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쾌하고 웅장한 무도곡이 연회장을 가득 울린다. 기타와 피아노, 바이올린 등이 섞여 자아내는 흥겨운 하모니는 듣기에 즐겁고,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직이며 리듬을 탈 정도로 박자와 리듬감이 잘 맞아 흥겹다. 음악에 조예가 없는 사람이라도 벽에 등을 기대고, 한 손에 가벼운 술을 든 채 리듬을 타며 듣기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아니면, 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어도 될 만큼.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박사는 그 음악을 들으며 그런 감상을 내뱉었다.


  그렇지만 내가 이 음악에 맟춰 춤을 추게 될 줄은 몰랐는데. 박사는 가볍게, 방금 전 자신이 생각 없이 내뱉었던 감상을 후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그의 운명에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음악은 경쾌하게 홀을 울리지만,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다른 이는 없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오직 이 곳에서 유일하게 춤을 추며 스텝을 밟는 두 사람에게 못이 박혀 고정된 듯 시선을 때지 못한다. 


  박사와 글래디아에게.


  글래디아의 춤 신청을 받아들이자마자 그녀는 박사를 이끌고 무도회장의 한 가운대에 올라섰다. 드레스와 정장을 입은 남녀, 마치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화려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무대에 서니, 자연스럽게 무도회의 주인공이 정해졌다. 어설프게나마 스텝을 밟으며 놀던 이들은 순식간에 구석으로 밀려났고, 어느세 나타난 로렌티나는 기다렸다는 듯 턴테이블의 음악을 바꿨다. 


  그것이, 바로 지금에 이른 과정이다.


  글래디아의 춤실력은, 박사에게 있어 그야말로 감탄할 정도로 훌륭했다. 춤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는 박사가 아무렇게나 내지르는 스텝에도 글래디아는 귀신같이 그를 리드하며 어리숙한 스텝마저 훌륭한 춤의 동작처럼 꾸며냈다. 이대로 그녀에게 몸을 맡기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박사는 자신이 마치 사교계의 이름난 귀족이 된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조금 더 다리에 힘을 주십시오. 그렇게, 잘 했습니다."


  리드를 하며 사소한 지시를 귓가에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 친절하고, 달콤했다. 고작 가벼운 스텝 한번 한번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 그녀의 목소리가 부드럽고 다정했고, 이대로 그녀의 리드를 따라가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훌륭한 춤선은 그 스스로 느끼기에도 감탄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박사에게는 지금의 춤이 참 고역이었다. 


  물론 그게 그녀의 문제는 아니었다. 평소에는 세상 차갑게 그를 대하던 글래디아가 처음으로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그를 칭찬하고 있다. 평소였다면 얼굴은 붉혔을지 언정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조금 더 솔직한 욕망을 드러내자면 박사는 항상 그런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어시스턴스직을 승인한 것이니까. 그러니 박사는, 평소였다면 웃으며 글래디아의 칭찬에 기쁜 티를 숨기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라도, 최소한 지금처럼 숙맥이나 다름 없는 얼빠진 반응을 보일 리는 없었다.


  지금처럼 글래디아가 박사와 몸을 딱 밀착하고 있지만 않았다면.


  스텝을 밟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좁혀지는 거리 덕분에 박사의 허리를 감은 글래디아의 손에 힘이 더해졌다. 박사 역시, 글래디아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어디에 손을 대도 글래디아의 몸은 탄탄하면서도 부드러웠고, 서로 맞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뜨겁다. 


  박자를 틀리지 않도록 신경 쓰며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만, 이미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날뛰는 심장 소리가 모든 소리를 집어 삼킨다. 귓가를 울리는 심장 박동에 음악 소리 마저 묻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글래디아의 목소리마저 희미해질 정도로.


"....아."


  박사의 스텝이 꼬여 글래디아의 발을 밟을 뻔 했다. 이를 피하려고 발을 잘못 딛다가, 순간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려 앞으로 꼬구라졌다. 아니, 꼬꾸라질 뻔 했다. 


  박사의 시야가 무도회장으로 변모한 홀의 바닥으로 가득 찼다. 이대로 가면 얼굴부터 떨어진다. 이미 늦었구나. 박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최소한 글래디아와 뒤엉켜 넘어지지는 않기를 바라며 그는 제 운명을 기다렸지만, 바닥에 부딪히는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경악과 놀람에 가득찬 함성과 환호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눈을 뜨자, 그의 시야는 바닥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더 이상 앞으로 넘어지지는 않는다. 이게 무슨 일이지? 하며 박사가 의아함을 느끼기도 전에, 시야가 반대로 돌아갔다. 글래디아가 다시, 박사의 몸을 받아냈다.


  순식간에 휙 돌아간 시야에 글래디아의 모습이 가득 담겼다. 그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가, 숨길 생각도 없는 열기를 담아 뜨겁게 일렁인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박사의 시야에 담긴 모든 것들이 멈추고, 귓가에 들리는 음악 소리 마저 들리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박동하는 심장소리만이, 그의 귓가를 가득 채웠다. 


"조심하셨어야죠."


  글래디아가 웃었다. 박사의 허리를 감은 글래디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외에 느껴지는 감촉이 하나 더, 박사의 등을 떠받히고 있는 글래디아의 허벅지가 느껴졌다. 그 덕에, 박사는 지금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수치심 때문에? 아니 그것보다는 


  자신을 보며 여유롭게 웃어 보이는 글래디아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았기 때문에.


  그녀의 붉은 눈을 보면, 붉은색이 이토록 차가워 보일 수도 있구나, 하며 신기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글래디아를 처음 만났을 적, 박사는 분명 그랬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글래디아의 눈동자는 박사의 기억과 다르다. 석류를 닮은 아름다운 붉은 빛도, 심해와 같이 빠져들 것 같은 깊음도 여전하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뜨겁다.


  열기를 띄는 눈동자가 의미하는 것은...


  울리는 심장소리 때문에 귀가 아프다. 더 이상 무슨 음악이 들리는지, 주변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들이 어둠 속에 집어 삼켜져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하여, 무도곡만이 희미하게 울리는 이 곳에 순간 둘만 남은 것 같았다. 박사는, 


  그리고 글래디아는.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그러기를 희망했다.


  이 춤은, 이 스텝은 글래디아에게는 굳이 의식하며 밟아야 할 만큼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에기르의 사교파티에서도, 로도스의 가벼운 무도회에서도 수도 없이 밟아왔던 스텝이었고 눈을 감고도 출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춤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박사의 발을 밟을 것 같았고, 조금만 다른 곳에 신경을 쏟으면 스텝이 엉켜 넘어질 것 같았다. 음악이 달라서도 아니었고, 오랫동안 춤을 추지 않아 몸이 굳은 것도 아니었다.


  서로 손을 맞잡고, 몸을 붙인 채 춤을 추는 남자가 박사라서, 사랑하는 남자라서. 제 품에 안겨 이끌리며 춤을 추는 그에게 시선을 쏟고 있자니,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변의 시선도, 웅성거리는 목소리도, 스텝을 밟아야 하는 음악까지도.


  박사에게 여유로운 미소를 띄고 있는 것은 그저 가면에 지나지 않았다. 겉으로라도 태연한 척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얼굴을 숨기지 않으면 그 때는 진짜로 스텝이 망가져 넘어질 것 같았으니까.


  몸을 숙이고, 허벅지로 등을 지탱해 그의 실수를 춤으로 꾸몄다. 아무도 박사의 실수를 알아채지 못했는지, 주변에서 박수소리가 크게 울렸다. 글래디아는 박사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조금 거리를 벌리고 다시 손을 잡으니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시야가 서서히 밝아지는 것 같았다. 음악이 끝났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흘렀다.


  두 사람의 눈이 오직 서로만을 비추고 있다.


  지금이다. 글래디아의 직감은, 지금이 가장 최적의 타이밍이라고 소리쳤다. 바로 지금이, 박사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할 타이밍이다. 춤을 멈추고 그의 손을 붙잡고 지금이야 말로, 가면을 벗어 던지고 그에게 진심을 말해야 한다고. 글래디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수도 없이 연습했던 말이다. 반드시 오늘 말하고야 말겠다고, 그렇게 결심하며 드레스와 함께 준비했던 말이다. 그러니 말해야 하는데....


"......."


  박사도, 글래디아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박사는 방금 전의 광경에 홀린 듯 매료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아직도 이명이 울리는 듯 희미하게 들리는 음악소리가, 현실성 없었다. 그래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여기서 입을 열었다간, 이 꿈에서 깨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할 것 같아서. 이 시간에 빠져들어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아서.


  글래디아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가만히 웃었다. 그에게 말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와 더욱 더 오래 붙어 있고 싶었다. 이대로 손을 잡아 당겨 그를 강하게 끌어안고 싶다는 충동이 그녀를 감쌌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곳에서 혼자만의 이기심으로 그에게 제 마음을 고백했다간, 주변의 시선을 이용해 그를 협박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에게 사랑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쉽다. 찰나와 다름 없는 순간처럼 순식간에 손 안에서 빠져나간 그와의 시간이 너무 아쉬웠다. 이대로 영원히, 이 시간이 무한히 반복되었으면 좋겠다고 소망 할 만큼.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음악이 끝났으면 춤은 멈춰야 하고, 아무리 달콤한 꿈이어도 아침이 오면 깨어나야 하는 법. 이제는 물러날 때다. 글래디아는 손을 놓았다. 상상 이상으로 허망하게 떠난 손에, 박사의 손이 잠시 그녀를 쫓아 앞으로 뻗어졌다. 하지만, 박사 역시 이내 주먹을 꼭 쥐고 팔을 내렸다. 


  아직 손에 남은 그의 온기가 따뜻하다. 이대로 이 온기를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다. 벌써부터 차갑게 식기 시작한 그의 온기를 끊임 없이 기억에 세기며 글래디아는 드레스의 끝자락을 한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을 가슴에 얹고, 몸을 가볍게 숙였다.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귀족적인 작별 인사. 그 우아함이 눈을 땔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박사 역시, 가슴에 손을 얹고 몸을 숙였다. 춤의 마지막을 고하는, 파트너끼리의 작별 인사.


  그렇게, 무도회는 끝났다.


.

.

.


  연회가 끝났다. 무도회가 끝나고, 모두가 이 자리를 떠났다. 어둠에 잠겨 적막해진 홀에 바람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렸다. 오늘의 이 무도회가 단순한 소설이나, 영화로 끝났다면 이만큼 적합한 엔딩도 없을 만큼, 오늘의 연회는 성황리에 끝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 무도회는 영화 속의 한 장면도, 소설 속의 한 단락도 아니었다. 이 무도회가 끝나도, 로도스는 꾸준히 항행할 것이다. 무도회는 끝나고, 커튼콜과 함께 오늘의 파티는 끝났지만, 오늘을 위해 준비했던 수많은 음식과 도구들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니 누군가는, 이를 정리해야 한다.


  그 역할을 자처한 박사는 기꺼이 아무도 없는 이 무도회장을 홀로 정리하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정리를 그 혼자 한 것은 아니었다. 남은 음식들은 먹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챙겨가거나 이미 구내식당의 설거지장으로 보내졌고, 대부분의 설비들은 한 곳으로 치우기만 하면 된다. 즉, 박사 혼자서 충분하니까 그는 다른 모두를 물린 것이었다.


  마지막 테이블을 접어 구석에 놔두는 것으로 모든 정리는 끝났다. 깔끔해진 홀이 보기 좋았다. 이제 나도 가서 쉴까, 박사는 기지개를 켜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 까지 이 곳을 비추던 샹들리에는 사라졌고, 화려한 음식들이 올라와 있던 테이블은 전부 치워졌으며 귀가 아프도록 홀을 채우고 있던 음악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정말 이 곳이 아까와 같은 장소가 맞나, 싶은 생각까지 든다. 그래서, 이 모든 일들이 한 순간의 꿈이었나 싶은 착각이 들 정도로 홀의 변화가 어색하다.


  잠시 벽에 등을 기대고, 박사는 글래디아와의 춤을 회상했다. 아직도, 그녀와 춤을 췄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했다. 진짜 있었던 일인지 확신이 들지 않을 정도로, 꿈과 같은 한 때였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눈 앞에 있는 것만 같다. 그 순간을 떠올리자, 답지 않게 심장이 주책을 부리며 두근거렸다. 


  하지만 역시, 달콤한 꿈은 빨리 끝나기 마련인지, 글래디아는 춤을 끝내자마자 홀을 떠났다. 처음부터 그와 춤을 추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는 듯, 그 어떤 대화도 없이 묵묵히 그의 곁을 떠났다. 그가 떠나는 그녀의 등 뒤로 손을 뻗어보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녀는 이미 미련을 털어냈다는 듯 망설임 없이 홀을 떠났다. 


  그는 그녀의 뒷모습 만을 눈으로 쫓는 것이 고작이었다. 차마 뒤돌아 떠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춤을 마친 직후의 그는, 무도회장을 가득 채운 열기로 머리가 마비되어 있었다. 그러니 분명, 그가 글래디아를 붙잡아 세웠다면, 그가 할 말은 뻔했다. ....그리고, 그 말은 해서는 안되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맞는 거겠지. 박사는 씁쓸한 듯 웃었다. 


  그래, 글래디아는 그저 순간의 변덕이나 친애의 의미만을 담아 나와 춤을 추었던 것 뿐이야. 그 이상으로 그녀에게 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민폐야. 난 그저, 아까 마셨던 술에 취했던 것이겠지. 그걸로 충분해. 화려한 드레스를 걸친 그녀는 아름다웠고, 그녀의 춤은 매혹적이었으니까. 아마 나는 평생 그 순간을 잊지 못하겠지. 이 계절의 적당한 추위와, 나와 춤을 추던 그녀의 표정을. 그 때의 온기를. 그래, 이거면 충분해.


  하지만....


  박사는 손을 들어 올렸다. 아무도 없는 허공에서 손을 내밀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에 '만약에 다음'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 때는 반드시. 반드시 내가 춤을 신청하겠노라고 다짐했다. 뭐, 그럴 리는 없겠지. 박사는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이 곳에 없다. 내 바보 같은 춤 신청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올 리 없었다.


"혼자입니까?"


  그래, 바로 이 목소리가....?


  글래디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덕에, 화들짝 놀란 박사는 뒤를 돌았다. 순간 귀가 잘못됐나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홀의 입구에 기대어 선 채, 글래디아는 박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차가워진 붉은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박사는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녀에게 추태를 들켰으리라는 생각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응."


"왜 혼자서 정리하고 계십니까, 다른 사람들은?"


  글래디아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당연히 아무도 없다. 설마, 그에게 일을 전부 떠넘기고 도망간 건가, 이 무능한 것들이. 글래디아가 표정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글래디아의 표정에 떠오른 불쾌함을 읽은 박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누가 쉬는 날에 일하고 싶겠어. 다들 가서 쉬라고 했지."


"....당신은?"


"나야 뭐, 좋아서 하는 거지 뭐."


  글래디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성실하시네요."


"뭘. 별 거 아니잖아."


  어련하시겠어요, 가벼운 미소를 띄우며 작게 중얼거린 글래디아는 박사의 곁으로 다가왔다. 홀의 어둠에 가려져 이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글래디아는 그 사이 옷을 갈아 입었다. 그녀의 지금 옷차림은 아까 전의 화려한 드레스도, 평소에 입고 다니는 갑갑한 그 제복도 아니었다. 


  가벼운 하얀색 티셔츠에, 허벅지까지 겨우 올 정도의 돌핀팬츠만 걸친 모습이 경박할 지경이었다. 솔직히 경박하다는 단어에는 무리가 있었으나, 그게 글래디아라면 다른 이야기였다. 로도스의 다른 사람들에게 지금 글래디아의 옷차림을 이야기하면 경박하다 못해 경악스럽다고 할 것이었다.


  박사는 본능적으로 아래로 내려가는 시선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머리도 풀고, 가벼운 옷차림을 한 글래디아는 평소보다 훨씬 부드러워보였다. 옷차림이 달라지니 마음가짐 역시 달라진 것일까, 평소의 고압적이고 도도한 오오라가 한껏 약해진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흘렸다. 방금까지와 전혀 다른 결의 아름다움에 순간 눈을 빼앗긴 박사는 군침을 삼켰다.


".....당신의 친절함에, 모두가 당신을 좋아하는 거겠죠."


"아냐 뭘. 내가 할 일을 할 뿐인걸."


  박사는 볼을 긁적였다. 처음 들어보는 그녀의 부드러운 칭찬이, 오늘 급변한 그녀의 분위기가 낯설면서도 싫지 않았다. 평소의 항상 날 서 있던 그녀의 모습에 비하면 지금의 글래디아의 모습은 확실히 이때까지와 달랐다.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떠올랐고, 박사의 머리 속에 한 가지 예감이 스쳤다. 아니, 예감이라기보다는 확신이었다. 바보가 아니라면,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모른 척 할 수 있을까?


  오늘의 그녀는 특별했다. 글래디아가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것도, 모든 시선을 무릅쓰고 그에게 춤을 신청한 것도, 그를 보며 웃어준 것도. 전부 평소의 그녀와는 달랐다. 바보도 아니고, 그녀의 변화를 박사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역시, 정말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변화가 기뻤다. 그 변화의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정말 바보같은 이유였다. 그가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딛지 않은 것은, 춤이 끝난 후 글래디아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은. 정말 만에 하나, 모든 것이 그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 때는 절대 견딜 수 없게 될 것 같아서였다. 혹여나 그렇게 될 까봐 겁이 나서, 오늘의 일을 한 가을날 밤의 꿈이라 생각하고 넘기려 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당연하다.


"그렇기에 저 역시 당신을 좋아합니다, 박사."


  지금 그의 눈 앞에 서 있는 글래디아가 굳게 결심한 듯, 그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으니까.


"....."


"친애나, 존경. 그 외 다른 의미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박사."


  글래디아의 차가운 눈동자가, 붉게 일렁였다. 저질러버렸다는 듯, 약간의 후회와 수치심으로 달궈진 붉은 얼굴이, 희미한 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났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당황스럽겠죠. 이해합니다. 저는 이 때까지, 당신에게 좋은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못했으니까요."


'저질렀다..........!'


  글래디아는 고개를 숙였다. 이 곳에 돌아온 것은, 그저 로렌티나의 성화와 같은 부추김 때문이었다. 여기서 그를 만날 수 있으리라곤,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 고백도 안하고 부끄러워서 도망쳤다고요?! 대장 진짜 미쳤어요?!!? 지금 당장 박사한테 안 가면 나한테 죽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로렌티나에게 반쯤 강제로 방에서 쫓겨난 직후, 어디로 가야 할 지 감도 잡지 못했다. 그래서 정처 없이 떠돌다, 이 곳에 도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그와의 춤은 너무나 꿈만 같아서, 눈을 감기만 해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귓가를 맴도는 음악, 아직 손에 남아 있는 듯한 그의 온기, 춤을 마쳤을 때 한껏 상기되어 있던 그의 표정. 모든 것이 떠올라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기분 좋은 기억이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끝이 아쉬웠다. 그래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던 아름다운 추억들이 순식간에 후회가 되어 그녀를 감쌌다. 그래서 그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발걸음은 이곳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그가 여기에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이 곳에서 혼자 남아 평생 간직하고 싶은 추억을 곱씹으며 시간을 끌다 적당히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이 곳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글래디아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럴 결심을 하기도 전에, 입이 먼저 움직였다. 


  그를 보자마자, 그 외의 모든 것이 정지한 듯 방금까지 그녀의 머리 속에 떠올라 있던 여러 생각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본능처럼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그저, 그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는 것 뿐.


  그래서 그에게 말을 걸었고, 변하지 않은 그의 친절한 표정을 보았으며, 변하지 않은 그녀의 마음을 고백했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이대로 계속 마음 속에 담아두기만 하다간, 이 마음이 썩어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글래디아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됐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그의 대답이 긍정적으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은 간절했지만 거절 당한다고 해서 그를 책망하거나 그와의 관계를 끊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그를 사랑한 것이 온전히 그녀의 자유의지이듯,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 역시 그의 자유니까. 그에게 사랑을 강제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초조해지는 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글래디아는 다시 시선을 끌어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박사는.


  웃음을 터트렸다.


".....웃...."


  순간, 글래디아의 턱 끝까지 웃지 말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사람은 기껏 진지하게 고백을 했건만, 그 대답이 이런 폭소라니. 불쾌할 법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글래디아의 말은 턱 끝에서 멈췄다. 


  박사는 대답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저, 손을 내밀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아까 글래디아가 했던, 춤을 신청하던 바로 그 자세.


"....한 곡. 추시겠습니까?"


  자세는 틀렸고, 손도 틀렸다. 지적해야 할 곳이 한 두 군대가 아니었지만, 글래디아는 그런 핀잔 대신 그저 가볍게 웃었다. 무도회가 끝난 이 곳에서, 더 이상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었다. 매너를 어기면 어떤가, 품위가 없으면 어떤가. 서로가 좋으면 된 거지.


"기꺼이."


  글래디아는 박사의 손을 잡았다, 박사의 대답은 여전히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는 굳이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아니, 그의 대답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다시 손을 맞잡고, 서로의 허리에 손을 감은 두 사람은 어스름한 달빛이 내려앉은 홀에서 춤을 췄다. 


  음악은 필요 없었다. 빛도, 화려한 샹들리에도 필요 없었다. 서로의 발이 얽히지 않게 스텝을 밟으며, 서로의 손을 잡고 웃으며 춤을 추던 두 사람은, 서로의 이마를 맞댔다.


  아직, 무도회는 끝나지 않았다.















.

.

.


"그런데, 스카디와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나요?"


"아, 울피아누스씨 연락처 좀 구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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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ca.live/b/arknights/61977521

전편 링크


예아 반갑소. 


이번에는 조금 늦었습니다. 한 4일 정도 걸렸나?

모종의 일이 있어서, 늦었습니다. 거기다 중간에 글 쓰던 걸 날려먹기도 해서 작업 시간 2배 연장.


일단 이번편을 끝으로, 묵혀뒀던 신청작 'Shall We Dance?'는 완결.


뭐 솔직히, 스킵한 부분도 많음.

스카디 파트는 가벼운 개그신으로 계획하긴 했다만 분량 상 그냥 저런 짤막한 언급으로 스킵했고, 로렌티나 파트도 대폭 삭제.

아무래도.... 다 적으면 너무 길어지고 난잡해져서 어쩔 수 없었어.


엔딩은 이게 최선인 거 같다. 처음에는 상편의 초반과 수미상관 구조를 띄게 하려고 녹음파트 같은걸 생각했는데 너무 뜬금 없는 느낌이 강해서 패스. 그리하여 뒷정리가 끝난 무도회에서 가벼운 차림으로 춤을 추는 느낌으로.

좀 더 이런게 나을 것 같다고 하면 피드백 달게 받음.


아무튼 그래서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더 나은 글을 위해 언제나 피드백 받음.

그리고 댓글 보는 맛으로 글을 쓰는 파라, 댓글 많이 달아주면 하나하나 다 읽고 쥰내 열심히 글 적음.


댓글 달아줘 어서 

잔뜩 달아줘 당장





그 외에도 일단 단편 신청 받음.

이 글쟁이는 확정은 아니지만 일단 무료로 써드립니다.


일단 지금 고려 중인 단편은

1. 그라벨X독타 순애

: 일단 플롯 짜는 중인데, 이거다 하는 플롯이 없음.




아니 진짜 근대 알1리 금지어 인거 은근 거슬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