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팅게일은 머틀 옆으로 가. 빛을 등지는 거 잊지 말고, 바로 앞에 새장 내려놔. 머틀, 지금 깃발을 들어."

"네, 알겠어요."

"사과야! 오늘도 잘 부탁해!"

20번의 모의전, 사흘간의 밤샘. 3주 전부터 그 소식을 듣고 준비했던 이번 위기 협약 상주 작전 지점에서의 도전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차분하다 못해 여유롭기까지 한 박사의 지시에 따라 로도스의 오퍼레이터들은 헬기에서 강하해 강한 기술을 퍼붓고 잠시 퇴각하여 재정비하기를 반복했다.

"사일라흐는 이제 퇴각해. 백파이프, 엘리시움 옆으로 내려가. 그쪽 길목은 맡길게."

"어디? 시끄러워서 잘 못 들었사!"

"엘리시움 옆!! 수르트, 퇴각해!"

시끄러워서 무전이 들리지 않는다는 말에 박사가 급히 목소리를 키웠다. 글룸핀서 한 마리를 엘리시움이 저지하고 백파이프가 후다닥 전장으로 내려갔다.

급하게 수르트를 퇴각시키고 노시스를 배치했지만 박사는 작전의 실패를 예감했다. 백파이프가 배치된 타이밍이 너무 늦었다.

"나이팅게일, 성역! 아군을 보호해!! 머틀, 엘리시움은 퇴각하고 백파이프는 화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작전은 이미 실패했으니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후퇴하는 게 최선이다. 노시스가 아츠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적을 붙들어 놓고 빠르게 후퇴하자. 전략을 전면 수정한 박사는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일심불란 전투를 지휘했다.

"노시스, 범위 안에 들어오는 적을 모두 얼려줘!! 적을 최대한 처리하고 모두 안전하ㄱ-으윽."

팔 한쪽의 통증과 함께 무전기가 옥상 난간 아래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몸이 땅바닥을 뒹굴었고, 누군가가 그를 깔아뭉갰다.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는 칼날을 향해 박사는 필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목을 향해 내려오던 칼이 공중에서 멈춘다. 팔을 잡힌 아머레스 유니온 암살자와 바닥에 깔린 박사 사이에 힘 싸움이 시작됐다. 괴한은 온 힘을 다해 칼을 내리누르고 박사는 이를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분명 백파이프를 지나친 아머레스 유니온의 활잡이들은 노시스가 얼려버렸을 텐데. 대체 이 암살자는 어디서 흘린 것인가? 박사는 바들바들 떨리는 칼을 목전에 두고도 이 문제에 대한 답을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백파이프가 막고 있던 곳의 반대쪽. 누구도 지키고 있지 않았던 윗길이다.

백파이프의 배치부터 명령 전달이 밀려 아랫길에 적이 지나치게 쌓였고, 박사의 관심도 자연히 그쪽으로 쏠렸고, 그렇게 아머레스 유니온 암살자 하나가 유유히 전장을 빠져나와 근처 건물 옥상에 있던 자신을 찾아낸 것이다.

명백한 자신의 실책이다. 전장의 소음을 예측하지 못한 것부터 그 이후의 대처까지 뭐 하나 잘 한 것이 없다. 박사는 칼날이 자신의 목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필사적으로 버티면서도 자책을 멈추지 못했다. 지금 위험에 처한 건 자신뿐만이 아니라, 지휘관 없이 전장에 덩그러니 남겨진 오퍼레이터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박사! 괜찮은가?"

창이 공중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금빛 광채가 번뜩인다.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내리누르던 무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니어는 퇴각한 지 얼마 안 됐는데? 하지만 살았다, 다행이다. 괴한의 속박에서 벗어난 박사는 곧장 난간으로 달려가 전장의 상황을 확인했다. 이미 모든 오퍼레이터들은 퇴각한 뒤였다.

"어서 돌아가지. 위기 협약은 다음을 기약하는 게 좋겠군."

"그래. 고마워, 니어."

나쁜 녀석들 호가 고도를 낮추자 날개 소리가 커지고 강한 바람이 끼친다. 라이트의 불빛이 박사를 비춘다. 부축해 주겠다는 니어를 뿌리친 박사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보며 깨달았다. 그 난전 중에 후드가 벗겨졌었단 것을. 헬기의 문이 열리고, 위로와 걱정의 말을 건네려 다가오던 오퍼레이터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박사가.. 여자였어?"

몇 년간 베일에 싸여있던 박사의 성별이 드러난 것은, 그가 돈 시커 작전의 1주 차 최고점에 도전하기 위해 출전했던 어느 날이었다.

늘 후드 안에 숨겨져있던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까지 흘렀다. 하얀 얼굴에 자리 잡은 서글서글한 이목구비가 앳된 분위기를 자아냈다. 눈이 휘둥그레 커지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얼굴을 가린다. 어? 생각보다..

"예쁜데?"

박사가 빛과 같은 속도로 후드를 다시 뒤집어썼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대원들은 이미 그의 얼굴을 목격한 뒤였다. 밖으로 삐져나온 머리카락 역시 숨길 수 없었다. 엘리시움의 입에서 솔직한 감상이 튀어나왔다.

"왜 그 얼굴로 하는 짓이.."

"딜런, 출발해. 부상자는? 다들 무사히 퇴각한 거 맞지?"

컵라면 입에 넣고 물 부어서 익혀 먹기, 여성 오퍼레이터 희롱하기, 탈모, 폭음, 폭식.. 수차례 희롱당한 전적이 있던 사일라흐는 평소 행적과 전혀 매치가 안 되는 그의 외모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박사, 얼굴 한 번만 더 보여주면 안 돼? 제대로 못 봤단 말이야."

"니어는 괜찮아? 재정비도 덜 끝났는데 내려왔잖아."

"난 괜찮다, 박사. 우선 팔부터 치료하지."

얼굴에 관한 말은 전부 못 들은 척 제 할 말만 하는 박사를 보며 머틀이 살살 웃음을 흘렸다. 불길한 예감이 박사의 좌우뇌를 스쳤다가 다시 돌아와 전두엽에 박혔다. 조만간 로도스에 자신이 여자라는 소문이 쫙 돌 것이다.

"정말 그러고 갈 거야? 머리카락 다 삐져나왔어."

"..나도 알아 테킬라. 다들 내 얼굴이나 성별에 대해 어디 가서 떠들지 마라."

박사의 말에 몇몇 대원들이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썩 미덥지 못한 약속을 받아낸 박사는 한숨을 쉬며 다시 후드를 내렸다. 그리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 방호복 안으로 숨겼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모두의 생각은 아마도 전부 같을 것이다. 역시 박사는 꽤 예쁘다.

'카리스마 있고, 상냥하고, 똑똑하고, 가끔 엉뚱한 것도 귀엽고..'

니어의 머릿속에 언젠가 그라벨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박사의 생김새는 몇몇 여성 오퍼레이터들이 상상했던 모습 딱 그대로였다. 거기에 살짝 병약함을 더하고 성별을 바꾼다면 그게 박사일 것이다. 다시 모자 속으로 얼굴을 숨기는 박사를 보며 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박사의 한숨이 그 위에 덮였다. 막막한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위기 협약이 시작된 날부터 이 작전을 시행하는 날까지 PRTS와 함께 며칠 밤을 지새웠다. 그 오랜 시행착오가 한 번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얼굴을 들킨 건 그다음의 문제다.

첸의 검술을 활용해 볼까, 샤마르의 저주 인형을 써 보면 어떨까, 오래간만에 플레임테일이 활약할 기회이지 않을까. 얼마나 많은 고민을 거듭했는데. 전장에 한두 번 섰던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실수를.

"미안.. 내가 무전을 제대로 들었어야 했는데."

"됐어, 전장의 소음을 예상 못 한 내 잘못이다. 자책하지 말고 돌아가면 다들 의료부에서 치료부터 받아."

이런 초고난도 작전은 필연적으로 부상을 동반한다. 나이팅게일의 치료 아츠가 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이건 막을 수 없다. 전열 오퍼레이터들의 몸에 남은 크고 작은 상흔들을 보며 박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어, 치료는 박사님이 먼저 받으셔야 할 거 같은데.."

"부상의 경중을 정확히 파악해라, 박사. 여기서 치료가 가장 시급한 건 우리가 아니다."

니어에 이어 스즈란과 노시스까지. 이걸로 벌써 세 번째 팔의 상태를 지적 당한 박사가 그제야 나이팅게일에게 꾸물꾸물 다가갔다. 아무리 박사의 신체 구조가 유별나다지만 팔 정도는 여타 메딕 오퍼레이터들도 치료할 수 있다. 만약 찔린 게 좀 더 깊숙한 곳이었다면 그를 치료할 수 있는 건 오직 켈시뿐이었겠지. 아니면 그대로 절명했을지도 모르고.

"텍사스, 요즘 펭귄 로지스틱스는 많이 바쁜가?"

"별로. 운전은 나만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그럼 아무 때나 불러도 상관없는 거지?"

"상관없어. 한 명쯤 없어도 어련히 알아서 잘들 하니까."

"박사님, 그렇게 움직이시면 치료하기 힘들어요."

박사의 머리가 바쁘게 돌기 시작했다. 돌아가면 오늘 시행하려던 작전을 재검토해 봐야겠다. 다음 작전 일정도 잡아야겠지. 로도스 소속의 오퍼레이터라면 박사가 임의로 일정을 조정할 수 있겠지만 협력 단체에서 파견된 오퍼레이터라면 일정부터 다시 조율해야 한다.

일단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펭귄과 카란, 두 회사와 일정을 다시 논의하는 것. 이번 주 안으로 약속을 다시 잡을 수 있을까. 실버애쉬의 일정에 맞추느라 이번 주 일정을 얼마나 비틀었는데.

"실버애쉬. 넌 이번 주에 시간 되는 날 더 없어?"

"시간은 만들면 생기는 것이지. 최대한 일정을 조정해 보겠다."

"전이랑 말이 다른데."

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지 알고 있다. 실버애쉬에게 있어 자신이 얼마나 높은 가치를 지녔는지는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지만, 방금 그의 안에서 제 가치가 몇 단계 더 격상되었음은 분명하다.

"제대로 말해. 네 일정에 방해되지 않게."

"이틀 뒤 오후 두 시 이후로는 전부 비어있다."

"여동생은 안 만나게?"

"이 정도는 엔시아도 이해하겠지."

"...그럼 그날 세 시에 보는 걸로 알고 있을게."

자신이 성별을 분명히 밝혔을 때 얻는 이득과 손해, 그리고 저의 성별을 남들 좋을 대로 상상하게 뒀을 때의 이득과 손해. 두 가지 경우의 손익을 가늠하는 박사의 저울이 살짝 기울었다. 소문이 퍼지는 건 이미 막을 수 없겠지만 이거, 어쩌면 나쁘지 않을지도.









보고싶은 게 없길래 남아도는 시간에 써봄
추석연휴 만만세

참고로 작중 박사가 구사하던 택틱은
https://m.bilibili.com/video/BV1Q44y1T7Vw
이거임


아니 이왜념;; 써올게 2화 써올테니까 제발 그만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