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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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녹색의 필라인 여성이다. 

 

녹색보다는 하얀색에 가까운 머리카락, 그와 반대로 너무나도 짙은 에메랄드빛 눈동자. 길가를 걷는다면, 열에 아홉의 남성은 한번쯤 뒤를 돌아볼법한, 아름다운 자태는 절로 감탄이 나올법한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외모임에도, 그 곁을 감싸는 분위기는 까칠함을 넘어선 다가가기 힘든 일종의 벽을 치고 있는 것 같다. 아마, 그녀의 벽을 허물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남성은 어쩌면 이 테라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리라.

 

설명은 길었다만, 켈시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외모의 등장에도 박사는 바이저 아래의 표정을 구겼다. 방금 전 까지, 기분 좋게 타찬카와 나눴던 잡담마저 잊어버린 채 박사는 보란 듯이 혀를 찼다.

 

"서로 얼굴 볼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한 건 그 쪽이었을 텐데."

 

로도스에 도는 소문, '박사와 켈시는 사이가 안 좋다.'라는 말 마따나, 두 사람은 사이가 매우 안 좋다. 아니, 사이가 안 좋은 것을 넘어 살벌할 지경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켈시가 박사를 향해 대놓고 적의를 표하니, 박사 역시 자연스레 켈시에게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박사도 기억을 잃었으니 용서 해 달라, 라는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숨김 없는 적나라한 적의까지 웃으며 받아줄 정도로 그는 호인이 아니었다. 아니, 그정도면 호인이 아니라 호구다.

 

계속해서 차가운 기류와 냉전만 오가는 둘의 사이를 보다 못해, 아미야나 와파린은 꾸준히 둘 사이를 만류했지만, 박사는 켈시 입에서 사과의 말이 나오지 않는 이상 사이좋게 지낼 생각은 없었다. 

 

"...그 이야기는 그만 하도록 하지. 지금은 때가 아니다."

 

켈시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박사를 바라보는 눈은 날카롭고, 어둡다. 

 

봐라, 저 녹색 필라인은 항상 저런 식이다. 용건이 있어 찾아오건, 공적인 자리든 사적인 자리건 상관 없이 언제나 따가운 눈총을 보낼 뿐이다.

 

"용건만 말하고 가. 쉬는 시간에도 일할 생각은 없으니까."

 

대놓고 귀찮다는 듯, 가볍게 손을 털어내듯 저으며 박사는 의자를 들려 켈시에게서 등을 돌렸다. 길게 이야기 할 생각은 없다, 라는 자신의 뜻을 행동으로 전했다. 둘 사이에 낀 텍사스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박사도 더 이상 켈시에게 호의적으로 대해 줄 생각은 없었다. 

 

박사의 적대적인 태도에 켈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 대해 따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켈시는 품 속에서 카드키를 꺼내 텍사스에게 건냈다. 그리곤 텍사스의 어깨에 손을 얹고 박사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작게 속삭였다.

 

"...엑시아에게 가 봐라. 그리고 그녀에게 가서 전해. ...1주일 근신형에 번복은 없다."

 

켈시의 말에, 텍사스는 고개를 돌려 켈시와 눈을 맞췄다. 떨리고 있는 텍사스의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너무나도 단호한 초록 눈동자.

 

텍사스는 온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딱히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그 이름을 듣는 것과 동시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으니까.

 

입에 물고 있던 담배도 떨어뜨린 채, 텍사스는 켈시에게서 카드키를 받아 튀어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엑시아, 방금 전 박사가 근황을 물었던 인물. 이 로도스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스나이퍼임과 동시에 오퍼레이터로서의 경력만 따지면 이 로도스의 최고참 중 하나.

 

...그리고, 이전. '라플란드 살해 미수'라는 죄목으로 일주일의 근신처분을 받게 된 인물.

 

텍사스는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차라리 잘 됐다. 박사의 질문에 당황했던 차였다. 박사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였지만, 켈시의 개입이 텍사스로서는 반가웠다.

 

"텍... 텍사스?! 어디..."

 

그 움직임에, 박사는 당황한 듯 그녀를 불러세웠지만 텍사스는 멈추지 않았다.


미안, 박사. 


무엇에 대한 사과일까, 대답을 내놓았음에도 의문 쌓여가게 텍사스는 그 짧은 말만을 남기고 집무실을 떠났다.

 

텍사스가 떠난 집무실에는, 켈시와 박사만이 남았다. 견원지간의 두 사람, 무력으로는 Mon3tr를 보유한 켈시의 승리지만, 박사는 딱히 주눅들지 않았다.


왜인지 몰라도, Mon3tr은 박사를 공격하지 않으니까. 

 

"야. 텍사스한테 무슨 소리를 한 거야."

 

"별 것 아니다. 네가 알 필요는 없... 아니."

 

켈시는 한숨을 픽 내쉬었다.

 

"박사. 지금은 사사로운 감정 싸움이나 할 때가 아니다."

 

다시 한번 한숨. 켈시는 쇼파에 걸터앉았다.

 

"...결국,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건가..."


또 혼자만 알아들을 법한 이상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저 녹색 고양이의 안 좋으면서도 가장 꼴 보기 싫은 습관이다. 


아는 게 많은 것은 알고, 그 지식에 도움을 받은 것도 많아 평소엔 함구하고 있지만 역시 아는 게 많아 머리가 무거우면 입도 무거우면 좋을 텐데 말이야. 박사는 가볍게 짜증을 냈다.

 

품 속에 손을 넣은 켈시는 이내 접어 놓았던 종이를 박사에게 건넸다. 박사에게도 익숙한 물건이다.

 

"...클로저에게 복구해 달라고 했다."

 

"...!"

 

종이를 확인한 박사는 신경질적으로 종이를 빼앗았다. 종이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박사는 켈시의 멱살을 잡았다. 거칠게 잡아 끌여져, 켈시의 옷이 뜯겨질 기세다.

 

하지만 박사의 시선은 그런 속물적인 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짜증스럽게 바이저마저 벗어던진 박사가, 흉터투성이의 외눈으로 켈시를 노려봤다.

 

"사생활 침해는 선을 넘지 않았나? Dr. 켈시."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하지만, 박사. 지금은 때가 아니다."

 

의외로 순순히, 켈시가 사과했다. 박사는 손을 놓았다. 

 

켈시의 순순한 사과에 박사가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손을 놓은 이유는 켈시의 뒤이은 말 때문이었다.

 

"...네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더 이상은 숨길 수 없다. 켈시는 그렇게 말하며 박사를 쳐다보았다. 하나 밖에 없는 그의 눈이,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

 

.

 

.


시간을 조금만 뒤로 돌려보자.

 

"별 일이네, 니가 날 부르다니."

 

라플란드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항상 곁에서 떼어 놓지 않는 그녀의 무기, 특이한 장식이 붙은 쌍검을 한팔로 감싸 안은 채 라플란드는 삐딱하게 의자 위로 다리 하나를 얹었다.

 

"...그렇지. 평소라면 정기 검진을 제외하면 너를 부를 일은 딱히 없다."

 

"그럼 용건만 간단히 해."

 

라플란드는 의자에 등을 기대, 아예 무게를 뒤로 실었다. 의자 앞 다리가 공중에 뜨도록 뒤로 기울이고 한 발로만 까딱 까딱,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으며 놀았다. 

 

"그래, 알겠다."

 

반대편에 앉아 있던 것은, 켈시였다. 두 사람의 만남이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로도스의 오퍼레이터이기 전에, 중증의 광석병 환자였던 라플란드는 로도스의 주기적인 치료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평소 그녀의 주치의는 와파린이었다. 켈시가 아니라. 하지만 딱히 라플란드는 이에 의문을 갖지는 않았다. 켈시는 의료쪽 책임자니까, 권한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딱히 불만도 없었고.


"...몸은 어떻지?"


"아주 말짱해. 그 쪽이 걱정할 필요도 없을 만큼."


차트 상으로도 라플란드의 컨디션은 최상이다. 딱히 다른 것도 없어 켈시는 차트를 넘겼다.


켈시의 손이 멈췄다. 라플란드가 가장 최근에 입었던 부상에 대한 의료차트다.


[허벅지 부분의 유탄은 제거 됨. 추가적으로 추가 외상을 방지하기 위해 허벅지 부분의 오리지늄 광석을 일부 제거함.]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가 직접 써넣은 소견서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 것이다. 엑시아의 총에 라플란드가 맞았던 것이.


계기는 단순했다. '질투에 미친 엑시아가, 박사의 연인인 라플란드를 쐈다.' 너무나도 심플한 치정 싸움의 결말.


하지만 박사는 이를 모른다. 이 사건의 피해자인 라플란드도, 그리고 사실상 유일한 목격자인 켈시도 이를 함구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엑시아의 수호총을 압수하고 자기 방에 가둔 뒤, 오직 텍사스, Ash, 크루스 3명에게만 대략적인 사건을 알렸다.


크루스와 Ash는 아직도 창고의 한 켠에서 엑시아의 수호총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텍사스에겐 미안하지만 주기적으로 엑시아를 찾아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는 일을 맡겼다. 하지만 한번 질투에 미친 엑시아는 아직도 라플란드를 죽일 것이라고 갈갈이 미쳐 날뛰고 있다고 텍사스는 항상 보고했다.


어쨌건, 그 때 엑시아가 쏜 총알은 라플란드의 허벅지에 박혔다. 이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라플란드의 허벅지에 나 있던 그 흉측한 광석 역시 일부 제거됐다. 조금이라도 광석병이 심해지면 다시 자라날 터지만, 라플란드 본인도 매끈해진 자신의 허벅지가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다리가 가볍네, 싸울 때 좋겠어.


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정작 수술의 결과를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그녀를 비춘 거울이 아니었으니, 라플란드의 진심을 알아채기는 어렵지 않았다.


지금도 흉터나 광석 하나 없이 매끈한 다리로 의자를 까닥이고 있으니 회복이 잘 되고 있다는 것을 굳이 검사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 회복도 정상적으로 된 모양이군."


"그 쪽 덕분에."


가볍게 라플란드가 대꾸했다. 하지만 의외로 순순히 감사를 표한다. 감싸 안고 있던 자신의 쌍검을 톡톡 두드리며 가볍게 혀를 찼다.


"그 빨간 천사 자식. 이번에야 말로 끝을 볼 수 있었는데 말이야. 너희들이 말리지만 않았어도." 


"그랬다간, 네가 죽었을 지도 몰랐을 텐데?"


켈시가 일부러 라플란드를 도발하기 위해 되물었다. 라플란드는 켈시의 질문에 미소를 씨익 지어 보였다. 여느 때나 보이는, 광기에 저민 전투광의 웃음.


"물론이지, 그 녀석이 미쳐서 덤비는 건 오히려 나로선 잘 된 일이었어. 내가 박사랑 계약했던 이유는 알고 있었지 않아?"


라플란드는 까닥이던 의자를 앞으로 되돌렸다. 그녀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이다. 살짝 비춰진 전투광의 미소가 입에 걸렸다.


"난 힘을 좋아해. 그리고 이 곳에선 그런 내 힘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지. 강한 녀석들과도 잔뜩 치고 박을 수 있었고. 이 로도스에서 강하다고 하는 녀석들과는 다 한번 씩 싸워봤어. 그 녀석만 빼고."


엑시아와 라플란드의 관계가 원만했을 적. 그러니까, 라플란드가 엑시아의 총에 맞기 전의 이야기다. 로도스에 있는 내로라하는 전투 오퍼레이터들에게 지겹도록 대련을 신청하던 라플란드는 결국 엑시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오퍼레이터들과 싸워볼 수 있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엑시아는 예외였다. 그녀가 끝까지 거절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강하긴 하더라. 내가 전력을 다해 부딪혀도 이기지 못할 만큼."


엑시아가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어 덤빈 것이라 해도, 솔직히 말해 그 때 켈시의 Mon3tr가 라플란드를 감싸지 않았다면 라플란드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으리라. 그만큼이나, 엑시아의 화력은 압도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라플란드는, 무섭기보다는 전율했다. 자신에게로 향하는 순수한 살의가, 그 압도적인 증오가 그녀의 몸을 떨리게 만들고 칼 끝에 힘을 더했다.


"아마 또 싸우면 분명 내가 죽겠지. ...하지만, 분명... 난 언젠가 다시 한 번, 그 애와 싸울 거야."


"다음에도 구해줄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적당히 하도록."


"무슨 소리! 니 도움은 필요 없어. 전력을 다해 싸우고 죽는다? 오히려 바라는 결말이야."


라플란드가 '라플란드'가 되었을 때부터, 그녀의 몸에 광석이 자라나고 시라쿠사에서 유명이 아닌 악명이 훨씬 커진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바람은 바뀌지 않았다. 힘을 키우고, 힘으로 모든 것을 굴복 시킨다. 그것이 불가능하면, 전력을 다해 부딪히고 실패하면 기꺼이 죽는다.


"...과연 그럴까."


중얼거리듯, 작은 소리로 내뱉은 켈시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켈시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쿡쿡 웃으며 라플란드는 자신의 쌍검을 쓰윽 어루만졌다. 그녀의 쌍검이 걸리는 곳이 있어 라플란드가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가져다 댔다. 


박사에게 받은 선물이다. 필요없다 말은 했지만, 그가 직접 만들어 준 선물이다. 그래서 항상 가지고 다니기로 했다. 라플란드의 입가를 스치는 살벌한 미소가, 한층 옅어졌다.


그 모습에, 켈시는 작게 웃음을 흘리며 의료차트를 넘겼다.


"그래. 그 이야기는 그만 하도록 하지."

 

그 다음으로 넘긴 페이지는 내용이 적다. 와파린이 아주 간단하게 실시한 검사들의 결과만 적혀 있기 때문이다. 쓸 때 없는 짓을,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린 켈시는 의료 차트를 보며 이내 질문을 이었다. 


"...박사와의 관계는 어떻지?"

 

"뭐야, 우리 박사와는 맨날 으르렁 거리더니 사실은 질투라도 했나 봐? 하긴, 우리 박사가 워낙 절륜해야지~"

 

라플란드는 작게 휘파람을 불며, 대놓고 켈시를 조롱했다. 켈시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대놓고 보이는 조롱과 아주 희미한 적대감. 켈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놓고 적대감을 표출하는 라플란드를 보니, 남일 같지 않아 또 헛웃음이 난다.

 

자기가 하는 행동이 제 연인을 깎아 먹는 일이란걸 모르고.


켈시도 마찬가지지만, 딱히 박사는 로도스에 파벌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혹여나 파벌이 생겨 로도스가 분열하는 것 만큼은 두 사람 모두 다 피하고 싶은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대거 모이는 곳이라면 자연스럽게 사회가 형성되는 법이고, 박사나 켈시나 이를 잘 알고 있기에, 사이가 좋지 않음에도 공적인 자리에서 만큼은 더욱 악착같이 서로의 편을 들었다. '켈시와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이를 로도스에 끌고 올 생각은 죽어도 없다.' 라면서.

 

둘의 사이가 나쁜 것은 사실이나, 두 사람 모두 아미야라는 공통의 소중한 존재가 있다. 로도스는 최후에 아미야의 것이 될 것이다. 박사나 켈시나, 그녀가 한 명의 어엿한 어른이 되기 전 까지만 로도스를 지켜내고 있는 것 뿐이다.

 

하지만 박사와 켈시 사이의 대립, 그리고 파벌을 만들어내지 않기 위한 중립정책. 이 모든 일에서 라플란드는 예외였다. 그녀는 애초에 '박사의 개인 경호원' 신분으로 박사와 직접 계약한 관계다. 현재 로도스에 해당 신분은 단 두 명, 엑시아와 라플란드 뿐이다.

 

애초에 라플란드는 박사의 연인이었으니, 자연스레 라플란드 역시 켈시에게 그리 좋은 감정은 못 가지는 상태였다. 그 누구에게도 켈시에 대한 험담과 푸념을 하지 않는 박사였지만, 함께 술을 마시고 또 같이 밤을 보내는 라플란드에게는 예외였다.


그러니 켈시는 흔쾌히 용서했다. 박사도 푸념할 곳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켈시로서는 잘 된 일이었다.

 

"...들을 가치도 없군. 연인 자랑은 다른 곳에 가서 해라."

 

켈시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자각해, 이를 가리려는 듯 비웃음이 뒤섞인 코웃음을 치며, 의료 차트를 넘겼다. 그녀의 시선이 밑을 향했다.

 

[-hCG호르몬 검사: 음성] 

 

어려운 단어로 적혀 있긴 하지만, 사실은 간단한 테스트기를 이용한 결과다. 

 

보여주는 건 단순하게 임신 여부. 아직 라플란드의 뱃속에는 새 생명은 자리 잡지 않았다. 

 

다행이군, 켈시는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내, 스스로의 발언에 놀라 가볍게 손가락을 깨물었다. 징벌이다.

 

"피임은 제대로 하고 있나 보군."


주제가 거기로 향하니, 라플란드가 의외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는 사양이야."

 

라플란드가 켈시의 시선을 피했다. 수치심 때문은 아니다. 다른 무엇인가 때문에, 이 하얀 늑대는 시선을 피하고 가볍게 이를 악물었다.


저건... 

 

"그거 놀랍군."

 

하지만 켈시는 입가를 이죽거리며 라플란드를 조롱했다. 딱히 악감정 때문은 아니고, 아까 당했던 것을 그대로 돌려줄 뿐이었다. 박사의 연인이니 사정을 봐준다곤 했지만, 당한 것을 그대로 삭힐 생각은 없었다.

 

가볍게 놀려 댄 말이었지만, 효과는 꽤 발군이었던 모양이다. 라플란드는 순식간에 말문이 막혀, 아무런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 답지 않게.

 

...그래, 그녀 답지 않게.

 

예전의 라플란드였다면, 텍사스에 대한 승부와 집착. 광석병과 끔찍한 과거로 인한 광기로 더럽혀져 미쳐 날뛰던 그녀였다면 차라리 미쳐 날뛰는 한이 있더라도 방금의 조롱에 대한 감사 인사는 확실하게 전달했을 것이다. 아니면, 역으로 뻔뻔하게 굴어 음담패설을 내뱉었거나.

 

켈시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켈시가 가볍게 손을 허공에 긋자, 그녀의 등 뒤에 수정이 떠올랐다. 

 

그 속에, 검은색과 녹색 광채가 서로 어지럽게 이지러지며 회전한다. 아주 작게,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는 것 같다. 딱히 큰 의미를 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만일을 위해. 조금 긴장한 듯, 켈시는 잠시 말을 정리해, 입을 열었다. 평소의 켈시라면 꺼내지도 않을 화제를 꺼낸 이유는 간단했다.

 

이젠, 모두가 문제를 직면해야 할 때니까.

 

"두 사람이 사귄다고 했을 땐, 당장 아이가 들어서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아이 같은 건 생겨봤자 거추장스럽기만 해."

 

"내 입으로 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소리겠지만, 박사 정도면 제 자식에게 과할 정도로 다정히 대해줄 남자다. 그 남자는 싫지만, 그 착실한 성정만큼은 보장하지."


"...그건 나도 알아."


라플란드가 미소 지었다. 방금 전, 켈시를 조롱하기 위해 지어 보였던 가식적인 비웃음이 아니다. 광기, 집착, 비웃음 모든 것이 사라진. 진흙의 편린조차 묻지 않은, 너무나 순수한 미소. 


하지만 그 순수함이 떠오른 것은 매우 찰나였다. 켈시의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라플란드는 고개를 홱 돌렸다.


"아무튼, 아이는 필요 없어. ...박사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했고."


"그 말은, 때가 되면 낳을 거다?"


허를 찌른 켈시의 질문에, 라플란드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절대로 안 낳을 거야. 아이는."

 

"그런가..."


그런데, 라고 가볍게 대답했던 켈시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낳기 싫은 건, 박사의 아이인가. 아니면 '네' 아이 인가?"

 

순간, 의자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을 구르는 소리와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 그리고 철과 기묘한 무엇인가 서로 맞부딪치는 소리. 이 모든 것이, 찰나의 순간에 거의 동일하게 울렸다.


라플란드는 켈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언제 뽑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뽑힌 검이 향한 것은 켈시의 목. 손속따위 없는, 명백히 켈시의 목을 베어 넘기려는 행위였다.


하지만 라플란드의 검은 멈췄다. 당연히, 라플란드가 켈시를 용서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라플란드의 검이 막혔다. 그녀의 검을 막은 것은 켈시가 아닌, 그녀가 등 뒤에 띄워 놓았던 녹흑색의 수정, 거기서 튀어나온 거대한 가시가 라플란드의 검을 막았다.


라플란드도 알고 있는 존재다. Mon3tr. 켈시가 부리는 정체불명의 소환수. 저것이 얼마나 강한지는 로도스에 처음 왔을 때 덤볐기에 잘 알고 있었다.


"여전하네. 그 개새끼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지?"


라플란드가 Mon3tr의 가시에 막혀버린 자신의 검에 힘을 주었지만, 날이 들어가지 않는다. 도대체 이 빌어먹을 개새끼는 뭐로 만들어진 거야? 라플란드가 혀를 찼다.


"Mon3tr."


켈시가 자신을 지키고 선 제 수족에게 명하자, Mon3tr는 가시를 휘둘러 라플란드의 검을 튕겨냈다. 순식간에 그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고 가시를 펼친 Mon3tr의 공격에, 라플란드의 검이 순식간에 공중을 날았다. 


하지만 이마저도 Mon3tr는 그 날카로운 가시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섬세한 움직임으로 라플란드의 검을 잡아챘다. 그리곤 이를 순식간에 켈시의 앞으로 가져왔다.


순식간에 검을 빼앗겼다. 하지만, 라플란드는 제 손에서 검이 떠나자마자 순순히 바닥에 주저 앉았다. 


"...빌어 쳐 먹게 강한 개새끼네."


"라플란드."


"아~ 아! 알았어. 미안해. 순간 화가 올라와서 칼질했다. 불만 있어?"


"아니. 그 반대다."


켈시는 라플란드가 자신에게 칼을 휘두를 때도 시선을 때지 않던 의료차트에서 시선을 뗐다. 의료차트에 마지막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담자 라플란드는 특유의 폭력성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결론 내릴 수 있음.]


로도스에 정신과 의사는 없지만, 샤이닝이 내린 상담의 결과였다. 


"Mon3tr."


켈시는 Mon3tr에게 지시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들고 있던 라플란드의 검을 제 주인에게 던졌다.


"라플란드를 공격해."


Mon3tr, 그 충직한 검은 개는 제 주인의 말을 거역하지 않고 충실하게 라플란드에게 송곳니를 드러냈다.


빠르게 켈시가 던진 검을 잡아낸 라플란드는 쌍검을 전부 뽑아내 Mon3tr의 가시를 막았다. 


"Mon3tr, 깨어나라."


켈시의 구동어를 신호로, Mon3tr의 몸에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로도스에 온 첫날, 자신을 일격에 쓰러뜨렸던 공격이다. 본능적으로 떠올린 라플란드는 쌍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그녀의 검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라플란드의 아츠를 담아낸 검이, 아츠의 힘을 방출하며 일렁인다. 


라플란드는 Mon3tr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여러 전투를 넘나들며 단련된 그녀의 감각은 언제나 최적의 공격을 직감적으로 알려준다. 그녀의 눈은 정확했다.


Mon3tr의 관절부. 필연적으로 공격을 하며 가장 취약할 수 밖에 없는 부위. 그 곳을 향해 라플란드는 제 아츠가 담긴 검격을 날렸다.


정확히 Mon3tr의 왼쪽 상부 관절에 라플란드의 검격이 적중한다. 그와 동시에, Mon3tr의 몸에 흐르던 붉은 기운이 일시적으로 멈춘다. 붉은 기운이 사라진 가시라면, 막아내도 문제가 없다. 라플란드는 두 자루의 검을 한곳에 모아 Mon3tr의 공격을 튕겨냈다.


이 뒤는 간단했다. 무방비가 된 Mon3tr의 관절부를 베어 넘겨 무력화 시키면 끝이다. 수도 없이 많은 적들을 밀푀유 마냥 조각 냈던 그녀라면, 어려울 일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한번 싸워보며 수도 없이 머리 속으로 독투(獨鬪)를 거듭하며 패턴을 익힌 상대라면.


내 승리다. 씨익 웃으며 라플란드가 검을 휘둘렀다. 이 검격으로 Mon3tr의 딱딱한 장갑의 틈을 뚫고 유효타를 먹일 수 있다.


...하지만 Mon3tr는 베이지 않았다. 왜? 이미 1격은 들어갔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느린 라플란드의 공격에 당황한 것은 스스로였다. 그녀가 그 원인을 깨닫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검이 무거워.


라플란드는 Mon3tr의 가시에 맞아 뒤로 밀려났다. 양 손에 하나씩 쥐었던 검은 그녀의 손을 떠나 허망하게 바닥을 굴렀다.


순식간에 라플란드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 검은 사냥개가 달려들었다. 


졌다, 라플란드가 어떻게든 피하기 위해 몸을 굴리려던 찰나.


"Mon3tr. 거기까지."


켈시가 Mon3tr를 물렸다. 전투에서 물리는 것으로 모자라, 켈시는 그 사이에 만신창이가 된 방을 정리하라고 Mon3tr를 시켰다. 그 거대하고 사나운 거구가, 어울리지 않게 섬세한 움직임으로 엉망이 된 진료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찌 됐건, 더 이상 전투를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라플란드는 계속 덤비지 않았다. 검을 놓쳐셔?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라플란드가 손을 떨었다.


"...이제 알겠나? 네 상태가 어떤지."


Mon3tr가 다시 세워준 의자에 앉은 켈시는, 냉정하게 라플란드의 상태를 지적했다.


"라플란드. 네가 마지막으로 작전에 참가한 게 언제지?"


"...두 달전."


"그 후로 눈에 띌만한 작전이나 훈련은?"


"...없어."


"그럼 마지막으로 묻지. ...검을 손에 쥔 적은?"


"...."


일주일 전. 그리고 방금. 그 외엔 끝이다.


라플란드의 손 끝이 떨린다. 방금 전, 검을 놓친 충격. 그리고 그것 뿐만이 아닌 다른 것.


"넌 약해졌다, 라플란드. 물론,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지. 누구나, 평화 속에서 힘을 추구하는 것보단 자신의 행복을 만끽하고 싶어하는 법일테니."


라플란드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언제부터, 그녀의 손을 덕지덕지 얼룩지게 만들고 있던 비릿한 핏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그녀의 귓가를 괴롭히던 이명이 들리지 않게 되었다.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제 귀를 괴롭히는 지탄과 비난을 듣지 않을 수 있어 좋았다. 손을 씻어도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피비린내가 가신 것도 좋았다. 그저, 좋았다. 


...근대, 언제부터 였지? 날 강하게 만들어주던. 날 싸우게 만들어주던 그것들이, 들리지 않아도 좋았던 것은?


"하지만, 그런 것 치곤, 네 말과 행동은 모순적이기 그지 없군. 입으로는 전투에 미친 것처럼 굴면서, 정작 몸은 제 목숨이 아까운 것처럼 굴지. ...방금처럼."


Mon3tr가 자신의 목을 꿰뚫을 것처럼 달려들 때, 나는 어떻게 했지? 살겠다고 발버둥 쳤다. 검을 집을 생각을 하지 않고, 추하게 몸을 피할 생각부터 했다.


왜지? 죽기 싫으니까...? 라플란드는 고개를 저었다. 몸을 일으켰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주저앉았다.


컨디션이 안 좋았다, 검이 무거웠다. 다음 기회를 노렸다. 같은 구차한 변명을 내지를 생각도 들지 않았다. 스스로 느끼길 자신의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아침에도 박사와....


박사와...? ...박사가 아닌 나는...? 아니, 내 검은...? 


라플란드가 자신의 입을 틀어 막았다. 그러지 않으면 비명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언제였더라, 더 이상 텍사스와 싸우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던 것은?


얼마나 됐지? 근처에 검을 놔두지 않아도, 편하게 잠들 수 있었던 적은.


몇 달 전이지? 전투에 나가지 않아도 몸이 근질 거리지 않았던 적이?


몇 주 전이었지? 마지막으로 실버애쉬와 대련한 것은?


몇 일 전부터지? 검을 손질하지 않게 된 것은.


...도대체 언제부터, '나'는 이렇게 무뎌져 있었지?


자각하지 못하는 독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차라리 너무나도 강력한 극독이라면, 그래서 몸에 들어온 순간부터 온 몸이 불타오르고 피를 토한다면, 뱉어내거나 죽음을 받아들이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독이라면? 내가 중독됐는지도 모르는 채, 서서히 죽어가는 독이라면?


가장 무서운 독은, 스스로가 중독됐는지도 모른 채 어느 사이에 서서히 잠식 당하는, 조용한 독이다.


그리고 라플란드는, 그 독에 중독되어 있다. 언제 들이켰는지 모를,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도 모른, 그 달콤한 독을.


그 독의 이름은...


그녀의 머리 속에, 한 남자의 얼굴이 스쳤다.


"넌 어디까지나 박사의 경호원으로 이 로도스에 있다. 그리고, 지금 당장 네 목숨을 노리고 미쳐 날뛰는 적도 있지. ...그러니, 그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면, 곤란하다. 너나, 그리고 우리나."


라플란드는 언제나 싸우는 쪽이었다. 전투에서의 그녀는 언제나 적에게서 무엇인가를 빼앗거나, 혹은 적에게서 무엇인가를 '지키는' 입장이었다. 로도스에 온 뒤론 더욱 그랬다. 박사의 목숨을, 그의 안전을. ...연인의 행복을 지켰다.


하지만 그녀는 약해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너무나 달콤한 독에 중독되어 그녀의 검은 무뎌졌다. 무뎌진 검은 그녀의 손에 무겁다. 지금의 그녀로서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 행복도, 안전도. ...목숨마저도. 


"하지만."


켈시는 말을 이었다.


"네가 세워 놓은 공적도 있고, 로도스의 사정도 여유로워졌으니, 네가 오퍼레이터를 관둬도 괜찮다. 이 로도스에, 널 위한 자리 하나 쯤은 얼마든지 비어 있으니."


선택하라.


"단, 그럴 경우엔 박사의 경호원은 관둬야겠지. 뭐 그래도 상관 없지 않나?"


지키는 쪽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박사의 곁에 남을 수 있는 건 변함 없을 테니. 이젠, 그가 널 지켜줄 거다."


지켜지는 쪽이 될 건가.


라플란드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혼란스럽다. 당장이라도 저 녹색 필라인의 목을 졸라 비틀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자기에겐, 그럴 힘이 없으니까. ...내가? 힘이 없다고 지레짐작하고 포기한다고...?


"....라플란드."


켈시는 나즈막하게 라플란드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라플란드의 귀에는 이 목소리가 희미하게, 그리고 연신 울리듯 들려온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답은 간단했다. 다시 검을 들고, 강해지면 된다. 이때까지 그래 왔듯이.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래.... 어렵지 않을거야 분명...


-그게 되겠어? 이제 너에겐 더 이상 절박함이 없잖아.


머리 속을 울리는 목소리는 눈 앞에 있는 빌어먹을 녹색 필라인의 것이 아니다. ...그녀의 것이다.


-응? 안 그래? 널 강하게 만들었던 건 외톨이 늑대인 네 상황이었잖아? 


가문에서 버림받았다. 이름을 빼앗겼다. 목숨을 위협 받았다. 그래서 싸워야 했다. 


복수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지키기 위해.


-이제 넌 절박하지 않아. 행복하잖아? 


하지만 이제 그녀는 부족한 것이 없다. 과거의 미련도 놓았다. 더 이상 죽음의 위협도 없고, 자신을 잠식하던 광석병의 잔재도 씻은 듯 가셨다.


전부 그 남자 덕분이다. 사랑하는 연인의 힘이다. 


-너도 넌지시 알고 있잖아? 박사가 새로운 반지를 벌컨에게 부탁하는 걸. 곧 너에게 청혼할 거라는 거. 전부 알면서 모른 척 하고 있잖아? 기뻐서 어쩔 줄도 몰라하면서.


그와 계속 함께하고 싶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스레, 검은 뒷전이 되었다. 그는 그녀의 행복이자, 독이었다. 그와의 시간은 라플란드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달콤한 독은, 외톨이 늑대를 외롭지 않게 만들었다. 행복을 깨닫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외톨이 늑대 라플란드'는 약해졌다.


-어때? ◼◼◼◼◼


있을 수 없는 이름, 잊을 수 없는 이름. 이 세상에서 오직 한 명. 그녀만이 알고 있는 이름. 박사마저 모르는 이름.


-넌 곧 그 이름을 박사에게 알려주겠지. 반지를 받는 그 순간에. 그럼 박사는 또 귀엽고 사랑스러운 애칭으로 널 새로 부를 테고. 행복해질 수 있어. 대신.


라플란드는 죽을거야.


머리 속의 목소리를 듣기 싫어 귀를 틀어막았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이젠 저 녹색 필라인이 뭐라 말하든 들리지 않았다.


라플란드는, 아니 그녀는, 이 곳에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니 '라플란드'로서는 처음 지르는 끔찍한 비명과 함께.


"대답은 천천히 듣도록 하지."


켈시의 목소리는 라플란드에게 닿지 않았다.


라플란드는 진료실에서 도망쳤다. 어디로든 그저. 자신의 머리 속을 뒤흔드는 이 망할 목소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리 긴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겠지만, 결코 짧지도 않으리라.


라플란드는 하염 없이 복도를 거닐었다. 머리 속이 혼란스럽다. 자신을 괴롭히던 목소리는 울리지 않았지만, 마음 속이 복잡했다.


집무실을 도망치면서, 기적적으로 검은 주워 나왔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팍을 더듬어 박사의 선물이 떨어지진 않았는지 걱정하던 제 모습이 퍽 우스웠다.


나는, 어떻게 해야하지?


라플란드는, 아니 그녀는 생각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검을 놓고 박사의 손을 잡을 것인지


박사의 손을 놓고 검을 잡을 것인지


'라플란드'는 검을 잡을 것이다. 


하지만, ◼◼◼◼◼는 박사의 손을 잡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아 하지? 검을 손에 놓고 싶지 않았다. 


라플란드로 살아온 모든 순간, 모든 날에 검을 손에서 떨어뜨린 적이 없었다. 그녀는 전투로서 살아 있을 수 있었고, 싸움으로써 존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박사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의 곁에 있는 것이 좋았다. 그와 함께 잠드는 것이 좋았다. 그의 손을 떠나고 싶지 않다.


머리 속이 어지럽다. 평소에 이럴땐 박사에게로 향했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금 박사의 얼굴을 보면, 그 순간이야 말로 라플란드의 마지막이 될 테니까.


"...?"


...문득, 복도가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 한창 바쁠 낮 시간대건만, 이 복도에 아무도 없다.


항상 바쁘게 움직이던 오퍼레이터들은? 지금쯤 농땡이 피우고 어딜 도망가냐는 텍사스의 핀잔은?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찾아오는 박사는? 


복도에 아무도 없다. 아직 살아 있는 직감은, 이 적막을 이렇게 해석했다.


불안이라고. 불운이라고.


"...찾았다."


복도에 사람이 나타났다. 


머리카락은 붉다. 하지만 평소의 모습과는 다르게 산발이 된 머리카락은 난잡하고 흐트려져 있다.


옷은 풀어 헤쳐져 있고, 찢어져 있다. 찢어진 옷 아래로 비치는 피부는 상처투성이다.


눈은 공허하다. 아무런 빛도 담고 있지 않은 눈이 품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살의.


엑시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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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https://arca.live/b/hypergryph/41531148


예아, 반갑소. 


드디어 다음 편이면 끝이 날 예정. 원래는 2편 마지막에 라플과 엑시아가 만나는 느낌으로 잡을 생각이었는데, 중간에 너무 붕 뜨는 거 같아 2편을 넣게 됨.


근대 아무리 봐도 이게 2편이고, 저번에 쓴 2편은 좀 너무 난잡한게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든다.  나의 실수다.


1편은 얀데레 엑시아에 삘 받아서 쓴 감이 없잖아 있긴 한데, 이 소설의 메인은 라플독타NL이다. 그래서 결국 엑시아는 악역, 내지는 시련 정도로 작용할 수 밖에 없게 됨. 엑시아한텐 미안하다.


라플란드의 전체적인 컨셉은 정상이 되는 걸 자각 못한 비정상임. 판타지에서 흔히 나오는, 제 감정을 부정하는 츤데레. 그거에 딥다크한 버전이라 생각하면 됨. 이 컨셉 하나만 보고 글을 썼고, 그래서 이거에 대한 기승전결은 조잡하더라도 제대로 짜놨음.


묘하게 켈단또가 비중이 많아졌다. 근대 켈단또처럼 남에게 막말해도 되는 포지션을 찾기 힘들더라고. 아미야가 하기엔 어울리지도 않고.


근대 켈시어를 아직 마스터 못해서, 좀 모자랄거야. 켈시어 100점 만점에 몇점?



몰랐는데, 댓글 보는 재미가 엄청 쏠쏠하네 ㅋㅋㅋㅋㅋ



TMI)


켈시가 박사에게 건네준 건 결혼반지 영수증, 그리고 라플란드에 대한 메일. 정확힌 라플란드 파일 기록 4번 문서임.


시간 순서는 3편 중반(켈단또 라플) > 2편 > 3편 초반(박사 집무실) > 1편 > 3편 마지막임. 조금 꼬였을 수도 있긴 한데, 적당히 넘어가 줘.


스토리 편의 상 라플 스킬은 자의로 온/오프 가능하게 해놨어. 그거 말고 인게임 고증은 나름 지킴.

 

켈단또가 박사에게 갖는 감정은 애증. 박사는 켈단또가 풀어지면 적당히 사이좋게 지낼 생각까진 있음.


라플본명은 따로 있는거로 설정해놨음. 당연히 오리지널이니, 양해 부탁함.


라플란드 본명으로 설정해놓은건 시칠리아 늑대 관련 이름을 살짝 비튼거. 너무 소설 분위기를 해칠거 같아서 말하진 않을듯?


전혀 큰 비중은 아니지만, 광석병으로 돋아난 광석을 외과수술로 제거한다.는거 자체는 여기선 가능하다고 해놨음. 치료가 아니라, 미용시술 정도의 느낌정도지만.



아무튼 긴 글이랑 헛소리 읽어줘서 압도적 감사



엑시아 결말 추천 받음. 아직 생각 안 해놈. 


피드백 달게 받아유. 글 쓰는 솜씨가 영 모자라서. 


아마 시험기간이라 17일쯤 되서 마지막 올릴듯? 근대 공부하다 막히면 글 쓸거라 몰?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