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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그 표정 봤어? 산산조각 날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절망하는 그 표정! 흥분되지 않아?”

 

“신속하게 빠져나가자. 폭발 직전에 저 녀석은 아래로 몸을 날렸어. 충격은 받았겠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을 거야.”

 

“쳇, 알았어. 박사도 아니면서 귀찮...”

 

먼지구름 사이를 단검 한 자루가 가르고 날아와 W의 왼팔에 박혔다.

 

“레드, 찾았다! 리유니온의 적은 찌르고 뜯어서, 씹고, 죽인다!”

 

“젠장! 벌써 여기까지 오다니! W, 괜찮나?”

 

“성가시네... 20m만 더 가면 두 번째 함정이 있어, 달리자!”

 

그 순간, 복도 끝에서 큰 폭발음이 들려왔다.

 

“어이, 설마 그 함정이라는 게 지금 터진 저건 아니지?”

 

“아주 꼬일 대로 꼬여가네... 맞아.”

 

먼지구름 속에서는 로즈몬티스가 걸어나왔다.

 

“너무해... 너희는 엄청 나쁜 녀석들이야! 정말 미워!”

 

철괴 몇 개가 던져지자 그때마다 벽면은 쩍쩍 갈라졌고, 지면은 무너질 듯 흔들거렸다.

 

“로도스의 침입자들, 너희는 포위되었다. 순순히 항복해라.”

 

“글쎄, 아쉽지만, 살카즈는 항복하지 않는 법이야!”

 

W의 손에서 검은 신호기 하나가 떨어졌고, 오른쪽 벽에서 큰 폭발이 일어났다.

 

“콜록, 콜록! 로즈몬티스! 오른쪽이다! 적들을 쫓아!”

 

레드와 로즈몬티스가 벽에 난 구멍으로 적들을 쫓았을 때, 복도는 한 길로 이어져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막다른 벽에 가로막혀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는 W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끓어라. 레드는 너를 죽이지 않는다. 로즈몬티스, 로도스의 진랑이 보이지 않는다. 이쪽이 미끼였어. 너는 저쪽을 쫓아라.”

 

“응! 열심히 할게!”

 

“설마 둘 다 걸려들 줄이야. 이거 아픔을 참아 가면서 유인한 보람이 있는 걸?”

 

“더 이상 너의 퇴로는 없다. 손을 머리 뒤로 올려라.”

 

“알겠어. 어차피 막다른 길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까.”

 

W가 빈 손을 들어올리자, 레드는 천천히 접근했다.

 

“그런데 말이야, 그거 알아?”

 

W는 들어올렸던 왼손을 내려서 자신의 외투로 가져갔다.

 

“멈춰라!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W는 멈추지 않고 왼손으로 외투를 벗었다.

 

“미끼엔 독이 들어 있거든.”

 

외투 안에는 설정이 끝난 시한폭탄들이 깜빡이고 있었다.

  



“설명해 주시죠, 켈시 선생님, 어째서 계획대로 하지 않으신 건가요?”

 

“좋아, 아미야. 그러면 반대로 물어볼게, 왜 네 계획대로 해야 하는 건데?”

 

“말했잖아요, 작전을 진행하는 데에 있어서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일치되지 않으면 예측에서 벗어날 우려가 있어요.”

 

켈시는 가소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벗어날 거라면 벌써 벗어났겠지, 애초에 시작부터 뒤틀린 채로 들어간 작전 아니었나? 그리고 대사 하나가 극의 흐름을 바꿀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데.”

 

“다행히 이 부분은 별 문제 없이 넘어갔어요. 모스티마 씨가 수습 중에 있죠. 하지만 저는 선생님께서 왜 일부러 계획에 변수를 만드시는지 모르겠네요. 제 계획에 질리기라도 하신 건가요?”

 

“딱히 그런 건 아니야. 흐름에 몸을 맡기다 보니 발생한 실수일 뿐이지.”

 

“이제 정말로 거의 끝에 도달했어요. 계획은 이제 피날레만이 남았죠. 모스티마 씨가 박사와 함께 돌아오시는 대로, 우리의 노력은 이제 평가받을 일만 남게 돼요.”

 

“바로 그 평가 부분 말인데, 아미야...”

 

“궁금한 점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 조금 늦춰졌으면 해서. 피날레가 끝나고 커튼 콜 정도는 해도 괜찮잖아?”

 

켈시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리유니온 지휘실의 구석에서, 블레이즈가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그리고 몇 마리의 키메라들도 함께.

 

“...켈시, 당신이 이런 일을 벌이”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켈시 선생? 마침내 완전한 권력을 손에 넣었는데.”

 

“나쁘지 않았어. 아미야를 잘 감시해. 먼저 전화를 걸어야겠거든.”

 

켈시는 몇 개의 번호를 눌렀고, 어디론가 신호가 가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거의 끝나가. 잠시 후면 계획대로...”

 

“메리 크리스마스. 계획은 중지야, 모스티마. 이제 내가 책임자가 되었거든.”

 

“...켈시,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이건 중대한...”

 

“중,지,야. 알아들었을 텐데? 박사를 포장지에 싸서 용문에 있는 로도스 아일랜드의 요원들 앞으로 대령하란 말이야. 그리고 크리스마스 선물도 잊지 말고. 로도스에 먼저 도착하도록 ㅁ마련해 놔.”

 

“아무리 그래도 그런 짓은 이...”

 

“토 달지 말고, 말 끊지 말고, 일이나 잘 해. 끊는다.”

 

“ㅇ...”

 

교신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종료되었다.

 

“갑자기 결단력이 좋아지기라도 한 거야? 전과는 달라 보이는걸.”

 

“그야 그렇겠지. 이제 광대놀음은 질렸거든. 배우로서 되도 않는 연기만 하는 건 그만두겠어. 이제 극작가가 되어 볼 차례야. 블레이즈. 체르노보그 이동시켜.”

 

블레이즈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있잖아, 켈시.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지? 체르노보그 이동은 이전 계획이랑 정확히 일치하는 거잖아, 안 그래?”

 

“맞아, 아미야 말 못 들었어? 행동 하나하나가 일치해야 계산된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고. 가서 그대로 해.”

 

“잠깐, 우리 잠시만 침착해져 보자... 그 결말은 알잖아? 패트리어트 유격대를 앞세워서 로도스의 전 병력이 진군해 올 거야. 아미야의 협력도 없는 우리에게 가진 병력이라곤 힘만 셌지 무식한 키메라들 몇 마리가 전부라고.”

 

“말 조심해, 듣겠다.”

 

“니미 씨발. 네 계획이 우리 다 뒤지는 걸 네가 지휘하고 싶다는 거였냐?”

 

“당연히 아니지. 상황은 전부 계산 안에 넣어두었어. 지금까지 내 제멋대로였던 행동이 뭘 위해서였다고 생각하는 거야?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사소한 변화. 개별적으로는 너무 작아서 흐름을 바꾸기도 어려운 정도지만, 충분히 쌓으면 작은 사실 하나를 움직일 정도는 되거든.”

 

“하...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데?”

 

“오, 블레이즈. 아미야는 나에게... 몇 가지 비밀을 말해 주었거든. 절대 말해서는 안 되는 비밀 말이야. 난 그걸 가지고... 몇 가지 연구를 진행했어. 이건 그 중 하나야. 우리의 운명을 바꿀 연구. 믿지 못하는 눈치인데 그러면 증거를 몇 개 말해줄까? 너는 자매가 셋 있어. 전부 너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들이지. 어려서부터 너는 자매들에 비해 성장도, 화염 아츠의 발달도 뒤떨어졌어. 네가 감염된 건 순전한 사고... 로 볼 숭도 있겠지만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사건이었지. 아츠를 잘 다루지 못하던 네게 네 언니들이 오리지늄 촉매재를 사용해 보라고 부추긴 거야. 자격지심이 가득하던 너는 위험하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그 촉매재를...”

 

“그만! 그만해! 뭐야, 어떻게 아는 건데?”

 

“하루 종일도 읊을 수 있어. 어때, 이건 네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비밀일 텐데. 아, 독심술 같은 건 아니야. 정신계 아츠? 그런 건 소질이 없어서 말이지. 그런 게 있으면 여기서 이러고 있겠니? 믿어. 그리고 따라와. 앞으로는 내 시나리오 안에서 움직이게 될 테니까.”

 

켈시의 말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왜? 너무 충격적이어서 말도 안 나오나 보지?”

 

“아니, 슬슬 네가 웃을 타이밍이 아닌가 싶어서. 멋진 연설도 했고, 상당히 분위기도 고조되었고...”

 

켈시는 블레이즈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하아. 내가 광대놀음은 질렸다고 했지?”

 

“맞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어.”

 

“알면 위치로 가.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니까.”

 

켈시는 잠시 멈칫했다가, 블레이즈 쪽을 돌아보았다.

 

“그래, 사실 웃음소리로 쓸 글자가 다 떨어졌어. 이제 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