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 오류 지적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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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피곤했던 탓인지 푹 잤지만 알람도 못 듣고 아슬아슬한 시간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처음 했던 날이 우스울 정도로 만족감은 흘러넘치는데, 아로마테라피를 받은 게 의미없을 정도로 몸이 피곤하다. 특히 허리랑 허벅지에 피로가 장난 아니다. 체력이 나름대로 붙었다고 생각했는데, 반 이상은 레나한테 맡겨버렸는데도 처음 할 때랑은 다르게 많이 지친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때는 밤늦게 찾아가서 두어 시간 하고선 끝났다. 하지만 어제는 저녁부터 시작해서 날짜 바뀌도록 해댔으니, 중간중간 쉬었다고 해도 그 시간이 배 이상 길었지. 멀쩡하면 그것대로 이상하려나.


아무튼 레나는 괜찮을지 모르겠네. 어제 아로마테라피 해주고 나서 쉬는 것도 없이 바로 불붙어서 몇 번이나 했는데. 정작 일어나서 바로 사무실로 온 탓에 레나가 어떤지 확인도 못 했다. 


고양이 세수만 하고 서둘러 사무실로 뛰어가 문을 열었다. 오늘 비서 오퍼레이터가ㅡ


"어? 안젤리나. 언제 왔어? 아니, 왜 네가 거기 앉아 있어?"


"어제 밤에. 한동안 멀리 나갈 일 없고, 오늘 원래 비서 오퍼레이터인 사람이 몸이 안 좋대서 아미야가 대신 넣어줬어."


몇 개월만에 돌아온 안젤리나가 비서 오퍼레이터 자리에 앉아 손을 흔들었다.


일정표를 확인해 보니 오늘 비서는 캐터펄트가 될 예정이었다.

....얘가 몸이 안 좋다고 하니까 믿음이 안 가네.


"밤에 오고 바로 비서 오퍼레이터는 피곤할 텐데. 모처럼 돌아왔는데 늦게까지 자고 싶을 거 아니야."


"뭐, 괜찮아. 한 번씩은 이런 날도 있어야지. 눈도 일찍 떠졌고, 할 것도 없었으니까."


생각해 보니 간혹 아침에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일거리는 상자에 담겨서 문 앞에 놓여 있는데 오늘은 그런 것도 없다. 잘 보니 매번 보는 상자가 이미 내 자리까지 옮겨져 있었다. 안젤리나가 아츠로 옮겨준 모양이네.


"음? 박사는 늦잠 잤어?"


"어? 어어. 뭐, 어쩌다 보니."


잠깐 상자가 어디 놓였는지 서성거리고 있자니 안젤리나가 말을 걸며 가까이 다가왔다. 


"뒷머리가 거의 새집이야. 잠깐만 소파에 앉아 봐. 정리해 줄게."


"응? 아니, 괜찮아. 물 한 번 묻혀서 누르고 있으면 가라앉겠지."


"가라앉을 때까지 그럴 거야? 괜찮으니까 와서 앉아 봐."


결국 안젤리나 손에 이끌려 응접 소파에 앉았고, 손가방에서 귀여운 머리빗을 꺼낸 안젤리나는 능숙한 손길로 빗질을 시작했다. 그다지 긴 머리는 아니니 시간이 많이 걸리진 않겠지.


"요즘 어때? 잘 지내고 있어?"


습관적으로 뭐, 똑같지, 라고 이야기하려고 말하려 했다가 깨달았다.

안젤리나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명백히 바뀐 게 있으니까.


다만 왠지 모르게 그걸 그대로 말하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금기나 거부감과는 좀 다른 느낌이다.

....미약한 공포, 일까.


"잘 지내. 네가 없는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어."


될 수 있는 대로 그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생각하면서 나는 우르수스와 카시미어 국경에서 온 감염자들 이야기를 시작했다. 새로운 사람들 이야기에 같은 나이대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고, 있다고 했더니 같이 떠들 사람이 생겼다고 좋아하는 걸 보면 여전히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다.


메신저로서 여기저기 다니면서도 기회가 되면 같은 나이대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하려나. 


"음? 이거 내가 착각한 거 아니지? 박사한테서 좋은 향기 나. 향수....는 아니고, 방향제 냄새가 몸에 배인 건가?"


"어...."


그럴 리가 없는데. 난다고 하면 분명 땀 냄새일 거다. 거기에 일랑일랑 조금이려나.

한참 뒹굴다가 깨닫고 보니 귀신같이 캐모마일 향기가 그걸로 바뀌어 있었다. 슬쩍 물어봤더니 어떻게 알았냐고 되묻고는 더 가차없이 달라붙어온 건 덤이다. 나도 향에 취해서는 좋다고 더 해댔으니 할 말은 없지만.


어째 요즘 어설프게 숨기려다 들키는 일이 많은 것 같다. 물론 방향제만 갖고는 이렇다하게 알 수는 없겠지만, 사실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일 거다. 안젤리나가 어제 밤에 오고, 오늘 어디 달리 가는 일 없이 사무실에 온 거니까. 점심 먹으러만 가도 바로 알겠지.


그리고 사실 스즈란도 스즈란이지만, 안젤리나에게도 고백에 대한 상담이라던가 했었으니, 숨길 수만도 없을 거다.

차라리 다른 사람을 통해 알기 전에 말해주는 게 나으려나.


"퍼퓨머한테서 캐모마일 방향제를 받았어. 그 냄새 아닐까."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고 입은 당연하다는 듯 거짓말을 자아냈다. 거짓말만도 아니지만.


"아, 역시 방향제구나. 그치. 퍼퓨머 언니가 만들어주는 향 되게 좋지. 가방에 넣어놓으니까 편지 받는 사람이 편지에서 라벤더 향기 난다고 되게 좋아했었어. 그러고 보니 이번에도 만들어 주려나. 전에 왔을 땐 다음 날 바로 출발해서 만들어달라고 못 했는데. 됐다. 좀 나아졌네."


방향제 치곤 진하다거나, 아무튼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 이번 건 속아 준 모양이다.


"그럼 시작할까. 하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


대답 대신 콧노래를 부르며 안젤리나는 맨 위에 놓인 서류 한 뭉텅이를 내용도 확인 안 하고선 들고 자리로 갔다.

조용히 그 뒷모습을 보다가 나도 남은 것들 중 맨 위에 있는 서류부터 처리하기 시작했다.




한참 서류들과 씨름하고, 명멸하는 컴퓨터 화면을 보며 슬슬 눈이 피로해지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잠깐 간다거나 뭘 마신다거나 하는 일도 없고, 중간중간 일에 집중이 풀린 틈을 타 전날 밤의 향연을 멍하니 떠올리기도 하며 나른한 오전이 가고 있었다. 그다지 집중하고 있지 않는 것 같은데 어떻게 일이 진행이 되고 있는 걸까.


"박사. 여기 있어. 오랜만에 하니까 좀 걸렸네."


"고마워.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다음은 이건데, 지금 시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뭐 해야 하는지 보고 오후에 시작해줘."


"어차피 시간 남을건데, 조금 이야기하다가 점심 먹으러 가면 안 돼?"


안젤리나 말에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까지 20분 정도 남았다. 요즘 어째 점심시간을 몇십 분 남기고 농땡이를 피우는 날이 많네.

뭐 언제 해도 내 일이고, 오늘 어째선지 잠깐 숨돌릴 틈도 없이 계속 자리에 앉아서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전에 만났을 때 어디 이야기 했더라? 오늘은 어떤 도시가 궁금해?"


옆에 놓인 스툴을 끌어다 앉은 안젤리나가 운을 띄웠다.


"그때 어디 도시 이야기 안 했던 것 같은데."


"어? 그랬던가? 그러면 그때 내가 컬럼비아에서 감염자 자매 입사지원서 받아왔었나?"


"맞아. 지금 언니가 가드 오퍼레이터로 일하고 있고, 아츠로 점성술이랑 플라네타리움 하고 있어. 나중에 한 번 가 봐."


"점성술? 재밌겠네. 언니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리 세상이 재앙과 전쟁의 풍파에 각박해져도 사람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건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물론 그 모든 것들과는 상관없는 도시도 있고, 안젤리나도 여기저기서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테니 매일 전투에 발을 걸치고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감각이겠지.


근데 요즘 생각해 보면 전투라고 할 것도 그다지 없었지 않았던가. 리유니온 일이 수습된 것도 몇 개월이나 지났고.


"본명은 모르겠고, 코드네임은 아스테시아로 되어 있었을 거야."


"아스테시아. 알겠어. 며칠 있는 사이에 한 번 가봐야겠다."


그 말이 끝나고 잠깐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무언가 말하려는 걸 억지로 눌러참고 있는 것 같다.


"....아, 그래. 박사는 가 봤어? 아스테시아라는 사람한테. 점성술이든 플라네타리움....이었나? 어쨌든 그걸로."


"플라네타리움을 보러 갔었어. 퍼퓨머가 아스테시아한테 플라네타리움에 써 보라고 향 샘플을 줬다고 해서 같이 리허설 겸, 피드백 겸."


"음? 박사랑 퍼퓨머 언니랑 그렇게 친했어?"


"일단 퍼퓨머가 향을 줬으니까, 그게 아츠랑 같이 잘 돌아갔는지 보러 온 거 아니었을까? 나보다는 향에 대해 더 잘 아니까."


"아, 그렇겠구나. 괜히 지레짐작했네. 고생 많았네. 어쨌든 로도스 아일랜드 지도자니까 그런 것도 봐줘야 하고."


"뭐 자주 있는 일도 아니니까. 그거 하나하나 귀찮아하면 더 친해지기도 힘들고. 그러는 김에 이야기도 하고, 가끔 곤란할 때 도움도 청하고 그러는 거겠지."


"도움....그렇지. 그럴 수 있지."


안젤리나가 시선을 잠깐 피하고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초조한지 허벅지를 비비고, 푸른색 오리지늄 결정이 돋은 오른쪽 다리가 일정하게 떨리고 있다. 순간 그쪽으로 시선을 주면 안 됐나 싶어서 다시 얼굴을 보니 연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놓았다 하고, 한숨을 쉬고 있다.


"박사. 전에 왔을 때 있잖아....아니, 이건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 줘도 돼. 나한테 물어봤었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어떻게 고백을 하면 좋겠냐고."


결국 억지로 잠가두었던 이야깃거리를 먼저 꺼낸 건 안젤리나였다. 나도 어떻게든 이 이야기를 최대한 늦게까지 미룰 생각이었지만 언제까지고 미룰 수는 없고. 그래도 언제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모른 척 할까? 차라리 다른 사람 입으로 듣게 할까?

아니, 안젤리나는 어쨌든 내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그날 내게 조언을 해준 것이다.


"그랬지."


"그 뒤로 어떻게 됐어?"


천천히, 하지만 조용히. 다그치는 것처럼.


"그러고 나서....생각을 해 봤어. 이 사람한테 고백해도 되는 걸까, 그래도 괜찮을 정도로 이 사람하고 친해졌을까. 몇 번이나 생각해 보고 되풀이하고, 다른 방향으로도 생각해 봤는데....그게 맞았던 것 같아. 조금 돌아갔지만, 이런저런 일도 있었지만. 지금 그 사람하고 잘 지내고 있어. 이 사람하고 보내는 시간도, 추억도, 같이 나누는 감정도. 전부 네 덕분이야, 안젤리나. 고마워."


그 대답에 안젤리나가 눈을 크게 떴다. 코코아가 든 컵으로 코 아래를 가렸을 때와 같은 눈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컵도 없고, 짙게 피어오르던 김도 없어서 안젤리나의 얼굴이 온전히 보인다. 두 뺨에서 핏기가 걷히고, 살짝 벌어진 입은 소리없이 무언가를 되뇌이는 듯 연신 짧게 움직였다.

코랄색으로 칠한 입술이 한참을 떨리더니 겨우 말을 자아냈다. 눈과 얼음을 두르고 나타나서, 코코아를 마시면서 말했던 그 입술이.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한 대답은 의외로 담담하고, 기쁨이라는 감정을 자아냈다.


"정말이야? 잘 됐네. 그 감정 눌러참을 수도 있었는데, 결국 뛰어넘으려 했구나. 잘 됐다. 정말 잘 됐어...."


불포족 소녀가 그때와 같은 순박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 표정을 만들어내려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입은 웃고 있었는데 그 얼굴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으니까.


"어떤 사람....아니, 물어볼 필요 없겠구나. 방향제 냄새가 옷에 이렇게 짙게 밸 리가 없으니까. 잘 됐네. 그 사람 좋은 사람이지. 착하고, 나긋나긋하고, 어른스럽고."


가슴 깊은 곳에서 공포라는 감정으로 빚어진 붉은 여우의 형상이, 구슬픈 울음소리를 냈다.


"잘 됐다....나도 그렇게, 좀 더 빨리 용기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빨리 용기를 낸다고?


잠깐만.


"그럼 그때가 마지막 기회였네. 나는....나는 왜 그 뒤로도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혹시 박사가 고백을 해도 잘 안 될 거라고, 그렇게 되면 내가 옆에 있으면서 빈자리를 채워주고 싶었던 모양이야.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어. 나는 항상 빈자리일 테니까."


ㅡ감염자가 되고서부턴....전부 내려놔야 했으니까.


ㅡ그래도 그 사람은 감염자든 아니든 평등하게 마음을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는데....그 사람도 이미 누구한테 마음을 뺏겼더라고. 


그 말들이 누구를 향하고 있었는지 이제 알았다.

왜 안젤리나의 말은 망가진 축음기처럼 안타까운 소리를 연주했는지.


"그때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안젤리나."


이 사과를 왜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분명 선을 그을 생각이었을 텐데.


"응? 아니야. 그게 왜 미안할 일이야....박사는 자기 마음에 솔직했던 거야. 그 사람이 좋았던 거고, 그 사람하고 잘 되고 싶어서  결국 그 사람하고 잘 되고 있잖아. 아니면 박사가 그 고백이 조금만 더 빨랐어도....아, 아니야. 이건 내가 말도 안 되는 걸 생각했구나. 지금 그건 못 들은 척 해줘."


잠깐 안젤리나의 얼굴에 정말 싫은 걸 떠올린 얼굴이 되었다. 왠지 모르게 그 감정이 나나 레나를 향한 게 아닌 것 같다.

고백을 하지 못한 자신에게? 아니면....


"그래도....좀 아쉽다. 내가 좀 더 박사랑 같이 있었으면 나한테도 기회가 있었을까? 아니, 결국 메신저니까 박사가 먼저 내 마음에서 떠났을까. 왜,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하잖아. 박사가 감염자든 비감염자든 편견 없이 대해 주니까 내게도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만 생각한 게 아니었나 보네."


눈을 뜬 안젤리나가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박사. 나는 아직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할 일이 많으니까, 박사하고 사귈 수 없게 되었다고 훌쩍 가버리거나 하진 않을 거야. 누구누구 말로 이야기하자면....아직 젊잖아?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을 텐데, 이 정도에 꺾이면 안 되지. 다니다 보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날지도 모르고....로도스에 오고서부턴 박사 말곤 아직 없었지만."


어쩌면 감염자가 되고서 잃어버렸던 것 중 하나라도 되찾을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내가 그걸 의도치 않게 빼앗아버린 모양새가 되었나.


"그래도 괜찮아. 사과할 것도 없어. 그 사람한테 더 잘 해 줘.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고, 먼저 들어주고, 할 수 있으면 끝까지 듣고 대답해 주고, 해결책을 찾아주는 것도 좋지만 그 감정을 같이 나눠주고....좋은 일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픈 일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하잖아. 아플 때는 옆에 있어주고, 여자애는 같이, 그게 뭐가 되든 좋으니까 같이 한다는 느낌만 받아도 좋아하니까 같이 할 수 있는 걸 찾아보고. 이 사람이 있어서 행복하다는 것도 계속 확인시켜주고....숨길 것은 숨기고, 그 사람이 말하기 싫어하면 억지로 캐묻지 말고....그래도 할 수 있으면 솔직하게 말해주고...."


그것 하나하나가 전부 자신을 향했으면 하는 것처럼. 그럼에도 안젤리나는 진심으로 나하고 레나의 사이가 오래도록 이어지길 바라고 있다. 설령 그게 자신에게 모진 폭풍이 되어 몰아친다 하더라도.


"그러니까 괜찮아....내가 아니라....그 사람한테 잘 해줘....그 사람한테....괜찮아, 괜찮으니까....잘 해 줘....그러니까....그러니까...."


망가진 축음기가 같은 소리를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그나마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내는 소리의 가짓수도 줄어들고, 노이즈가 끼어간다.

결국 그 마음은 완전히 무너졌고, 남은 것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되뇌임 뿐이었다.


그래선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아니, 그래야 했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안젤리나를 남겨두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이제껏 들은 적 없는, 가장 서러운 흐느낌이 방문을 뚫고 귓속에 사정없이, 후벼파듯이 새겨졌다. 뜨겁게 타는 새빨간 감정은 그 틈새에 들어와 점점 굳어갔고, 빠르게 식어 낙인이 되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문 옆에서 듣고 있는 것도 미안해서 겨우 발걸음을 옮겼다. 귓속에 파고들었던 낙인은 어느샌가 발로 옮겨져 무거운 족쇄가 되어 있었다. 

희미하게 들리던 울음소리는 점심 시간을 알리는 무심한 방송에 묻혀버렸다.




결국 안젤리나는 점심시간이 끝나고 한 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얼마나 울었던 건지 눈이 빨갰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으며 돌아와서는 다시 일을 계속했다.


중간에 멍하니 있는 일도 있었고, 자리를 자주 비웠지만 나는 안젤리나에게 어떤 말도, 위로도 건넬 수 없었다.

지금 와서 안젤리나에게 위로를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안젤리나에게도, 레나에게도 좋을 리가 없다.


안젤리나에게는 알 자격이 있었다.

내 등을 밀어주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나를 위한 조언이었다.


하지만 그 자격이 있다고 해서 그 후폭풍까지 감당하게 두어야 할까?

거짓말을 한다는 건 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럴싸한 거짓말로 넘기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알아버렸다. 물론 선내 모든 사람들에게, 안젤리나에게는 이 사실을 함구해 달라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래서? 그럼 뭐가 바뀌지?


비가 오는데, 약속 시간까지 약속 장소에 가야 한다. 손에 우산도 없고, 비옷도 안 걸치고 있다.

비가 그칠 때까지, 천년 만년 기다리면 언젠가 그칠지도 모른다. 비를 맞을 일도 없을 거다. 하지만 약속 시간은 지킬 수 없다.


비를 맞고 미친 듯이 뛰어가면 어쨌든 약속 시간을 지킬 수 있다. 

옷이 젖으면 마르길 기다리면 된다. 비를 맞아서 감기에 걸리면, 나을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안젤리나에게 그 사실을 전부 말한 후 내게 몰아칠 폭풍도, 지나가길 기다리면 될 것이다.


ㅡ사실 그렇게 고백을 하면 어떻게 되든 그전같은 관계가 되긴 힘들어. 그건 고백하는 쪽이 감당해야 하는 것도 맞아. 그래서 일부러 고백 안 하고 애만 태우는 사람도 있었어.


안젤리나는 그 이상 애태우는 것보다는, 세찬 비를 맞으며 서럽게 우는 것을 선택했다.

스스로 맞서서 부딪혀 깨지고, 관계의 끝과 무너진 마음을 짊어지기로 한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그 무게가 줄어들지는 장담할 수 없다. 감기처럼 한동안 낫는다 하더라도 잊혀질 만하면 또 괴롭힐지도 모른다.


이 자리에서 안젤리나를 달래줘야 했을까 수도 없이 고민을 했다.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해보더라도, 설령 안젤리나에게 지휘자와 피지휘자 외의 관계에서 모질게 대하는 게 되더라도 그래선 안 된다는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




나중에 레나에게서, 안젤리나가 왔었고, 둘이 사귀는 걸 들었다면서, 축하한다고 전해달라는 말을 들었다. 물론 그 안에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는 안젤리나도 이야기하지 않은 모양이다. 

안젤리나는 뭐가 되든 솔직하게 말해주라고 이야기했지만, 이것만큼은 묻어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숨길 것은 숨겨놓고.

말하기 싫어하면 억지로 캐묻지 말고.


안젤리나가 말한 대로 자신이 받을 수 없는 만큼 레나에게 잘해주는 것이, 내가 안젤리나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성의겠지.

그리고 오늘 일을 더 이상 남겨놓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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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이다



오늘은 다른게임 이벤트 뛰고 온다고 좀 늦었음

기다려줘서 고맙고 이번주도 읽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