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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천루에서의 그 일이 있고 일주일이 지났다.

그 동안 내가 늦게까지 일하는 사무실에 안젤리나가 창문을 열고 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혹시 내가 그때 혼낸 것 때문에 서먹해진 건가, 하는 생각도 꽤 많이 했다.

안젤리나가 물론 조심하지 않을 리는 없겠지만 나름대로 그러면서 즐거웠을 텐데. 그 즐거움을 빼앗아 버린 게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에, 그때 보았던 자유로운 미소를 떠올리며 일하다 보니 저녁시간이 훨씬 지나버렸다. 

비서 오퍼레이터는 또 저녁시간 땡 하자마자 보내놓고, 오늘은 안젤리나가 오려나 하면서 괜히 일을 질질 끌고 있다.


몇 번 안젤리나가 야근할 때, 더구나 창문으로 왔다 보니 일하면서도 창문을 흘끗흘끗 보게 된다.

그 새파란, 자유로운 빛줄기가 언제쯤이면 보일까 하던 그때 조심스러운 노크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문이 살짝 열리고 암적색의 꼬리 한 쪽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반가운 얼굴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사, 지금 많이 바빠?"


오오, 오늘은 창문이 아니라 평범하게 문으로 왔다.

편지 배달이 일찍 끝났나 보네.


"아니. 슬슬 끝나는데. 무슨 일 있어?"


"그....전에 박사가 이야기해 줬잖아. 스트레스 풀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으면 찾아봐 주겠다고."


잊어버릴 리가 없다. 그때 놀랐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이 기분 나쁘게 간지럽다. 언제 갑자기 다시 물어뜯길까 싶어 불안하다.


"그랬었지. 뭐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말도 안 되는 거만 아니면 같이 해줄게."


"일하는 중이잖아?"


"그거 하고 끝내면 되지. 뭔데?"


"아, 고마워. 그러면 그....내가 예전에 학교 다닐 때는 주변 친구들 머리도 잘라주고 그랬거든. 근데 한참 안 하고 있었으니까 손이 무뎌질 것 같아서."


그런 재주도 있었구나.

안젤리나 하면 집배원 같은 인상이었으니 다른 걸 할 거란 생각은 그닥 들지 않았는데.


"지마나 굼 같은 애들한테 해줘도 되잖아?"


"긴 머리보다는 짧은 머리로 먼저 연습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남자분들 중에선 쉽사리 부탁할 사람이 없기도 하고."


이래저래 내가 선택된 이유가 좀 의아하지만 납득이 안 가는 선도 아니다.

굉장히 다양한 궁금증은 차치하고, 아무튼 약속한 거니까 지켜야지. 마침 머리 자를 때도 됐고. 평소에는 생활부 직원에게 잘라달라고 하는데 이번엔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


"알겠어. 여기서 할 거야?"


"응. 빗하고 가위하고....신문지도 가지고 왔어."


빗하고 가위뿐인 이발....이라고 하니 좀 그렇지만, 반대로 안젤리나는 남자들 머리 자를 때 쓰는 바리깡이 익숙하지 않겠지. 쓰자면 단순하게 쓸 수 있지만 그만큼 위험부담도 클 거고.


사실 안젤리나가 머리를 망쳐도 외부로 나갈 일이 없으니 문제는 없다.

직원들이나 오퍼레이터들이 뭐라고 하면 다 밀고 있으면 되겠지. 머리는 또 자랄 거니까.


"알겠어. 스툴에 앉아서 하자. 신문지만 줘."


사무실 한가운데에 안젤리나가 가져온 신문지를 깔고, 여분으로 가져다놓은 스툴을 신문지 위로 끌고 왔다. 그 사이 안젤리나는 손가방에서 머리빗과 이발용 가위 하나를 꺼내 내 책상에 내려놓고, 많이 본 이발용 큰 천도....저건 어디서 나온 거야?


"앉아봐, 박사. 이거 둘러줄게."


안젤리나 말에 따라 스툴에 앉으니, 그대로 스툴채 몸에 이발용 천이 둘러쳐졌다. 거울도 없고, 낯선 사람에게 머리를 맡긴다고 생각하니 많이 생소한 느낌이다. 설마 얘가 머리를 잘라줄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는데.


그래도 한 손에 빗, 한 손에 가위를 들고 등 뒤에 서는 폼이 많이 해 본 것 같아 믿음은 간다. 좀 해 봤다 이건가. 아까 천 둘러주는 것도 사실상 생활부 직원이 해주는 거랑 큰 차이가 없었고.


"그러면~시작할게요~"


"예쁘게 잘라주세요."


헤어샵이라던가 가 본 적은 없지만 왠지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무심코 대답해버렸다. 안젤리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빗으로 내 머리를 내려주더니, 이리저리 눈으로 길이를 재보기 시작했다. 사락사락 하고 빗이 살짝살짝 두피를 스치는 게 평소 대충 하는 빗질하고는 다른 느낌이다. 생활부 직원하고도 다르다.


조금 머뭇거린 뒤에 사각사각 하는 기분좋은 소리가 약간 불안한 템포로 귀를 간질인다. 나름대로 가위 다루는 요령은 있는데 오랜만이어서인지 신중한 것인가. 머리카락을 살짝 잡는 것도, 가위질을 하는 것도 조금 느릿하다.


"근데 어떻게 하다가 친구들끼리 머리 잘라주고 한 거야?"


"헤어샵에 가서 하면 비싸기도 하고, 또 조금 정리할 건데 돈 주고 하기도 그러니까. 앞머리 정도는 혼자 하고, 이제 옆쪽이랑 뒤쪽은 손이 가기 힘드니까 서로 해준 거지."


"그러면 저기....우르수스 애들도 그래?"


마침 지마를 비롯한 우르수스 학생자치단 오퍼레이터들이 안젤리나랑 같은 나이대니까.


"우르수스는 어떻게 할지 모르겠는데 비슷했지 않았을까? 안나는 할 수 있을 것 같고, 소냐는 좀 힘들려나. 라다는 아직 어려서 모르겠는데 손재주 좋으니까 조금만 가르쳐주면 잘할 것 같아."


나이가 비슷하다 보니 이름으로 편하게 부르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 안젤리나의 친화력도 한몫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박사는 머리 어떻게 자르고 있었어? 바리깡으로 밀어버리는 건 아닌 것 같았는데."


"나? 생활부 직원이 잘라줬는데."


"생활부 직원? 누구?"


"그....물자 주문하는 불포족 여자분. 나 말고 다른 사람들 머리도 잘라준다던데."


"흐응."


가위질하는 손이 점점 익숙해졌는지 살살 속도가 붙는다. 괜히 방해될까봐 숨도 참고 꼼짝도 안 하게 된다.


"따로 돈 받고 하는 것도 아닐 것 같은데."


"그렇나? 뭐 켈시한테 수당은 받는다곤 하는데."


"그럼 내가 머리 잘 자르게 되면 박사 머리는 내가 해 줄까? 손이 하나라도 줄면 그분도 편할 거 아니야."


"어, 정말? 너 귀찮지 않겠어? 남자 머리는 꽤 자주 자르는데."


"비슷한 길이로 자른다고 하면 여자랑 그렇게 다르지도 않아."


사각사각, 하고 귓전에서 조심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머리 위에서 탭댄스를 추듯 노닐던 빗과 가위가 자리를 옮겨 그루브를 타기 시작한 것이다. 옆머리가 짧았다 보니 손가락이 가볍게 닿고 있다.


"어어, 큰일났다. 옆머리가 좀 짧아졌는데."


"그렇게 신경쓰진 않는데. 실수해도 괜찮아."


"아니, 박사 머리 만지는 건데 잘 해야지. 수습해 볼게. 이거 윗머리로 덮어지려나."


안젤리나의 손이 바빠졌다. 좀 불안한 듯 하면서도, 이따금 심호흡을 하며 떨리는 손을 진정을 시키는 것처럼.


"어어....잠깐만. 이거....어떻게 하지....왜 이래...."


"왜 그래? 뭔데....?"


안젤리나가 눈에 띄게 불안해하고 있다. 얼굴을 안 보는데도 표정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내 머리는 어떻게 되어있을지보다 안젤리나가 괜찮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 왜....요리같은거 하다보면 물이 많다고 간을 더하고....간이 세다고 물을 더 넣고 하는 거 있잖아."


요리를 해본 적은 없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겠다. 밸런스를 맞추려 하다가 감당 안되는 일이 됐다던가 하는 거.

지휘를 하면서도 몇 번 겪어본 일이니 공감이 간다.


"뭔지 알 거 같아."


"그....박사. 미안해. 머리 많이 짧아질 거 같아. 수습은 최대한 해 볼게. 이상해도 화내지는 마."


"괜찮아, 안젤리나. 천천히 해. 망쳐도 되니까 너무 부담갖지 말고."


정말 이상하다. 생활부 직원이 잘라줄 때는 그러려니 했던 게, 안젤리나가 하고 있으니 안심시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만이라고도 했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하는 건데 이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되니. 


하지만 바람도, 말도 무색하게 안젤리나의 손길이 점점 조급해진다.

괜히 더 이상 가위랑 빗도 못 들 것 같아서 그만 하라고도 못 하겠다.


"아닌데....이게 아닌데....더 잘 할 수 있는데...."


결국 5분 정도 혼자 씨름하던 안젤리나가 한숨을 쉬며 빗과 가위를 든 손을 늘어뜨렸다.


"안젤리나, 괜찮아?"


"진짜 미안해, 박사! 가위를 한 번 잘못 넣었더니 많이 짧아졌어....그래서 그거 수습하려고 길이 맞추다 보니까...."


어느 정도인가 싶어 손을 들어 만져봤는데 꽤 많이 짧아져 있다. 원래 길이의 3/4 정도가 뭉텅 날아갔다. 윗머리는 그럭저럭 괜찮은 길이인데 옆머리가 일직선으로 길이가 비슷할 정도로 많이 잘린 모양이다. 


"아니다....잠깐만. 이 머리....위쪽이 살아있으니까....박사, 머리 한 번 더 감는 거 괜찮아?"


"응? 왜 그래?"


"그....있잖아. 나중에 내가 사진 하나 보내줄게. 컬럼비아에서 이런 머리 비슷한 걸 봤거든. 머리 스타일 만들어놓고 고정시킬 게 있으면 당분간은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런 게 있어?"


머리를 만진다고 해봐야 빗질 정도뿐이다. 그나마도 아래로 내릴 뿐인데.


"아니, 박사가 매번 만지기엔 어려우려나...."


안젤리나가 건네준 거울을 보니 정말 어떻게 해야 될지 감이 안 온다. 옆머리가 그대로 위로 퍼지는 곡선을 그리고 있다. 윗머리도 꽤 정리를 해버려서 윗머리를 내려서 어떻게 한다 수준이 아니고, 오히려 잘못 내리면 짧아진 옆머리가 간섭해서 손을 못 쓸 것 같은데.


"안젤리나. 그러면 남은 부분도 비슷한 길이로 잘라줄래?"


"어? 여기서 더 잘라버린다고?"


"전부 길이가 비슷해지면 어디가 실수인지 모를 거 아니야."


여기서 짧아지면 굳이 손질할 것도 없을 거니까 하는 생각 반의 반, 아예 애매한 길이를 짧게 해버리면 어떻게든 되고 또 자라면서 답이 나오겠지 하는 생각 반의 반, 수습할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내려는 안젤리나를 도와주려는 생각 반 정도일까. 물론 머리스타일에 대해 일자무식인 내가 이야기한들 설득력은 없겠지만.


"나 그렇게까지 짧게 잘라본 적이 없는데?"


"한 번 해 봐. 가장 짧은 데랑 길이 비슷하게 할 수는 있을 거 아니야."


"그....알겠어. 화내지 마."


화 안 낸다니까.


안 어울리면 실패한 셈 치면 되니까 하며 거울을 안젤리나에게 돌려주었다. 안젤리나가 다시 가위를 잡고, 아까보다는 좀 더 확신에 찬 느낌으로 사각거리는 소리가 귀에 울렸다. 가위 전체가 피부에 살짝살짝 닿는 느낌으로.


갑자기 과감해져서 조금 놀랐지만, 아무튼 10분 정도 더 계속된 가위소리는 안젤리나가 뒤에서 거울을 건네주면서 끝났다.


"가위로는 이 이상 짧게는 못 할 것 같아."


"오....이건 이거대로 깔끔한데."


좀 낯선 모습과 생각보다 어울리는 건 아닌 것 같아 놀랐지만 아까보다는 나은 것 같다. 두상이 보일 정도로 전체적으로 짧아졌는데....아침저녁으로 머리 감을 때 좀 더 편할 것 같네.

몇 군데 쥐파먹은 데가 눈에 보이는데 잘 봐야 보이는 정도고, 그나마도 며칠 지나면 묻혀서 잘 안 보일 것 같다. 뭐, 내일 보는 사람들이 머리를 왜 그렇게 짧게 잘랐냐고 인사는 하겠지.


"고생했어, 안젤리나."


"미안....내가 실수해서 더 짧아졌지."


"다음에 더 잘 하면 되잖아. 오늘만 날인 것도 아니고."


등과 어깨에 묻은 머리카락을 털고, 안젤리나가 도구를 정리하는 사이에 빗자루를 가져와서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그 사이에도 안젤리나가 푹푹 한숨을 쉬는 게 조금 안쓰럽게까지 느껴진다.


그래도 조금만 더 연습하고 다듬으면 잘 할 것 같은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좀 더 연습 상대가 되는 것도 좋겠다.


"안젤리나. 다음에도 머리 한 번 잘라줄래?"


"응? 어?"


안젤리나는 지금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놀라며 물었다. 눈은 둥그렇게 뜨고, 입은 살짝 벌어져 있는 게 지금 한 말을 못 믿는 눈치다.


"아까 네가 해 준다며. 뭐, 좀 하다 보면 많이 나아질 것 같고, 지금 이 머리도 생각한 것보다 잘 만져줘서 수습이 됐잖아."


"그, 그래도....아까처럼 또 실수하면....기껏 맡겨줬는데 잘 못하면 미안하기도 하고...."


"그럼 그건 그때 생각하지. 어차피 너도 더 익숙해지려면 몇 명 정도 머리 잘라봐야 할 거니까. 한 명이라도 늘어서 그게 누적되면 좀 더 감이 빨리 잡히지 않을까? 나는 뭐....당장 이렇다하게 외부로 나갈 일도 없으니까 머리 한두 번 망쳐도 부담은 덜해. 아무튼 늘 때까지는 도와줄게."


내 말에 안젤리나는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고 생각에 잠겼다.

물론 안젤리나가 앞으로 머리 손질하는 걸 업으로 삼을 거라 생각하긴 힘들지만 나름대로 예전 생활을 떠오르게 하는 방법이기도 하니까.


안젤리나가 가위와 빗을 더 이상 잡지 않을 때까지는 도와주고 싶다.

이것도 안젤리나의 스트레스 관리에 도움이 된다면.


한참을 그렇게 내 시선을 피하던 안젤리나가 겨우 고개를 돌려 나를 잠깐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다시 시선을 피한 끝에, 안젤리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치떠 나를 올려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나는, 당연하겠지만 비서 오퍼레이터나, 뭔가 보고하러 방문하는 오퍼레이터들에게 머리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들어야만 했다. 아미야는 기절할 것처럼 놀라고, 켈시는 헬멧이라도 쓸 셈이냐며 핀잔을 주었다. 마침 비서 오퍼레이터로 들어온 첸도 웬 경찰대원이 들어온 줄 알았다고 하더라.


아침에 나설 때 준비할 시간이 줄어든 건 역시 소소하게 좋은 것 같다.

짧은 머리....좀 더 알아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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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이다


요즘 일도 빡세고 글도 안써지고

망상으로 한편뚝딱 가능했는데 뭔가 전반적으로 안되는 느낌임


주말이니 맛있는거 먹고 다음편도 준비하겠음


읽어줘서 고맙고 주말 재밌게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