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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을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니 계속 한 단어만이 머릿속을 맴돈다. 머릿속이 연탄이라도 끼워넣은 것처럼 흐려지면서 깊이 생각할 수 없게 만들어, 며칠째 업무도 제대로 못 하고 있다. 비서 오퍼레이터들과 아미야에게 잔소리 듣는 것도 이미 100번을 넘었으리라.

고개를 숙여 다시 서류를 봤다. 일은 해야 퇴근하니 어떻게든 잡아보려 했지만, 건방진 뇌가 검은 건 글자요, 흰 건 종이라며 정보를 거부하고 있었다. 머리를 쥐어 뜯어보고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지만, 딱히 나아지는 건 없었다. 빌어먹을 정신 상태 때문에 머리를 벅벅 긁어보았지만 안타까운 내 검은 머리카락만 뽑혀 나온 건 덤이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원.” 

용문 작전이 끝난 지 나흘째. 로도스는 다음 행선지를 위해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한동안 여기 묵었던 용문 경찰들은 자기 직장으로 돌아간 지 오래다. 로도스의 오퍼레이터로서 근무 중인 용문 출신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작별 준비를 마치고 있을 것이다. 그 외의 대원들 역시 용문 시내를 즐기고 있을 테지.

물론 상층부랑 기관부 사람들에게 그런 여유는 없다. 함내 인원 변동 사항 확인에 선용품 확보. 출국서류 준비. 선체 보강을 위한 수리 작업.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일로 바쁘다. 그리고 빌어먹게도 그 모든 결재를 하는 게 나다. 

[박사님. 가드 오퍼레이터 스와이어가 복귀했습니다. 지금 박사님 방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이리저리 의자를 돌리고 있던 찰나, 현문 당직을 맡은 오퍼레이터의 통신이 들려왔다. 일주일쯤 걸린다고 들었는데 벌써, 라는 의문도 들었지만, 그 이전에 내 눈에 보이는 건 엉망진창인 사무실이었다.

비서 오퍼레이터들이 간간이 정리해줘도 테이블과 책상 위에 어질러져 있는 서류더미들. 며칠간 입은 옷과 이불이 널브러져 있는 소파. 설거지할 접시랑 컵이 쌓여 있는 싱크대. 방구석 백수의 방이라 해도 믿을 거 같은 이 상황을 보니 무심코 입 밖으로 단어가 튀어나왔다. 

“이런 젠장...!” 

트램펄린에서 튀어 오른 것처럼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에 널린 옷들을 빨래 바구니에 처박은 다음 이불을 차곡차곡 접었다. 테이블에 있는 서류 더미들을 대충이라도 가지런히 세 묶음으로 나누어 정리했다. 싱크대 쪽이 신경 쓰이지만 시간이 없으므로 설거지는 포기한다. 

“창문 열고 책상 위 정리하고... 다음으로... 세수와 면도를...”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며 방을 황급히 치우고 있더니 머리가 갑자기 잘 돌아가기 시작했다. 일하다가 딴 길로 새서 그런 것인가 싶었지만, 곧바로 떠오르는 새로운 의문점이 기존에 있던 녀석을 밀어냈다.

국가의 고위층을 만나는 경우 같은 격식이 요구되는 상황이 아닌 이상 평소에 누가 오던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는 게 나였다. 청소는커녕 꾀죄죄한 얼굴을 후드로 가린 채 만나는 게 일상이었다. 당장 지금 내 방으로 오고 있는 저 용문 아가씨도 얼마 전까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금 난 이렇게 황급하게 청소하고 있는 거지? 무엇이 두려워서. 무엇이 부끄러워서. 대체 어떤 이유로? 

“윽...!”

순간, 손가락에서 서늘한 감각이 스쳐 지나가며 잡념이 찢겨나갔다. 종이를 들고 있던 엄지손가락에서 흘러나오는 선홍색 액체는, 분주히 움직이고 있던 내 몸에 제동을 걸었다. 

“박사~ 나 왔어!”

재빨리 반창고를 찾으려 했지만, 아쉽게도 타임 오버였다. 문이 열리면서 한동안 못 들은 텐션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인 손가락과 피로 얼룩진 종이를 뒤로 숨기며, 고개를 돌려 내 앞으로 다가오는 여성을 맞이했다.

“어서 와요. 스와이어.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네요.”
“응. 예정되어 있던 스케줄이 비워져서 말이야.”
“괜찮겠어요? 좀 더 쉬었다 와도 되는데.”
“뭐야. 내가 없던 게 좋았던 거야?”
“아뇨, 그게 아니라...”

예상외의 질문에 당황한 내가 웃기기라도 했는지, 스와이어는 쿡쿡 웃더니 내 어깨를 ‘탁’ 치며 농담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고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가 들어간 종이 가방을 내게 건넸다.

“자 여기. 선물이야.”
“이건...?”
“종합 영양제야. 요즘 박사 식사도 제대로 안 하잖아? 이거라도 제대로 먹어야 되지 않겠나 싶어서.”

다치지 않은 손으로 가방을 받아 내용물을 확인했다. 용문 시내 약국에서 비싼 값에 판매되고 있는 고급 영양제 한 박스 세트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의료부가 가지고 있던 영양제 관련 카탈로그에서 본 기억이 있으니 확실하다.

“고맙긴 한데... 갑자기 왜...?”
“뭐기는. 얼마 전에 도와준 거에 대한 답례야.”
“얼마 전이요?”
“왜 있잖아. 그...”

뭘 말하려나 싶더니, 스와이어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감 넘치고 텐션 높아 보이던 행동거지와 목소리는 신기루였던 것처럼, 컬이 들어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갑자기 붉어진 뺨도 그렇고, 뒤에서 불안한 듯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꼬리는 덤이다.

“그... 파티 때... 술 취한 날... 방에 데려... 그...”
“어...”

묵혀뒀던 열기가 몸을 채우는 것만 같이, 얼굴에 불꽃이 일렁였다. 안 그래도 잊으려 노력하고 있었는데, 이 아가씨가 쓸데없이 말한 것 덕분에 선명하게 기억이 되살아나는 거 같았다. 희미한 불빛을 발하는 어두운 방. 칭얼거리는 스와이어의 주사. 풀어헤쳐진 옷 너머로 보인 고혹적인 속옷과 새하얀 속살. 그리고, 잠결에 나에게 말한...

“...미안해요. 괜한 걸 물어봤네요.”

머릿속에서 용문에서 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재생되고 있다. 자극적인 장면이 계속 내 시야를 방해해오면서, 입술이 씰룩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손으로 급히 하관을 가린 채 눈앞의 있는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나랑 같은 심정인지는 몰라도, 스와이어 역시 시선을 허공으로 돌리며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어색함이 방을 채우고 있을 때쯤, 뒤쪽의 열린 창문에서 바람이 들이닥쳤다. 코트를 입고 있어 춥진 않았지만, 손가락의 베인 부분을 꿰뚫고 지나가는 저릿함이 눈썹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쥐고 있던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작게 울려 퍼진 건 덤이다. 

“뭔가 비릿한 냄새가 나는데...”

바람에 피 냄새가 스며든 건가. 스와이어는 허공을 몇 번 두리번거리더니, 곧바로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거리가 조금 있는데도 냄새를 알아채다니. 필라인 종족 특유의 예리한 감각은 가끔 놀라게 만든다.

“박사. 아까부터 오른손을 가리고 있던 거 같은데, 한 번 보여줘 봐.”
“네?”
“잔말 말고 빨리.”

성큼성큼 걸어오며, 스와이어는 내 손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것에 맞춰 나는 몸을 돌리거나 팔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그녀의 손길을 회피했다. 별거 아닌 상처지만, 왜 다쳤는지 취조당했다가는 여러모로 귀찮아질 테니까. 

“뭐야. 뭐길래 안 보여줘?”
“그게... 좀 복잡한 사정이...”

그러기를 두 번. 세 번. 다섯 번쯤 됐을 때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왔는지, 스와이어에게서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끝이 뭉툭하게 뾰족한 그녀의 귀 역시 정측면으로 향하며 강렬한 감정을 표출하고 있었다. 때마침 등 뒤는 서재. 눈앞에는 호시탐탐 내 오른손을 노리고 있는 필라인 아가씨. 궁지에 내몰린 쥐가 이런 것일까?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야!”

회심의 일격을 날리려는 건가 싶었지만, 이번에도 회피 성공.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스와이어의 손바닥이랑 서재가 부딪치니, 굉음과 함께 서재 꼭대기에 인테리어용으로 올려둔 진자 모빌과 옆에 뒀던 책 몇 권이 중심을 잃고 휘청이다가 그대로 바닥을 향해 돌진했다.

“어...”
“스와이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몸은 진작에 움직이고 있었다. 잡아당겨서 구한다고 해도 스와이어의 다리 쪽에 물품들이 떨어져 다칠 수도 있는 상황.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도출해 낸 판단은, 내 등을 방패 삼아 그녀를 감싸 안는 것이었다. 

등 쪽에서 묵직한 충격이 두세 번 정도 느껴지더니, 곧이어 쇠가 대리석 바닥을 강타하는 소리를 필두로 몇 가지의 굉음이 들려왔다. 한동안 청소를 안 한 탓인지, 먼지가 주변에 흩날리기 시작해서 눈이랑 코가 간지러워져, 소매로 입을 가리고 기침이 새는 걸 막았다.

“콜록... 괜찮아요? 스와이어?”
“으... 응. 고마워.”

기침하면서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러더니 내 눈앞엔 모자가 벗겨진 채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스와이어의 머리가 보였다. 

“다친 데 없죠?”
“난 괜찮은데... 박사는...”

서로의 허리를, 혹은 소매를 잡은 채, 우리 두 사람은 뻣뻣하게 굳었다. 스와이어가 고개를 들자, 서로의 얼굴이 눈동자에 비치는 게 보일 정도로 매우 가까이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
“...”

비켜야 하는데. 일어나야 하는데. 머릿속에서 계속 팔과 다리에 명령을 내리고 있지만 도통 소용이 없었다. 바로 앞에서 반짝이고 있는 스와이어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마치 벌과 나비를 유혹하는 꽃처럼 날 잡아두고 있었다. 

비단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만이 아니었다. 화려한 금빛 머리카락 너머로 느껴지는 향수의 잔재는 내 머릿속을 흐리게 만들었고, 옅은 색의 틴트를 바른 윤기 나는 입술은 그녀의 얇은 허리를 잡고 있던 내 손에 무심코 힘이 들어가게 했다. 

내 눈앞의 여성도 나랑 비슷한 듯이,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허리에 올린 내 손길에 반응해, 내 옷소매를 잡아당겨 자신에게 다가오는 걸 유도했다.
 
주변에 들리는 온갖 소음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점점 빨라지는 심장 박동만이, 이 방을 채우는 배경음악이 되어주었다. 

천천히. 점점 가깝게. 양쪽의 입술이 닿기까지, 10센티미터도 남지 않았을 그 순간.

“박사님! 의료 부서에서 약품 리스트 관련으로 전달할 사항이...”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서류를 들고 온 보라 머리의 살카즈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밀착해 있는 우리 둘을 보자마자 그 중요한 서류들을 다 떨궜다는 게 문제지만.

아무 말 없이 우릴 보고 있기를 1초. 상황 판단을 했는지 얼굴이 붉어지기까지 또 1초.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서 말을 다듬는데 또다시 1초.

“시. 시. 실례했습니다아~!”
“잠깐... 기다려! 히비스!! 스탑!!!”

방에 온 지 3초 만에, 메딕 오퍼레이터 히비스커스는 황급히 도망쳤다. 알려지면 매우 위험해질 정보와 함께. 

벌떡 일어서서 쫓아가 보려 했지만, 문밖을 보니 히비스커스의 모습은 이미 사라졌었다. 내 체력에 오퍼레이터를 따라잡는 건 무리다. 나중에 따로 호출해서 사정을 설명하는 게 더 현명한 판단이겠지.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다시 사무실에 들어오니, 바닥에서 일어나 몸에 묻은 먼지를 털고 있는 스와이어의 모습이 보였다. 모자를 꾹 눌러쓴 채 바닥을 바라보고 있어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왜인지 모르게 어떤 기분일지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그... 스와이어...”
“그,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도베르만 교관과 약속이 있어서 말이야!”
“아... 네.”

다음에 보자는 말을 하기도 전에, 스와이어는 황급히 사무실을 뛰어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도 들리는 황급히 걸어가는 듯한 구두 소리는, 몇 초 지나지 않아 저 너머로 사라졌다. 조금 전의 일이 한순간의 꿈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무실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떨어진 물건들을 서재에 올려놓았다. 그 후 의자에 앉아 상처에 딱지가 붙기 시작한 오른손을 물티슈로 조심히 문지른 후, 반창고를 살며시 붙였다. 여전히 피부를 뚫으며 느껴지는 저릿함이 느껴졌지만, 그와 동시에 조금 전에 잡고 있던 그 사람의 얇은 허리의 온기가 남아있는 거 같아, 무심코 손을 쥐락펴락 움직였다. 

사라지지 않은 잡념은, 계속 내게 같은 질문을 던져왔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를 이렇게 의식하게 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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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붕이 한 달 만에 글 쓴다.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미안하다. 취업도 하고 졸업준비도 하느라 좀 바빴음...


한동안 시간 여유 날 거 같으니 꾸준히 쓸게. 기다려준 명붕이 있던 거 같은데 정말 미안하고 고맙다.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