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박사는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마침 어제 제 5차 위기협약 스펙트럼 작전이 종료된 참이었다.


어떻게든 이성을 쥐어짜서 18점 달성에 성공한 박사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고


방금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지친 몸을 이끌고 집무실로 돌아온 것이다.


육체적인 피로는 꼬박 하루 동안의 숙면으로 이미 풀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응급 이성 회복제와 오리지늄 원석으로 너덜너덜해진 


뇌의 정신적 피로는 상상 이상이었다.


"켈시 보지 털보지...아미야 자궁탐사대...몬3터 단단쫄깃..."


박사는 영문 모를 말들을 중얼거리며 서랍에서 이성 회복제가 든 주사기를 꺼내들었다.


박사가 소매를 걷고 주삿바늘을 팔뚝에 꽂아 넣으려던 찰나, 책상 위의


휴대전화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스윗 퍼리 - 박사님, 협약도 끝났는데 잠깐 시간 좀 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마운틴이 무슨 일로?" 


로도스에서도 과묵하기로 소문난 오퍼레이터 마운틴은 개인적인 일로 다른 누군가를 


부르는 일이 거의 없었다.


맨스필드에서 탈옥한 뒤 그가 보여 준 활약을 인정받아 다른 오퍼레이터들과 비교해


상당히 넓은 개인실을 배정받은 마운틴이었지만 그 안에 들어가 본 사람은 


기껏해야 카프카, 파인콘이나 로빈 정도가 전부였다.


박사 또한 개인실을 안내해 줄 때를 제외하고 그의 방에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박사가 알고 있는 것은 매달 상당한 양의 소포가 마운틴에게 배달된다는 것 정도였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로도스 내의 길고 어두운 복도를 걷던 박사의 눈에


다른 방보다 조금 큰 문을 가진 방이 보였다.


마운틴의 거대한 덩치에 알맞게 문을 넓혔기 때문인지 멀리서도 


보다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박사는 작게 심호흡을 하고 커다란 적갈색 문을 두드렸다.


"마운틴, 안에 있나?"


"박사님, 들어오시죠."


중저음의 야성적이지만 정중한 미성이 울려퍼졌다.


곧이어 육중한 문이 열리고 마운틴의 방으로 가는 길이 나타났다.


"그러고 보니 박사님이 제 방에 오신 건 처음이군요."


"그러네. 내가 배정해 주긴 했지만 들어가 보지는 않았으니까 말이지."


현관과 이어져 있는 짧은 복도를 따라 거실로 들어가자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장식장이 눈에 들어왔다.


한 눈에 봐도 상당한 가격이 나갈 것 같은 암적색 원목 장식장 안에는


마운틴이 전투에 나갈 때 입는 하얀 양복이 걸려 있었고 아래에는 


커다란 검은색 너클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네가 양복 말고 다른 옷을 입은 걸 본 적이 없군.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대단한 이유는 아닙니다. 오래 입다 보니 편해져서 그런 것이지요."


그렇게 말한 마운틴은 장식장으로 다가갔다.


유리로 된 장식장 문을 연 그는 양복으로 가려져 있던 작은 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부드러운 구동음이 나면서 거실 전면의 고해상도 디스플레이를 제외한 


벽들이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상당히 공을 들인 모양이군."


"아무래도 포기할 수가 없는 게 있어서 말입니다."


얼굴을 전부 가리는 마스크 너머로 느껴지는 놀라움에 마운틴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이윽고 벽이 완전히 돌아가자 박사의 앞에는 말 그대로 


술의 바다가 펼쳐졌다.


각양각색의 술병들이 마치 태피스트리처럼 벽을 가득 메우고 


자신을 봐 달라는 듯 오묘한 빛을 발산했다.


마운틴은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감상하듯 수많은 술들을 꼼꼼하게 


뜯어보고는 그 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집어들었다.


"컬럼비아산 스카치 위스키, 잭 다니엘스 입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병뚜껑을 따고 두 개의 온더락 잔에 투명한 얼음까지


물 흐르는 듯 한 움직임으로 담은 마운틴은 맨스필드 밖 황무지의 풍경을


비추는 디스플레이를 등지고 푹신해 보이는 의자를 길게 뺐다.


작은 탁자를 중심으로 반대편에도 의자를 가져다 놓은 마운틴이 말했다.


"한 잔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