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젖은 머리를 닦으며 그녀는 되물었다.


"그날 다른 일 있어?"


박사는 앞에 있는 서류 더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어온다.


"기쁜걸? 데이트 신청은 언제라도 받아줄게"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그가 앉는 소파 쪽으로 다가가 옆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서류에서 얼굴을 뗀다. 


"아미야를 볼 면목이 없겠는걸"

"그렇게 속 좁은 여자는 아니잖아?"

"나만 일 쉬고 놀러다닐 순 없지."


박사는 서류를 놓고, 수건을 집어들고 그녀의 머리를 닦아준다. 호쾌하게 물기를 닦는 그 손놀림에, 그녀는 기분 좋은 듯이 눈을 감는다.


방 안에 머리 닦는 소리만 울려퍼지고, 잠시 후 그는 그녀의 머리에서 손을 떼었다.


"실은 그날 어시스턴트를 누구로 할지 정하지 못해서 말야"

"그래서 아무 계획도 없어 보이는 나한테 얘기한거야?"

"표현이 이상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야."


박사가 커피잔에 손을 뻗자 그보다 빨리 그녀가 낚아챈 뒤, 거리낌없이 입을 대고 목으로 흘려보낸다.


"……내 건데."


그의 중얼거림은 개의치 않고 그녀는 그대로 꿀꺽꿀꺽 들이켰다.


"우웩."


컵에서 입을 뗀 그녀는 맛없다는 듯 혀를 작게 내밀며 눈살을 찌푸린다. 컵 안에는 걸쭉한 설탕 덩어리가 남아 있었다.


"뺏어먹고 그 반응은 너무한 거 아냐?"


갑자기 방 안에 노크소리가 울렸다.


"박사님, 계세요?"

"아미야구나. 들어와도 돼." 


그가 대답하자 휴대단말기를 든 아미야가 들어왔다. 그러나 그녀는 곧 움직임을 멈췄다.


"박사님...? 뭐하고 계세요?"


앳된 외모와 달리 위압감을 풍기며 그녀가 물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건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라플란드.


"크리스마스 스케줄 관리."


서류철을 들여다보며 담담하게 답한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아미야의 표정을 더욱 굳게 만들 뿐이었다.


"이렇게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 무슨 짓이라도 했겠어?"


라플란드가 턱을 괸 채 그를 곁눈질한다.그 발언에 잠시 머뭇거리던 아미야였지만, 서류에서 얼굴을 들지 않는 박사를 보고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것도 그렇네요."


아미야는 박사의 옆으로 다가가 서류를 들여다본다.


"역시 크리스마스는 일정 조절이 어렵네요"

"그렇지, 오퍼레이터들의 파티 출석 여부 조사하는 것만으로도 힘들단 말이야."


경영자들의 대화에 라플란드는 시큰둥한 듯 박사를 쳐다본다.


"다들 열심이다만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군"


그렇게 말하며 라플란드는 소파에서 일어선다.


"이거, 빌려갈게"


그가 고개를 들자 수건을 펄럭이며 퇴실하는 라플란드의 모습이 보였다.


"라플란드는 당일 일정 없음…"


박사는 단말기에 재빨리 기록하고는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린다.


"도와드릴까요?"

'그래도 괜찮아?'

"네, 오늘 제 업무는 일단 끝난 상태라서요."


아미야가 서류를 절반 정도 나눠받아, 산더미처럼 쌓인 유급휴가 신청과 보고서들을 점검하고 사인을 해 나간다.


"그러고보니 박사님"

"왜?"

"왜 라플란드 씨는 젖어 있었나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박사의 모습을 슬쩍 살핀다. 이에 대해 그는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한다.


"방에 들어오더니, 라플란드가 갑자기 체취가 신경쓰인다고 해서 말이야"


아미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의외네요..."

"그래서 씻고 와도 된다고 했어."


그의 설명에 아미야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그녀는 또다시 문득 입을 열었다.


"...왜 굳이 이 방 욕실에서?"

"나도 알고 싶다."


박사는 자기도 모른다는 듯 작게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한다.


두 사람은 묵묵히 일을 계속해나갔다. 11시를 넘겼을 때 마지막 서류에 서명 날인이 끝났다.


크게 기지개를 켠 뒤 소파에 주저앉는 박사를 지켜보던 아미야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박사님. 하지만 아직 쉬시면 안 돼요."


그녀의 발언에 그는 나른하게 일어나 한마디 중얼거린다.


"정말 끝내주는 근무환경이구만"


빈정거림을 들은 아미야는 작게 웃은 뒤,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여기 사인해 주세요"


그가 받은 종이는 유급휴가 신청서. 지정일은 크리스마스 당일. 신청자란에 사인만 하면 되는 상태였다.


"이건...?"

"켈시 선생님이 가끔은 쉬라고 하셔서요"


마스크 너머로 그가 미소짓는 것 같았다. 


"녀석도 참 변함없군"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더니 재빨리 사인을 한다. 아미야는 그것을 확인한 뒤, 서류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처리해 드릴게요."

"고마워."


서류 더미에 단말기를 올려놓고 그녀는 조그만 몸으로 서류뭉치들을 껴안는다. 그리고는 발을 움직이려다 멈췄다.


"저… 박사님. 저도 파티에 가도 될까요?"


조심스럽게, 작은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박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선 뒤, 아미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물론이지."


박사의 승낙에 그녀는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래, 나도 정말 기대되는구나"


기대감에 총총걸음으로 뛰어가는 아미야를 지켜본다.


"파티라……"


그의 중얼거림은 히터 소리에 지워졌다. 



***



"크리스마스라……"


휴게실 창가에서 라플란드는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득히 먼 곳에서 창백하게 반짝이는 그 빛에 손을 뻗는듯, 그녀는 창문에 손을 갖다댄다.


백은빛 털에 덮인 귀가 쫑긋 움직이며, 희미한 발소리가 들리는 것을 파악한다. 그리고 작게 입꼬리를 올리더니 문 쪽으로 몸을 돌려 열리는 순간을 기다렸다.


"안녕 텍사스. 좋은 밤이야."


문이 완전히 열리기도 전에 들려오는 라플란드의 목소리에 텍사스는 미간을 찌푸린다.


"그래."


대충 대꾸한 뒤, 텍사스는 휴게실에 마련된 커피메이커를 통해 종이컵에 커피를 따르기 시작한다.


"오늘은 혼자야?"

"다들 각자 예정이 있어서."

"그렇구나!"


텍사스의 대답에 그녀는 소리내어 웃은 뒤, 다시 창을 향해 몸을 돌려 별을 본다. 잠시동안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히터 작동음과 텍사스가 커피 마시는 소리만 들렸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지?"


문득 라플란드가 먼저 말을 꺼낸다.


"텍사스, 너는 구원자를 믿어?"


그렇게 말하며 돌아본 그녀의 웃음은 조금 전의 경박한 미소와는 다른, 그림자를 머금은 쓸쓸한 미소였다.


"난 믿을 거야. 나는 틀림없이, 나의 별을 만나기 위해 태어났을 거야."


마치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황홀한 듯이 말하며 별을 올려다보았다. 싸늘한 시선을 보내며 커피를 마시던 텍사스. 갑자기 라플란드가 다시 이쪽을 돌아본다.


"…그 구원자가 혹시 힘이야?"

"그럴리가! 적들을 전부 죽인다고 괴로운 게 없어지겠어?"


그녀의 말에, 텍사스는 잠시 뒤 대답한다.


"난 안 믿어"

"그래?"

"단 한 사람에게 의지하는 평화는 언젠가 반드시 깨지게 돼있어."


라플란드에게서 옅은 미소가 사라졌다. 목에 건 수건을 움켜쥐고 입술을 굳게 다문다.


"현실의 복지시설과 같아. 무상지원은 오래 가지 못해."


대답할 기미가 없는 라플란드의 모습을 보며 텍사스는 계속 말을 이어간다.


"자금 마련, 내부 분열 등 이유는 많지. 혹은… 주동자의 마음이 한계를 맞이하거나."


담담하게 말을 이어간 텍사스는 이내 다 마신 컵을 들고 일어선다. 그러자 라플란드는 다시 경박하게 웃음소리를 냈다.


"하핫! 생각이 참 시니컬한데!"


이번엔 아무런 반응 없이, 텍사스는 컵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러나 라플란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한다.


"하긴, 너랑 내가 생각이 다른 건 당연하지"


잠깐 걸음을 멈췄던 텍사스였지만, 이내 다시 걷기 시작해 휴게실을 나간다. 홀로 남은 라플란드는 다시 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단 한사람… 마음의 한계…"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손은 수건을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



"이봐, 크리스마스 화환이 좀 모자란 것 같은데?"

"이프리트, 과자 함부로 집어먹으면 안돼!"


다양한 목소리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식당. 박사는 단말기와 서류 투성이인 테이블 위로 재빨리 펜을 움직이고 있다. 서류에는 리유니온 목격 정보와 기상 예보도, 현재 위치 지도 등이 기술되어 있다.


"박사, 이건 어디에 놓으면 되지?"

"아, 그건…"


사람 키만한 크리스마스 트리를 안은 오퍼레이터가 물어보자 박사는 눈을 돌려 장식도를 훑어본다.


"일단 건너편 벽 쪽에 놔줘. 나중에 장식할 거니까."

"알았어"


지시를 마치면 곧바로 다시 서류와의 다툼이 시작된다. 몇 시간동안 이를 반복하고 있으니 누군가가 테이블에 캔커피를 올려놓는 게 보였다.


박사가 고개를 들자 앞치마 차림의 미드나이트와 눈이 마주쳤다.


"평소보다 훨씬 바쁜 것 같네, 박사."

"너도"


미드나이트가 들고 있는 장식들을 보며 박사가 되받자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인다.


"과자 만드는 데도 장식 디자인 지휘에도 동원되다니, 나의 유능함이 모두에게 인정받았다는 증거일까?"

"그렇겠지."


그의 발언에 박사는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한 박자 놓고 두 사람은 서로 키득키득 웃었다.


"여긴 내게 맡기고 잠깐 쉬었다 오라구. 모처럼 호화로운 구경도 하고 말이야."


미드나이트는 시계를 흘끗 보며 박사에게 그렇게 말한다. 그는 순간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내 캔커피를 들고 일어섰다.


"그래, 그렇게 하지. 너도 너무 일에 빠져있진 말라구?"


박사의 말에 미드나이트는 곤란한 듯 작게 웃는다.


"물론이지."


그 말을 듣고 박사는 자리를 떴다.


그가 찾은 곳은 식당 끝쪽의 테라스. 황혼의 어스름속 조용하게 내려 쌓이는 눈이, 주위의 아직 장식되지 않은 크리스마스 화환들을 얇게 덮어 간다. 내뿜은 하얀 입김이 마스크 안에 가득 찬다.


박사는 마스크를 조금 벗고 캔커피를 벌려 한입을 삼켰다. 살짝 들여다본 눈가에 충혈된 눈망울과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진 것이 눈에 띈다.


"박사, 너도 쉬는 시간이야?"

"잠깐동안."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답하자 목소리의 주인이 입꼬리를 올린 기색이 역력했다.


"옆에 써도 되지?"


라플란드는 박사 바로 옆 난간에 기대고 그와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대지와 하늘을 떠다니는 눈이 있을 뿐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두 사람은 말없이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본다. 문득 라플란드가 입을 열었다.


"또 일만 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 파티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어."


물론 평소 업무도 포함해서라는 말을 덧붙이며 그는 엷은 미소를 짓는다. 열을 머금은 하얀 숨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모두가 기뻐해준다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그렇게 말하는 그를 바라보니 지금 막 캔에 입을 대려던 참에 눈이 마주쳤다. 박사가 라플란드에게 커피를 내밀자 그녀는 순순히 받아 한 모금 마신다.


"그 '모두' 중에, 너는 있어?"


그녀의 물음에 그는 라플란드의 얼굴을 쳐다봤다. 거기 있었던 것은 평소 기분나쁜 웃음을 짓는 그녀와는 정반대의 진지한 눈빛. 박사는 잠깐의 침묵 뒤 느닷없이 입꼬리를 올리더니 그녀의 머리를 난잡하게 쓰다듬었다.


"뭐야, 걱정해 주는 거야? 요 귀여운 녀석."

"잠깐, 박사ー!"


라플란드가 언짢은 듯 외치자, 그의 손은 세기를 바꿔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한다.


"걱정하지 마. 무리하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박사에게 그녀는 무어라 말하려고 했으나, 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단지 흰 입김만을 내뿜었다.


정적은 계속되는 가운데 그의 손은 머리뿐 아니라 부드러운 털에 싸인 그녀의 귀까지 만지작거리기 시작하지만, 라플란드는 그저 가만히 감촉을 느끼고 있었다.


"있잖아 박사, 너의—"

"박사님! 크리스마스 선물 몇 개가 없어졌어요!"


그녀의 말은 황급히 달려온 직원에 의해 막혔다. 보고를 받고 박사는 즉시 직원에게 다가간다.


"어떤 게 없어졌지?"

"환자용 테이블 게임이 몇 개..."


박사가 그녀를 돌아보며 작게 손을 흔들고, 직원과 함께 테라스를 지나 식당으로 돌아간다.


"당장 다시 주문해 줘. 추가 여분까지."

"하지만 예산은 이미 다 써버렸습니다."

"내가 사비로 보충하면 돼. 문제없어"


두 사람은 그런 대화를 나누며 식당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남겨진 라플란드는, 좀전처럼 바깥의 황무지를 바라보며, 커피를 목구멍으로 흘려 넣는다.


"……쓰다"


홀로, 눈이 내리는 테라스에서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



"박사님, 또 안 자고 일하셨죠?"


크리스마스 음악이 흘러나오는 식당에서 폴리닉은 냉철하게 박사를 노려봤다. 그런 그녀를 앞에 두고 그는 테이블에 매달린 채 손바닥을 내밀었다.


"잠깐만 Dr. 폴리닉. 오늘 중으로 꼭 끝내야 할 업무가 있어서 그래. 모두를 위한 거야. 이번만 좀 넘어가주면……"

"가비알 씨, 부탁드려요"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폴리닉의 뒤쪽에 있던 가비알이 박사의 팔을 붙잡았다.


"변명은 취침 이후에 듣겠습니다"


박사는 혼신의 힘으로 저항했지만 이내 두 여성에게 끌려간다. 그 현장을 지켜보던 라플란드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그가 사용하던 테이블을 바라본다.


어제보다 늘어난 서류가 테이블을 뒤덮을 정도로 널려 있고 빈 캔 커피와 머그잔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그녀는 새로 캔커피를 하나 더한 뒤 주위를 둘러본다.


곳곳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달렸고 스피커에서는 끊임없이 크리스마스송이 흘러나온다. 그 와중 시야 한구석에 커다란 물건이 비쳤다.


커다란 종교 그림을 두 사람이 식당으로 옮기고 있었다. 가로 세로 모두 1m가 넘는 크기에 그려진 것은 갓 태어난 아기를 둘러싼 사람들과 머리 위엔 반짝이는 큰 별.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는 그것에 가까이 가있었다.


"여, 엑시아, 텍사스. 많이 힘들겠다. 도와줄까?"


그녀가 말을 건네자 텍사스는 입을 굳게 다물고 엑시아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엑시아는 순간 텍사스의 눈치를 보았지만 이내 환하게 웃으며 응대했다.


"진짜? 그럼 부탁할게!"


라플란드가 그림의 중앙을 받치고, 세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도착한 곳은 연두색 테이프가 붙은 벽. 엑시아는 다가가 식당 벽에 부착식 걸이를 설치한다.


거기에 그림을 걸고, 라플란드와 엑시아는 한숨 돌리고 그림을 바라본다. 텍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이미 잽싸게 자리를 떴다.


남겨진 엑시아는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반대로 라플란드는 유쾌하게 웃는다.


"하핫! 텍사스는 여전하네"


멀어진 텍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그림 쪽으로 눈을 돌린다. 그걸 본 엑시아는 잠시 머쓱해진 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그보다 조금 빨리 라플란드가 먼저 물었다.


"이건 구세주의 탄생 장면인가?"


갑작스런 그녀의 물음에 엑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었지만 조금 전까지의 밝은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연다.


"맞아, 잘 아는데?"

"이래봬도 나는 믿음이 깊어. 하지만 식당 장식용으로는 너무 숭고한 것 같은데."


그림을 감상하면서도 빈정거리며 말을 이어가는 그녀에게 엑시아는 놀라 입을 다무는 것도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내가 믿는 건 사신뿐이야!' 라고 말할 줄 알았어"

"사신? 후후… 어떻게 보면 그렇지"


라플란드가 의미심장하게 웃음소리를 흘리는 것을 보는 엑시아의 표정이 점차 씁쓸한 웃음으로 변한다.


그녀는 다시 그림을 보았다.


"예전에는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구원자를 믿어."


그 순간 보인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에, 굳어 있던 엑시아의 손에서 긴장이 풀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은 해피하다는 거지? 해피 라피! 같은 식?"

"라피?"


쾌활하게 말하는 엑시아를 라플란드는 의아스러운 듯 쳐다봤다.


"귀엽지 않아? 라플란드니까 라피!"


손으로 개 모양을 만들며 자신만만하게 말을 건네는 그녀를 보자 라플란드는 차가운 미소를 짓더니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웃음 뭐야!?"


발끈한 엑시아가 묻지만 라플란드는 귀와 꼬리를 가늘게 움직일 뿐 대답하지 않는다. 그 반응에 그녀는 과장되게 어깨를 늘어뜨리지만, 라플란드는 여전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때 어디선가 풍겨온 달콤한 냄새가 엑시아의 비강을 자극했다. 문득 부엌 쪽을 보니 앞치마를 입은 오퍼레이터가 산타클로스 분장을 한 직원에게 과자를 건네주고 있었다.


과자를 본 그녀는 무언가 생각난 듯,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작은 향초와 적갈색 수지(樹脂)를 꺼낸다. 그리고 가까운 의자를 그림 아래로 옮기고, 그것들을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건?"

"유향(乳香)과 몰약(没薬)이야. 갓 태어난 구세주에게 현자들이 바쳤대."


초에 라이터로 불을 붙이니, 잠시 뒤 향이 은은하게 퍼진다. 그 향기에 라플란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양초와 수지 옆에 소량의 탄약을 함께 올려놓고, 엑시아는 눈을 감고 목소리를 낮추어 기도를 시작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당신께 바라건대 어명을……"


막힘없이 중얼거리는 기도는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1분도 되지 않아 끝낸 엑시아는 라플란드 쪽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라플란드도 해볼래?"


엑시아의 물음에 라플란드는 애매하게 웃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사양할게. 내 구세주는 오직 별 뿐이니까."


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엑시아가 고개를 갸웃하는 것을 무시하고, 의자 위의 세 공물로 눈을 돌린다. 그리고 일그러지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하하, 현대의 크리스마스는 완전 거꾸로네!"

"거꾸로?"


엑시아는 모르겠다는 듯 라플란드의 말을 되풀이한다. 그러자 라플란드는 식당 한구석에 쌓인 포장상자들, 그리고 산타 분장을 한 직원들과 오퍼레이터들을 보며 말한다.


"바치는 쪽에서 받는 쪽으로 바뀌었잖아! 완전 아이러니하지 않아?"


그녀는 소리 높여 웃더니, 이내 서류와 빈 음료수 통으로 어지러운 테이블을 잠시 바라본 뒤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윽고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



복도에 걸린 시계가 23시를 가리킬 무렵 라플란드는 식당 문을 열었다. 안에는 오후 무렵의 활기는 없고 드문드문 빛나는 전등과 자동판매기의 은은한 불빛만 빛나고 있을 뿐이다.


늦은 식사를 하는 사람, 아직까지 일하는 사람도 조금 있고, 구석에서 선물박스 점검을 하는 직원들도 소수 있다.


그녀는 식당을 둘러보다가 익숙한 모습을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간다. 


그녀가 원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옆에 앉아 검을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여전히 마스크를 쓴 박사는 테이블에 엎드린 채 조용히 숨소리를 내고 있다.


라플란드가 그의 잠든 모습을 보던 와중, 그녀의 눈에 아직 작업중인듯한 서류가 들어왔다. 구매 증축 보고서라고 써있는 그것을 들여다보고, 휘갈겨 쓴 글자들에 그녀는 눈살을 찌푸린다.


보고서 글귀에는 크게 증축비를 경비로 충당해 달라는 요구가 적혀 있고, 근처에 아무렇게나 놓인 수첩에는 박사의 글씨로 구매를 증축하는 개선안이 적혀 있다.


라플란드는 보고서와 수첩을 번갈아 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하핫... 박사, 피곤하겠네"


그녀는 그렇게 박사의 손에서 펜을 빼들더니 보고서에 망설임 없이 '각하'라고 적었다. 그리고 이미 작업이 끝난 서류의 다발로 몰래 끼워넣어 새로 한 장을 집는다.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에 라플란드는 묵묵히 날인이나 박사의 사인을 해나가고, 중요해보이는 것은 건드리지 않고 따로 정리한다.


신음소리를 내며 박사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머리를 흔들고 나서 피곤한 듯이 시계를 본다. 이미 0시가 넘었다.


문득 옆을 보니 평소처럼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차곡차곡 정리된 서류와 모락모락 따뜻한 김을 내고 있는 커피가 담긴 컵이 있다.


마신 흔적은 없이 새로 탄 듯하다. 받침 접시에는 '사랑하는 박사에게' 라고 적힌 종이가 곁들여져 있다. 그는 종이를 읽고 미소를 지었다.


'기특한 녀석.'


종이를 가슴 주머니에 넣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뜨거운 액체에 뒤섞여 가라앉은 설탕이 흘러들었다.


그가 커피를 놓고 서류를 집어들자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박사, 조금 시간 괜찮을까요?"

"아, 괜찮아."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고 대답하자 아미야가 옆에 앉았다.


"드디어 오늘이네요"


그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들자, 크리스마스 장식을 만든 아미야와 눈이 마주친다.


"불안해?"


그의 질문에 그녀는 일순간 머뭇거리지만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 모두들 즐거워 해주실지..."


가냘프게 중얼거린 말에 박사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곧 아미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많은 사람들과 네 덕분에, 마무리는 완벽에 가까워"

"하지만……"

"아직 남은 일이라도 있나?"


그의 물음에 아미야는 고개를 젓는다.


"그럼 즐겁게 기다리기만 하면 돼. 부족했던 것들 점검은 나중에 해도 충분해."


강한 의지를 담은 말에 아미야는 무심코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박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마스크로 들여다보이는 눈으로 "아니야?" 라고 말한다.


"그렇죠, 박사님"


아미야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그도 고개를 끄덕이고 커피를 내민다.


"좀 마실래?"

"...그럼, 사양않고."


조금 망설이다 받아들인 그녀는 커피를 목으로 넘긴다. 입을 뗀 컵에, 검은 설탕 자국이 남는다.


박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아미야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를 식당 문에 기댄 채 듣던 라플란드는 쓸쓸한, 그러나 어딘가 광포한 미소를 띠고 복도를 걷기 시작한다.


으슥한 복도는 냉랭한 풍경만 이어지고, 그녀는 무기력하게 걸음을 옮긴다. 그러던 도중, 라플란드는 어떤 물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구매센터라는 간판을 내건 시설 일부가 복도에 크게 노출돼 있다. 더욱이 튀어나온 부분은 이어붙인 부분 투성이로, 여러 소재들을 끼워 섞어 확장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급조 구매센터로 다가간다. 선반에는 크리스마스 관련 상품, 액세서리와 과자 등이 뒤섞여 있었다. 그중 라플란드는 회중시계 하나를 집어든다.


흥미롭게 그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선반 너머에서 소리가 났다.


"헬로우~ 뭐 찾는 거 있어?"


손님 맞이에 기쁜 기색이 만면하던 클로저의 표정이 순간 굳은 미소로 바뀐다. 그러나 곧 상인용 미소로 돌아가 라플란드에게 다가섰다.


"여, 클로저. 구매부 상태는 어때?"

"크리스마스 덕분에 승승장구!"

"그럴 것 같았어"


그녀는 무난한 이야기를 하며 시계를 골라 내밀고, 그것을 받고 재빠르게 계산장으로 가는 클로저를 따라갔다.


"보아하니, 박사에게 보고 안 하고 증축한 모양인데?"

"맞아, 요즘 매출이 좋으니까!"


신바람이 난 듯 대답하는 그녀에게 대금을 건네면, 클로저는 계산대에서 익숙한 듯 거스름돈을 내민다.


시계를 받아든 라플란드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입을 연다.


"박사가 재정 문제 때문에 많이 피곤한 것 같더라고."

"에고… 요즘 힘든 것 같던데 말이야."


클로저는 그 말을 듣고 약간 걱정스러운 듯한 반응을 한다. 이윽고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목덜미에 차가운 칼날이 닿아 있었다. 클로저의 얼굴이 굳어지면서 숨이 멎는다.


"만일 박사가 과로로 쓰러지기라도 하면… 선반에 네 목이라는 상품이 하나 늘어나게 될지도 모르지?"


그렇게 말한 뒤 라플란드는 칼을 떼고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베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광포하게 웃더니, 회중시계를 주머니에 넣으며 돌아 걸어간다. 



***



"메리 크리스마스!"


그 말을 신호로 식당에 폭죽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각자 자유롭게 행동을 시작하여, 제일 먼저 선물 더미로 달려가는 사람, 음식에 달려들어 먹기 시작하는 사람 등이 보인다.


아미야는 제각기 움직이는 이들을 보고 숨을 작게 내쉬었다.


"괜한 걱정이었지?"


그녀의 옆에 선 박사는 안도한 듯 어깨에 힘이 빠진 아미야에게 말한다.


"네. 다들 좋아해 주시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그렇게 대답하며 그녀는 돌아서서 다행인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도 웃으며 아미야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갑자기 환호하는 소리가 들려 그쪽으로 눈을 돌리니 그 발생원은 선물을 나눠주는 직원들 근처. 그 옆에서 기묘한 가면을 들고 승리의 포즈를 하는 느와르 코르네와, 산더미같은 과자를 들고 기세등등한 이프리트의 모습이 보였다.


"반응이 예상 이상인걸."

"신중하게 고른 보람이 있네요"

"그러게"


두 사람은 그런 대화를 나누며 선물에 기뻐하는 사람들을 지켜본다. 문득 박사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뭔가를 찾는다. 아미야가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자 나온 것은 작은 봉지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아미야"


그녀에게 봉투를 내밀며 박사가 말했다. 아미야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되묻는다. 


"저한테 주시는 건가요?"


대답 대신 박사는 재촉하듯 봉투를 내민다. 쭈뼛쭈뼛 봉투를 받아들자, 뭔가 각진 것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열어봐."


시키는 대로 열어보니 안에 있던 것은 옅은 초록빛 향수. 온순한 기품을 느끼게 하는 그것을 보며 아미야의 눈이 빛난다.


"써봐도 되나요?"

"물론이지."


아미야가 자신의 손목에 향수를 조금 뿌리자 이내 달콤함을 머금은 상쾌한 향기가 퍼졌다.


"마음에 들었니?"


단단한 음성으로 가득 찬 그 말에 그녀는 만면에 웃음을 띤다.


"감사합니다. 박사님!"


박사는 말없이 그저 부드러운 눈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박사! 잘 마시고 있어!?"


갑자기 블레이즈가 박사의 등에 달려들었다. 그 충격에 그는 비틀거리며 간신히 자세를 유지한다.


뒤돌아보니, 벌써 취한 듯 뺨을 붉힌 블레이즈의 얼굴이 있었다. 


"안 마십니다"

"팍팍 마시고 괴로운 일들은 싹 잊어버려!"

"안 마십니다"


팔을 걸친 채 즐거운 듯 말을 건네는 블레이즈와 완강히 거절하지만 저항은 하지 않는 박사.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아미야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문다.


"술 좀 적당히 마셔."


그는 그렇게 말하며 강렬한 술기운을 풍기는 블레이즈의 얼굴을 밀친다.


"안 낚이는구만~"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블레이즈는 이내 몸을 뗀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아미야에게 시선을 돌린다.


"토깽이, 향수 바꿨니?"

"네, 아까 박사님한테 받은 거예요."


흐뭇하게 대답하는 그녀에게 블레이즈는 박사를 돌아본다.


"잘 어울리지?"


팔짱을 끼며 대꾸한 그에게 블레이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에게 돌아서서 말을 한다.


"응, 향기가 고급진 게 아미야에게 잘 어울리는데?"


칭찬을 받고 수줍어하는 그녀의 모습에 블레이즈는 부드럽게 웃는다. 그러던 중 요란한 벨소리가 울린다.


"고급 치킨 로스트! 빨리 먹는 사람이 임자다!"


식당 안에 울려 퍼지는 소리와 함께 무수한 인파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블레이즈도 귀를 곤두세우고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돌아본다.


"그럼 이만!"


그렇게 말하고 블레이즈는 사람들 무리 쪽으로 떠났다. 남겨진 그는 한마디, 아미야에게 들릴락 말락 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술은 잘 못 마셔."

"고생하셨어요"


한숨을 쉬는 박사에게 아미야가 위로의 말을 건넨다.


"앗, 리더!" 


멀리서 엑시아가 두 사람을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을 보니 손을 흔드는 엑시아와 과자를 먹는 텍사스가 보이고, 두 사람 근처의 테이블은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박사와 아미야가 부르는 대로 다가서자 사람들이 둘러앉은 테이블 위에는 한입 크기만한 진저브레드. 그런데 어째서인지 다들 케이크를 노려보기만 할 뿐 가져가지는 않았다.


"CEO도 같이 있구나. 둘 다 하나 먹을래?"


텍사스는 이들을 보자 케이크를 접시에 덜어 내밀었다.


"아, 고마워."

"감사합니다"


박사와 아미야는 동시에 케이크를 입으로 가져갔고, 동시에 기침을 하며 내뱉었다.


"당첨!"


콜록거리는 두 사람에게 환하게 당첨이라 말하는 엑시아는 조용히 쿡쿡 웃고 있는 텍사스와 하이파이브를 나눈다.


"실은 말이야, 파티 느낌 나게 매운 진저브레드를 섞어놨어!"


즐겁게 설명하는 엑시아와 그 옆의 텍사스의 머리에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박사의 춉이 떨어졌다.


"아얏~!"

"앗!"

"당장 빼버려"


머리를 누르는 두 사람에게 냉담하게 설교를 하는 그의 옆에서 아미야는 다른 케이크를 집어들었다. 이번에는 자극적인 매운맛이 아닌 은은한 생강향과 단맛이 입안에 스며든다.


"맛있어……"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엑시아가 다른 진저브레드를 박사에게 내밀었다.


"자자, 자신작이니까 리더도 먹어봐!"

"사양하지."

"에이~!"


엑시아는 과장되게 실망한 소리를 내지만 박사와 아미야가 등을 돌리자 점잖게 손을 흔들며 배웅한다. 그런 그를 떠나보내고 잠시 후 박사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 자유로운 녀석들이야"

"저 두 사람은 파티를 좋아하니까요"


박사의 중얼거림에 그녀는 난처한 듯 웃으며 대답한다.


"하지만 가끔 저런 것도 나쁘진 않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맞은편에서 집사복 차림의 미드나이트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손에는 쟁반을 들고, 진한 보라색의 액체로 채워진 잔을 돌리고 있다.


"두 분, 한 잔 어떠십니까?"


두 사람이 눈앞에 이르자 멋들어진 목소리로 미드나이트는 쟁반을 내민다.


"미안하지만 술은 마시지 않아서 말이야."


그의 거절에 미드나이트는 재빨리 말을 바꾼다.


"와인이 아니라 포도주스입니다."


미드나이트가 자신의 뒤쪽에 있는 테이블을 가리키자, 거기에는 가지런히 놓인 와인병, 그 중에는 포도주스도 섞여 있는 것이 보였다.


"섣불리 판단했군. 미안하다."

"신경쓰지 마."


사과한 박사가 잔을 받고, 이어 아미야도 한 잔 집어든다. 그것을 확인한 미드나이트는 다시 돌아서서 다음 인물에게 말을 건다.


"이런 날까지 대단하네요."

"그러게나 말야. 존경스러울 정도야"


감탄하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그는 감개 깊은 듯 동조한다. 그리고 말을 마치자, 아미야에게 유리잔을 내밀었다.


"자, 우리도 건배할까?"

"네, 박사님"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잔을 든다.


"성공적인 파티에"


박사가 그렇게 말하고 두 사람은 잔을 부딪쳤다.


""건배""



***



박사가 시계를 쳐다보니 이미 파티 시작 후 한 시간 정도가 지나 있었다. 이를 인식한 그는 옆에서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아미야에게 말을 건다.


"아미야. 먼저 갈게"

"벌써…요?"


그녀는 쓸쓸하게 중얼거리지만 박사는 식당 한쪽을 가리킨다.


"녀석들에게 찍히면 피곤해지니까."


그 손끝에는 술판을 벌이는 무리들이 빈 와인병을 산더미처럼 쌓아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렇군요. 알았어요."


동정하는 듯한 눈이 된 아미야에게 작별을 고하고, 잠시 병이 늘어선 테이블에 들른다. 그리고 포도주스 병을 집어든 뒤 가까운 직원에게 말을 건다.


"이거, 한 병 가져가도 될까?"

"네. 괜찮습니다."


직원의 승낙을 받고, 박사는 병과 종이컵을 챙겨 술꾼 집단에게 들키지 않도록 식당을 빠져나갔다.


수십 분 뒤 박사는 사다리를 올라 헬기장에 도착했다. 거기에 있는 사람의 그림자는, 그와 또 한 명 뿐.


"찾았다"


그의 목소리에 라플란드는 흰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고개를 돌렸다.


"파티는 벌써 끝났어?"

"술꾼들 때문에 소란스러워졌으니까."


박사는 라플란드 옆에 걸터앉아 병과 종이컵을 놓는다.


"틀림없이 다들 즐거워했겠네."

"그렇다면 좋겠는데"


엷은 웃음으로 대충 건네는 그녀의 말을 받는다. 그 반응에 라플란드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네가 뼈 빠지게 노력한 성과잖아?"

"직업상, 깊게 즐길 시간은 없어서."


그 대답을 끝으로 대화는 끊겼다.


두 사람은 말없이 흘러가는 경치를 바라본다. 보이는 것은 밤하늘과 눈이 쌓인 황무지뿐.


"있잖아 박사. 넌 날 혼자 두지 않을 거지?"


갑작스런 말에 그는 그녀를 쳐다본다. 거기에는 평소의 미소는 없고 뭔가를 참는 듯한 표정.


박사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는 기색을 보인다. 


"약속하지는 못하겠어.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나에겐 미래같은 건……"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라플란드는 그의 얼굴에 손을 뻗어, 순식간에 마스크를 벗겼다. 내동댕이쳐진 마스크가 마른 소리를 내며 굴러간다.


박사의 뒤통수를 잡고, 코끝이 닿을 듯 얼굴을 가까이 붙이며, 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다.


"아니, 아니야. 내가 묻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야."


분노 섞인 목소리에 그의 시선이 방황한다.


"사실 알고 있지? 지금 네가 일하는 방식은 가까운 미래에 자신까지 망가뜨릴 정도라고."

"...그래."


쥐어짜는 듯한 대답에 그녀는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다른 손을 내민다.


"다른 누군가에게 떠넘기면 되잖아. 간단한 일이야."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박사는 분노섞인 눈빛으로 라플란드를 노려보았다.


"...도망치라고?"


분노에 떨리는 듯한 저음과 함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옷깃을 붙잡았다.


"내가 져야만 하는 책임이야. 그 누구에게도 떠넘길 생각은 없어."


그는 막힘없이 힘차게 단언한다. 그녀는 그것에 대해 말꼬리를 올리며 입을 연다.


"나로서는, 함께 도망쳐 주는 게 더 좋았겠지만……"


아쉬운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에게 박사는 험악한 시선을 던지며 옷깃을 잡는 손에 힘이 실린다.


"그거 알아 박사? 늑대는 말이야, 욕심이 많아."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옷깃을 잡은 박사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린다. 가볍게 당기자 그 손은 쉽게 떨어졌고 라플란드는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계속 생각해왔어. 저 별과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마음 속을 들여다보듯 박사는 그녀의 눈을 응시한다.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라플란드는 단숨에 말한다.


"내 힘을 빌리는 것도 도망치는 것에 포함되는 거야?"


일 초도 안 되는 아주 잠깐, 그 사이를 두고 그가 입을 열려고 하자 그녀의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포함된다고 하진 않겠지? 앞으로 수십 년간 져야 할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게 도망치는 거 아니겠어?"


할 말이 없어 입에서는 그저 공기가 빠져나갈 뿐이다. 이어 한숨을 내쉬며, 그는 이마를 짚고 자조적인 웃음을 흘린다.


"책사가 따로 없군."

"칭찬을 받아서 영광이야. "


대담하게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라플란드와는 반대로, 박사는 이마를 짚은 채 움직임을 멈췄다. 수십 초, 몇 분. 로도스가 황야를 달리는 소리만 또렷이 들린다. 이윽고 그는 자세를 바로하고, 그녀에게 돌아섰다.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아. 성과 없는 외교는 물론이고, 여태까지처럼 전투 훈련만 할 시간은 없을 거야."


그가 굳은 목소리로 묻자 그녀는 생각하는 기색도 없이 도전적인 미소를 짓는다.


"너와 함께라면 얼마든지."

"……너다운 대답이군."


그녀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그는 허무하게 미소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런 내 길에, 다른 누군가를 말려 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가 가냘픈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라플란드는 조용히 박사에게 몸을 기댄다.


"한 개의 별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두 별이 붙어있는 건 흔한 일이야"


잠시 움직임을 멈췄던 박사였지만, 이내 다시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확실히."


그의 행동에 라플란드의 귀가 쫑긋쫑긋 움직인다. 그리고 그녀는 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손의 감촉에 기분 좋은 듯 눈을 감았다.


"동결해놨던 어시스턴트 제도를 다시 실시해야겠군."


한숨과 함께 그렇게 말하자 그녀가 조금 놀란 듯 눈길을 던졌다.


"요즘 비서가 아무도 붙어 있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구나"

"이렇게라도 해야 아미야와 켈시가 간섭을 조금이나마 덜 하거든"


말을 마친 뒤 박사는 '결국 너한테 졌지만'이라 웃으며 덧붙인다. 그리고는 곧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쓰다듬는 손을 떼었다.


"어디까지 떨어질지 모르는데도, 따라와 주겠어?"


그 말에 그녀는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하얀 이를 드러냈다.


"따라갈게, 나의 별. 네 행선지라면, 어디까지라도."


의지가 충만한 목소리에, 그는 잔잔한 미소를 보인다.


"믿을게. 라플란드."


그리고 그는 다시 그녀의 머리에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고 귀를 만진다.


"너는 귀 만지는 걸 좋아하나봐?"

"부드러워서 좋은데?"

"마음에 든다면 좋을 대로 해."


귀를 만지는 박사에게 귀를 내민 채 그녀는 눈을 감는다. 그대로 잠시 얌전히 있던 라플란드는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맞아. 너한테 전해주려고 했던 게 있어."


그녀가 꺼낸 것은 금색으로 빛나는 회중시계. 뚜껑에는 바싹 달라붙은 두 마리 늑대가 그려져 있었고, 그 눈에는 작은 청금석이 박혀 있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박사"


박사는 회중시계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몇 박자 뒤에야 그녀의 얼굴을 본다.


"나한테 주는 거야?"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그의 말에 잔잔하게 미소를 머금은 다음 순간, 라플란드는 어느새 그의 품 안에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몸을 경직시키지만 곧 상황을 인식하고 작게 웃는다.


"꽤 대담하네에."

"감정은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녀를 꼭 끌어안은 뒤, 박사는 천천히 몸을 떼었다.


"뭔가 답례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머뭇거리며 말을 흘린 뒤, 그는 살피듯 입을 연다.


"일단, 고급 연마제는 준비돼 있어."

"사양할게. 무기 손질에나 쓰라구"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행방을 잃은 질문에 라플란드는 한심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떨군다. 그대로 몇 초 뒤, 그녀는 그의 코트 자락을 붙잡는다.


"이거."


그는 자신이 입은 코트를 본 뒤, 그녀의 얼굴을 보고, 다시 코트를 본다. 그리고 의아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이런 걸로 되겠어?"

"내 거보다 따뜻해 보여."


그녀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는 재빨리 코트를 벗어 건넸다. 라플란드는 자신의 코트를 박사에게 넘기며 받은 것을 얼른 껴입었다.


헐렁한 소매 틈으로 손을 내밀고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며 박사는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다.


"따뜻해?"

"생각했던 만큼은 아니지만, 최고야"

"어느 쪽이야?"


애매모호한 발언을 웃으며 지적하니 그녀에게서도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코트 사이로 나온 하얀 꼬리가 좌우로 파닥파닥 흔들리고 있었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너에게 있어 사장님과 나는 어떤 존재야?"


문득 그녀가 진지한 눈빛으로 묻는다. 그는 그 물음에 일단 눈을 내리깔고 생각한 뒤, 곧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한다.


"아미야는 딸. 라피는 친구."


그 대답에 그녀는 한숨과 함께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뭐, 지금은 그걸로 봐줄게"


라플란드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경치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 옆에서 그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그만두고 병에 손을 뻗었다.


그의 행동에 이끌린 그녀가 쳐다보자 그는 포도주스라고 적힌 라벨이 보이도록 병을 들었다.


"마실래?"

"잘 먹을게."


병을 열자 진한 보랏빛 포도주스가 향기로운 향과 함께 흘러나온다. 종이컵 두 사람 몫을 채우고는 하나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잔을 받은 그녀는 은은한 은빛의 달빛에 비춰지는 컵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별빛에"


느슨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그도 컵을 내밀며 말을 잇는다.


"우리의 미래에"


그가 말을 마치자 그녀에게서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리고 둘은 같은 타이밍에 입을 열었다.


""건배""


밤하늘 아래, 두 사람은 종이컵을 서로 부딪쳤다.






※ 이 소설은 원작자 「ACnate」님의 허가를 받고 번역하였습니다. 

※ 무단전재금지

※ 원문출처  https://www.pixiv.net/novel/show.php?id=16842785



재미있게 본 소설이라 번역해서 가져와봤어. 라플란드 너무 귀엽다. 오역, 의역 및 어색한 부분 지적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