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링크(클릭)


꽤 잔잔하면서도 흥겨운 연주 소리가 방안에 들려왔다. 악기에 대해 문외한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피아노나 바이올린 소리는 얼추 알 수 있었다. 그 연주 소리에 맞춰 드럼을 치듯이, 내 앞에서 망치 두들기는 소리가 일정한 템포로 울렸다. 

소리에 맞추며 허공을 춤추고 있는 먼지가 내 코를 살며시 간지럽혔다. 재채기가 나올 거 같으면서도 안 나와 미쳐버릴 상황이라, 급하게나마 손으로 코를 막았다. 내 눈앞에 있는 에기르 여성은 이 가루들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잘 되어가?"

내 질문을 못 들은 건지, 스펙터는 별 대답 없이 자신이 할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 손에 들고 있는 조각도 뒤쪽을 나사 삼아 다른 손의 망치로 툭툭 치니, 칼날이 눈앞에 있는 석재를 과일 껍질처럼 서걱서걱 깎는 것이 보였다. 그 장면이 꽤 신기하고 재밌어 보여서 무심코 시선이 이끌리게 만들어, 어느 순간부터 바닥에 앉은 채 멍하니 조각하는 그녀의 옆모습을 보고 있었다.

서포터 오퍼레이터 이스티나가 빌려준 책에서 그런 내용이 있었다. 라테라노의 유명한 성인 중 하나는 원래 직업이 석공을 겸하는 목수였는데, 몇몇 화가들은 그 점을 살려 그 성인을 묘사할 때 3대 500은 거뜬히 칠 수 있는 근육질로 묘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목수나 석공에게 요구되는 체력이나 근력이 상당하다는 뜻이겠지.

"...분명 그래야 할 텐데."

어떻게 이 여성은 1시간째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석재를 깎고 있는 거지? 대단한 집중력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 저 편한 일상복에서 쑥 튀어나온 가녀린 양팔에서 그 정도의 근력이 나온다니. 인체의 신비함에 통탄할 따름이다. 정확히는 종족의 신비함이겠지만.

스펙터의 종족은 에기르. 정확히는 '특수한' 에기르다. 열람한 정보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씨본이라는 정체불명의 적에 맞서기 위해 만들어진 개조 인간 비슷한 존재인 셈이다. 그런 존재들이 모인 곳이 심해 사냥꾼 '어비설 헌터스'. 동료인 글래디아나 스카디에 비해 종합검진 결과가 살짝 부족하지만, 그런데도 월등 항목 2개에 우수 항목 2개라는 괴물 같은 스테이터스를 가진 게 내 눈앞에서 열심히 조각하고 있는 여성 되시겠다. 

"박사."

갑자기 이름을 불러서 화들짝 놀란 나머지, 몸이 용수철처럼 폴짝 뛰어올랐다. 꽤 꼴사나운 모습이었겠다만, 스펙터는 관심 없다는 듯이 시선과 손짓을 석재에 집중하고 있었다.

"할 말 있으면 그냥 말해도 돼. 우리가 그렇게 어색한 사이는 아니잖아?"
"아니, 이런 건 처음 보니까…"

그녀가 맨정신으로 집중하여 조각하는 모습도 어색하지만, 더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이 방의 분위기다. 이곳저곳 일정 간격으로 배치된 명화. 방을 채우는 연주소리. 건조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살포되고 있는 가습기. '제정신'으로 돌아오기 전엔 방 안에 묶음줄이 달린 병상과 간호사가 쓸 의자만 있던 황량한 방이었는데, 리모델링을 거치고 나선 웬 예술가의 공방으로 환골탈태해버렸다. 당연히 낯설 수밖에 없잖은가?

몇 달 전, 스펙터가 잠시 의식을 되찾고 내게 찾아와서 물품 몇 개를 준비해달라 한 적이 있었다. 명화가 들어간 액자와 음반. 그리고 조각하기 위한 장비들. 왜 필요한 건지는 몰랐지만, 본인의 취향인듯 싶어 그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다. 스페셜리스트 오퍼레이터 글래디아의 조소 섞인 조언을 받아적어 그대로 방에 놔뒀더니, 본인도 썩 맘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조각, 재밌어?"
"재밌으니까 하지. 이거 생각보다 섬세함이 많이 요구되는지라 좋아하지 않고서야 하기 힘들거든."

숨을 고르거나 땀을 닦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는데 힘들다고? 아무리 봐도 거짓말 같지만, 보이지 않는 고통은 어디에든 있는 법이다. 특히 그녀같이 중증의 감염자일 경우엔 더더욱. 

감염자라는 단어를 떠올리니 문득, 멍하니 있다 보니 잊고 있던 것을 떠올랐다. 이곳에 내가 들른 이유를.

"맞다. 내일까지는 의료부에 들러줘. 정기 검진인데 안 온다고 걱정이라더라."
"어라.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한동안 조각만 하느라 잊고 있었네."
"건강 좀 챙겨…"

스펙터의 체내 오리지늄 융합률은 이전에 비해 0.5%가 상승했다. 혈중 오리지늄 결정 밀도 역시 0.03u/L 증가. 감염자의 병세 악화는 필연적이지만, 이미 체내 오리지늄 융합률이 10% 중반에 근접한 그녀의 상태는 위중하다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특별한' 에기르인의 신체 특성 때문인지 일상 활동엔 그다지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광석병은 마른 하늘에 등장하는 벼락과도 같은 녀석이다. 결코 방심할 수는 없다.

"그 이전에, 왜 박사가 온 거야? 그냥 사람을 보내면 됐을 텐데."
"그냥 너 걱정되서 전달할 김에 한 번 보러 왔지."

전달해야 할 담당 의료 오퍼레이터가 스펙터를 무서워해서 나에게 떠넘긴 거지만,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걱정된다는 것도 딱히 틀릴 것도 아니니까 적당히 좋은 구실이 되어준다.

"에잇."

조각도와 망치가 바닥에 휙, 하고 떨어졌다. 먼지가 묻은 손을 매고 있던 앞치마에 쓱쓱 문지른 다음, 기지개를 켜며 스펙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석재 쪽을 보니 딱히 끝난 거 같진 않은데. 스트레칭이라도 하려는 건가?

"아. 영감이 갑자기 싹 사라졌어. 밥이나 먹을까."

배꼽시계가 울린 거였군. 에기르의 예술가님이라도 식사는 어쩔 수 없는가 보다. 

"근데 지금 저녁 10시인데? 식당은 닫혔을걸."
"매점에 가면 되지. 컵라면 정도는 팔지 않겠어? 대충 먹고 때우지 뭐."
"건강 상한다."
"입에 라면 넣고 주전자를 붓는 박사님이 말하니 영 신빙성이 없는걸?"
"어…?"

덜컹. 지진이 난 것도 아닌데 심장이 턱하고 가라앉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들었는데 잘못 들었을 리가 없잖은가. 로도스에서 살면서 내가 피하고 싶은 흑역사 top 5에 당당하게 들어있는 그걸, 스펙터가 알고 있다고? 그녀가 '제정신이 아닐 때' 있었던 일인데? 대체 어떻게?

"너,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대원들이랑 대화 좀 즐겁게 나누더니 영상들 몇 개 보여주던데? 회식 중에 네가 폭음하고 벌인 짓이라면서."
"어떤 놈이 퍼트린 거야…"

삭제 요청을 했는데도 비밀리에 퍼져버린 건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유포자는 반드시 잡아서 로도스의 함교에 매달아두거나 황야의 샌드비스트의 먹이로 줘야겠다는 다짐을 굳히게 했다.

물론, 역으로 생각해보자면 그만큼 정신을 차린 스펙터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도 있다. 정신이 멀쩡하지 않았을 때 모두에게 기피당하던 그녀가, 상태가 호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다른 대원들이랑 비밀을 공유할 수준의 친목을 다졌다는 뜻이다. 사교성이 심각하게 떨어지는 글라디아나 스카디가 있다 보니 더욱 대비된다.

"박사. 얼굴이 새빨간데? 부끄러워? 난 귀여워 보여서 좋던데."
"너까지 놀리는 거냐."

그런 내 반응이 재밌는 듯, 스펙터는 쿡쿡 웃으며 앞치마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앞치마를 벗으며 드러나게 되는 그녀의 상체가 눈에 들어와 몸이 철심을 박은 점토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앞치마를 입었을 땐 몰랐는데, 앞부분만 시스루인 구조의 티셔츠라니. 이걸 디자인한 사람의 괴상한 센스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문제는 옷이 시스루인 것이 아닌, 그 안으로 비치는 검은색 속옷. 그리고 그 속옷이 감싸는 스펙터의 풍만한 곡선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보이는 짧은 반바지, 정확히는 그것보다 좀 더 내려가니 시원하게 뻗어 있는, 상아를 떠올리게 만드는 새하얀 맨다리는 덤이다. 뺨에 열이 오르는 것이 분명 조금 전의 수치심뿐만은 아닐 것이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건 인간으로서 큰 실례지만, 남성으로선 어쩔 수 없나 보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도 시선은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고개 돌리고 뭐해? 날벌레라도 날아다녀?"
"아니, 아무것도…"

들키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본인은 눈치채지 못한 거 같다. 그래? 라고 물으며 스펙터는 주변 물품들을 테이블로 옮기더니, 문 쪽으로 걸어가면서 다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아무튼 알려주러 와준 것에 감사를 표할게. 이제 볼일 보러 가도 좋아."
"퇴근하면서 온 건데…"
"그래? 그럼 매점 갈 거니까 따라와 줄래? 너라면 육지 음식에 좀 더 박식하겠지."
"마음에 안 들면 어떡하려고?"
"색다른 경험은 나쁘진 않지."

어차피 오랜만에 비는 시간이겠다, 대원과의 친목을 도모할 겸 산책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스펙터의 뒤를 따라갔다. 방을 나오고 곧바로 문이 닫히자, 비상등만 켜져 있는 복도의 삭막한 풍경이 우리 둘을 반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박사."
"왜?"

내 앞으로 복도를 걷고 있던 스펙터는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내게로 걸어왔다. 장난기가 섞인 살짝 불안한 웃음과 함께 날 살며시 올려보더니, 그녀는 속삭이듯이 내게 말을 던져왔다.

"아까 시선이 야릇하던데, 역시 너도 남자구나?"

은발의 아가씨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내게서 떨어져 복도 저편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얼추 10미터 정도 떨어졌을 때쯤, 무언가로 꽉 잡히고 있던 것 같은 폐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뇌며 심장이며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해 그 자리에서 계속 서고만 있었다. 멀리서 안 오고 뭐 하냐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아무래도 내 인생 속 흑역사가 오늘 하나 더 추가될지도 모르겠다.


-----




스펙터 눈나 너무 조아...


오늘부로 섬멸전 스킵 티켓 생김. 이제 안 까먹어도 되서 너무 좋더라.


이벤트 돌려야 되는데 상어눈나 스킬작 재료 땜시 돌라는 이벤트 안 돌고 일반 맵 돌고 있다... 착한 명붕이들은 그러지 말것.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