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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해가 바뀌고 좀 지난 어느 한겨울날.

온 테라를 할퀴던 한파가 주춤해진 틈을 타 이른 아침부터 컬럼비아의 남쪽, 시에스타가 잘 보이는 고원에 와 있다.


날씨는 해도 뜬 데다 공기가 차가운 탓인지 맑게까지 느껴진다. 


"....날씨 끝내주네."


우리가 자리잡은 곳은 담갈색으로 마른 침엽수림을 테이블로 해서 곳곳에 녹지 않은 눈을 플레이팅한 노란색 잔디가 접시삼아 얹어져 있다. 그리고 그 메마른 접시 위에는 보기만 해도 시릴 것 같이 푸른 호수가 담겨져 있는, 어느 캠프장의 한구석이다.


이 추운 날씨에 무슨 캠프인가 싶었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엔 이미 굴뚝으로 연기를 피워올리는 텐트 두 동이 세워져 있었다. 더구나 안젤리나 말로는 하루 자고 오는 게 아니라서 준비할 것도 많지 않다고.


"이정도쯤 되면 하루 충분히 태우겠지."


20분 정도 헤맨 끝에 안젤리나가 내준 가방에 다양한 굵기의 마른 나뭇가지 다발과, 주먹만한 솔방울 몇 개가 들어찼다. 솔방울은 겨울잠을 잊은 다람쥐가 빼먹고 있는 도중이었는지 알맹이가 조금 들어있지만. 서둘러 돌아가서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에 가릴 처지가 되지 않았다.


나무 사이를 지나는 바람 소리, 공기 못지 않게 청명하게 들리는 새 소리를 뒤로하고 숲 밖으로 나와 안젤리나가 일하는 쪽으로 간다.

텐트는 맡겨달라면서, 힘 쓰는 일도 중력 아츠로 어떻게든 할 수 있고 설명서도 읽어봤으니 자신있어 했었는데.


"좀 어때, 안젤리나?"


하지만 예상대로면 예상대로일까, 어쩌면 예상 밖일까. 텐트천은 펼쳐놓고, 가방에 넣어놨던 폴대를 늘어놓고는, 머리를 당겨 묶은 채로 설명서를 다시 읽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아?"


"아, 박사. 왔구나. 고마워. 엄청 많이 찾아왔네. 한 30분 됐나?"


"왔다갔다까지 하면 30분 정도려나. 잘 안 돼?"


"그러게. 설명서 읽어봐서 괜찮겠다 싶었는데. 폴대만 먼저 세웠는데 잘못했더라고. 한 번 더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폴대를 쭉 늘어놓고 있었구만.


"같이 할까?"


어차피 도와줄 생각이었고. 


"괜찮아. 박사는 할 거 다 했으니까 쉬고 있어. 금방 끝날 거야."


안젤리나 혼자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낑낑거리는데 구경하고 있는 건....뭔가 몸은 편하지만 불편할 것 같다. 

한 30분 정도 장작 주워오는 동안 진도도 못 나가고 있었으니. 남자의 프라이드 같은 것도 있고 해서, 내가 해야될 건 끝냈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어차피 둘이 써야 되는 건데. 뭐부터 하면 돼?"


손사래치는 걸 기어코 달라붙어서 시작하니, 두어번 만류하고는 결국 안젤리나 쪽이 포기했다.

안젤리나가 설명서를 읽고, 그에 따라서 부속을 찾아서 끼우고, 당겨야 하는 천 부분을 당기고 하니 바닥에 펼쳐진 채로 나름대로 모양이 갖추어진다.


"거기서 잡고 하나 둘 하면 당겨줘, 박사." 


"이거 맞는 거지?" 


"이번엔 맞다니까. 하나, 둘!" 


안젤리나의 말대로 잡아당기자, 축 늘어져 있던 천이 가운데의 심지를 중심으로 팽팽하게 부푼다. 이어 안젤리나 쪽에서 무언가 둔탁한 소리가 몇 번 들리고, 곧바로 안젤리나에게서 망치를 넘겨받아 못을 얼어붙은 땅바닥에 박았다. 


한 시간 반, 안젤리나가 헤맨 시간까지 하면 두 시간 가까이 온갖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결국 텐트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식사 준비할 때 필요한 작업대에 앉아서 쉴 의자 두 개와 테이블, 그리고 용도 모를 받침대를 조립하는 것까지 끝내니, 만족스러운 캠프 자리가 만들어졌다. 외부 작전 나갈 때 펼쳐놓는 숙영지와는 비슷하면서 또 다른 느낌이다.


"고생 많았어, 박사. 나도 처음 해보는 거라 많이 헤맸는데. 도와줘서 고마워." 


"뭐, 잠깐이라지만 둘이 쓸 거잖아. 같이 하는 게 맞지." 


간만에 뭔가 해냈다는 만족감과 동시에 이걸 하루도 못 쓰고 다시 걷어야 한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느껴진다. 


반면 안젤리나는 그 시행착오도, 이렇게 만들어진 텐트도, 다시 걷는 과정까지도 마음이 들뜨는지 연신 빙긋빙긋 웃고 있다. 얘가 만족스럽다면 나도 굳이 초칠 필요는 없겠지. 


"코코아 준비할 테니 모닥불 좀 피워놔 줘, 박사." 


"모닥불 피우고 그 위에 주전자 올리면 되는 거 아니야?" 


딱히 주전자를 매달아놓을 건 없어 보이지만 안젤리나가 중력으로 어떻게 띄워놓으면 될 것도 같은데. 


"장작불에 주전자 쓰면 아랫쪽이 까매진다고 전에 안나한테 들었거든. 모닥불은 이 위에 피우면 돼." 


모닥불....아, 그렇겠구나.

이 잔디 위에 그대로 불을 피웠다간 난리가 날 테니.


"아...그럼 큰일이지." 


"엄마한테 등짝 맞는다구." 


안젤리나가 알려준 대로 솔방울에 불을 붙이는 걸로 시작해 나뭇가지를 비스듬히 둘러세우자 얼마 안 가 그럴듯한 모닥불이 완성됐다.

왜 솔방울이 필요한가 했더니 그냥 나뭇가지에 불 붙이는 것보다 잘 붙는다.


생각해보면 작전에 나갈 때 불이 필요하면 매번 불 아츠를 쓸 수 있는 오퍼레이터들에게 맡겨야 했는데, 알아두면 의지할 필요까진 없겠지.


"여기, 박사."


가는 나뭇가지는 다 둘러세웠고, 굵은 나뭇가지를 불에 넣고 있자니 안젤리나가 뒤에서 트레이를 내밀었다.

코코아만 하는가 했더니 고소한 냄새가 나는 버섯 수프와 빵도 있다. 빵이 좀 차갑다 치더라도 모닥불까지 있으니, 공복인 채로 추운 날씨에 움직인 몸이 속부터 반기는 것 같다.


아침이라기엔 좀 늦고 점심이라기엔 좀 빠르지만 아무것도 안 먹고서 하루를 시작할 수는 없으니, 의자를 끌어다 앉고 식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어째 캠프를 할 생각을 다 했어? 거기다가 이 장비들은 다 어디서 났고."


텐트도 그렇고 모닥불을 얹어놓은 받침대라던가, 안젤리나가 작업하는 데 썼던 테이블과 지금 앉아있는 의자도 있고. 물 끓이는 데에 쓴 버너와 취사도구까지. 들고 온 것도 들고 온 거지만 이거 다 돈으로 하면 얼마야.


"모닥불 받침대랑 취사도구는 박사가 준 돈으로 샀고, 텐트 의자 테이블 작업대는 중고로 샀어. 편지 배달해 주는 손님 중에 캠프 좋아하는 분이 있는데, 새로 장비를 싹 바꿨다고 하더라고. 팔 생각이라고 하길래 나중에 캠프라던가 하면 좋겠다 싶어서 사버렸어. 원래 가격의 반값도 안 줬고."


캠프하는 데에 필요한 게 있으면 사는 데 보태라고 돈을 좀 줬었는데 여기에 썼구나.


"나는 먹을 것 정도나 생각했는데."


"먹을 것도 다 준비해 놨지. 많아야 한두 끼 먹을 거니까 짐도 그렇게 많진 않아."


"이번에 캠프하려고 일부러 산 건 아니지?"


"혹시 그렇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중고로 산 게 있는 거고. 나도 캠프는 하고 싶지만 장비 사는 건 처음이라서 살까 어쩔까 고민을 많이 했거든. 아무리 돈을 벌고 있다고 해도 한 번밖에 할지 어쩔지 모르는데 돈을 그렇게 쓰는 건 낭비니까."


나름 빈틈을 메운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하루 나오니 소풍 나온 느낌도 들고. 소풍....기억은 별로 없는데. 도시가 아닌 데에 나가면 항상 작전이었으니.


"생각보다 이런 거 좋아했던가? 어쨌든 장비 같은 거 만지고 하는 거 다 손이 가는 거니까. 어릴 때야 부모님이 해 주니 그렇다 쳐도 조금만 나이들면 귀찮아질 것 같은데."


"뭐든 해보고 싶으니까. 얕게 넓게. 그래서 하다 보면 금방 싫증나는 것도 있어. 그러면서 제대로 하고 싶은 걸 찾는 거고."


"아직 어리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이것저것 많이 해 보는 게 좋다더라."


다만 이렇게 돈이 들어가는 건 조금 더 고민해보고 정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리 아르바이트랑 오퍼레이터 일로 돈을 벌고 있다지만 그래도 계획적으로 돈 쓰는 연습도 해야 하니.


"그래서 있잖아, 박사. 뭐 좀 해 보고 싶은 게 있는데."


코코아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안젤리나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발갛게, 조용히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살짝 말라붙은 코랄색 심지. 그 위에 하얗게 내려앉은 눈꽃.


내심 놀라면서 입에 넣고 있던 음식을 목 뒤로 넘기고 무엇인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역시 안 되나 봐."


웬일로 체스를 가르쳐달라고 하는가 싶었다. 인사치레로 하는 말인가 했는데 일부러 준비까지 해 왔고, 기물 움직이는 법과 룰도 대충은 파악해 왔다고 한다.

준비까지 해서 왔는데 모른 척 할 수도 없어서 붙잡고 시작한 것이 한 시간 반. 잘못 알고 있던 건 바로잡아주고, 제대로 알고 있는 건 또 적당히 칭찬해 줬더니 배시시 웃으며 좋아하는 게 심장에 또 안 좋다.


세 번째 대국까지 가니 안젤리나가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내가 곧잘 쓰는 전술과, 핵심을 파훼하는 방법까진 아니더라도 야금야금 갉아먹는 방법을 알려줘가면서 했는데도 한 번도 따내질 못하고 있다.


"아무래도 쉬운 게임은 아니지."


"공부할 때도 그런 거 있었거든. 선생님이나 친구들한테 물어봐서 대답을 들어도 모르겠고, 벽 같은 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려나. 체스는 수십년을 붙잡고 해도 박사는 못 이길 것 같아. 실전으로 단련된 거려나."


"체스하고 실전 지휘하고 또 다르기야 하지만."


물론 안젤리나도 나름 승부욕이 있어서인지, 시작한 거 그래도 포기할 때까지는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건지 물러 달라던지, 여기선 어떻게 해야 하냐던지 묻지는 않았지만. 나도 체스가 취미인 사람이 늘어나는 거는 즐거우니 잘 가르쳐줄 수야 있지만 아무래도 진입장벽이 너무 높다. 안젤리나한테 내 취미를 강요하기도 좀 그렇고.


"....아, 망했다."


몇 수를 주고받은 끝에 결국 안젤리나가 또 외통에 걸리면서 세 번째 대국도 끝났다.


"조금 더 할래?"


"잠깐 쉴래."


"그래. 세 번이나 달아서 했으면 지칠 법도 하지."


하물며 잘 되지도 않는데 세 번이나 하면 더더욱. 모르긴 몰라도 왜 이걸 하고 있나 하는 생각도 했을 법하다.


"몇 시지? 벌써 열한 시 반인가. 아침이 늦어서 아직 배는 안 고프지?"


"그렇지."


점심은 뭐였던가 하고 생각하던 그때, 호수 주변으로 둘러쳐진 울타리 주변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여자아이 둘이 눈에 들어왔다. 열 살은 아직 안 됐으려나. 귀와 꼬리를 보니 필라인족인 것 같다. 30분 전이었나 떠드는 소리가 나길래 애들 참 잘 노네 싶었는데. 잘 보니 울타리에 붙어서 호수 쪽을 보고 있다.


"....박사, 왜 그래?"


"아, 아니. 저 애들."


기색을 보니 뭔가 물에 빠뜨리기라도 한 것 같다. 당황하면서 어쩔 줄 몰라하고.

안젤리나도 이상한 걸 느꼈는지 표정이 굳어서는 가까이 다가간다. 나도 놀라서 따라가니,


"여기까지 와도 너무 멀잖아. 떠내려올 것 같지도 않아."


"진짜 어떻게 하지? 엄마가 프리스비 하나 더 잃어버리면 더 이상 안 사준댔는데."


쌍둥이인가? 닮았다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똑같이 생겼다.

얼굴과 몸집의 크기는 물론이고 머리도 똑같이 묶고, 옷도 똑같이 입었다. 그나마 차이는 신발의 색인가.


"서니가 너무 세게 던져서 그래."


"진짜 미안해."


"계속 못 받게 던지고."


더 놔뒀다간 싸울 것 같다 싶었던 그때 안젤리나가 끼어들었다.


"프리스비가 왜?"


안젤리나가 상황파악을 하려는지 호수 쪽을 유심히 보았다.


"언니....여우? 여우 언니?"


"누구야?"


안젤리나 뒤에 서서 호수 방향을 보니 살얼음이 낀 수면 위에 떠 있는 노란색 무언가가 보인다.

그나마 눈에 잘 보이니 다행이려나. 그보다 어디서 던졌길래 저기까지 날아간 거래. 지금 슬슬 멀어지고는 있지만 한 20미터 떨어져 있는데.


"저게 물에 빠진 거야?"


"응. 배 같은 것도 없고, 엄마가 프리스비 또 잃어버리면 안 사준댔어서 엄마한테 말도 못 했고....어?"


파란색 신발을 신은 여자아이가 대답하자 안젤리나가 훌쩍 날아올랐다. 

꿈이라거나, 상상만 했던 일이 눈앞에서 일어났으니 여자애 둘이 입을 헤벌리고, 하얀 귀는 쫑긋 세우고, 눈만 끔벅거리고 있던 사이.


중력을 거스르며 수면 위 몇십 센티미터 위에 멈춘 안젤리나가 몸을 옆으로 돌려 프리스비를 건져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묻은 물을 털어내고, 다시 울타리 너머로 돌아와 사뿐히 지면을 밟는 데까지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여기. 이제 잃어버리면 안 돼?"


"어, 언니 짱이다! 언니 날 수 있어? 어떻게 하는 거야? 루나도 가르쳐 줘!"


"야, 루나. 그게 아니잖아. 언니, 고마워."


"아, 그렇지. 여우 언니, 고마워. 프리스비 찾아줘서."


뭔가 되게 있을 법한 자매라서 웃음이 나온다. 기뻐하면서 달라붙는 필라인 여자아이 둘을 보며 당황하는 안젤리나의 모습도 왠지 귀엽고.

좀 도와 줘, 하면서 나를 보기야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서. 그냥 웃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언니, 같이 프리스비 던지고 놀자!"


"어? 그래도 돼?"


"프리스비 찾아줬잖아! 여기 오빠도 같이!"


갑자기 나도 지목되어서 당황스러운 차에 안젤리나가 언제 다가왔는지 슬며시 내 손목을 잡아끌고 있다.

프리스비 던져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애들이 같이 놀자는데, 안 놀아줄 거야?"


"...."


아까 체스를 가르쳐달라고 할 때와 비슷한 은근한 미소에 속으로 한숨을 쉬고, 발걸음을 옮겨 거리를 벌리고 섰다.


여자애 둘이 호수를 등지고, 나하고 안젤리나가 호수 방향을 보고.

누구에게 던질지는 완전 무작위인 프리스비 던지기가 예기치 못하게 시작됐다.


던지는 건 몇 번 하다 보니 감이 잡히는데, 받는 게 잘 안 된다. 안젤리나도 그렇고 얘네들도 기운이 얼마나 넘치는지 엄청나게 잘 던진다.


"....아니, 그건 반칙이지, 야."


한참 던지고 받고 하다 보니 안젤리나도 흥이 올랐는지 아예 아츠를 써서 날아서는 공중에서 받자마자 던지기까지 한다.

애들은 안젤리나가 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한지 더 신나서 프리스비를 받고 던지고 있다.


"잠깐만, 안젤리나. 나 슬슬 힘든데."


"박사, 체력 너무 없는 거 아니야?"


"의자 갖고와서 잠깐 앉아있을 거니까 잠깐만 네가 놀아주라. 15분만."


아무리 신나서 뛰어다니는 것도 체력이 따라야 이야기다. 한 20분은 뛰어논 것 같은데.

잠깐 볼 통통하게 부풀려서는 이쪽을 보다가, 다시 필라인족 아이들에게 프리스비를 던지는 모습을 보고는 안도하며 의자를 가지고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그렇게 한 5분 정도 또 프리스비를 던지고 놀았을까, 갑자기 아이들이 안젤리나 가까이에 모여 선다.


"왜 그래?"


"언니. 루나도 날아보고 싶어."


"서, 서니도!"


"....어?"


프리스비만 한참 던지고 놀다 보니 지겨워진 걸까. 하긴 우리하고 놀기 전에도 프리스비를 던지고 놀았을 테니.

생각해 보니 안젤리나의 중력 아츠는 사람에게도 들어가지. 스즈란이랑 샤마르 같은 어린 오퍼레이터들도 공중에 띄워서 놀아줬던 적도 있고.


"자, 잠깐만. 박사. 이거 로도스 아일랜드 밖인데. 아츠 써도 되는 거야?"


아무래도 로도스 아일랜드 안에서야 아츠를 쓰는 게 별일 아니니 넘어가겠지만 이렇게 밖에서는.

하물며 안젤리나는 감염자라 그런지 안젤리나가 일부러 거리를 벌려 물러서기까지 하고 있다. 만약 아이들 부모님이 감염자를 싫어한다거나 하면 지금 이렇게 놀고 있는 것도 조심스럽다.


"뭐, 여기까지 놀아준 거. 좀 더 놀아줘도 달라질 건 없겠지. 네가 마음 가는 대로 해."


혹시 아이들의 부모님이 안젤리나에게 안 좋은 소리를 한다면 그때 내가 나서면 되겠지. 로도스 아일랜드에 대해 이야기도 할 겸.


"그러면....둘이 순서를 정해볼래? 언니동생 같은 거 있어?"


"음....엄마 아빠가 우리는 같은 날에 태어났대. 부를 때도 서니가 먼저일 때도 있고 루나....내가 먼저일 때도 있고."


"우리 둘 같이 해 주면 안 돼?"


"미안, 서니. 언니가 두 명은 못 해서."


이상하다? 전장에서 중력 아츠 뿌려대는 것 보면 아이 두 명은 거뜬할 텐데.

아, 혹시 그건가. 혹시 잘못해서 떨어뜨린다거나 할까봐?


"박사, 미안한데 내가 중력 아츠 만지는 동안 뒤에서 어깨 좀 잡아 줘." 


"응? 뭐 그 정도 못할 건 없지만."


"이 정도 애들한테 섬세하게 조작하는 건 처음이라서 몸이 제어가 안 될 수도 있어서 그래."


그 이상 별말하지 않고 안젤리나의 양 어깨를 붙잡았고, 안젤리나가 오른손을 앞으로 들고선 아츠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 루나하고 서니는 순서를 정했는지 루나가 앞으로 먼저 나왔다.


"몸에 힘을 빼고, 떠오르는 느낌에 그대로 몸을 맡겨줘. 너무 많이 움직이면 언니가 힘드니까."


조금 시간이 지나 온몸에 털이 주뼛 서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에 이어, 파란색 신발을 신은 필라인족 여자아이가 공중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올라간다!" 


"진짜로 날고 있어!"


떠오른 쪽도, 기다리는 쪽도 들떠서 떠들기 시작한다. 걱정한 것과는 다르게 안젤리나가 안정적으로 아츠 제어를 하고 있다. 어깨가 잠깐잠깐 떨리는 게 느껴지지만 완전히 나를 믿고 맡긴 건지 금방 진정된다.


"언니! 더 높이는 안 돼?"


이미 발이 내 키 정도로까지 떠 있는 상태다. 이 이상 올라가면 떨어졌을 때 크게 다칠 터다. 대답하지 못하는 안젤리나 대신 내가 고개를 저었다.

말은 못 하지만,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고 안젤리나도 기뻐하고 있는 걸 알 것 같다. 점점 아츠를 조작하는 손에 여유가 생기고 있다.


3분 정도 루나를 공중에 띄워 놀아준 다음, 잠깐 숨을 고르고 다시 아츠를 돌려 이번에는 서니를 공중에 띄운다.

루나하고는 다르게 조금 무서워하는 것 같지만 안젤리나가 조금 낮게 띄워주자 조금 자유롭게 몸을 돌려 바닥에 있는 루나의 손을 잡거나 하며 똑같이 즐거워한다.


루나하고 서니를 번갈아가며 3분 정도씩 공중에 띄워주다 보니 정말 여유가 생겼는지 이번에는 두 명을 다, 조금은 낮게 띄워서 놀아주던 그때.


"세상에! 서니! 루나! 이게 어떻게 된...."


깜짝 놀란 낯선 목소리에 나도 안젤리나도 놀랐다. 그쪽으로 돌아보니 삼십 대 정도 되어 보이는 필라인족 부부가 아이들 쪽으로 달려오고 있다.

쌍둥이보다는 조금 진한 줄무늬라 호랑이가 연상되는 것도 같다.


"엄마! 아빠! 이거 봐! 우리 날고 있어!"


아차, 싶어 안젤리나의 어깨를 다시금 붙잡았지만, 다행인지 안젤리나는 놀라면서도 조심스럽게 중력 아츠로 루나와 서니를 바닥으로 내려주고 숨을 몰아쉬었다.


"엄마! 아빠! 저 언니가 프리스비 찾아주고 놀아주기까지 했어!" 


이런. 너무 즐겁게 보고 있었다. 안젤리나도 놀란 눈으로, 불안한 듯 나와 가족을 번갈아 보고 있다. 


ㅡ어떻게 해, 박사? 


"그래? 언니한테 고맙다고 똑바로 인사 했어?" 


"그럼! 우리가 못 하는 걸 도와준 사람한테는 인사해야 된다고 했잖아!" 


"잘 했네. 이제 점심 먹으러 가야지. 아이들이랑 놀아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엄청 즐거워하네요." 


하지만 오가는 대화는, 너무도 평범했고 그래서 너무나 감사한 내용이었다. 아츠를 쓰고 있어서, 감염자라서 꺼려진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몇 살 더 나이가 많은 언니가 프리스비를 찾아준 것에 대해서, 아이들과 놀아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다. 


"저희도 재밌었어요. 루나, 서니. 나중에 또 보자." 


"여우 언니도 나중에 봐!" 


몇 번이고 돌아보면서 손을 흔들기에 안젤리나도 매번 손을 흔들어주고, 좀체 눈을 떼질 못하고 있다.


"귀여운 애들이었지." 


"그러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게 되더라. 괜찮아? 아츠 많이 썼지." 


"애들이 재밌어했으니 그거면 됐어." 


여전히 안젤리나는 즐겁게 떠드는 가족들에게서 눈을 못 떼고 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안젤리나의 어깨를 손으로 붙잡고 있는 중이었다. 놓아야 되나 고민하던 그때.


"나도 저런 애들 키울 수 있을까...." 


"아직 먼 얘기....아닐까 싶은데." 


열여덟 살 남짓이니 그런 생각도 할 즈음이려나. 물론 안젤리나는 감염자다 보니, 임신이나 출산이 조심스러울 대상이긴 하다. 그래도 바람 정도는 얼마든지 가져도 괜찮겠지. 


"옛날엔 결혼 빨리 하고 싶다고도 생각했었거든. 아기 낳는 게 무섭다고 생각하면서도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고." 


"그래도 안젤리나도 좋은 엄마는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것저것 손재주도 있고, 잘 놀아주고. 애들이랑 뭐 같이 하는 거 좋아할 것 같아." 


아까 필라인족 쌍둥이 자매랑 놀아줄 때도, 아츠를 쓰면서 집중해야 하는데도 즐거워하는 기색이었고. 


"그....그래? 박사가 도와주면 좀 더 빨리 될 수 있....으려....나...." 


아무렇지 않게 떠들던 안젤리나의 얼굴이, 등 뒤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화악 빨개졌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깨달은 모양인지, 붉은 여우 소녀는 고개를 홱 돌려 앞을 보고, 그마저도 보일까봐 고개를 숙여버렸다.


"뭐....그것도 아직 먼 이야기니까." 


사귀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이런 이야기라니, 요즘 애들은 좀 빠르려나.

좀체 눈을 마주치질 못하면서도 자기 어깨를 잡은 내 손을 뿌리치지는 않는 걸 보니 복잡한 모양이다.


막상 나도 안젤리나하고 그런....걸 상상했더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다.

나하고 안젤리나 사이에, 나하고 안젤리나를 닮은 어린 존재라....남자아이는 그려지지 않지만 여자아이는 안젤리나를 쏙 빼닮았겠지.


"....우리도 점심 먹을까?"


"맞네. 벌써 점심시간이지. 고기 맛있는 걸로 사 놨어."


그렇게 조금 늦은 점심 준비를, 조금 어색한 분위기에서 시작했다. 지금 이야기는 아무래도 좀 충격력이 컸다보니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그것도 잠시, 야채를 왜 그렇게 자르냐며 툭탁대다가, 조금 전 그 가족이 고맙다면서 스튜를 가져다주고, 우리는 우리대로 구운 고기를 답례로 돌려주면서 나름대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렇게 조금 추운 날 했던 당일치기 캠프는 묘한 분위기와 함께 저녁까지 이어지고, 그대로 하루가 끝이 났다.

다만 오늘 일이, 나중에 어떻게 계속될 거라고는 이때 알지 못했다.


안젤리나는 돌아와서 자기 방에 갈 때까지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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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오류 지적 환영
어느정도 오리지널 설정도 있음. 피드백 환영    


안젤리나는 왠지 저지르고 후회하거나 저지르고 부끄러워할 것 같은 느낌이라

이런 느낌으로 쭉 갈거같음



야로나와 함께하는 집안생활....

덕분에 출장은 내일모레 가는걸로 되었다


한주 집에 있는 동안 글도 쓰고 겜도 하고

남부럽지 않게 낭비한 것 같음


지금은 괜찮아졌다

도쿄도 왈 토요일 00시부터 외출할 수 있다더라





오늘도 와줘서 고맙고, 읽어줘서 고맙고, 기다려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