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링크



하늘에선 여전히 비가 내린다. 아까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빗줄기는 어느새 굵어져 알아채지 못한 사이 주변의 소음마저 전부 매워버릴 정도로 거세게 내렸다. 먹구름이 꾸물거리며 하늘을 뒤덮고 있다. 우중충한 날씨 덕분인지, 보고 있는 내 기분마저 우울해질 지경이다.


불 꺼진 복도가 흐린 날씨와 뒤섞여 어둠에 뒤덮였다. 사람의 발길 하나 닿지 않는 복도 속에, 내 발걸음만 적막하게 울렸다. 습기 속 먹먹하게 울리는 공기 중의 발소리가, 무척이나 선명했다. 


그녀의 방문 앞에 섰다. 노크를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하지만, 이 안에 그녀가 있다. 그 사실은 틀림이 없다. 이 문은 공주님을 가두는 성문이며, 이 굳게 닫힌 성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다. 


품 속에 손을 넣어 카드키를 꺼냈다. 로도스에서 오직 하나만 존재하고, 그 누구도 쉽게 들고 다닐 수 없는 물건.

로도스 전 숙소의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를 꺼내 들었다. 비상시를 대비해 제어센터에만 보관하는 물건을, 가져왔다. 평소였다면 쓸 생각도 안 했겠지만, 어쨌건 비상상황이니까.


마스터 키를 단말로 가져가자, 아무런 저항도 없이 문이 열렸다. 내부는 어둡다. 

불 하나 켜지지 않은 방 내부가 을씨넌스럽다. 순간, 안으로 발을 들이기 겁이 났다.

이 어둠 속에 소중한 공주님이 있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주저하고 만다. 

마치, 심연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만 같아서. 고작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는 것 마저 주저한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멈출 수는 없었다. 여기서 멈추는 것 만큼, 한심한 짓거리도 없어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방 안은 어둡다. 불 하나 켜지지 않은 방 안은 너무 어두워, 이대로 걷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질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었다.


"....미쳤어?"


어차피 칼을 든 공주님이 나를 먼저 맞이해줄 테니까.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습기에 찬 눅눅한 공기를 타고, 선명하게 내 귓가에서 맴돌았다.

목소리에 담겨 있는 것은 분명한 분노. 당장이라도 날 두 동강 낼 것 같은 시퍼런 살기.

허나 겁이 나지는 않았다. 

지금 그녀에게서 풍기는 분노는 그저 가면일 뿐이다. 

분노라는 가면 뒤에 숨어, 타오르는 분노를 감싸 사라지고 싶어하는 감정을. 나는 알아챌 수 있었으니까.


고작,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너무나 선명하게 닿은 라플란드의... 그녀의 감정이 내게 전해졌다.

그녀의 분노에 가득한 목소리는, 오히려 내게 호소하는 것처럼 들렸다.


-날 찾아오지 말라고, 여기서 제발 나가 달라고. 약해진 자신을 보지 말라고.


그렇게,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의 협박에도 겁이 나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모습이 폭풍우 속에 갇혀 홀로 울고 있는 아기 늑대와 같아 보여서, 상처 입은 채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모습이 덫에 걸려 도망치지 못한 체 주변을 위협하는 맹수와 같아서. 그래서 지나칠 수 없었다.


"그럴 지도 모르겠네요."


그녀의 기분을 정면에서 거스르기 위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순간 목을 스치는 검의 감촉이 날카롭고, 차갑다.

하지만 묘한 확신이 있어 아무렇지 않았다. 그녀가 내 목을 그대로 그어 버리지 않으리라는. 그 정도 믿음은 진작 있었다.


"안 무서워? 이대로 내가 네 목을 썰어버릴 수도 있는데?"


"그럼, 과분한 죽음이겠네요.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을 수 있다니."


나름 진심을 담아 대꾸했다. 태연하게,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그렇게 말했다.

라플란드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궁금해서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장 나가."


공주님은 축객령을 내렸다.

내 등 뒤에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나를 밀어내며 당장이라도 날 죽일 기세다. 

하지만, 그 말을 순순히 들어줄 생각은 없다. 


"그럴 수는 없겠네요."


가볍게 내 목에 드리워진 검을 손가락으로 밀어냈다. 애초에 그녀는 날 벨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검이 이렇게 떨릴 리 없을 테니까.

떨리던 검은 별다른 저항도 없이 가볍게 밀려났다. 역시, 그녀를 처음부터 나를 벨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야기했죠, 저는 의사로서 당신을 돌봐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가볍게 숨을 골랐다. 어쩌면, 사태를 이 지경까지 끌고 간 것은. 그녀를 이렇게 만든 것에는 내 책임이 가장 클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저하지는 않기로 했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할 지라도, 거기에 대해 가져야 할 것은 책임감이지 죄책감이 아니다. 텍사스에게서 필요한 이야기는 이미 전부 들었다. 각오는 되어 있다.


저번에는 나 혼자 겁을 먹어, 그녀의 감정을 충동질 한다는 생각에 주저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답은 얻었다. 이제 남은 것은, 내 진심을 오롯이 그녀에게 쏟아낼 뿐.


"일단 앉아요. ...우리, 할 이야기가 많잖아요?"


"잠..."


그 전에 이 어둠부터 몰아낼까. 불 꺼진 방의 스위치를 찾았다. 지금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고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 날, 쓰러진 그녀의 간호를 하며 속삭였던 서로의 진심을, 이제는 피하고 싶지 않았다.


뒤에서 라플란드가 무어라 소리쳤지만, 일부러 무시했다. 방문 바로 옆에 있는 스위치를 켰다.

방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전등이 켜진 방이 순식간에 환해지고, 밝혀진 빛은 어둠에 잠겨 가려져 있던 그녀의 방을 유감 없이 드러냈다.

예상은 했지만, 상태는 처참했다. 가뜩이나 침대와 책상을 빼면 가구 하나 없는 그녀의 방이 이렇게까지 어질러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의자는 내팽개쳐져 있고, 바닥에는 수면제들이 굴러다니며 피를 머금어 붉게 물든 낡은 붕대들 역시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역시 라플란드의 상태였다.

그녀는, 만신창이가 되어 약해져 있었다.


원래의 그녀는 미쳐있었을 지언정, 정돈된 사람이었다. 

자신의 광기마저 멋들어진 한 벌의 정장으로 삼아 스스로를 빛내던. 아름다운 광인이자 시라쿠사의 고고한 늑대였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첫 눈에 마음을 빼았겼던 것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곳에 그 고고한 광랑(狂狼)은 없다.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옷은 한쪽 어깨로 늘어져, 반대쪽의 어깨와 속옷 까지 보이는 지경이다. 

피부 여기저기에 돋아난 검은색 결정들마저, 지금은 그녀의 광기가 아닌, 그녀의 비참함을 부각시키는 장치처럼 보인다.


피곤과 근심에 시달려 더더욱 핏기를 잃은 창백한 피부, 그녀의 잔혹한 아름다움을 상징하던 미소가 사라진 표정, 그리고 짙은 근심이 검게 내려앉은 그녀의 휑한 눈동자. 세상 모든 것을 자욱하게 감싸는 안개와 같았던, 하지만 강철을 녹여 펴 바른 것 같던 강인함이 묻어 있던 회색 눈동자는 이젠 모든 강인함을 잃고 희뿌옇게 흔들리고 있다.


손과 팔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늘어났다. 평소처럼 검을 잡다 생긴 것이 아닌, 자신의 손톱으로 직접 살을 후벼 판 흔적이다.

지금의 그녀는, 망가지고 상처 입은 맹수와 같았다. 상처 입고 도망쳐, 도움이 필요하지만. 야생의 본능에만 의지해 모든 것을 배척하며 으르릉거리는. 그런 맹수와 같았다. 모든 힘을 잃은, 그런 맹수.


그녀의 목을 감싼 붕대가, 그녀의 살을 파고들며 목을 조이는 목줄과 같아 보였다.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모습은 충격적이었지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은 동정심을 일으킬 지 언정 추하지 않았으니까. 사랑하는 이의 아픔을 보고 눈을 돌릴 정도로 추해지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이젠 도망치지 않기로 했으니까.


일전, 그녀의 방에 놔두었던 구급상자를 열었다. 다행이, 저번에 챙겨두었던 약품들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안에서 적절한 약품들과 붕대를 꺼내, 바닥에 아무렇게나 넘어진 의자를 세웠다.


"앉아요. 치료해줄 테니까."


라플란드를 불렀다. 의자에 앉으라 손짓하며, 웃어 보였다. 

딱히 너의 모습을 보고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고.

여전히, 사랑한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보여주고 싶었다. 


....아, 이래선 진심이 안 전해지려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바이저를 벗어 옆에 놔뒀다. 

그녀를 앞에 두고 얼굴을 가리고 있다니, 나도 참 바보 같았다. 

얼굴을 가리던 바이저도 벗었으니, 이제 라플란드도 내 얼굴을 마주했을 거다. 그녀도 알아챘을 거다.

거울을 보고 왔던 내가 내 입으로 말하기 참 한심스럽게도, 나 역시 그녀처럼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라는 것을.


"앉아요, 어서."


라플란드는, 검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

.

.


"조금 따끔할 거에요."


"....읏."


그녀의 손목을 약하게 잡아 소독약을 발랐다. 제대로 소독조차 하지 않아 더러운 딱지가 덕지덕지 앉은 팔이 처참할 정도다. 

이 정도면 평소에도 아팠을 건데. 소독을 끝마친 팔에 약을 바르고, 깨끗한 붕대를 새롭게 감았다. 반창고 정도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걸로는 턱 없이 모자라다.


"팔은 다 끝났어요. 그럼..."


라플란드는 순순히 내 치료에 따르고 있었다. 가끔씩 따끔거리는 고통에 작게 소리를 흘리긴 했어도, 아무런 말도 없이 의자에 앉아 내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그 덕에, 치료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그녀의 목만을 제외하고. 그녀의 목을 단단히 감싸고 있는 붕대로 손을 가져갔다.

긴장된 손 끝이 가볍게 떨렸다. 고작 목에 감긴 붕대일 뿐인데, 라고 생각해도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풀게요."


그녀의 목을 옥죄던 목줄을 풀었다. 스르륵, 붕대가 풀려 바닥에 떨어졌다. 얼마나 두껍게 감은 건지, 매듭을 몇 번이나 풀어도 붕대는 계속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모든 목줄이 풀리고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녀의 목을 보자, 나도 모르게 입술을 씹었다.

그 어떤 반응도 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손이 멈추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목과 비교한다면, 크고 작은 상처로 넝마가 되었던 그녀의 팔은 상태가 아주 좋은 축에 속했다.

그 만큼이나, 그녀의 목은 상처로 가득했다. 


크고 작은 상처들이 나 있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선명하게 나 있는, 손 모양의 멍자국.

굳이 의사의 지식을 빌리지 않아도 이게 설명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누군가... 아니, 그녀가 스스로 목을 졸랐다.


"....역시, 보기 추하지?"


내 손이 멈췄던 것을 알아챈 라플란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래서 보여주기 싫었어. 넌 이렇게 약해진 나에게 환멸 했을까 봐. ...이런 망가진 여자는 너도 싫어할 게 분명하니까... 그래서..."


"조용."


라플란드의 말을 끊었다. 그녀에겐 미안했지만,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말을 계속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

멈췄던 손을 움직여 다시 소독약을 집었다. 이를 솜에 발라, 간단한 소독솜을 만들었다.


"조금 따끔거릴 거에요. 잠시만 말하지 마요. 목이 흔들리니까."


그녀의 목 위로 소독 솜을 톡톡 두드렸다. 상처를 제대로 처치하지도 않고 붕대를 감아, 목에 습기에 찬 탓에 상처가 곪아 있다.

솜을 한번 갖다 댈 때마다, 진물이 묻어 나온다. 고작 몇 번 움직였을 뿐인데, 솜이 진물에 젖어 색이 변했다.

다시 새롭게 솜을 만들어 상처를 소독했다. 이를 몇 번 반복하자, 겨우 목에 난 상처의 소독을 끝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처치할 수 있는 건 상처 뿐이다. 멍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건 시간만이 해결해 줄 문제다. 그녀의 멍도, 멍과 함께 마음 속 깊이 들어 있는 상처도.

이번에는 팔과 달리 붕대는 감지 않기로 했다. 그녀의 목을 감싼 멍자국을, 똑바로 직시해야 했으니까.


"싫어하지 않아요."


조심스럽게, 그녀의 목을 어루만졌다. 손가락 끝이 그녀의 목에 닿았다. 잡티 하나 없는 그녀의 피부는 부드럽지만, 목에 난 상처에 내 손이 닿을까 조심스럽다. 그녀의 목을 선명히 옥죄는 멍에 손을 가져갔다. 아픈 걸까, 라플란드가 몸을 떨어 나도 모르게 손을 땠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랐어요."


"그냥 욕하면 돼. 날 싫어하면 돼. ....이런 여자는 싫다고, 그렇게 말하고 두 번 다시 날 찾지 마."


라플란드가 고개를 푹 숙였다. 나를 싫어해달라고, 나에게서 떠나 달라고 말하는 입과는 다르게 그녀의 귀는 반으로 접혀 주눅들어 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겉과 속이 다른 그녀의 언행이, 모순적이게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녀의 등 뒤에 섰다. 


"겁이 났어요. 혹여나 내가 당신에게 내 감정을 강요했을까 봐. 당신이, 진짜 행복한 사랑을 하지 못하게 만들까 봐. ...내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을까 봐."


"....."


"미안해요. 제대로 답해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나 혼자만의 욕심으로, 당신을 힘들게 해서."


라플란드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 그녀의 대답을 재촉할 권리도, 이유도 없다. 잠시 울리는 침묵의 틈 사이로 울리는 빗소리가 백색소음이 되어 정적을 채운다. 이대로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면, 세차게 내리는 빗 속에 묻혀 사라질 것처럼.


그녀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이대로 그녀를 보지 못하게 되어도 좋다.

그녀가 이걸로 편해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제 탓을 해도 좋아요. 제 멋대로 당신에게 강요한 감정이고, 제가 충동질한 거니까. ...하지만, 이것만 알아줘요."


등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어 끌어 안으면 그녀가 부숴질 것 같아서, 너무나 위태로워 보이는 이 품 속의 공주님이 당장이라도 으스러질 것 같아 겁이 나, 그녀를 힘주어 안을 수 없었다.


안았다기 보다는 둘렀다는 것이 더 어울릴 정도로, 그저 양팔을 걸쳐 그녀의 어깨와 몸 위에 둘렀을 뿐이다.

결국 나는 이런 남자다. 자기의 잘못과 단점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해, 진심으로 사랑한다 믿었던 사람의 마음 하나 편안하게 만들어주지 못했던 사람이 바로 나다. 


하지만, 이젠 그럴 생각은 없다. 내가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나를 평가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내 품속의 공주님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그 때 그 날처럼 내 진심을 입 밖으로 꺼냈다. 내가 듣고 싶은, 그녀가 들었으면 하는 말을 꺼냈다.


"사랑해요, 라플란드."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정말 궁금했지만 나는 눈을 감았다.

오늘의 끝이 파국으로 끝나 두 번 다시 그녀를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후회는 없다. 나는 진심을 이야기했고, 그녀가 행복하길 바라는 나의 소원은 어떤 형태로든 이뤄질 테니까.


"당신이 어떤 모습이라도,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아니."


라플란드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 안았다. 떨림이 멎었다.


"네가 좋아하는 건, 지금의 약한 내가 아니잖아. 네가 좋아하는 건...."


"물론, 저는 라플란드를 사랑하죠. 그건 분명해요.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그럼..."


"하지만, 저는 지금의 당신도 좋다고 생각해요. 약해진 당신도 충분히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대로 내 품에 계속 끌어 안고 싶을 정도로."


조금 욕심을 부려,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더했다. 저항은 없다. 

처음에는 이유를 짐작조차 못했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고 있다. 결국 라플란드는 두려웠던 거다. 

이렇게 급박하게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행여나 내가 실망하지는 않았을까, 내가 약해진 그녀를 싫어하지는 않을까. 그게 무서웠던 것이다.


나로서는 생각할 가치도 없는 문제라고 생각은 하지만, 내가 그녀의 의도를 알지 못했던 것 처럼, 그녀 역시 내 마음을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트라우마 때문에 정신적으로 몰려 있었다면 더더욱.


"....."


다시 라플란드의 말이 막혔다. 다시 그녀의 어깨가 떨리지만, 아까와는 다른 느낌이 든다. 확신하진 못하지만, 아까보다 부드러워진 떨림은. 겁 먹은 것은 결코 아닌 것 같았다.


마저 말을 이었다. 설령 오늘 밤 결국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내가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순간 하고 싶은 말은 모두 할 생각이다.


"침대에 누워 있던 당신의 그 부드러운 미소를 봤을 때, 저는 또 다시 첫 눈에 반했어요. 시라쿠사의 보름달 아래에서 웃으며 춤추던 당신의 모습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었거든요. 그거 알아요? 당신이 제 얼굴을 보자마자 겁 먹고 달아났을 때,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당신의 그 약한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저도, 진짜 이상하죠?"


이건 진심이다. 나는 분명 시라쿠사에서의 그녀, 하얀 늑대 라플란드에게 첫눈에 반했다.

사신이라기엔 아름다웠으며, 요정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죽음에 가깝던 그 미소에 나는 분명, 마음을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약해진 모습에 실망한 것은 아니었다. 부드럽게 웃던 그녀의 미소에, 상냥하게 속삭이던 그녀의 목소리에 분명 나는 그 때와 같은 감정을 느꼈던 것이 틀림 없다. 아니, 확신할 수 있다. 그러니, 날 보고 도망친 그녀를 보며 독점욕 같은 바보 같은 감정이나 불태웠던 거겠지.


그 때부터, 그리고 텍사스와 이야기하면서 겨우 깨달았다.


[.....니가 뭐 성인군자라도 되는 줄 알아?]


독한 담배를 뻑뻑 피우며 내 고민상담을 해줬던 텍사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날 한심하게 쳐다봤다.

결국, 내가 멍청했던 것이다. 나는 그녀가 행복하길 바란다고 말하며, 뭔가 내가 플라토닉하고 헌신적인. 그런 고차원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인 양 행동했다. 실제로 나는 그럴 능력도 없는 멍청이였음에도.


나도 사람이다. 심지어 연애는 커녕 사랑 한 번도 제대로 해 본 적 없던 숙맥이자 멍청이였다.

그런 내가, 무슨 수로 상대의 행복만을 바라는 고차원적인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래서 솔직해지기로 했다. 여기서 그녀에게 차여 뺨을 맞더라도, 차라리 나를 경멸함으로 그녀가 편해질 수 있다면 그걸로 될 수 있게. 그래서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내 진심을 전했다.


"지금 당신의 상태가 정확히 어떤지, 나는 알 수 없어요. 그저 심각하구나, 정도 뿐이죠."


"...."


"하지만 지금 당장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당신의 모든 것에 간섭할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러니, 언젠가 말해주고 싶을 때 말해줘요. 저는 기다릴 테니까."


나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다. 나는 그녀의 마음 속을 읽을 수도 없고, 지금 당장 그녀의 마음 속 깊이 들어 있는 트라우마를 해결해 줄 수 있을 리도 없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다리는 것 뿐이다. 내가 진심을 보였듯, 그녀도 언젠가 내게 진심을 보여주길 바라며 그저 곁에서 기다릴 뿐이다. 물론, 그녀의 곁에 서 있게 해 달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다. 그녀가 이대로 날 거부하고 꺼지라고 한다면, 기꺼이 그럴 수 밖에.


"그래도, 언제든 다치면 이야기 해주세요. 얼마나 심하게 다치건, 어떤 상처가 나든, 흉터 하나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치료해줄 테니까. ...지금처럼."


그리곤 눈을 떴다. 당연히, 내가 껴안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뭔가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도 아니다. 그저, 내 품 속에 안긴 라플란드는 떨지 않고 가만히 앞을 보고 있을 뿐.


"....박사."


"네."


"...왜 날 이렇게 잘 대해주는 거야?"


나도 모르게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그 날, 침대에 누운 그녀가 내가 건넸던 질문. 그 날과 똑같은 질문.

하지만 그 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난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는 것. 그리고 이젠 더 이상 그녀가 오해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점.


"사랑하니까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래서 다시 한번 그녀에게 내 마음을 고백했다. 그녀가 몇 번을 물어도 이제 내 대답은 같다. 변할 일은 없다.


"....나도."


그녀의 목소리가 떨린다. 희미하게 갈라지는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먹먹하게 울린다. 마치 밖에 내리는 비처럼.


"나도 사랑해. ....이 말이 하고 싶었어."


라플란드의 어깨가 떨렸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갈라진 목소리로 울었다.


"하지만 무서웠어. 이렇게 약해진 내가 한심해서 죽어버리고 싶은데, 당장이라도 목을 그어 죽고 싶을 만큼 내가 끔찍한데. 이런 한심한 나를, 네가 싫어하면 어쩔까 무서웠어. ....그런데도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라플란드가, 아니 그녀가 울었다. 울면서 처음 듣는 목소리로 나에게 호소했다. 내 팔에 뚝뚝 떨어지는 뜨거운 액체가 팔을 타고 방울져 흐른다.


"보고 싶었어. 악몽에서 겨우 벗어나 눈을 뜰 때마다, 너에게 달려가 의지하고 싶었어. 아프다고. 무섭다고 말하고 싶었어. ...그런데 넌 이런 나를 싫어할까 봐. 여기서 버림받으면 이젠 절대 견딜 수 없게 될까 봐 두려워서 갈 수 없었어. .....진짜 바보 같지?"


그녀는 울음을 터트렸다. 분명 라플란드라면, 이렇게 울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상관 없다. 지금 내 품에 안겨 있는 그녀가 누구건, 나는 그녀를 사랑하니까.


"괜찮아요. 저도 항상, 당신이 저를 싫어하면 어쩌나 겁 먹으며 살았거든요. 우린,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닮았네요.."


그녀가 눈물이 가득 맺힌 눈으로 날 쳐다봤다. 다시 한번, 방울져 차오른 눈물이 열매를 맺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렀다.


"언젠가.... 언젠가 너에게 모든 걸 말해줄게. 넌 나한테 이렇게나 잘 해줬는데, 너에게서 도망치고 숨으려고만 했던 나를 찾아줬는데... 아직도 아무것도 말 못해줘서 미안해.... 미안해...."


"언젠가 그럴 생각이 든다면 이야기해줘요. 저는 그 때까지 기다릴게요. 당신이 다치면 약을 발라줄게요. 붕대를 감아줄게요. 흉터가 남지 않게 해줄게요. ...그러니, 당신의 곁에 있어도 될까요?"


계속해서 울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손수건은 들고다니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 모양은 빠지지만, 구급상자에서 아무것도 묻히지 않은 깨끗한 솜을 꺼내 그녀의 눈물을 닦아줬다.


"이제 스스로를 깍아내리는 건 그만해요. 당신은 망가지지도 않았고, 이상하지도 않아요. 설령 지금은 그렇다해도, 다시 예전처럼... 아니, 더 나아질 수 있잖아요? 저는 믿어요."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우는 그녀의 한 손을 잡고,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도와줄게요. 당신의 곁에서, 당신을 괴롭히는 끔찍한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괜찮을까요? 나는 그녀에게 허락을 구했다. 당신의 곁에 남게 해달라고. 내 사랑을 받아달라고.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그저 웃었다. 순간, 폭우가 쏟아지는 바깥에서 번쩍거리는 섬광이 스쳐 보였다. 

순간, 방의 불빛마저 묻어버릴 강렬한 섬광이 그녀를 비췄다. 쏟아지는 폭우와 번개 속에서 부드럽게 웃는 그녀의 미소가 아이러니하게도 너무나 아름다웠고, 포근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욕심을 부려 그녀를 앞에서 힘껏 끌어 안았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팔을 들어 나를 끌어 안았다.








첫키스는 약품의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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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아 반갑소.


11000자. 많이 썼네 이 정도면.


일단 이걸로 챕터2도 끝.


오늘도 많이 늦었다. 이유야 뭐...

일단 단편 3개 쓴다고 3일 쓰고, 이것도 초안만 한 3번 막혔고 중간에 갈아 엎었다. 


아무튼 그래서


1)일단 결국 텍사스와의 대화는 생략했다. 굳이 그걸로 길게 끌 필요는 없는 것 같았거든.

마찬가지로 텍사스가 먼저 라플란드에게 찾아가는 것도 생략. 그냥 텍사스와 라플란드는 나중에 둘이서만 이야기하는 걸로.

그리고 박사가 존댓말만 하는 이유 가지고 쓰다가 뇌절 와서 전부 삭제함. 


2)박사와 라플란드는 이제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입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고, 곁에 있어도 된다고 했으니 커플 맞지.


3)아직 쟤들 야스 안 했다.


4)이제 남은 이야기는 크게 둘. 라플란드의 트라우마 치료+박사가 커플이 되며 로도스에 생긴 여러 사건.

일단 전자는 메인 플롯이라기보다는 이야기의 흐름 동안 자연스럽게 풀어갈 이야기고 아마 메인은 후자가 될 것. 

근대 이거 결말 유추당했...


5)라플란드의 트라우마는 이제 더 심해질 예정.

당연한 것이, 트라우마의 원인은 엄연히 따지면 박사가 아니라 행복한 삶을 되찾으면서 덩달아 되살아난 어린시절의 기억임.

이를 의도적으로 지우거나, 아니면 이겨내는 것 밖에 답이 없고. 이 기억들은 라플란드가 행복해질수록 점점 더 커질 것.


6)만약 글 쓴 놈이 무능해서 글이 이상하고 내용 이해가 안 된다면 대충 이런 내용입니다.


1. 박사와 라플란드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서로의 오해를 어느정도 해소 함. 

물론 라플란드의 트라우마의 진짜 원인이 라플란드의 과거라는 걸 박사는 알고 있지만 일부러 말하지는 않았음. 

텍사스가 알려줬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2. 박사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지나친 이상을 포기하고 본인에게 솔직해지기로 결정.

라플란드가 행복하면 좋겠다는 건 진심이지만, 그냥 자기 감정에 솔직하게 고백하기로 결정했고 여기서 차이면 깔끔하게 포기하도록 노력해 볼 생각이다, 정도 까지. 그래도 사실 천성이 어느 정도 그게 가능은 해서 조금 허들을 낮춘 정도고 그래도 많이 현실적이게 됨.


3. 라플란드 역시, 박사가 약해진 자신 역시 좋아해준다는 걸 알곤 안심하고 고백.

트라우마가 바로 낫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힘들 때 마다 박사를 찾아갈 수 있게 됨.



이제 이거 썼으니, 플롯 고쳐가며 신청받은 단편들부터 쓸 예정.

일단 다음 단편은 확정.

아마 어지간해선 얘. 

나머지는 아직 선별하기 어렵고, 이거다 하는 것도 없어서 달린 것 중에 더 좋은게 있으면 그거부터 할 생각.

없으면...일단 찾아보고


단편이 쓰다 보니 엄청 재밌어. 뒷이야기도 생각 안 해도 되고, 플롯이 좀 더 단순해도 되니 단순한 묘사에 좀 더 집중 할 수 있고. 그래서 필력 키우는 데 장편과는 다른 부분에서 도움이 되는 느낌.

그리고 사람들이 1화빌런이 되는 이유가 좀 이해됨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더 나은 글을 위해 언제나 피드백 받음.

그리고 댓글 보는 맛으로 글을 쓰는 파라, 댓글 많이 달아주면 하나하나 다 읽고 쥰내 열심히 글 적음.


댓글 달아줘 어서 

잔뜩 달아줘 당장




일단 단편 신청은 받지만 확정은 아님.

그래도 이 글쟁이는 시간이 걸려도 무료로 써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