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까지의 찌는듯한 더위와 정반대의 서늘한 기운.

그렇다고 시원해서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다. 쾌적하다기엔 곰팡이가 너무 많은 공간.


두꺼운 돌기둥이 어둠 속에서도 여러 개 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천장이 꽤 높다. 돔 형태의 형상으로 미루어 볼 때, 원래 이 곳은 종교 시설 같은 곳이었을까...?


나란히 정렬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긴 나무 의자들은 이미 썩어 망가졌고, 의자의 틀로 추정되는 녹슨 쇠다리가 곳곳에 널려 있다.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 함부로 깊게 들어갈 수도 없다.

천장까지의 높이에 비해 방 자체는 그다지 넓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천장에서 비치는 빛만으로 대략적인 방의 넓이를 재 본다면... 아마 로도스의 식당 정도일까.


그리고 그 유일한 빛을 가져오는 천장... 그곳에 지상으로 통하는 큰 구멍이 열려 있었다.



"후~ ...저기서 떨어졌구나. 잘도 무사했네. 저기, 박사? 어? 박사? 살아있어?"


"아ー 미안, 허리를 삐끗한 것 같아서 일어나지 못하겠어. 잠깐만 기다려 줘."



나는 쓰러진 상태로 라플란드를 곁눈질로만 바라볼 뿐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솔직히 쫄았다. 죽는 줄 알았다.



"네 그런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 않은데~? 그렇게 무서웠어?"


"너랑 같은 취급 하지 마, 라플란드. 이러면 보통 무서워하는 게... 아니, 아냐. 고마워 라플란드. 구해줘서 고마워. 내가 살아 있는 건 네 덕분이야."


"후훗, 고맙다고 할 거면 어서 일어나야지."


"아니, 못 일어나겠다니까"



나와 라플란드는 조금 전, 저 천장의 큰 구멍에서 떨어졌다. 나 혼자였다면 분명 그냥 낙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라플란드의 전투 기술력: 월등 평가는 허세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런 경우는 전투기술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상황판단력과 운동능력이지만.

라플란드는 아츠를 이용해, 떨어지는 와중에도 공중에서 나를 붙잡아, 나를 안은 채 한손으로 몇발의 충격파를 땅으로 쏘아, 낙하의 충격을 완화함으로써 훌륭히 착지해낸 것이다. 덕분에 나는 찌부러진 토마토꼴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떨어진 천장 구멍까지는 높이가 족히 20m는 될 것 같다. 이 정도는 제아무리 라플란드라도 올라가지 못할 것이다. 나는 더욱 그렇고.

그렇다면, 이 지하 유적 안에서 출구를 찾아나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네 박사, 내가 안고 가줄까?'


"그건 좀 부끄럽거든. 5분만 기다려줘."



키도 내가 더 큰데, 너무 꼴사납잖아.



***



오늘은 라플란드 외 몇 명과 함께, 한 산악지대에 있는 마을에 고급 약품의 원료를 사러 가고 있었다.

그곳은 그리 큰 마을도 아니고, 살아남기에 험난한 환경이었지만 그만큼 다른 곳에서는 구하기 힘든 귀중한 원생식물 채취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직 그 수익만으로 마을이 먹고살 정도의 양이 채취된다. 로도스로서도 매우 귀중한 이른바 VIP 고객이다.


평소라면 이런 구매 업무까지는 동행하지 않는다. 이래봬도 일단 로도스의 수뇌부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정이 좀 달랐다.

인근 위험 생물들의 흉포화로 인해 채집량이 줄어, 가격을 인상해야겠다는 것이다. 

로도스로서도 고객이 가격을 올려야 할 만큼 채집량이 감소했다면, 지원을 해 주는 게 좋을 것이다. 그로 인해 전투를 할 수 있는 오퍼레이터와 그 지휘관이 필요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다른 복합적인 안건이 있을 수 있다는 우려. 예를 들어 거래의 밸런스가 무너지고 있는 경우, 채집량 감소는 대외적 이유에 불과하고, 실은 이 희귀 원료를 노리고 라인 랩 등 타 조직이 개입한 것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럴 경우 현지에서 전술적 판단뿐 아닌 정치적 판단을 내릴 필요도 있었다.

...그걸 둘 다 할 수 있는 게 나였다. 그게 이번 원정에 참가한 이유다.


동행한 라플란드는 명목상으로는 내 호위를 목적으로 데려온 것이지만, 실은 위험물 배제에 더 가깝다. 

쉽게 흥분하고 쉽게 달려드는 라플란드가 호위로 적합한지 적성 검사를 할 것도 없이, 부적절하다는 것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외부 출장이 있을 때는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항상 그녀를 호위로 데려온다.

이유는 단순하다. 라플란드가 말을 듣는 로도스 내 지휘자가 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른 지휘관들에게는 완전히 미친개 취급을 받고 있다.

때문에 내가 장기간 로도스를 비울 경우에는 호위로 라플란드를 데려간다. 내버려두고 가면 돌아와서 본인에게 심심했다고 다이렉트한 불평을 듣는다. 게다가 대개 내가 없는 동안 사고를 치고 나에게 돌아오는 시말서와 세트로.

이번 건은 위험 생물을 구제한다는 목적도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귀찮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읏차. 이제 좀 움직일 수 있게 됐군. 그럼 탐색하기 전에... 라플란드? 이봐, 라피?"


"여기야"



뒤쪽에서 소리가 났다. 아니, 나한테까지 기척을 지울 필요는 없지 않아? 갑자기 놀라면 생명의 위기를 느끼는데.



"보이는 데 있어줘. 먼저 가버린 줄 알았어."


"아니, 박사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라피라 불러주는 건 예상 밖이었는데. 아 참, 사실 산책도 좀 하고 왔어.



아니나 다를까 벌써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뭐 돌아와준 것만으로도 다행이겠군.



"뭔가 알아낸 거 있어?"


"출구가 어딘지 전혀 모르는 건 알겠어. 거기에 보이는 문을 열면 통로가 있는데, 그 앞은 미로 같아. 우선 두 갈래 길 중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도 모르겠어.



그렇군. 아까 관찰한 바로는 이 방은 문이 하나뿐인 막다른 곳이었다. 시작부터 유적의 최심부에 갑자기 도착해버린 상황일지도 모른다. 출구를 찾는 데까지 꽤 긴 탐색이 될 것 같다. 



***



흙탕물에서 물만을 정수하는 여과 장치, 휴대용 식량 이틀분, 착화제에 고형연료 몇개, 서바이벌 시트, LED 랜턴...



"어떻게든 절약하면 4일 정도는 버틸 수 있겠군. 고형연료가 약간 부족할까봐 걱정되는데."


"그건 그 근처 나무를 쓰면 되지 않을까, 박사?"


"그래. 불을 피울 때는 근처의 나무를 주워서 말려 쓰자. 노숙용품을 가져와서 다행이야."


"지원요청은 힘들 것 같아?"


"지하라서 전파가 들어오지 않아. 다른 녀석들도 설마 우리가 지하로 떨어졌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테니, 아무래도 우리끼리 자력으로 탈출해야겠어..."



원래는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노숙을 하게 될지도 몰라 챙겨온 장비가 있었다. 그걸 라플란드에게 맡겼던 것은 행운이다.

다만 나와 라플란드는 근처 마을에서 운반용 차량 및 운전수를 고용하던 다른 동료들보다 좀 더 일찍 출발했기 때문에 몇 시간 후면 원인불명의 실종자 취급을 당하게 될 것이다.

떨어지게 된 경위도 종잡을 수 없다. 워낙 햇볕이 강했기 때문에 점심식사 겸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그늘에서 라플란드와 잠시 쉬려고 했던 순간, 갑자기 발밑의 땅이 무너져 내렸다.

작전팀 A4의 레인저라도 함께 왔다면 우리들의 실종을 알아챘을지도 모르지만, 일어나버린 일을 후회해도 어쩔 수 없다. 지금의 우리는 훌륭한 MIA(작전 행동중 행방불명)다.


LED 랜턴의 스위치를 넣자 천장 구멍으로부터의 태양빛 뿐이었던 방안이 밝게 비추어졌다. 흠, 역시 예배당인가. 이 LED에 내장되어 있는 아츠 유닛은 아츠를 사용할 수 없는 나라도 스위치 하나로 작동시킬 있어, 290시간≒2주일 정도 빛을 유지할 수 있다. 비싼 장비는 나름대로 비싼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싸구려로 사지 않아 다행이야.



"자, 그럼 박사. 유적 탐색 데이트라고 해도 되는 상황일까?"


"데이트라기보단 서바이벌에 더 가깝지만. 이런 규모의 예배당이 있구나. 이 유적은 꽤 큰 걸."


"혹시 역사적 대발견이라던가 하는 정도야?"


"고고학적으로는. 다만 연대로 미루어 보건대 이곳은 오버테크놀로지가 묻힌 고대 유적 정도는 아니니, 가치는 고고학적인 것뿐이야."


"...좀 부숴져도 되는 거야?"


"...적당한 정도는."



예배당을 나서자 아까 라플란드가 말했던 것처럼 갈림길이 나왔다. 왼쪽? 오른쪽? 어느 쪽이 정답인지 전혀 모르겠다. 일단 찍을 수밖에 없나.

그런데 이 분위기...



"라플란드... 여기, 있어?"


"있어~ 아주 우글우글해. 여기 완전 원석충 둥지네. 심지어 이 냄새... 변이체가 더 많은 것 같아."



갓뎀.

라플란드가 산책에서 금방 돌아온 이유가 이건가. 나를 혼자 두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녀석, 제대로 호위하고 있잖아?



"라플란드. 지휘는 나에게 맡겨."


"아하하! 부탁할게, 박사!"



좀 길어질 것 같다. 이 유적 데이트.



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



결론부터 말하면 이틀이 지났다.

그리고 그 이틀째... 우리는 처음 떨어졌던 예배당으로 돌아와 있었다.



"꽝이었네..."


"꽝이었군."



우리는 처음 예배당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지, 그것을 동전 던지기로 결정했다.

신의 인도는 오른쪽. 허나 꽝이었다. 앞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통로가 무너져서 갈 수가 없었다. 신 따윈 없다.



"이제 왼쪽 길도 무너져 갈 수 없게 되면, 나랑 박사는 여기서 살아야 하는 건가?"


"재수 없는 소리 마. 여긴 너무 냄새나"


"나랑 둘이 사는 건 괜찮은거야...? 난 이제 코가 마비되었으니까 냄새는 신경 쓰이지 않지만."



탐색하는 동안 상당수의 원석충을 격퇴했다. 식량이 적은 이곳에서 이 녀석들이 대량으로 있다는 건 어딘가 밖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는 걸텐데... 오른쪽 루트는 통로가 도중에 붕괴되어있었기 때문에, 남은 왼쪽 루트가 밖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고 싶다.



"라플란드, 오늘은 여기서 쉬자. 왼쪽 루트 탐색은 내일 한다."


"괜찮겠어? 휴대식량 여분이 이틀밖에 안 남았잖아?"


"그래. 그래도 괜찮아. 여기서 쉬자."


"...알았어. 물 좀 구해올게."



그러고 라플란드는 더러운 물이 고인 웅덩이를 찾아갔다.


...이미 알고 있지 않을까.

귀는 늘어져 있고 꼬리는 축 처진 채 꿈틀꿈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여유로운 척 하고 있지만... 라플란드도 이제 한계다.


지난 이틀 동안 라플란드는 정말 호위 오퍼레이터로서 훌륭한 역할을 해주었다.

달아나는 원석충이 있어도 결코 뒤쫓지 않는다.

그렇다기보다, 내 주위 2m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덤벼드는 것, 눈에 거슬리는 것은 모두 막무가내로 베어버리는 라플란드가 전투는 최소한의 정도로 자제하고, 나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었다.

라플란드의 독단적, 호전적인 행동은 결코 그녀의 성격만이 원인이 아니다. 광석병의 영향도 있는 것이다. 그걸 지금 라플란드는 나를 우선으로 하며, 충동들을 정신력으로 비틀어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유적 탐색에 나선 지 벌써 꼬박 이틀째.

이제 라플란드는... 광기를 억누르는 것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박사, 여과장치 여기 놔둘게. 물은 가득하니까 내일까지는 갈 것 같아. 그럼 난 좀 쉴게. 쉬고 있는 나한테는 가까이 오면 안돼. 방어 본능으로 손이 먼저 나가서, 죽여버릴 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말한 뒤 라플란드는 예배 제단 구석으로 가서 검을 옆에 꽂은 뒤,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풀어진 동공, 그리고 짧게 반복되는 가녀린 호흡.

분명 한계다.

솔직히 상상도 못한 일이다. 라플란드가 이렇게 한계까지 몰린 건.

그렇게까지 나를 지키려 해주었다. 모든 것은 나를 이 유적에서 무사히 생환시키기 위해. 나를 죽게 하지 않기 위해서


외톨이 늑대... 미친 개.


라플란드. 너의 광기, 내가 받아줄게. 



***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쉬고 있는 라플란드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검을 집어들었다.

그것을 집어들며 이쪽을 확인한 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본다.



"박사...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는데? 죽고 싶어? 벌써 이 상황에 절망한 거야?"


"아니?"



다시 좀 더 다가간다. 라플란드의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아무래도 가까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모양이다.



"박사, 거기 멈춰... 죽일 거야?"


"할 테면 해봐, 외톨이 늑대. 너한텐 쉬운 일이잖아?"



더욱 가까워진다. 이제 라플란드의 검에 닿을 수 있는 거리다.

나를 향한 칼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평소 그녀에게서 나오는 살기는 추호도 느껴지지 않는다.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광기에.

넌... 날 죽이고 싶지 않구나.


나는 그대로 검날을 잡는다. 잡은 순간 내 손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박, 사... 무슨 짓을... 그만해... 그만해줘... 정말 죽여버릴 거야..."



피를 보고 흥분한 라플란드가, 자신의 반대 손으로 검을 쥔 손을 억누른다.

덜덜 떨고 있는 라플란드는 자신을 멈추기 위해 온 신경을 쓰는 듯했다.

먹히고 있다. 광기에. 피의 충동에.


그런 라플란드에게 나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오른손을 그대로 그녀의 눈앞에 내밀었다.



"라플란드. 오른손이 다쳤는데, 치료해 줄래? 방법은 너에게 맡길게."



...쨍강ー



처음 본 것 같다. 그녀가 상대에게 겨눈 검을 떨어뜨리는 모습은.

그녀의 검은 마른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이젠 눈에 초점이 풀린 라플란드와 피가 뚝뚝 흐르는 내 오른손뿐.


정적 속에서 라플란드는... 조심스럽게 내 오른손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양손으로 부드럽게 나의 오른손을 잡더니, 가늘게 떨면서 나의 오른손에 흐르는 피로 얼굴을 들이댄다.



할짝.. 할짝.. 할짝..



상처에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감각을 느낀다.

라플란드는 마치 늑대가 다친 아이를 핥듯이 부드럽게, 천천히 내 상처를 핥고 있었다. 상처를 핥는 라플란드의 요염한 혀 감촉에 등줄기가 오싹해진다.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고요한 폐허에는 나와 라플란드의 숨결, 그리고 그녀가 나를 핥는 질척한 소리만이 울리고 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핥았던 것도 점점 거리낌없이 바뀌어, 지금은 이미 상처로부터 피가 나오는 것보다 라플란드가 핥아버리는 속도가 더 빠르다.


한동안 황홀한 표정으로 내 상처를 핥던 라플란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초점이 풀렸던 그 눈에는... 평소와 같은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전혀 멈추지 않네. 얼마나 세게 잡은 거야? 칼날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라니... 조금만 더 조절하지 그랬어."


"많이 나오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덕분에 조금 안정됐어. 하지만"



라플란드가 바이저 너머로 내 눈을 들여다봤다. 눈에 생기가 돌아오긴 했지만 평소의 라플란드와는 조금 다른 눈동자. 무언가를 포기한 듯한, 그러면서도 별 거 아니라는 듯한 평소의 눈이 아니다. 푸른 빛이 도는 검은 눈동자가 나를 사로잡는다.



"박사. 이젠, 돌이킬 수 없어. 내가 이런 맛을 느끼게 하다니... 평생 나와 함께해줄 생각이야? 이런 광견에게."



그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여기가 전환점이군.


아마 지금 라플란드는 자신의 한계까지 나에게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아마 여기서 내가 "그럴 생각은 없었다"고 말하는 순간 여기서 우리의 관계는 끝일 것이다.


...그렇지만 라플란드. 난 이미 정해버렸어. 너의 광기를 받겠다고.


나는 조심스럽게 후드와 바이저를 풀었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라플란드가 나를 보고 있다.


모든 장비를 벗은 나는 그런 라플란드를 마주하자 그 아름다운 눈빛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라플란드. 넌 자기 스스로에게까지 광견이라고 하는 거야?"


"다들... 그렇게 말하잖아. 넌 그렇게 말한 적 없지만 그래도 생각은 하고 있겠지? 너도 내가 만든 밀푀유, 처음 봤을 땐 별로 좋은 표정이 아니었잖아"


"그런가. 그럼 라플란드, 네가 보기에 내 인상은 어때? 대충 말해도 괜찮아"


"질문이 많네. ...대체로 나쁘진 않아. 로도스에 있는 녀석들은 너를 마음에 들어해. 특히 여직원들에게서 인기가 많은 것 같던데. 친절하다나? 나랑은 상관없지만 말이야."


"...흐핫! 아하하하하!!!"


"박사...?"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 나를 라플란드가 신기한 얼굴로 바라본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라플란드가 광견이고 내가 친절하다니?

다른 사람들의 평가같은 건 신경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라플란드에게도 조금은 짐작이 가는 모양이다.

착각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라플란드. 네가 로도스에 들어온 후,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넌 한 명도 사람을 죽인 적이 없는데?"


"뭐어? 너 무슨 소리를..."


"착각하지 마, 라플란드. 죽인 건 나야. 네 밀푀유는 내가 시켜서 만든 거야. 넌 작전 외엔 단 한 번도 사적인 살인을 하지 않았다. 내 죄를 함부로 가로채지 마."



라플란드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내 입장에선 사실만을 늘어놓았을 뿐이지만 라플란드에겐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건 궤변이잖아? 그래도 실행한 건 난데?"


"그게 시라쿠사 방식이지? 라플란드, 너 혹시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하는 거야?"


"...아니, 전혀."


"그렇다면, 넌 나 대신 손을 댔을 뿐이야. 만약 네가 미쳤다면, 나 이외엔 아무 말도 듣지 않고, 처벌도 신경 안 쓰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그 성격뿐이야."



안절부절 못하는 라플란드는 나와 나의 손을 번갈아 쳐다본다. 분명 그렇게 쉽게 누군가를 믿을 수 있는 인생은 아니었겠지.


그리고 주뼛주뼛... 말을 잇는다.



"...너, 이런 날 받아들일 생각이야?"



라플란드는 살생에 거리낌이 없다. 그녀의 광기, 그녀의 성격, 성장 과정, 광석병의 증상, 그것들이 그녀를 몰아세운다. 이윽고 그녀는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 일도 없이, 기억을 잃은 내가 그녀보다 더 많이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음에도 말이다.

그런 주제에 주변에서 나는 다정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가 훨씬 솔직하지 않은가? 



"너는 내가 이대로...지금 이대로도 좋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럴 건데."



당연하다는 즉답에 라플란드는 순간 말을 잇지 못한다.

이런 대답에는 익숙하지 않다. 얼굴에 그렇게 쓰여있어.



"...한번 전투를 시작하면 피를 보기 전까진 진정되지 않아. 피, 살, 뼈... 그 냄새가 없으면 멈출 수 없어. 이건... 어딜 봐도 미친 거 아니야?"



확인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건 너에게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럴지도. 하지만 그런 난잡한 피보다 이쪽이 낫지 않아?"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라플란드가 핥는 것을 멈춘 동안, 다시 손바닥에 고인 피를 라플란드에게 내밀었다. 라플란드는 귀와 꼬리를 살랑이면서 그것을 쳐다본다.


망설이고 있군.

이 손을 잡을지 어떨지.



"네가 줄 거야? 이걸? ...계속?"



잠시 후, 간신히 짜낸듯한 그녀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갈 듯 작았다.

망설이며 내 옆에 앉을지, 내 손을 잡을 지 고민하는 그녀의 손을 내가 먼저 잡는다.


라플란드... 나는 널 배신하지 않아.



"네가 더이상 충동에 휩싸이지 않게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으니까. 라플란드, 정 죽이고 싶다면 나를 위해 죽여. 그 대신 네가 품을 수 없는 광기는... 내가 전부 받아가겠어."


"...이봐, 혹시 나보다도 당신이 훨씬 미쳐있는 거 아냐?"



이제 와서 뭘 뻔한 걸.

주변에서 착하다는 평을 듣는 대량학살범이 제대로 된 인간일 리가.



대답은 듣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ーー조금 전까지 늘어진 채 움직이지 않았던 그녀의 귀와 꼬리가, 지금은 기쁜 듯이 파닥파닥 움직이고 있었다.



***



~♪~~~♪♪~♪


기분이 좋은듯한 라플란드의 콧노래가 들린다.

그녀의 기분이 좋은 것은 매우 기쁜 일이지만... 이 정도일 줄은 예상외다.


꽤 깊이 베인 내 손의 치료를 마치고. 나는 돌기둥에 기대어 앉아 쉬고 있었다.

그런 내 무릎 위에는 라플란드가 올라타 나와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다. 그렇게 하고 싶단다.

그녀의 체온과 냄새가 직접 전해져 온다. 직접 안아보니 그녀는 정말로 가냘펐다. 이런 몸 어디에서 그런 괴물같은 전투능력이 나오는 걸까?

그런 와중에도 나올 곳은 제대로 나와있다. 뭐지, 고문인가? 



"저기, 박사. 좀 더 쓰다듬어 줘. 우리 루포는 원래 신뢰하는 사람에게 만져지는 걸 좋아해. 페로만큼은 아니지만."



라플란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항의한다. 

아니, 이미 만지고 있잖아. 이미 안고 있잖아.

지금도 등을 쓰다듬고 있다. 이 상태에서 더 이상 어디를 만지라고...



"페로가 그런 건 알았지만 루포도 그런 줄은 잘 몰랐네."


"우리도 원래는 무리 지어 다니거든. 나랑 함께 다니려던 녀석은 한 명도 없었고 나도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페로와는 달리, 루포는 마음을 허락한 상대가 아니면 만지는 걸 허락하지 않아."



오우, 뭐야 라플란드. 그거 빙빙 돌려서 나를 좋아한다 말하는 거랑 다를 게 없잖아.

지금의 이 흐름을 타고 그녀에게 손을 댈 정도로 나도 분별력이 없진 않지만... 참는 것도 한계가 있어?


되도록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과 가느다란 허리, 이틀 동안 씻지도 못했음에도 좋은 냄새가 나는 머리카락에서 의식을 돌리려 한다. 돌릴 순 없지만. 

이런 내 반응도 즐기고 있겠지. 라플란드는 한층 더 기분이 좋아진 듯하다. 



그 때, 내 시야에 붕붕 흔들리는 것이 비쳤다.


어...? 평소에 참았는데, 이거 혹시 지금이라면 용서해주려나...?



"후앗?"



눈앞을 왔다갔다하는 라플란드의 꼬리를 살며시 쓰다듬자 여태껏 들어보지도 못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나한테 매달리는 힘이 강해진다. 


역시... 거절하지 않는다...


신이 난 나는 등을 쓰다듬는 손길을 멈추고, 끌어안고 있는 라플란드 너머 두 손으로 그 복실복실한 것을 잡았다.


...와. 적어도 이틀간 손질을 하지 않았는데도 라플란드의 꼬리는 푹신푹신했다. 손빗을 넣으면 폭 들어가고, 도망가려는 꼬리 뿌리를 잡으면 두 손이 꼬리로 푹신 감싸진다.

아. 안되겠다... 그만할 수 없어...



"으응...! 박사... 거기, 좀 예민한 곳인데? 예고도 없이 여성의 꼬리를 다짜고짜 만지다니 어쩔 셈이야?"



라플란드가 항의의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입으로만 항의할 뿐 전혀 도망치려는 기색은 없다.

꼬리를 만지작거리다보니 금세 그녀의 힘이 빠졌다. 지금은 나를 안는다기보다 나에게 걸쳐 축 늘어져 있는 상태. 이런 라플란드는 본 적이 없어 신기한 기분이다.

꼬리를 만져지며 나에게 힘없이 기대고 있는, 그런 라플란드의 모습은 나에게 더욱 불을 붙였다.

휴식을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내 이성이 소비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네가 만져지는 게 좋다면서?"


"그렇긴 한데... 으응, 잠깐 박사, 뿌리 쪽은 진짜 안 돼... 잠, 응..."



라플란드가 귀여워 손을 멈출 수가 없다.

라플란드는 꼬리를 만져지는 것을 포기했는지 내 어깻죽지에 얼굴을 묻더니 천천히 할짝할짝 내 목덜미를 핥기 시작했다. 뭐지? 루포의 습성인가? 더욱 그만둘 수가 없는데?



그대로 15분... 정도. 정신없이 그녀의 꼬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라플란드의 움직임이 멈추고 조용해졌다.

웬일인가 하고 그녀 쪽을 확인하니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고 있다.


어? 진짜? 잤어 이녀석. 남자 위에 올라타서 축 늘어지면서 잤어. 아니, 그야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난 2초만에 밀푀유라고? 근데 잘 수 있어? 보통?


"루포는 마음을 허락한 상대가 아니면 만지는 걸 허락하지 않아."


그런 그녀의 말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나는 꼬리에서 손을 떼며 살며시 라플란드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확실히, 어제부터 제대로 자지 못했을 것이다...


......


............


............어? 이 녀석, 귀도 말랑해보이잖아?




나는 라플란드가 잠든 것을 기회로, 밤새도록 그녀의 귀와 꼬리를 만지작거렸다.



***



"흐ー응, 즉 너는 정식 반려자도 아닌 루포의 귀와 꼬리를 밤새 만져댄 거야? 내가 잠든 틈에?"


"...면목없다."


"우리 루포의 귀나 꼬리는 말이야, 굉장히 민감한 기관이거든. 뭐 그건 다른 종족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그걸 내가 자고 있는 사이에 말이야. 자기 욕망대로 유린한 거야, 너는. 밤새도록.


"...아무런 변명할 거리가 없다."


"나한테 있어서 귀나 꼬리를 만지는 건 성기를 만지는 거나 다름없는데. 박사, 알아?"


"...진짜로?"


"진짜로. 박사, 네가 아니었다면 내 앞에 있는 건 이미 고깃덩어리였어"


"...진짜론가"



라플란드의 귀와 꼬리를 내가 잠들기 직전까지 만지작거린 것은 다음날 아침 일어난 라플란드에게 바로 들켜버렸다. 그렇다기보다 이 녀석, 사실 도중에 몇 번인가 일어났던 것 같다.

...모른 척하고 다시 잤다는 건 허락했다는 거 아냐?

아냐, 안 돼. 이 생각을 말하면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하지 마.

그것을 허락했다는 것의 의미를 깊게 파고들면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기분이 든다. 이 안건은 나중에 다시 생각해야겠다.


...자, 여러 일이 있었지만, 우리가 조난당한 상황임은 변함없다.

오늘부터 왼쪽 루트를 탐색한다.

길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고 너무 들떠선 안된다. 조심해서 시작하자.



"자, 그럼 탐색 열심히 해 볼까!"


"박사... 너 언제 한번 누구한테 찔릴 거야."



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



나와 라플란드가 왼쪽 루트 탐색을 시작한 지 벌써 6시간정도 후.

역시 이쪽이 정답 루트였던 것 같다.

나와 라플란드는 유적... 이라기보다 이건 신전이었겠지. 그 출구로 통하는 통로 직전에서 문 쪽을 엿보고 있었다.

뭐, 어느 정도 나올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이건, 이건..



우글우글우글... 우글우글우글... 우글우글우글...



"우와~ 박사, 저 정도 사이즈는 나도 처음 봐. 역사적 발견이 아닐까?"


"이런 역사적 발견은 원하지 않았는데..."



신전 정면 입구와 밖을 잇는 넓은 통로. 그 넓은 공간을 변이 원석충들이 빽빽이 뒤덮고 있었다.

말 그대로 진짜 둥지였다. 게다가 그 통로 중앙에 있는 녀석, 이곳의 여왕일까. 크다. 엄청 크다.

예전 시에스타에서 본 폼페이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사이즈다.

이런 것들이 폭발한다니 상상조차 하기 싫다. 그런 괴물이 통로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오른쪽 루트가 망가진 지금, 우리가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이 원석충 둥지를 통과하는 수밖에 없다. 여기만 지나면 바로 출구. 거대한 장애물. 내 인생은 언제나 이런 식이야...



"박사, 네 전술안을 통해 강행돌파 이외의 계책을 내놓을 수 있을까?"


"미안, 못하겠다"


"...그렇겠지..."



밖으로 통하는 통로는 여기밖에 없다. 빽빽하게 채워진 변이 원석충들와 특대 사이즈 폭발충.

움직일 수 있는 건 나와 라플란드뿐. 별다른 도구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책략을 쓰기에는 수단이 너무 없다.



"그럼 강행 돌파네. 박사, 부탁이 좀 있는데."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말해. 할 수 있는 게 더 적지만."


"뭐, 쉬운 일이야. 여기를 나가면 갖고 싶은 게 있어. 들어줄 수 있어?"


"내 월급으로 살 수 있는 거라면."


"그렇게 비싼 건 아니야. 바이저 좀 벗어줄래?"


"???"



나는 시키는 대로 바이저를 벗었다. 푸른 빛을 내는 검은 유리구슬과 마주쳤다.

그 유리구슬이 기쁜 듯이 일렁였다.


어... 설마...





그 설마였다.

반응조차 할 수 없는 속도로 라플란드에게 입술을 빼앗겼다.

엄청난 속도의 버드 키스.


장난기 없는, 진지한 웃음을 띤 라플란드가 내 품 안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내 기억상으로는 첫 키스인데, 이거.



"라플란드... 난 좀 더 로맨틱하게 하고 싶었어..."


"뭐야, 박사. 기뻐서 울먹이고 있는 거야? 나도 처음인데."



뭐?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다시 라플란드의 얼굴이 눈앞에 다가온다.

피하지... 못한 건 아닌 것 같아. 피하지 않았다. 나는.



꽉!



그런 나를 비웃듯 이번엔 날카로운 통증이 내 입술 오른쪽 끝을 덮친다.

물렸다. 피맛이 난다.


아연실색하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입꼬리를 라플란드가 흐뭇한 표정으로 핥기 시작한다.

아픔과 기분 좋음이 뒤섞인 신기한 감각.

아... 이 아가씨와 사귀고 있으면 나는 성벽이 비뚤어질것 같은 기분이 들어...



"포상, 선불로 받아갈게"



그렇게 말한 뒤, 라플란드는 허리에 찬 두 검을 잡고 통로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냥 정면으로 들어가 날뛸 생각이다. 


사실 달리 방법도 없다. 정말 라플란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제 나에게는 그녀에게 말을 거는 정도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것밖에 할 수 없다면. 이쪽도 그녀의 방식을 따라볼까.



"라플란드."


"...왜?"


"다 부숴버려."


"하핫... Yes my Lord!"



그 한마디로, 라플란드의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순식간에 터져나오는 라플란드의 살기에 반응한 원석충들이 일제히 이쪽을 향한다.

장관이었다. 저 수많은 원석충들이 동시에 이쪽을 적으로 간주한 것이다.

단 한 명의 루포를. 저건 종족에 대한 위협이라고.



"자..."



그런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라플란드는 천천히 움직인다.

여유... 는 아닌 것 같다.

이 물량이 상대다. 제아무리 라플란드라도 여유가 없다.


그런 것이 아니다.


주인으로부터 학살 허가가 떨어졌다. 이것은... 그 기쁨이다.

유린하라는 명령이다.

이제부터 그녀는 광기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주인에게 몸을 맡긴다.



쉬익!



라플란드가 검을 뽑았다.

그 순간, 눈 하나 깜짝할 수 없는 속도로 쏟아져 나온 충격파가 무리의 맨 앞줄에 있던 폭발충들을 덮쳤다.

그 폭발충들은 순식간에 중추신경이 절단되어, 기폭도 하지 못한 채 순식간에 절명한다.

이 정도라변 베였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위력도, 속도도 모두 예전의 라플란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훗... 여러분, 너희 얼굴 따윈 기억 못 하겠지만... 뭐, 가볼까?"



더 이상 혼자가 아닌 외톨이 늑대의 검술은, 주인을 얻어 다른 차원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



"후우... 끝났어, 박사. 이 정도면 합격점 아닐까?"



눈앞에 펼쳐진 원석충 시체 더미.

대량의 원석충, 그뿐 아니라 온갖 형태의 변이종까지 섞여 있다.

그 모든 것을, 이 늑대 아가씨는 혼자서 먹어 치웠다.

규격외의 크기를 자랑한 이곳 우두머리로 생각되는 폭발충조차도, 그 덩치가 폭발하는 일 없이 쓰러져 있다.


단 혼자서 이 정도 전과를 올릴 수 있는 오퍼레이터는 로도스 전체를 둘러봐도 그리 많지 않다. 더구나 단 한 마리조차 폭발충을 기폭시키지 않고 해치울 수 있는 오퍼레이터는 아마 그녀 혼자뿐일 것이다.

천재 이외의 다른 말은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말은 원하지 않겠지.



"합격점이야. 아주 잘했어. 라플란드. 역시 나의 검이야."



라플란드의 귀가 꿈틀 움직여, 이쪽을 향한다.

솔직한 반응이군.



"검... 검인가. 좋네! 난 박사의 검이 될 거야. 베어버리는 것도, 피로 물드는 것도 내 역할이야, 박사. 넌 날 마음껏 휘두르는 것만 생각하면 돼!"



이 표현이 대단히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다. 뭐, 그렇게 과격한 방식으로 그녀를 사용할 생각은 없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 귀와 꼬리를 흐뭇하게 파닥거리며 내게 다가오는 너는, 고작 검 정도에 머물지 않는다.



"그런데 박사, 검은 쓰고 나면 손질이 필요한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내 눈앞까지 온 라플란드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포상을 받을 거라고 말했던 루포.

이렇게 귀엽다니. 이거... 아니, 근데 너 아까 선불로 받아가지 않았어?



...그런데 뭐, 그렇지. 사용한 검은 손질이, 필요한가.


"그래, 이리 와. 라플란드."



나는 널부러진 원석충 시체들 속에서 라플란드를 끌어안았다.

미친 개라는 말을 들었던 외톨이 늑대는, 기쁜 듯이 꼬리를 흔들며 내게 몸을 맡겼다.



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



"이런 깊은 산속까지 로도스 아일랜드의 중진인 박사님께서 찾아와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고개 들어주시죠, 촌장님. 우린 귀중한 동맹입니다. 요즘 채집이 여의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게… 요즘 근처에 대량의 원석충들이 생겨나서… 게다가 변이체가 많습니다. 단순한 원석충이라면 모를까, 변이종도 많아 마을의 젊은이들로는 대처할 수도 없고... 게다가 말입니다. 거의 집 한채 정도로 큰 폭발충도 목격되었습니다. 이래서야 아무리 마을의 생명줄이라지만 약초를 캐러 마을 사람들을 산으로 보낼 수도 없습니다."


"아, 아아ー......"



문제는 다른 동료들과 합류해 마을에 도착하는 순간 해결됐다.

다른 세력의 정치적 간섭같은 것도 없었다.


촌장님, 이미 끝났습니다. 그 원석충들...

내 늑대가 혼자 죄다 뜯어먹었어.



***



최근, 기분나쁜 놈이 박사의 집무실에 눌러앉아 있다.

특별한 어시스턴트도 뭣도,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다.

항상 있다. 특별히 뭔가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있다. 그러면서 박사를 보고 히죽거린다. 기쁜 듯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원래 별로 엮이고 싶지 않은 녀석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박사를 만나러 가보면 꼭 그와 세트로 있다. 정말 기분 나쁘다.


뭐, 기분이 좋고 나쁜 건 일과는 관계없지만. 나는 박사에게 전해줄 물건이 있으니 그의 집무실로 향한다. 그 뿐이야.



"박사, 들어간다"



나는 한마디 한 뒤 집무실로 들어간다.



"어이쿠. 안녕, 텍사스. 나한테 온 물건 있어?"


"안녕, 박사. 사인 부탁해."



부드러운 말투로 박사가 나를 대한다. 그와 이야기하는 이 시간은 특히 편안해지고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다.

은근히 기다려지는 이 시간. 내가 박사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건 이미 스스로도 느끼고 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을 것이다. 엑시아에게조차도.

그래, 누구에게도. 저 녀석에게도.



"여! 텍사스! 잘 지내? 오늘도 배송이야? 펭귄에서 여기까지 오는 배달부는 너뿐이잖아?!"



지독하게 불쾌한 소리가 소파에서 흘러나왔다.

애써 무시한다. 저 녀석과 엮이면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박사, 사인 부탁한다. 그리고 여기서 보낼 물건이 있으면 배달해줄 수 있는데, 있을까?"


"잠깐만 기다려. 3개 정도 있었을 거야. 어디에 뒀더라?"


"박사! 용문에 줄 서류라면 두 번째 선반에 넣어뒀어! 텍사스! 그렇게 무시 안 해도 되잖아!"



불쾌하다. 네가 박사의 서류가 뭔지 어떻게 알아. 얼마나 더 여기 있을 셈이야. 심지어 온 몸에 박사의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다. 마음에 안 들어.


...어? 녀석 목에 있는 건...


....어? 허어? 



"너... 그 목에 있는 거 뭐야"


"이제야 입을 여는군 텍사스! 내 목에 있는 게 궁금해? 당연히 그렇겠지."



라플란드의 목에는 얇은, 그러나 고급이라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는 가죽 초커가 매어 있었다.

언뜻 보면 그저 액세서리다. 

하지만, 루포에게 목에 하는 장식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도, 상대에 따라서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난번 임무 중에 큰일을 해냈거든. 그 공으로 받은 거야. 어때?"



저 년이 그 의미를 모를 리가 없다. 나는 박사에게 따지듯 시선을 돌렸다.



"아, 그렇지. 지난번에 라플란드가 내 목숨을 구해줬거든. 그 답례로 준 거야. 라플란드가 저걸 갖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박사, 저거 무슨 뜻인지 알아?"


"그런 건 내가 알고 있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텍사스? 너한테 따질 권리같은 건 없을 것 같은데?"



확신범이었다. 아무래도 박사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확실히 이건 다른 루포나 페로에게 하는 최고 등급의 견제다.

저 녀석... 그런 것에는 흥미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딱히 뭐라 할 생각은 없다. 박사, 배달물 준비는 다 됐어?"


"아, 미안 미안. 이거랑 이거랑. 그럼 부탁해, 텍사스."


"알았다."



나는 빠르게 처리를 마치고 다음 업무절차를 생각한다.

배달은 여기뿐이 아니다. 이런 녀석한테 신경쓸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라플란드는 "흥." 하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는 원래 있던 소파로 돌아갔다.

그 목에 찬 초커를 소중하게 어루만지면서.



"그럼 박사, 실례하지."


"그래 텍사스, 수고했어. 항상 고마워."


"일이다. 신경 쓰지 마."



나는 그대로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스쳐 지나가며, 그 녀석이 속삭인 '네가 할 수 있을까?' 라는 말이 끊임없이 머리에 울리고 있었다.




⇚ to be continued =


https://arca.live/b/hypergryph/43635635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소설은 원작자 「tada」님의 허가를 받고 번역하였습니다. 

※ 원문출처  https://www.pixiv.net/novel/show.php?id=16280556


라플란드가 명령 받는 부분은 원문이 "Yes my Ord"인데 Lord의 오타가 아닐까 싶어 바꿔봤어. Ord라는 단어가 있는데 내 영어실력이 짧아서 몰랐던 걸 수도 있지만, 아시는 분은 제보 바람. 바로 수정할게. 

오역, 의역 및 어색한 부분 지적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