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arknights/53329183 > 전편?링?크?




***


 [충고 하나만 더 할게. 아머레스 유니온은 정말 위험해.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건 더 위험하고.]


 [어쨌든 엎질러진 물이니까 만약을 대비해서 자기 지킬 수단 정도는 마련해두는 게 좋을 거야. 자다가 화살 맞고 죽어버리면 너무 억울할 거 아냐, 그치?]


 [당신, 칼 쓰는 실력 하난 끝내주는 거 같으니까 프리랜서 기사라도 해보는 게 어때? 의외로 인기 좋을 수도 있어. 이 불꽃 꼬리의 기사가 보증할게!]


 그렇게 불꽃 꼬리의 기사, 소나는 떠났다. 마치 또래 친구랑 수다라도 떤 것인 양손까지 팔랑팔랑 흔들면서.


 웃다가 갑자기 짜증을 내질 않나, 짜증을 내다가 또 걱정해주질 않나.


 “휴우우우…….”


 제이는 공원 벤치에 홀로 늘어져 탄식 같은 한숨을 뱉어냈다.


 온몸의 힘이 그야말로 해변으로 밀려나온 해파리만큼이나 좍 빠진 느낌이었다. 아슬아슬 걸려 있던 해는 이미 옛적에 기운 지 오래였고, 기사 아가씨마저 떠난 공원은 간간이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빼곤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생각을 정리하기엔 썩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차라리 아까 그 활잽이들이랑 싸웠을 땐 맘이라도 편했지…….”


 빈말인 것 같지만 반쯤은 진심이었다. 자라온 환경 탓에 그는 여자에 대해 엄청 서툴렀고, 소나처럼 활발하다 못해 타오를 것만 같은 여자에겐 더더욱 서툴렀다. 그에 비해 싸움은 그냥 머리 비우고 싸움에만 집중하면 되니 그 얼마나 편한가.


 새삼, 그는 자기처럼 사회성 없는 사람은 물론이요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와 친하고 얘기도 잘하는 박사가 전보다 더욱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아이고, 대장. 밥은 잘 잡숫고 계시나 모르겠네.”


 굶기는 밥 먹기보다 더 좋아하는 양반인데. 일에 치여 끙끙거리다가 비서 오퍼레이터들에게 집무실에서부터 식당까지 질질 끌려가는 걸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쩌다 한 번쯤은 그가 끌고 가야 할 일도 있었고 말이다.


 하루에 세 끼는 때려죽여도 먹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제이의 입장에서 박사는 그야말로 이단아나 마찬가지였다. 


 꾸르륵


 “…….”


밥 생각을 해서일까. 제 주인을 닮아 둔해 터진 배는 그제야 배가 고프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하긴 아까 그렇게 한바탕하고 여태껏 먹은 게 녹즙밖에 없으니 허기가 안 지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쓰읍, 그래도 밥때는 지켜야지. 다 먹자고 하는 짓인데.”


 말이야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어디 밥집이나 찾아볼 기세였지만, 정작 그렇게 말한 당사자는 쉽게 엉덩일 떼질 못하고 있었다.


 “…….”


 뭔 청승인지 원.


 그는 일어나는 대신 벤치에 대놓고 퍼질러 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밤하늘을 바라봤다. 별이 예쁘다느니, 용문의 밤하늘과 똑같다느니 그런 얼빠진 생각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복잡해서였다. 어지간한 경우 아니면 설령 작전 중에라도 끼니는 챙기는 그치고는 대단히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카시미어는 썩어들어가는 용과도 같아. 언뜻 보기엔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은 제 살점을 뜯어먹으며 겨우 연명해 나가는 그런 용.]


 “…….”


 대체 몇 수 앞까지 내다보시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대장. 따라가기도 벅차다구요.


 제이는 카시미어에 오기 전 들었던 박사의 말을 떠올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기사, 기사라.


 기사 ‘스포츠’라 이거지.


 “…자격시험이랍시고 글룸핀서 둥지에 사람을 처박는 게 스포츠면 뭔, 리유니온이랑 싸우는 건 피크닉이랍니까.”


 스며 나오는 목소리는 그답지 않게 신랄하기 그지없었다. 그만큼 속에 불만이 가득 찼다는 뜻이었다.


 세상 어느 곳도 완벽한 이상향은 존재하지 않는다. 용문도 그렇고, 로도스 역시 자기가 모르는 어두운 면모가 있을 것이며, 그건 이 카시미어라 해서 다르지 않을 터. 


 그렇다 해도 새로운 곳에서 느끼는 낯선 충격은 그의 생각 이상으로 컸다.


 기사가 있고, 그를 따르는 종자와 그를 후원해주는 스폰서인 기업이 있다.


 관중들은 그들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며, 자신이 지지하는 기사를 위해 아낌없이 지갑을 연다.


 언론과 미디어는 그런 열기에 더욱 장작을 집어넣으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겠지. 마치 기사만이 카시미어라는 도시의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카시미어가 돌아간다.


 이동 도시 바깥에선 사람들이 제대로 된 보호조차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데, 정작 중앙인 그랜드 나이트 영지에선 기사들의 싸움 놀음이나 즐기며 눈과 귀를 닫고 있다.


 썩어가는 용.


 겉으로 보기엔 의연하지만, 실상은 제 살점을 뜯어먹으며 겨우 연명하는.


 카시미어의 상황을 그보다 더 잘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 이곳에 온 지 고작해야 하루밖에 안 됐는데도 제이는 카시미어의 심연에 고개를 들이밀었다가 뺀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장께서 날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단 말이지…….”


 박사의 판단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박사를 처음 봤을 때 삐딱하게 봤던 그 순간을 제외하고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박사의 판단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자기가 대체 이 카시미어에서 뭘 할 수나 있단 말인가. 자기는 그냥 용문 뒷골목에서 어묵 장사나 하는 일개 상인에 불과했다. 박사처럼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친화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으며, 카시미어에 든든한 연줄이 있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거, 어묵 장사라도 해야 하나. 포장마차라도 열면 손님 꽤 올 거 같은데.”


 요리 전반에 관심 많은 제이였지만 특히 잘하는 걸 꼽자면 역시 어묵이었다. 맨 처음 배운 요리이기도 하고, 그만큼 애정도 있었으니까. 장사야 지금까지 문자 그대로 밥 먹듯 해왔던 거고, 식재료만 구할 수 있다면 어디서든 포장마차라도 열어서 먹고살 수도 있었다.


 물론 소나가 귀띔했던 대로 지하 투기장에서 기사 노릇을 해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싫었다. 싸우는 거야 뭐 잘한다 쳐도 그걸로 먹고살고 싶다는 생각은 꿈에도 가져본 적 없는 제이였다. 싸움은 어쩔 수 없을 때를 위한 수단이지 돈벌이를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다만 요즘 ‘그 어쩔 수 없을 때’가 좀 많아지는 것 같단 말이지.


 “…….”


 그는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 들었다. 아까 돌려받은 편지는 좀 구겨졌을 뿐 멀끔했다. 봉투 겉면엔 아무것도 안 쓰여 있었다. 단지 니어 가문의 문양으로 추정되는 봉인만 찍혀 있을 뿐이었다.


 [폐를 끼치는군.]


 로도스를 떠나기 전, 제이가 니어를 만나러 갔을 때 그녀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이전 작전에서 입은 상처가 아직 다 낫질 않았다. 박사에겐 신경 쓸 필요 없다고 그토록 말해뒀건만……. 박사와는 얘기가 다 끝난 건가?]


 [예. 카시미어로 가기 전에 니어 아가씨를 찾아뵈라 해서요.]


 [아가씨라니……. 훗, 정말 그대는 변하질 않는군.]


 그가 여자를 어려워한다는 걸 이미 아는지라 니어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신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한 뒤 방안에서 편지 한 통을 가지고 나왔다. 급하게 쓴 건 아닌 거 같았고, 미리 써둔 듯했다.


 [원래대로라면 전달자를 통해서 보내려 했던 것이지만 그대에게 줘야겠군. 가문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그대를 도와줄 것이다.]


 그러나 편지를 받을 때 들은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그 온화하고 자신감 넘치는 소리가 아닌 드물게 약하고 떨리는 목소리였다.


 […잘 지냈으면 좋겠는데. 조피아도, 마리아도, 무에나 삼촌도.]


 “…….”


 그게 이 편지.


 니어는 원한다면 편지에 뭘 썼는지 알려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가족끼리의 이야기지 않는가. 남 사생활에 고갤 들이미는 취미 같은 건 없었다.


 “니어 아가씨 가족들이라면 그 사람들도 기사겠지.”


 과연 그 사람들은 어떤 기사일까.


 니어처럼 고귀한 정신을 가진 이들일까, 아니면 그녀와는 달리 이 카시미어의 부패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일까. 그건 아직 알 수 없었다.


 “…일단 내일 부딪혀 보자.”


 그는 마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박사와의 임무도 있었지만, 니어의 편지를 받은 이상 그는 임무 여부와 관계없이 이걸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가족의 편지였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동씨 아저씨께 연락 안 한지도 꽤 됐지. 용문 떠나고 나선 두어 번 정도밖에 편지 안 썼으니까…….


 이번 일이 끝나면 박사에게 휴가 신청해서 찾아봬야겠다. 그래, 그래야겠다.


 그는 약간 가벼워진 마음으로 늦은 저녁을 먹으려 시내로 발길을 돌렸다.


 어쨌든 당장 끝날 일은 아니다. 일도 오뎅 만드는 것과 똑같다. 재료 중에서 빨리 익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오랜 시간 동안 푹 익혀야 제맛이 나는 것도 있다. 시간을 들여야 맛이 드는 재료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른다 해서 익을 시간이 줄어들진 않는다.


 요리처럼 생각하면 된다. 밑 준비는 충분히, 만들 때는 집중해서 꼼꼼하게.


 그 질긴 소 힘줄도 오랫동안 끓여 내면 세상 다시 없을 진미가 되지 않던가.


 “먹을 땐 먹어야지. 카시미어까지 왔는데 현지 음식도 안 먹어보면 그건 죄야, 죄. 보자, 가이드 책자를 어따 뒀더라?”


 제이는 가방을 뒤적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고민은 일단 끝. 내일의 고민은 내일의 것.


 그의 머릿속엔 카시미어 식도락을 즐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




 흔히들 그런다. 이 세상에서 누군가가 행복하다면, 그에 상응하는 불행 또한 동시에 존재한다고.


 갑자기 왜 이런 뜬금없는 소리나 하냐고?


 “그거 하나 일 똑바로 못해?!”


 그야 제이가 신나게 저녁 뭐 먹을까 고민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누군가는 어딘가에서 그날 먹은 게 다 쏠려 나올 정도로 욕을 세 바가지쯤은 듣고 있었으니까.


 “기껏 팀장이라고 두 놈이나 딸려 보내놨더니 한 놈은 머리가 터져서 오고, 다른 한 놈은 얼굴이 빵 반죽마냥 찌그러져서 돌아와?! 니가 그러고도 팀장이야?! 팀장이냐고!”


 꽤 색다른 광경이었다.


 카시미어의 야경이 한눈에 비치는 넓고 어두운 방 안.


 그리고 거구의 남자에게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 있는 아리따운 소녀.


 하얀 쿠란타 소녀였다. 앙증맞게 솟아 있는 귀에 머리카락, 눈썹은 물론 입고 있는 옷까지 하얘서, 마치 눈의 요정과도 같이 아름다운 소녀였다. 단지 미소가 어울릴 그 얼굴이 미소 대신에 짜증과 분노로 잔뜩 일그러져 있다는 게 유감이라면 유감이었다.


 그보다도 더 유감스러운 건 그 찌그러진 얼굴이 아마 오늘 밤 내내 펴질 일은 없다는 점이랄까. 아무튼 하얀 소녀는, 대체 그 작은 몸 어디에서 그렇게 솟구쳐 나오는 건지 모를 성량으로 분노를 무슨 폼페이 분화구처럼 터뜨리고 있었다.


 “그 구역 감염자 좀 청소하라는 임무가 그렇게 어려워?! 청소 몰라, 청소?! 암살 임무도 아니고 청소야! 그냥 그 구역에서 안 보이게만 하면 되는 거였다고! 그게 어려워?! 그따위 쉬운 일 하나 못하면서 급여에 야근 수당까지 따박따박 받아 처먹을 생각만 해?! 이 정신 나간 새끼야!”


 “…….”


 어린 소녀에게 듣는 것치곤 꽤 모욕적인 언사였으나, 남자는 그 모든 분노를 있는 그대로 받아내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부하의 잘못은 제 잘못이라는 참된 리더상이라서? 안타깝게도 그건 아니었고, 소녀가 한번 소리칠 때마다 아까의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욱신거리는 걸 참느라 그런 거였다. 남자의 꼴도 썩 좋진 않았다. 왼팔은 부러졌는지 깁스를 하고 있었고 코에는 거즈를 붙이고 있었으며, 한쪽 눈은 퉁퉁 불어서 시퍼렇게 변색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갈빗대도 두 대쯤 나가 있었다.


 물론 소녀는 남자의 갈빗대가 두 대가 부러졌는지 열 대가 부러졌는지 관심도 없었고, 설령 알았다 한들 성량을 낮출 생각도 없었다. 그만큼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이 보고서, 이미 제출했다고?”


 소녀는 이를 빠득거리며 책상 위로 서류 뭉치 하나를 세차게 내리쳤다. 그건 남자가 오늘 있었던 일을 기록한 보고서였다.


 “예. 긴급한 사항일 거라 생각해서…….”


 “그걸 왜 니가 판단해? 보고 절차 몰라? 니 직속 상관이 라주라이트야? 내가 자리에 없으면 기다려야 하는 게 상식 아냐? 아니면 내가 니 보고서 올라올 때까지 여기 가만히 앉아서 대기라도 하고 있을까? 응?!”


 “…….”


 사실 소녀의 말엔 조금 어폐가 있었다. 남자는 소녀의 말대로 기다렸으니 말이다. 남자가 어쩔 수 없이 보고서를 상부로 제출해버린 건 몇 시간을 기다려도 소녀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연락도 되질 않았으니 뭘 더 어쩌겠는가. 억울하다면 억울했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아머레스 유니온이었고, 소녀는 그런 그의 까마득한 상관이었다. 여기서 변명이랍시고 입 뻥긋하는 순간 화살이 너댓 대는 날아와 박힐 수도 있다는 걸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소녀는 가까스로 화를 참는다는 듯 입술을 짓씹었다.


 “후, 그래. 그놈이 출정 기사 출신이라고?”


 “예, 출정 기사들 중에 쌍검을 쓰는 기사가 있다고 들어서 슬쩍 떠봤더니 제 스스로 시인했습니다. 심지어 감정회의 기사장이 안부 전하라고 했다는 모욕적인 언사도 서슴지 않고…….”


 “너 그거 아니?”


 “예, 예?”


 남자는 팔과 옆구리에서 전해져 오는 고통도 잊을 정도로 바짝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느 사이에 뽑아든 건지, 소녀의 손에 들린 화살 한 대가 그의 목젖에 닿아 있었으니까.


 꿀꺽, 저도 모르게 삼킨 침. 움직이는 목울대를 따라 화살촉의 차가운 감촉이 독액처럼 그의 전신에 퍼져 나갔다. 소녀는 그런 남자를 경멸을 넘어 증오에 가까운 눈빛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니가 말하는 그 쌍검을 쓰는 출정 기사 출신의 경기 기사 말이야. 아마 4급 기사 아닐까?”


 “어, 엇! 마, 맞습니다! 분명 4급 기사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멍청한 새끼야, 잘 들어둬. 니가 말한 기사는 그라벨이라고 하는 여자야. 출정 기사 출신에다가 쌍검을 쓰는 4급 기사. 알겠니? 여자라고.”


 “…….”


 남자의 낯빛이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시퍼래졌다. 그야말로 제대로 된 검증도 하지 않은 채 얼추 아는 사실만 가지고 그게 진실인 양 상부에 보고서까지 써 올린 것 아닌가. 남자는 이제야 왜 소녀가 이토록 화를 냈는지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넌 아머레스 유니온이란 놈이 기사 명부 하나도 못 외워? 그러고도 니가 팀장이야?”


 “죄, 죄송…….”


 “제발 일 맡기면 맡긴 일만 해. 니 쓰레기 같은 사족 같은 거 달지 말고.”


 소녀는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너, 감봉이야. 병상에 처 누워 있는 그 두 놈도 감봉. 길 걷다가 비명횡사하기 싫으면 내가 부를 때까지 내 눈에 띄지도 마. 알겠어?”


 “아, 알겠습니다.”


 “나가.”


 소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남자는 절뚝거리면서도 허겁지겁 방을 나왔다. 그야말로 사자 아가리에 머리 집어넣었다가 겨우 뺀 듯 그의 등허리는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소녀는 남자가 방을 나서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경멸 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마침내 남자가 방문을 닫고 나가고 나서야 소녀는 겨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창밖엔 화려하기 그지없는 카시미어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의 더러운 기분과는 참으로 대조적이게도 말이다.


 띠리리리


 “…….”


 겨우 펴지려고 했던 소녀의 미간이 다시 찌그러졌다. 남자가 나가자마자 한숨 한번 쉴 틈도 없이 울리는 전화는 어서 받으라는 듯 시끄러운 전자음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이 거슬리는 전자음이 매우 싫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갑자기 울려대는 것도 싫었고, 이 소리 뒤에 뻔히 도사리고 있는 귀찮은 일 때문에 더욱 싫었다.


 그러나 제일 싫은 건, 아무리 싫어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언제 어느 때건 관계없이. 그녀 역시 아머레스 유니온이라는 조직의 톱니바퀴에 불과했다.


 “…네, 플래티넘입니다.”


 [이야, 플래티넘. 좋은 밤 보내고 있어?]


 “…….”


 뿌득


 소녀는, 플래티넘은 고운 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짓씹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건 나긋나긋하고 경박해보이는 남자의 목소리. 그러나 플래티넘은, 이 전화로 걸려올 수 있는 모든 목소리 중 이 경박한 목소리야말로 가장 귀찮고 짜증나고……. 게다가 위험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방금 부하로부터 보고서를 확인했습니다. 감염자를 청소하는 데에 실패했다고요.”


 [아, 그거? 알아, 알아. 그 보고서 읽은 거 나거든.]


 “…….”


 플래티넘은 마치 신에게 참을성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하필 받아도 이 사람이 그 엉터리 보고서를 받다니. 악몽도 이런 악몽이 따로 없었다.


 “…부하 관리는 똑바로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뭐 그럴 수도 있지. 기사 명부에 기사가 한둘도 아니고, 그라벨이 썩 그렇게 이름 있는 기사도 아니니까. 다만 그건 다 좋은데, 그 ‘가짜 출정 기사’ 씨 말야.]


 “…….”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경박하면서도 섬뜩했다.


 마치 천진난만한 아이가 시퍼런 면도칼을 들이대는 것처럼.


 [감염자 애들을 보호하면서 자기네들 셋을 동시에 상대했다고 쓰여 있더라고. 싸우기 전까지는 맹한 얼간이 같았는데, 싸움 시작되자마자 웬 미친놈처럼 달려들었다나 뭐라나. 대단하지 않아? 아무리 그래도 아머레스 유니온이 셋인데.]


 “그렇네요.”


 플래티넘도 그 점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부하들의 상처를 보면 손도 못 쓰고 당한 게 틀림없었다.


 [가짜 기사 행세를 한 것도 그렇고, 되도 않는 도발을 한 것도 그렇고……. 글쎄, 감정회와 아머레스 유니온을 충돌시키려는 속셈인가? 근데 그럴 거였으면 그 셋을 죽였으면 더 확실했을 텐데. 으음, 분란이 목적이라기엔 너무 순진하단 말이지.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 없이 출정 기사를 사칭했다기엔 또 너무 수지가 안 맞고. 이리저리 생각을 해 봐도 알 수가 없는 노릇이라니까.]


 “…….”


 하하, 이거 곤란해 곤란해.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경박하게 웃으며 말했다. 플래티넘은 침묵을 지켰다. 언뜻 가벼워 보이는 대화였지만 그와 그녀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그의 생각에 플래티넘이 관여할 권한 따윈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무슨 명령을 내릴지 기다려야 할 뿐이었다.


 [응, 결정했다. 그놈을 일단 찾아봐. 인상착의가 워낙 특이하니까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찾으면 일단 지켜봐. 만약 가능하다면 모르는 척 접근해보고. 아, 만약에, 진짜 만약에 정말 감정회의 끄나풀이나 그런 거면 바로 죽여버려.]


 인상착의가 특이하니까 찾기 쉬울 거라고? 수색 범위가 이 그랜드나이트 영지 전체일 텐데 잘도 그런 소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다니. 게다가 찾는 걸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추가 임무까지 있었다. 플래티넘은 어디 네가 해보라며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매우 순종적인 말이었다. 생각은 생각일 뿐이었다.


 [아참참, 하나 더. 사실 이거 말하려고 전화한 건데.]


 “……?”


 대체 이 자식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전화 한 통에 임무 하나. 그게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그런데 임무 두 개라니. 플래티넘이 전화기를 집어 던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걸 과연 알기나 할까.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여전히 경박하고 쾌활했다.


 [그랜드나이트 영지도 모였겠다, 이제 곧 토너먼트도 시작하잖아? 연합회가 치안에 더 신경 쓰고 있어. 왜 그런지는 알지?]


 “…피의 기사, 때문인가요?”


 [맞아. 피의 기사, 디카이오폴리스. 그 기사님 덕분에 감염자도 기사가 될 수 있는 세상이 왔고, 덕분에 여태껏 가만히 있었던 감염자들도 들썩들썩한단 말이지. 이른바 연합회가 자꾸 신경 쓰게 만든다는 거야.]


 “…그 전까지 확실히 청소하겠습니다.”


 [아, 그건 당연하고. 내가 우리 플래티넘 일 처리 방식은 당연히 믿지. 솔직히 이번도 그 부하들이 어수룩해서지 네가 임무를 망친 건 아니잖아?]


 “…….”


 이 말의 뜻은 ‘네가 직접 하면 그런 일 없었’다는 뜻이었다. 배려해주는 척하는 말투였지만, 실제로는 스스로를 갈아 넣으라는 무언의 암시나 마찬가지였다.


 [아, 하지만 진짜 안타까운 게, 아니 나는 물론 괜찮지. 사람이 뭐 한두 번 실수 할 수 있는 거고. 그런데 연합회 쪽에서 이번 실패를 조금, 안 좋게 본단 말이지. 응. 윗분들 생각이 다 그래. 하나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나머지도 다 안 될 거라 지레짐작하는 거. 아하하, 진짜 피곤하다니까.]


 “그 말은…….”


 [미안한데 벌충 좀 해야겠다, 플래티넘.]


 경박한 목소리는 전혀 미안한 기색도 없이 말했다.


 [3순위로 미뤄놨었던 로어 가드 컴퍼니 건 있잖아. 이번에 새로 나오는 신작 갑옷에 대한 비리 건. 기억나?]


 “그건 로즈 미디어에서 먼저 기사를 낸 뒤에 움직이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아하하, 그렇긴 하지.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잖아. 한번 눈총 맞은 이상 이쪽에서 뭐라도 행동을 보여야 한다고. 실수한 만큼 책임을 진다. 사회생활이라는 게 뭐,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아, 이런 빌어먹을.


 결국 우려하던 사태가 터지자 플래티넘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부하들의 실패에 대한 책임. 그게 결국 자기에게 넘어와 버린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플래티넘, 임무 수행하겠습니다.”


 [필요한 자료는 10분 후에 도착할 거야. 수고하라고~]


 경박한 목소리는 마지막까지 놀리듯, 아하하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플래티넘은 조용히 전화기를 든 손을 내렸다.


 쾅!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옆에 있던 책상을 걷어찼다.


 쾅! 쾅! 쾅!


 모던한 느낌의 철제 책상이 볼썽사납게 찌그러지고 나서야 그녀는 간신히 발길질을 멈췄다.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솟구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플래티넘은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아, 짜증 나. 뭐, 가짜 출정 기사?”


 한참 만에야 숨을 고르며 고개를 쳐든 그녀의 눈빛은,


 “만나면 죽여버릴 거야.”


 거짓말 안 하고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찢어 죽일 수 있을 만큼 번득이고 있었다.












---------------



본격적으로 원래 공식 스토리와 어긋나기 시작하는 부분


이번 편은 좀 떡밥도 뿌리고 그랬는데 감상 적어주심 감사합니다


제이가 혼잣말 중얼중얼 하는 부분은 솔직히 좀 자의적 같긴 한데 너무 대사 없이 서술만 하는 것도 또 안 좋을 거 같아서..


음...


아무튼 죽이진 않습니다


주인공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