첸과 약속을 잡은 야외 테라스. 지난 날 스와이어에게 박사가 고백을 했었던 장소가 분명했다. 스와이어와 연락이 안 되서 걱정인데 이쪽으로 오니 기분이 참 묘했다. 그때는 하도 긴장을 해서 마음을 진정시키려다 살짝 늦어서 스와이어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첸이 기다리고 있다.


 팔짱을 끼우고 박사를 기다리던 첸은 자신 쪽으로 오는 박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어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미안해요, 첸씨. 실버애쉬랑 이야기하다가 시간이 흐른 걸 몰랐어요."

"조금 신경 좀 쓰라고."


 약속에 늦은 연인 꾸짖는 듯 뾰로퉁한 표정으로 박사를 기다려 온 첸을 향해 다시 한 번 사과를 했다. 그녀와 큰 관계가 아니기에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슬슬 쌀쌀해지는 밤 바람과 평소처럼 별빛들이 빛나는 하늘 아래에서 분위기 탓인지 유독 첸이 예뻐 보이는 건 기분 탓인지 모르겠다.


 달리 이상한 마음 품은 건 절대로 아니다. 그냥 감상이다.

 

"첸씨, 할 말이 뭔가요? 며칠 전부터 잠깐 용문에 일 있다고 다녀오시더니. 갑자기 부르시고."


 첸이 어시스던트를 진행했던 날 이후 갑자기 급히 휴가까지 내면서 용문에 다녀올 일이 있다면서 며칠간 로도스에 나왔었다. 개인적인 일이 있다면서 나갔으며 크게 관심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달리 뭘하고 왔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고는 돌아오자마자 박사에게 지정된 시간의 특정 장소로 나와 달라는 부탁을 듣게 된 것이다. 갑자기 왜 그러냐고 질문을 했었도 중요한 용건 때문이라며 대답을 대충하고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약속한 시간에 약속한 장소에 나왔으니 용건을 물었다. 사람도 없는 장소에서 부른 것이라면 꽤나 큰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마치 스와이어 때처럼 고백 같은.... 것이라면 말이 안 되겠지. 하지만 이런 분위기 있는 곳에서 대체 무슨 부탁을 한다는 것인지도 호기심이 생긴다.


"너한테 꼭 할 말이 있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한 채로 첸이 길게 숨을 내쉰다. 긴장해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듯이 말이다. 언뜻보면 고백하려는 것 같기도 하지만 박사는 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스와이어랑 헤어져줘."

"....?"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운 다는 게 이런 뜻일까? 순간 첸이 한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눈이 휘둥그래지고 정적이 흘렀다. 그 사이 박사는 그녀가 한 질문의 의도를 이해해보려고 했고 첸은 박사의 대답을 기다렸다. 더 이상 아무런 이야기 안 나오지 않았다.


 스와이어와 헤어져 달라는 부탁이 진담이라는 뜻인 것 같은데 더욱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첸씨...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만...?"

"...난 널 사랑한다 박사."


 사랑에 빠진 여성의 눈동자가 보였다. 아까와는 박사에게 고백하기 전과 다르게 흔들리지 않고 강건하게 빛을 내고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박사를 바라보면서 그에게 답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첸이 장난을 치는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워낙 매사에 진지한 인물이라 술 기운 돌지 않으면 농담의 농자도 모르는 여성이었다. 그렇다고 정말 술에 취했다고 하더라도 남의 여인을 가지고 헤어지라는 실례를 주제로 농담을 던질 사람도 아니었다. 


 박사가 보기에도 첸이 자신을 향해 한 고백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더욱 곤란해졌다.


"체, 첸씨. 그런 농담은 곤란합니다."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음에도 박사는 농담은 곤란하다며 대답을 회피하다시피 전했다. 갑자기 박사에게 다가와 난폭하게 어깨를 붙잡고는 얼굴을 밀어붙인 채 박사를 노려보다시피 바라보는 첸의 눈동자에 대해서는 꽤나 반항심이 들었다.   

 

"대체 왜지 박사...?"


 잡힌 어깨로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여성이라고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쌍검을 휘두르는 게 일상인 근위국 소속의 팀장이니만큼 악력도 강한데 점점 아파왔다.

 

"일단 이거 놓고 이야기해주세요."

"내가 스와이어보다 못한 게 많아서 그런가? 그 년보다 돈이 없어서? 그 년보다 매력이 없어서? 그 년보다 사교적이지 못해서? 대체 왜지? 왜 날 거부하는 건데?!"


 고조되어가는 심각한 분위기에 악력은 더욱 강해져만 갔다. 윽박지르는 첸을 말리며 달래고 또 달래나 울것 같으면서도 당장 쥐어팰듯한 기세를 바꾸지 않았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처럼, 아니, 그 이상이다. 박사에게 스와이어에게 헤어지라며, 자신을 사랑해달라며 매달리고 있었다.


"그만하세요 첸!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첸이 어시스던트로 일하던, 사랑하던 남자는 이미 애인이 있었다고 했던 상담이 떠올랐다. 설마 그 남자가 자신이었을 줄이야. 첸에게도 사랑받다니, 나도 참 죄 많은 남자다. 라면서 혼자 씁쓸한 미소를 짓는 여유로운 상황이 아닌 것이 괴로울 뿐이었다. 


 한 번쯤은 예쁜 여자들에게 둘러쌓이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상이었고, 그것을 현실로 반영시킬 수는 절대 없는 일이며 여러 의미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지금 같은 경우 윤리적인 문제로 첸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인데 과거에도 그가 그런 윤리를 지켰었던지는 모르겠지만.


"첸, 전 베아트릭스와 사귀고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걸 부정하지 마세요! 첸씨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거셨잖아요!"


 박사는 첸의 고백을 여전히 거절했고, 고백을 받아들일 수 없는 합당한 이유를 이야기함에도 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일부러 듣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오히려 그것에 대한 공포였을까? 아니면 반항심? 멈추지 않는 첸의 갈구에 조금씩 강경하게 나갈 수 밖에 없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성이 첸을 달래기 위해 말로 그만하라며, 진정하라며 끊임없이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고 밀어내려했다.


"제발 박사!!! 나를 봐줘!!! 나만 바라봐줘!!! 내가 아닌 그딴 년을 고른 이유가 뭐냐고!!!"


 그런 박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계에 도달하고 마련이었다. 멈출 생각 없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이 굴던 첸이 스와이어까지 욕을 내뱉은 것을 참지 못하고 욱해서 손을 날렸던 건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최악이었을까.


"이제 그만하라니까!!!"


 분에 찬 다급한 외침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차렸을 때, 고개를 돌린 채 붉게 오른 뺨을 쓰다듬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리면서 놀란 표정으로 박사를 바라보고 있던 첸을 볼 수 있었다.


 박사의 손에서도 무언가와 부딪힌 듯한 따가움을 느낀 덕분에 상황파악은 쉬웠다.


"체... 첸씨...!"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저으며 상황을 부정한다. 그런다고 그 사실이 벌어지지 않았던 일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미 한 선택을 되돌릴 수도 없고, 되돌리더라도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박사는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가..."


 박사에게 한 대의 뺨을 맞고도 울듯하면서도 피식 웃어보이는 것은 섬뜩하다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박사 앞에서 히죽히죽 웃는 첸을 향해 박사는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과를 한다고 해도 어딘가가 심하게 망가져버린 첸을 향해 어떤 말이 통할까?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으며 이제는 아예 방긋 웃기까지 하는 그녀를 향해 경계심을 느꼈다.


"박사...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강하게 나올 수 밖에 없다고. 이렇게 하면 네가 괴로울 것 같아서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첸은 자신의 품속으로 손을 가져갔다. 혹시 적소라도 튀어나올까봐 긴장을 했으나 다행히도 그 예상과는 다르게 평소 첸이 가지고 다니던 평범한 휴대전화가 나왔다. 


 잠깐 그 전화기를 조작하다니 무언가를 보여주듯 전화기 화면을 박사쪽으로 돌렸다. 사진인지 뭔지 모를 것이 박사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을 본 순간 이성이 모두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화면 속에 나온 인물을 바라보면서 본능적으로 부정하고 있던 것을 첸이 확인 사살로 기정사실이 된다.


"스와이어. 이럴 때는 너도 참 도움이 되는구나."

"베, 베아트릭스...!!"









왠지 이후에는 호불호 갈리는 장르의 태그를 붙여야 할 듯. 음... 직접적인 묘사는 없지만 19금으로 취급해야 할 부분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