곤 하지만 그들 추종자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들을 추적할 수 있어. 간단히… 어디 있는지 정도. 그들이 『우리』와 접해 하나씩 육체를 되찾아가게 된다면, 그때는 걷잡을 수 없는 전화가 이 세상을 덮칠거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이런 상황에서는 차분히 경청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특히 몇 백년에 한 번씩 그 늙은이들 힘이 강해질 때가 있는데,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우리』들의 성소, 즉 무덤의 봉인이 약해질 때라는 말이지. 그 봉인을 다시 보강하면 앞으로 몇백년은 또 괜찮을꺼야. 물론 나도 그 몇백년이 지나기 전에 실행할 계획이 있고.”

 

니엔이 무언가 결심한 것이 있는듯 주먹을 꽈악 움켜쥐며 매끈한 하얀 비늘을 자랑하는 꼬리 또한 바들바들 떨었다. 그녀의 몸이 뜨겁게 달궈지며 생명을 얻은 아지랑이가 새하얀 머릿결을 공중으로 쳐올리고 그 끝은 조금씩 선홍색으로 물들어 차오르는 그녀의 분노를 가늠케 한다.

 

“그동안 우리들 각자가 알아서 대처하긴 했지만, 시는 자기 자신을 가두는 것으로 그것을 해결했어. 근데 이번에는 봉인이 약해진 것도 있고, 무엇보다 내가 걔를 꺼내오면서 문제가 생긴거지.”

 

“그러면 이번 일을 잘 해결하면…”

 

내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 끝나가기가 무섭게 니엔이 말을 이어 붙였다.

 

“그래. 다만 그 봉인이 있는 장소가 기억이 안 나. 더군다나 이건 너의 도움도 필요로 해. 박사.”

 

“나? 내가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길래 그래? 근데 너는 아무렇지도 않잖아? 시가 문제라면 시의 그… 성소로 가야 하는거 아냐?”

 

“그렇지는 않아. 그 봉인은 『우리』들 성소를 거미줄처럼 엮어 하나가 파괴되면 모두가 파괴되고 또 그중 하나가 복구되면 다 같이 복구돼. 다만, 티엔(天)의 무덤이 가장 가까이 있긴 한데, 어디인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는게 문제야. 절대 여유를 부려서는 안 되는 사안인데…”

 

치이익. 치익.

 

니엔이 다시 손톱을 입에 가져다 댄다. 이제는 더 뜯을 것도 남지 않은 손톱을 억지로 이빨로 물어뜯어 주르륵 흘러내리는 핏방울이 막 담금질을 한 쇠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손목, 그리고 팔을 지나가면서 열기에 끓어오르다가 기화되어 날아간다

 

“니엔! 그만!”

 

그 광경을 보다 못해 니엔의 팔을 확 낚아채자 놀란 니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뜨거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박사 전용 외투와 장갑에 방열처리가 잘 되어 있는 것도 있고.

 

“피나잖아.”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눈이 마주쳤다. 떨리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자유를 갈망하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잠시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니엔이 잡힌 팔을 슬며시 빼면서 먼저 시선을 돌리고는 헛기침을 하여 목을 정리했다. 

 

“일단은 이 근방에 매우 높은 산이 있는지, 특히 산의 중턱에서 길을 잃어 아무도 정상에 오르지 못한 산이 있는지가 제일 중요해. 그 곳에 티엔의 무덤이 있어. 그것만 좀 알아봐줘. 박사. 준비가 완료되면 바로 출발할꺼야.”

 

이에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신했다.

 

“그럼 난 일정이 있어서.”

 

니엔을 뒤로하고 나오는데 여전히 신경이 거슬린다. 저렇게나 동요하면서 분노로 일그러진 니엔은 본적이 없다. 느낀대로 정확히 말하자면 공포에 잠식되어가는 분노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어쩌면 아무도 저런 니엔은 본 적이 없을지도.

 

“실버애쉬… 실버애쉬…”

 

니엔과의 대화로 다급해진 마음에 무심코 혼잣말을 내뱉으며 발걸음도 덩달아 바빠진다. 니엔의 열기가 내 마음속에도 불을 지핀 것이다. 단순히 세계의 종말 때문만은 아니다. 이제는 니엔도 그녀의 여동생도 남이라고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들 또한 로도스와 함께하는 직원이자 동료이며 친구다. 그들을 다가오는 운명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다고 보장은 못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해주고 싶다.

 

“Requesting Doctor to bridge.”

 

함교로부터의 호출이다. 아마도 실버애쉬가 도착한 모양이다.


 


“박사님. 엔시오도스 실버애쉬님께서 로도스 본함에 도착하셨습니다. 서둘러 준비를 해주세요.”

 

“알겠다. 금방 가지.”



 

 

 



“나의 맹우여. 오랜만이로군.”

 

“실버애쉬.”

 

간단히 예를 표하며 그의 가문명을 불렀다. 비범한 아우라를 발산하는 장신의 저 사내는 언제 봐도 그 위압감이 대단해 도무지 익숙해지지를 않는다. 거리를 두면 좀 덜하겠다 싶어서 지금까지도 적당히 예를 표하며 최대한 선을 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마터호른. 수고가 많았어. 여기서부터는 내가 독대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박사님.”

 

눈보라를 뚫고 오느라 어깨에 눈이 소복이 쌓인 마터호른이 가볍게 인사를 하고 옆길로 빠졌다.

 

“실버애쉬. 내방 예정을 취소할 수도 있었을 텐데, 쉐라그의 눈폭풍을 뚫고 오게 만들다니 로도스 측에서 대비가 미흡했음을 너그럽게 받아줄 수 있겠는가.”

 

“후훗.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맹우여. 쉐라그인에게 얼음 폭풍이란 일상과도 같은 것. 전혀 염려할 것 없다.”


 


어렵게 대하지 않아도 된다며 살며시 미소를 지어주는 엔시오도스가 친애의 표시인지 자신의 폭신폭신한 꼬리로 허리부터 어깨까지 휘감아 톡톡 두드려 준다. 늘상 꼬리털 손질을 하는지 반들반들 윤기가 나는 털이 자아내는 고귀한 자태는 눈보라도 상하게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승강기를 타고 함교 층에 도달하자 제어센터를 가로지르는 복도 끝에 응접실이 보인다. 전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항상 빈객이 오면 응접실에서 맞이하는 것이 관례. 엔시오도스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가는데 얼마 전에 합류한 레인보우 팀원들과 여타 제어센터 직원들이 약식 인사를 하는 것을 다 받아주며 발걸음을 계속하자 어느새 응접실에 도착했다.

 

회담이라 해도 사실 별거 없다. 사전에 양측 기획부서에서 조약 서류를 정리하고 재가를 요청하여 올린 서류들을 회담에서 재차 확인하는 것일 뿐. 아미야가 같이 있으면 확실히 편하긴 하지만 이번에는 나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겠다 싶어서 전적으로 부탁한 듯하다. 게다가 아미야가 준 컨닝페이퍼까지 있으니 괜한 걱정을 한 것 같다.

 

“이번에도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지 알려줄 수 있는가? 엔시오도스.”

 

이번 조약도 어김없이 로도스 측에 너무나도 좋은 조건들로 구성이 되어 있다. 실버애쉬 가문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조약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내가 이 불평등한 조약을 받아들인다는 건… 네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나 실버애쉬가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편한 자세로 등을 기대고 앉았던 실버애쉬가 손을 깍지를 끼더니 얼굴을 가져다대며 심상치 않은 눈빛을 발했다. 쉐라그의 칼바람과 같이 바로 베여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이 이쪽을 되려 긴장하게 만든다.

 

“이번에는 협정체결 말고도 한 가지. 전할 중대 제안이 있다.”

 

그의 엄숙한 태도는 메마른 침을 삼키게 만들기에 충분한 위압감을 시사해 이제는 식은땀 까지도 날 정도다.

 

“나에게 여동생이 둘 있는 것은 알고 있겠지. 맹우여. 그대가 카란의 성녀 엔야 실버애쉬와 혼례를 올렸으면 한다.”

 

‘나? 내가?’

 

적잖이 당황스럽다. 결국 혼담을 꺼내려는 것이 이번 로도스 내방의 주 목적이었단 말인가. 만약 박사 전용 후드가 아니었다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을 것이라 생각하니 너무나도 아찔하다.


 


“어디까지나 ‘정략 결혼’일 뿐이다. 쉐라그와 실버애쉬 가문의 안전을 위해서는 아직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 부분에서 로도스에 조력을 요청하고 싶은데. 어떤가.”

 

여지껏 로도스 측에 우호적인 조항을 넣어가면서 협정을 체결한 것은 빚을 지어 두기 위함이었나. 이쪽에서 딱 잘라 안된다고 말 할 수는 있으나, 항상 협정 체결문서에는 [신뢰에 기반한 상호 조력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조항이 있는데다, 그간 로도스 측에서 흑자를 많이 보았다는 점은 이번 요구를 거절하기 힘들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어디까지나 신뢰 원툴로 이어진 관계가 자칫하면 깨져버릴 수도 있다.

 

“좀 기한을 넉넉히 줄 수는 없나? 중대 사안인 만큼 시간을 두고 결정하고 싶은데.”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급한일이 아니니 다음 회담까지 답을 준비해다오.”

 

쉐라그 내부 정치 싸움에 관여되는 것 또한 문제다. 다국적 기업인 로도스는 그 영향력이 대단하다고는 하나, 한 국가의 국정 문제에 개입하게 되는 순간 일이 골치아파진다. 엔시오도스 실버애쉬는 오히려 그 점을 이용해 쉐라그에서 완벽히 주도권을 잡고 로도스와의 독점계약을 꾸준히 이어나가려는 생각 같다.

 

“이것으로 전할 말도 확실히 전했고 핵심 조약들은 모두 문제 없이 성사된 것 같군. 내년 상반기에도 잘 부탁한다 맹우여.”

 

“하하… 이쪽이야말로.”

 

거의 다 비워서 바닥을 드러낸 홍차를 마지막 한 모금 마시며 대답을 하는데, 수다스러운 담화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여성들의 목소리다. 제어센터의 직원들의 목소리와는 완전 다른.

 

“오라버니?”

 

“엔야.”

 

엔시오도스, 엔야, 그리고 엔시아.  졸지에 로도스에서 가족상봉을 한 세 사람은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 바라보기만 할 뿐. 답답하고도 기나긴 침묵이 응접실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오라버니. 어째서 여기에 계시는거죠?”

 

“너의 혼례에 대해 박사와 의논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쪽이 할 소리다. 엔야. 너는 지금 쉐라그 대사원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무거운 분위기로 일관하며 추궁을 하는 엔시오도스의 말에도 엔야는 조금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이산가족의 만남이 주는 감동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 예기치않게 엔시오도스를 마주하게 된 엔야는 점점 더 안색이 안좋아 지는것이 노골적으로 얼굴에 드러났다


“저를 카란의 성녀로 추대한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제 혼사까지도 마음대로 정하시렵니까? 오라버니는 그저 정치와 권력에만 눈이 멀은 것이 아닙니까!"



엔야가 경멸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점점 앙칼진 목소리로 언성을 높여가기 시작한다. 엔시오도스 실버애쉬와 엔야 실버애쉬의 사이가 안 좋다는 것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는 실버애쉬 가문의 안위를 위해…!”

 

“그만하세요!”

 

“오라버니, 언니…”

 

엔시오도스가 다급히 자기변호를 하려는데 엔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불안한 마음에, 걱정되어 엔시아가 중재를 하려 하지만 엔야가 엔시아와 엔시오도스 사이에 끼어들어 시야를 가렸다.

 

“저도 한 명의 성인이며 지금은 카란의 성녀입니다. 더 이상 제 자유를 뺏어가는 것은 그만두어 주세요 오라버니.”

 

“…”

 

말문이 막힌 엔시오도스가 우두커니 서서 벌린 입을 닫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든 단어를 목구멍에서 끄집어내려다가 도무지 불가능했는지 건조한 숨결만이 새어나올 뿐이다. 그리고는 한숨.

 

“박사. 실례했군. 오늘의 소란에 대해서는 나중에 재차 사과하도록 하겠다.”

 

한껏 어두운 표정이 된 엔시오도스가 부랴부랴 짐을 정리해 응접실 문을 나섰다. 그리고 그런 그를 엔야가 빤히 쳐다보며 끝까지 혐오스러워하는 눈길을 유지하더니 엔시아를 따듯한 손길로 보듬어주고는 내쪽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박사님. 저희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이제는 엔야도 엔시아를 데리고 응접실을 나서서 가버렸다.

 

‘망했다. 회담 중에 근처 쉐라그 지리에 대해 물어봤어야 했는데.’

 

 


                                                        


필자의 독백란



담배 줘


그리고 BGM은 개인마다 글 읽는 속도가 달라서 분량 맞추기 어렵긴 한데 일단은 본인 독서 속도에 맞춰서 추천하는 BGM 링크 걸어둠.


혼담 얘기는 레딧발 실버애쉬 밈 보고 생각나서 집어넣음. 나중에 스토리에 잘 풀어보려고 노력할께


그나저나 상황에 맞게 넣을 삽화 찾기가 참 힘들다. 일러 여기저기 올라온거 출처 올리는 대신 짜깁기 해서 넣는중. 수익 창출만 안하면 문제 없겠지... 꼴잘알에 글도 잘쓰고 그림도 잘그려서 컨텐츠로 비틱질하고 다니고 싶다.


커미션이나 리퀘 넣어서 딱 원하는 그림을 받을까도 생각해 봤는데 그러기엔 돈도 너무 많이 나가고 그림 받을 때 까지도 시간 오래 걸릴 것 같아서 포기함.





간단한 설정


천지신명은 하수인들을 두고 있어 그들과 정신적 교감으로 세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며 은거중.


시가 자신의 능력으로 창조한 특별 공간은 천지신명의 눈을 피할 수 있다.


엔야 실버애쉬 (프라마닉스)는 오빠 엔시오도스 실버애쉬와 사이가 매우 안좋다. 어쩌다 사적으로 만나게 되면 완전 무시하거나 대판 싸우거나 둘 중하나. 이번에는 몰래 대사원을 빠져나와 로도스에 엔시아 (클리프하트)를 보러 놀러 나왔는데 엔시오도스랑 딱 마주친 격.


사실 엔시오도스는 두 여동생을 끔찍이도 아낀다. 그저 가족과 쉐라그의 안위를 위해 총대를 매고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일 뿐. 공식 스토리 보면 알겠지만 가족의 목숨을 구하는 대가로 가족관계 파탄난거나 마찬가지.







그림 주소


녹차단또

https://www.pixiv.net/artworks/89866009


https://www.pixiv.net/artworks/88324495


프틸롭시스

https://danbooru.donmai.us/posts/4124050


니엔

https://www.pixiv.net/artworks/92140771


유일신

https://www.pixiv.net/artworks/88318534

https://www.pixiv.net/artworks/87819226

https://www.pixiv.net/artworks/83633721

https://www.pixiv.net/artworks/83711640


프라마닉스

https://www.pixiv.net/artworks/88258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