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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슬슬 날이 풀리기 시작하지만 아직은 책상 아래 히터가 아쉬운 시기다. 다음 안젤리나하고의 외출은 극동 쪽으로 간다고 알고 있을 뿐, 언제일지는 아직 모르고 있다.
 언제쯤 있을 휴일을 맞기 위해 다른 때와 다를 바 없는, 늦게까지 일하는 날이지만 오늘 인사부에서 들어온 서류가 굉장히 비범하다. 

"이게 뭐지...." 

- 리사의 아츠는 주변 사람들을 보호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친의 혈통에서 내려온 이 힘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이끌어낸다면 작전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리사는 언니 오빠들을 무척이나 돕고 싶어합니다. 단순히 오퍼레이터라는 이름으로 이 의지를 묶어놓고 있는 것은 너무도 가혹하다고 생각합니다. 

- 리사는 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 대신으로서의 책임감을.... 

다들 스즈란을 너무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서류라는 것들이 이 모양이다. 인사부가 오퍼레이터들과 직원들의 추천서를 모아준 거라고 했는데, 이 안에 묘하게 범죄 냄새가 나는 것도 있지만 결국 결론은 '스즈란을 정예 오퍼레이터로 승진시켜서 스즈란의 능력을 발휘하게 해 주자'라는 거다. 

지금의 스즈란은 전방 오퍼레이터들의 호위 하에 아츠로 만들어낸 투척물을 적에게 던져, 일시적으로 적의 움직임을 묶는 정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위력이 그렇게까지 강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스즈란이 적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것은 아니다. 본인도 그런 걸 원하지 않고, 오퍼레이터들도 스즈란의 아츠를 살상용으로 변형하는 걸 바라지 않아서 그렇게 운용 중인 상황이다. 

사실 정예 오퍼레이터가 되는 데에 결격사유가 있지는 않다. 나이에 비해 의젓하고, 아츠 제어도 성인 오퍼레이터들에 지지 않을 정도로 능숙하다. 간혹 어린아이같은 모습은 보이지만 자기 책임감도 강한 편이고. 굳이 말하자면 아이가 너무 선하고, 어리기 때문에 아이가 전장에서 할 수 있는 걸 늘리는 것이 조심스럽다는 것이려나.  

정예라는 이름은 아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게 아니기도 하고. 아무리 서포터 오퍼레이터로서라지만 할 수 있는 것과 보수가 늘어나는 만큼 책임도 늘어나는 법. 그래서 어떤 오퍼레이터들은 정예 오퍼레이터가 될 그릇임에도 그 기회를 거절하고 있기도 하다. 

....뭐, 켈시나 의료부 오퍼레이터들하고도 이야기해볼 내용이긴 하다. 아츠를 최대한 비살상의 형태로 사용한다면 스즈란의 성향에도, 추천해주는 오퍼레이터들의 요청에도 부합하겠지. 사람을 보호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했으니 메딕 오퍼레이터들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거나. 

"안녕, 박사. 아직 일하고 있는 거야?" 

서류더미에 고개를 처박고 스즈란의 승진에 대해 한참을 고민하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에 속으로 안도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서 와, 안젤리나. 오늘은 일찍 왔네." 

저녁 먹고 얼마 안 됐으니 일곱 시 반 정도인가. 평소 안젤리나가 전달자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오는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빠르다. 

"오늘은 아츠 훈련밖에 없었거든. 리사 대단하더라. 그 어린 나이에 쉬지도 않고 연습하고. 방금 교관이 너무 늦게 저녁 먹으면 안 된다고 뭐라고 하고서야 들어갔거든. 나는 그 나이 때 저렇게까진 뭘 못 한 것 같은데." 

얄궂게도 안젤리나도 스즈란 이야기다. 서포터 오퍼레이터로서 먼저 정예 오퍼레이터가 된 입장에서도 스즈란은 귀여운 동생이면서, 대견스러운 후배인 모양이다. 다른 오퍼레이터들이 말하는 것처럼 너무 귀여워하는 건 아니겠지만, 꼬리가 폭신폭신해 보여서 뒤에서 껴안아보고 싶다고 말한 적은 한 번인가 있다. 

"그러면 마침 잘 됐네. 스즈란이 훈련하는 걸 직접 보고 왔으니. 너는 스즈란이 아츠 사용 방법을 확장한다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어....그 애? 일단 지금 하고 있는 건 자기 아츠를 좀 더 많은 사람에게 뿌리는 걸 연습하는 것 같던데. 나한테 그렇잖아도 물어보더라고. 어떻게 다섯 명에게 중력 아츠를 날릴 수 있냐고.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넓게 중력을 조작할 수 있냐고." 

"더 많은 사람에게라." 

"그거 말고도 아츠로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물어보고 다니는 것 같더라. 메딕 오퍼레이터 언니들이 하는 걸 참고하려는 것도 같고, 오늘 잠깐 훈련장에 왔던 퍼퓨머 언니에게도 물어봤었는걸." 

승진을 준비한다던가 하는 기색은 아닌 것 같지만, 직원들이 스즈란을 대하는 걸로 봐서는 인사부 오퍼레이터 중 누군가가 추천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하는 걸 은연중에 흘렸을 수도 있을 것 같긴 하다. 물론 스즈란도 언제까지고 그저 오퍼레이터로 있을 수는 없다지만. 

"근데 왜? 갑자기. 박사도 그 애가 궁금해졌어?" 

"뭐, 결국 마지막 결재는 내가 하는 거라지만 그래도 추천이 그렇게나 많이 들어오니까. 마침 네가 같은 서포터 오퍼레이터고, 오늘 같이 훈련했다는 것 같아서 물어본 거야." 

"오오, 리사 승진하는구나." 

"정해진 거 아니야." 

다시 서류에 얼굴을 파묻으며 대답했다. 안젤리나가 옆으로 오는 기척이 들리더니 빈 컵을 가져간다. 

"아, 혹시 말인데. 스즈란한테 승진 이야기 들어갔어?" 

"글쎄? 오늘 교관도 별말 안 했고, 퍼퓨머 언니도 이렇다할 이야기가 없었으니 오늘은 얘기 안 한 것 같은데." 

컵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약간 새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기도 모르는 걸 묻지 말라는 나름의 항의인 걸까. 

"혹시 모르니까 너도 승진 추천서가 나한테 들어왔다거나 하는 얘기는 누구한테 하진 말아줘." 

아무리 어린아이라지만 승진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기뻐할 건데 결재 과정에서 기각되면 엄청나게 실망할 거니까.  

그리고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가 들어간다고 하면, 스즈란이 그 대상인 이상 삽시간에 소문이 퍼질 거다. 그런 와중에 스즈란의 승진이 기각된다면 물론 안 그럴 사람도 있겠지만 반발이 없진 않을 거고, 그것 나름대로 피곤한 일이 될 테니. 

"....근데 인사부나 의료부나 리사를 그렇게나 예뻐하는데 아무도 그런 말을 안 했을까? 다 하면 못 해도 오십 명이 조금 안 될 건데. 거기다 의료부는 또 감염자 오퍼레이터나 직원들하고 이야기를 할 거고. 내가 입 다문다고 어떻게 될 건 아닌 것 같아, 박사." 

잠깐 텀을 두고, 새로 차를 타 온 안젤리나가 잔을 내 옆에 내려놓으면서 이야기했다. 

....역시 그렇게 되냐고.
 애를 너무 귀여워해도 문제다. 

"큰일이네. 켈시하고 이야기를 해봐야 되려나. 어쨌든 알려줘서 고마워, 안젤리나. 차도 일부러 새로 내줘서 고맙고." 

아마 커피가 아닌 건, 안젤리나가 '커피는 하루에 한 잔만!'이라고 하는 데다 오늘 내가 이미 커피를 몇 잔이고 마셨다는 걸 알아서겠지. 

"하나하나 고맙다고 하지 마. 매번 박사가 코코아 타 주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걸." 

"그러고 보니 너는? 차 안 마셔?" 

항상 같이 차나 코코아를 마셨던 것 같은데 오늘은 안젤리나가 내 잔만 새로 채워줬다. 

"아, 나는 오늘 잠깐 와 본 거라서. 내일 배달할 거 준비도 해야 되고." 

다만 안젤리나의 평범한 대답에서 왠지 묘한 기류가 느껴진다. 생각에 깊이 잠겨 있는 와중에 적당히 이유를 만들어냈다고 해야 하나.  

고민거리라면 항상 그렇듯 들어주면 되겠지만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이상 나도 쉽사리 물어보면 실례인 문제일 수도 있으니. 

"너도 고생 많네." 

그래서 일단은 평범하게 안젤리나의 수고를 치하할 뿐이었다. 

"에이, 내가 하는 건 뭐....박사가 이것저것 일이 많으니 고생하지. 아무튼 먼저 들어가 볼게. 일 도와줄 거 있으면 단말기로 불러 줘." 

"응. 조심해서 들어가, 안젤리나." 

"조심이라고 해봐야 이 배 위층이잖아." 

"어? 남자가 여자친구 배웅할때 이렇게 말하는 거 아니었나." 

"틀린 건 아닌데 뭔가 이상해." 

안젤리나가 킥킥 웃고는 손을 흔들며 사무실을 나섰다. 잠깐 안젤리나가 왔다 갔다고 일하면서 기운 빠졌던 게 조금이나마 회복된 것 같다. 그래서일까. 왠지 모르게 온몸이 가볍게, 뭉툭한 바늘로 쿡쿡 찔리는 것 같은 느낌이 더 선명하게 들었다. 

그러면....스즈란 승진 건은 어떻게 해야 될까.

 

1주일 정도 스즈란의 승진에 대해 인사부와 수뇌부의 의견이 오가고, 다음 조건 하에 스즈란의 승진이 결정되었다. 

아직 어린아이니만큼 작전의 소대장으로는 임명하지 말 것.
 같은 이유로, 아츠는 지금까지와 동일하게 지원용으로만 사용할 것.
 스즈란의 부모에게 연락해서 이 상황과 함께, 권한과 책임이 늘어나기는 하지만 작전상 스즈란이 하는 일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시킬 것. 

덕분에 스즈란은 오가는 곳마다 언니 오빠들의 축하세례를 받았지만, 그렇다고 우쭐하거나 풀어지는 일 없이 평소와 다름없이 일과를 수행했다. 비서로 오는 오퍼레이터들도 연신 스즈란 이야기라서 의도치 않게 스즈란의 근황도 알게 되었다. 

스즈란이 정예 오퍼레이터로서 얻은 권한은,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보호 아츠를 자신 나름대로 극대화하는 것. 그 때문에 훈련장에 있는 시간이 늘어났지만 아츠 사용이 적성에도 맞았는지 금방 숙달되었다고 한다.  

하도 오퍼레이터들이 이야기하길래 정말인가 싶어 훈련장에 살짝 가 봤는데, 범위가 아직 안정화되지 않거나, 가끔 치료 아츠가 잘 들어가지 않는 정도라 조금만 더 다듬으면 실전에서도 쓸 수 있을 것 같아 놀랐다. 

스즈란이 바라던 대로, 오리지늄 아츠를 이용해 자기 주변에 있는 오퍼레이터들의 가벼운 부상을 완화시키게 될 거라고 한다. 반대로 스즈란은 방어수단이 없어져 무방비해지겠지만 혼자 있거나 떨어져있지 않을 테니 문제없겠지. 

어린아이라지만 한 명의 오퍼레이터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니 기특하기 그지없다. 생각해 보면 안젤리나도 무중력 아츠를 광범위하게 뿌릴 수 있게 되었을 때 굉장히 좋아했었지. 

아무튼 스즈란의 승진은 그것대로 순조롭게 흘러가고, 다른 일들도 끔찍할 정도로 많이, 순조롭게 들어와서 흘러나간다던가 다시 돌아오거나 한다. 안젤리나도 요즘 배달 일이 많은 시기라면서 사무실에 못 오고 있고. 

그렇게 2월 중순이 되었다. 그날따라 날짜가 바뀌기 직전까지 일이 끊이질 않아서 오늘은 사무실에서 잠깐 눈 붙이고 내일 일을 시작해야 되나 하고 생각했던 그때. 

늦은 시간임에도 노크 없이 문이 열리는 걸로 일의 흐름이 바뀌어버렸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얼그레이색 시선과 코랄색으로 칠한 입술이 그리는 순박한 미소. 안젤리나에게 편지나 소포를 받는 사람은 매번 저런 얼굴을 보는 걸까. 

"박사, 아직 있었구나. 오랜만." 

"어, 어서와, 안젤리나. 계속 바빴나 보네." 

"오늘 딱 바쁜 게 끝났어. 이제 다음 달 초까지는 느긋하지 않을까 싶어. 그리고....이거." 

안젤리나가 이쪽으로 걸어오더니,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손바닥 두 개 정도 크기에 동글납작한....상자? 

"미안해, 박사. 직접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경황이 없어서....그래도 극동에서 가장 인기있는 가게에서 가장 맛있는 걸로 사 왔으니까, 실망....하지 말고 받아주면 좋겠는데." 

"갑자기? 아니지, 고마워. 일부러 생각해서 주고." 

실망할 리가 있나. 어쨌든 나를 위해 바쁜 와중에도 준비해준 건데. 

"갑자기, 라고 물어보는 거 보니까 무슨 날인지도 몰랐고, 내가 처음 주는 건가 보구나." 

안젤리나가 얼굴을 붉히며 빙글빙글 웃는다. 그제야 달력을 봤더니, 날짜가 바뀌었으니 2월 14일. 밸런타인이라는 성인의 이름에서 유래되어서, 지금은 연인이나 아직 연인이 아닌 사이에서, 여성 쪽이 선물과 함께 마음을 전하는 날이 된 날이다. 

"바쁘면 날짜감각이 없어지니 그럴 수 있지. 그래도 뭐가 되든 날짜 정도는 기억해주면 좋겠어. 중요한 날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안젤리나가 오늘까지 바빴던 모양이다. 밸런타인데이라고 직접 선물을 전하는 사람만 있을 수는 없으니, 편지와 함께 선물을, 마음을 전해온 것이다. 연말을 앞두었던 성탄절 때처럼.... 

"미안해, 안젤리나. 조심할게." 

"조심, 까지는 아니지만. 괜찮아. 다음에 안 잊어버리면 되니까....아, 그렇지. 그럼 하나만. 내 이야기 좀 들어주면 좋겠는데." 

갑자기 안젤리나가 분위기를 싹 바꾸었다. 거기서 문득, 얼마 전 안젤리나를 봤을 때 느꼈던 온몸을 뭉툭한 바늘로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때 무언가 내가 깨달았었어야 했던 걸까. 이날부터도 이미 안젤리나는 도움을 청하고 있었던 걸까. 

귀와 꼬리가 축 처진 것이, 뭔가 마음고생을 한 모양이다. 목소리도 방금 전의 분위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힘이 없고.
 일이 좀 남았기야 하지만 잘못한 것도 있고, 사귀기 전에도 그랬으니 안젤리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거라면 거절할 수 없다. 

"....차라도 한 잔 줄까?" 

"응....아니." 

"그럼 주스는 괜찮아?" 

안젤리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몇 개 사 두었던 차인데, 오늘 계속 커피만 들이붓다 보니 잊어버리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주스캔을 꺼내서, 그래도 일부러 와준 거니 잔에 따라서 내오자 안젤리나가 쓰게 웃었다. 이 표정, 사귀기 시작한 이래로 처음 보기야 하지만, 그래도 지금 와서 보는 것은 조금 마음아프다. 

"리사에 대한 이야기야." 

"리사....스즈란?" 

"아니, 나 혼자 하는 고민이려나." 

스즈란 성격에 안젤리나가 심적으로 고생할 언행을 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안젤리나가 스즈란을 괴롭힌다거나 하는 것도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고. 지금 당장 창문을 깨고 리유니온 잔당이 침입해 들어오는 게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될 정도니. 

"리사가 엘리트 오퍼레이터로 뽑혔다고 들었을 때, 솔직히 좀 복잡한 심경이었어." 

스즈란이 너무 어려서?
 그렇다곤 하지만 스즈란의 아츠 제어 능력은 웬만한 성인 오퍼레이터들도 혀를 내두르는 정도다. 무사히 어른이 된다면 더 잘 할 수 있을 거고, 오히려 저런 아이다 보니 비뚤어져서 아츠를 이용한 적극적인 살상을 배우지 않았으면 하고 있다. 

물론 안젤리나도 중력 조작이라는 특별하고, 쓰기에 따라 굉장히 다양하게 응용이 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전장 이곳저곳에 있는 오퍼레이터들에게 의료지원을 빠르게 도와준다거나 적들을 무겁게 하는 등 전장에 나가면 나름대로 활약하고. 이 아이가 아츠로 큰 역할을 해냈던 첫 번째 위기협약을 잊어버릴 리가 없다. 

"그....화내진 말아줘. 아니, 잘못한 거라면 혼내도 괜찮아. 리사가 엘리트 오퍼레이터가 되면서, 아무래도 가장 어린 엘리트 오퍼레이터가 됐잖아? 그래서 조금...." 

후회.
 자기혐오.
 수심. 

안젤리나의 얼굴에 실린 감정은 복잡하고도, 무겁게 안젤리나를 안팎으로 짓누르는 것 같다.
 안젤리나가 한숨을 크게 폭 내쉬었다. 

"솔직히, 처음 엘리트 오퍼레이터가 되었을 때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 로도스에서 처음으로 가장 어린 엘리트 오퍼레이터가 되었으니까. 하물며 참전할 수도 있고, 끝나고 나면 어쨌든 나한테 고맙다거나, 수고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근데 그걸 리사한테 빼앗긴 것만 같아서 내심 리사가 밉다고도 생각했었어." 

"스즈란한테 뭔가 잘못했다면, 스즈란한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면 되는 거 아닐까?" 

잘못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무색투명한 물에 떨어뜨린 검은 잉크 한 방울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순식간에 물 전체를 물들여버린다. 하지만 그걸 인지하고, 몇 배의 노력을 들여 그 물을 원래대로 돌리려 한다면 그 행동만으로도 사람은 상대를 조금은 다시 보게 된다. 

거기다 그런 정도 일로 내가 안젤리나에 대해 한순간에 생각을 뒤집어서 안젤리나를 싫어하게 될 리도 없다. 안젤리나가 그걸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나도 지금의 사이를 계속 이어나갈지 고민하겠지만 지금 상황은 그 정도까진 아닌 것 같다.
 이렇게 상담을 하는 것만으로도 안젤리나는 지금 상황이 어쨌든 잘못됐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니. 

"리사에게 뭔가 해코지를 한다거나 하진 않았어. 뭐든 걸어도 괜찮아. 그냥 나 혼자서, 괜히 리사에게 말 걸고 싶지 않고....그런 거니까. 앞으로도 더 비교될 거고. 거기다가...." 

안젤리나가 고개를 숙여버렸다. 자신의 모습을 목도하기 싫다는 듯, 지금의 표정을 내게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듯. 나도 억지로 눈을 맞추려 하지 않고, 안젤리나가 다음을 이야기하길 기다린다. 

한숨.
 고개를 들고 몇 번이나 열리려다 다시 닫힌 입술.
 눈 깜박이는 소리조차 들리는 듯한 침묵. 

몇 번이나 그게 반복되고서, 안젤리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리사가 엘리트 오퍼레이터가 되고서 1주일인가 지나서 그 애를 만났었어. 피하기만 할 수도 없고, 소식을 못 들은 척 하기도 그랬으니까 승진 축하한다고, 나보다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해줬어. 그랬더니, 아직 노력해야 되고 부족한 점도 많은데, 앞서가서 이정표가 되어준 사람도 있고, 다른 언니 오빠들이 믿어주어서 승진한 거라고, 앞으로도 자기를 잘 이끌어 달라고 말하더라고. 축하해 줘서 고맙다고, 더 열심히 하겠다고도 했고." 

그 아이라면 충분히 그런 이야기를 할 것이다. 너무 교과서같은 이야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알고 지내온 스즈란은 그럴 성격이다. 

사람들을 보호하는 스즈란의 아츠. 하지만 그건 스즈란 혼자 만들어낸 게 아니라 스즈란을 믿어준 많은 오퍼레이터들이 함께 만들어냈으리라. 그 안에 안젤리나도 있던 거였으려나. 

하물며 같은 감염자이고, 스즈란이 엘더즈 혈통이라지만 어쨌든 불포족이고, 동경하는 언니이기도 할 테니 안젤리나에게 적잖이 의지하기도 했겠지. 

"그 애는 승진 자체로 만족한 게 아니라 더 배우고 싶다고, 다른 사람들이 도와줘서 그 자리에 올라간 거라고 이야기했는데, 나는 그냥 나를 위해서만 그랬지 않나 하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내 스스로가 싫어진 것 같았어." 

그래도 자신을 위해 발전한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자신을 챙기고서, 여유가 생기면 주변을 볼 수 있게 될 테니. 물론 다른 사람을 챙기는 데에 전념하는 사람도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자신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으면 그건 오랫동안 이어질 수 없고. 

"어떻게 해 줬으면 하고 이야기를 한 건 아니야. 내가 너무 지금에 만족하고 안주해서 따라잡힌 거겠지. 뭘 해야 되는지도 모르는 건 아니고." 

"안젤리나." 

여자아이치곤 그다지 작지 않은 키인데도 오늘은 그 모습이 더없이 작아 보였다. 내버려두면 잃어버리고 말 것 같은 착각에, 안젤리나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기대어주었으면 하는 생각에 몸을 가까이하고, 그 여린 몸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괜찮아. 언니라고 항상 앞서가려고만 할 필요는 없어. 네가 스즈란에게 아츠 쓰는 방법을 알려준 만큼, 스즈란도 너에게 무언가 알려준 거라고 생각하면 돼. 그게 경각심이든, 스즈란의 아츠를 보고 무언가 네 아츠를 보완할 방법이 되든 상관없고. 사람은 다 할 줄 아는 게 달라. 모든 걸 하나의 기준으로 놓고 비교할 수는 없어." 

"같은 서포터 오퍼레이터고, 같은 불포족이니까....비교될 수밖에 없잖아."


두 팔 안에서 발갛게 피어오르는 온기, 달싹이는 무게감, 칭얼거리는 듯한 목소리. 영거리로 가까이 다가와 있는 존재감에 심장이 조금 빨리 뛰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해서 스즈란이 중력 아츠를 쓸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너는 너만이 할 수 있는 게 있으니까 거기에 자신감을 가지면 되는 거야. 물론 만족하기만 하면 안 되고, 나름대로 그걸 다듬는 게 필요하기야 하겠지. 그리고 가장 어린 정예 오퍼레이터라는 이름은 스즈란에게 내줬을지 모르지만 그건 스즈란도 커가는 만큼, 언제까지고 그렇다는 보장은 없어. 그 이름에 너무 연연할 필요도 없고." 

어쩌면 그 나이대 아이가 가진,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의 연장선상일까. 안젤리나는 감염자가 되고 방황하는 동안 그 인정을 못 받아왔고, 안젤리나가 말하는 '가장 어린 정예 오퍼레이터'라는 이름이 그 인정을 받았다는 증표 같은 거겠지. 

"그러니까 괜찮아.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있으면 돼. 여유롭게 가. 그리고 네가 서두르고 싶을 때 서두르고. 지금 네가 오퍼레이터로서 하는 건, 너 말고는 누구도 할 수 없어." 

"...."
  
 하는 게 비슷한 건, 물론 오퍼레이터가 그렇게나 많으니 겹치는 게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중력 조작을 작전에 있어 조커카드로 만들 수 있는 건 안젤리나 뿐이다. 

안젤리나는 대답하지 않고, 내 팔 아래에서 두 팔을 들어 살포시 자신의 손을 내 허리에 얹었다. 

"....아빠 같아. 지금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어." 

껴안겨서인지 안젤리나의 목소리가 쥐어짜이듯 들리는 것 같다. 그래도 안젤리나를 속에서 짓누르던 무언가는 확실히 가벼워진 모양이다. 

"아직 너만한 딸이 있을 수가 없는데." 

많이 차이난다고 해도 열 살 남짓이다. 

"그렇지. 아빠같기만 했으면 내가 고백하진 않았을 거니까." 

농담까지 할 정도면 정말 나아진 것 같다.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젤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밸런타인데이니까,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박사." 

"누가 오면 어쩌려고." 

"이 시간에 누가 와. 와도 내가 갑자기 울어서 박사가 다독여줬다고 하면 되겠지, 뭐. 아빠 같아서 나도 가만히 있었다 하고." 

입장이 반대인 채로 이야기를 하면 범죄가 될 것 같은 이상한 이야기지만, 이것도 안젤리나하고 만나고 있으니 한 번씩은 감당해야 될 일이겠지. 

그렇게나 마음고생을 하고서 내게 의지해주었다. 내밀어온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런 아이를 밀어낼 정도로 나는 모질지 못하다. 

안젤리나를 위해 준비한 주스와, 안젤리나가 내게 선물한 초콜릿이 주인을 찾아가려면, 조금 시간이 더 걸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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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오류 지적 환영
어느정도 오리지널 설정도 있음. 피드백 환영    



출장 와서 틈나는 대로 쓰다 보니 한 편이 완성되어버렸다.

밸런타인데이를 베이스로 썼지만 뭔가 밸런타인데이는 꼽사리?같은 거고 실상 쓰고싶던 건 안젤리나가 동료 오퍼레이터를 보고 느끼는 경쟁의식 비슷한건데 어떻게 보였을지 모르겠네.


쓰고서 느낀건데 스즈란 이야기가 줄창인거 보니 나도 옮은모양



아 그리고 일단 지칭은 2정예화를 정예 오퍼레이터로 했음. 이 부분에 대해 상세히 아는 챈럼 있으면 이것도 피드백 부탁함







아무튼 오늘도 찾아와줘서 너무고마움

폰으로 올리는거라 PC에서의 가독성이 어떨지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