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그 어떤 얼음보다 차갑고 그 어떤 무거운 돌보다 단단한 사람을 고르라 하면 로도스에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 중 나는 단언컨대 켈시를 고를 것이다.

사람을 사로잡는 카리스마, 웬만한 과학자들도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지식수준은 협상에서도 언제나 그녀를 갑의 위치에 있게 해주는 만능 도구였다. 외모는 또 어떠한가? 백색 윤기를 내며 빛나는 머리카락, 보기만 해도 쓰다듬고 싶다는 욕구를 참을 수 없는 부드러운(상대가 켈시만 아니었다면 박사의 권한을 이용하여 매일 10번씩 만졌을) 부드러운 귀, 오뚝한 코밑으로 연한 비단을 바른 듯 부르러워 보이는 입술, 항상 공허해 보이는 눈동자 안에는 마치 자석 처럼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매력적인 녹색빛이 그녀를 더욱 차갑지만 아름답게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겐 단 한 가지의 큰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흔히 "켈시어"라 불리는 그녀만의 정체불명의 화법이었다.

"그런 건가..."

"뭐가 그런 건데?"

"그것도 모르나?"

"...어 난 잘 모르겠어 부탁이니 알려주지 않을래..?"

"...다음에 알려주겠다."

"아, 잠깐! 저번에도 그렇게..!"

" 이 이야기는 그만 하도록 하지."

"...."


도저히 같은 언어를 쓰는 생물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화법. 차라리 원석충이나 시가 소환하는 즈자이랑 대화를 하는 게 더 속 시원하게 소통할 수 있을 것 같을 정도였다. 저런 화법으로 도대체 다른 회사와 계약은 어떻게 따내는 것인지. 협상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웠지만. 그보다 더 의심스러운 건 그녀의 태도였다. 어느 날이었다. 점심때를 놓쳐서 가벼운 인스턴트로 때우려는 참이였다.
"박사 들어가겠다."
똑. 똑. 두 번의 가벼운 노크와 함께 슬라이딩 도어가 열리더니 켈시가 들어왔다. 손에든 정체불명의 바구니와 함께.

하필 켈시가 들어온 타이밍은 인스턴트 라면을 입 안에 넣고 뜨거운 물로 데워먹으려던 순간이었다. 난 입안에 인스턴트 라면을 넣은 채로 고개를 위로 들고 있었고, 한 손으론 뜨거운 물이 담긴 포트를, 다른 한 손은 입안의 공간을 더 넓히기 위해 입을 당기느라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어있었다.


"박사.. 뭐 하는 거지..?"

"ㅈ ㅕㅇ 어끼.. 이이 거넌.. (저기..이건)"

입안에 든 인스턴트 라면 때문에 내 입속의 혀는 자유롭게 굴러가지 못했고, 안 그래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말까지 어눌하게 나오니 내모습은 광대가 따로 없었다.
이런 모습을 하필 켈시 앞에서 보이다니. 너무 부끄러워 붉어진 내 얼굴은, 내 손에든 포트처럼 하얀 증기를 내보내고 있었다. 이런 내 마음과는 다르게 켈시는 평소와 다름없는 메마르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박사는.. 인스턴트를 좋아하나..?"

그녀의 입에서 나지막하게 나온 한마디. 평소의 켈시어와는 다른, 조금 더 인간다운 켈시의 말투에 나는 조금 놀랐다.


"엥.에에어.. ㄱ그 거다니ㅣ데..(어... 그건 아닌데.") 라고 말하려던 순간,
내 혀는 입안에 장애물이 있는 걸 인지하지 못했는지, 평소처럼 말하려던 내 혀는 인스턴트 라면에 가로막혀 내 목젖을 간지럽혔고, 그 간지러움은 그대로 내 본능에 직결하여 입안에 있는 덩어리를 뱉어내어야 한다는 답에 도달한 듯 나에게 헛구역질을 요구했고, 결국 난 본능에 거스르지 못하고 입안에 있던 인스턴트 라면을 뱉어냈다.

"우엑...! 쿨럭.. 컥.."

난 입에 흐르는 침을 닦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차라리 들지 않았다면...) 상황은 끔찍했다. 침범벅이된 인스턴트 라면은 그대로 책상을 굴러 내 채액을 스프링쿨러마냥 흩뿌려 책상은 침범벅이 되고 결국 입구 앞에 있던 켈시 바로 밑까지 굴러간 것이다. 켈시는 자신의 바로 발밑에 있는 흉측한 덩어리(인스턴트 라면이라기엔 외형이 너무 변했고, 그렇다고 음식물이라 말할 수는 없으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수치스러움과 두려움에 감히 켈시를 쳐다보지 못하고, 그렇다고 떨어진 그 덩어리를 줍지도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인 채 잘못한 것을 걸린 아이처럼 켈시의 눈치를 보며 뻣뻣하게 서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할까, 격멸? 모욕? 아니면... 분노? 내 머릿속은 켈시의 기분을 맞추는 것에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근대 그녀의 입에 나오는 뜻밖의 한마디.

"박사, 그것 아나? 인스턴트 보다 토스트가 더 영양이 좋다."

"...네?"

지금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아예 딴 세계에서 대화하는듯한 그녀의 한마디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는 (놀랍게도 맨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흉물스러운 덩어리를 쓰레기통에 버려버리고, 침범벅이 된 내 책상을 티슈로 깨끗하게 닦아 원래 상태보다 더 깨끗해 보이는 책상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넋이 나간 내 표정을 찬찬히 보더니 뭔가 깨달은듯 들고있던 바구니에서 네모난 플라스틱 통으로 밀봉된 무언가를 꺼내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 먹는 건 위생적으로 좋지 않다. 식사를 인스턴트로 때우는 것도 좋지 않고, 이제 네가 해야 할 행동이 뭔지는 3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 거다."

눈앞에 가지런히 삼각형으로 잘린 토스트를 보며 나는 문뜩 떠오르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왜 내가 저지른 수치스러운 행동에 일말의 언급도 없는지, 이 수제 토스트는 또 뭔지, 말은 왜 또 사람 성질 긁게 하는지 등등... 하지만 내 사고는 배속 거지들의 폭동 때문에 온전한 생각을 할수 없었고, 한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일단 눈앞의 음식을 먹어보자!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원하는 것, 그건 바로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눈앞의 토스트는 무엇보다 배고픔 해소에 적절한 음식이었다.

네모난 통의 뚜껑을 열자 순식간에 달콤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내 코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왜 지금까지 못 맡았나 싶을 정도로 달콤한 향기였다. 한 손으로 삼각형 으로 잘린 윤기가 흐르는 토스트 한 조각을 들자, 안에 있던 내용물이 살짝 빠져나왔는데, 여러 채소와 베이컨, 달걀이 보였다. 빨리 음식을 내려보내라는 배속 거지들의 재촉에, 나는 헐레벌떡 토스트를 입안으로 받아들였다. 바삭! 소리와 함께 내 입안을 가득 채우는 버터와 함께 프라이팬에 녹아든 식빵과 푸르는 채소, 바삭하고 기름진 베이컨과 부드러운 달걀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내 입안에서 스텝을 밟으며 춤을 추었다. 씹으면 씹을수록 맛들은 점점 섞이며 색다른 식감과 맛을 내게 제공했고. 난 그들의 성의를 열심히 (단어 그대로) 씹으며 마지막 빵부스러기까지 맛있게 삼켰다.

"맛있다..."

굳이 머리로 명령해서 말하지 않아도, 몸속에서 만족한 세포 하나하나가 그렇게 소리치는 거 같았다. 그 소리를 켈시도 들었는지 옆에서 팔짱을 끼곤 자랑하듯이 토스트의 장점을 써내리 듯 말했다.

"토스트는 인스턴트 라면처럼 3분을 기다릴 필요도 없고 뒤처리도 간단하지. 방안에 냄새가 밸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되고."

" 그렇군..."

어째선지 나도 켈시처럼 말하게 돼버렸지만 뭐 그러면 어떤가? 음식은 맛있었고 나의 추악한? 행동도 켈시는 잊어버린 듯 한데. 배도 부르고 이제 오후 업무를 시작하면 될 것 같다.

"정말 잘 먹었어 켈시, 기회가 된다면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있을까? 구내식당에 이 정도 실력의 요리사가 있었을 줄 몰랐는데?"


내가 질문하자 순간 그녀의 얼굴에 당황이라는 글씨가 써진 것처럼 보였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고, 순식간에 원래의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그건... 네가 알 필요 없다."


"아..예..뭐.. 그러시겠죠.."

켈시는 아니나 다를까 또 켈시화법으로 대화하기 시작했고 난 더이상 생각하는 걸 그만두고 고개를 저었다. (로도스 데이터파일에 켈시어에 관련된 내용은 없는 걸까.)

"그치만..."

왠일인지 켈시는 말을 끊지 않고 이어가기 시작했고, 난 놀란 표정으로(바이저에 가려 보이지 않겠지만) 켈시를 돌아보았다.


"그 사람은 네가 만들어 달라고 요구만 한다면 얼마든지 만들 의향이 있다고 한다."

(켈시가 고개를 돌려버렸기 때문에 표정은 보질 못했지만.) 켈시의 백합 같은 피부의 볼에 복숭아 꽃이 열린 것 연분홍빛을 띄웠다는 걸 나는 보았다. 난 요리사를 칭찬했는데 왜 본인이 볼을 붉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 맛있는 음식을 계속 만들어 준다고 하니 일할 맛이 나는 기분이다.

"그럼 그 요리사한테 전해줘, 정말 맛있었다고. 또 먹고 싶다고 말이야 알겠지?"

".....읏"


켈시는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갑작스럽게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왜 저러지...?"

박사는 뛰쳐나간 켈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켈시가 책상에 덩그러니 남겨진 토스트가 담겨 있던 통만이 그녀가 아까까지 여기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