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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프레소 하나, 아포가토 하나 나왔습니다." 


음료를 받아 안젤리나가 앉아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진정할 시간이 필요할 거라면서 안젤리나가 아까 그 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카페로 데려온 것이다. 


안젤리나는 창 밖을 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까 그 애들을 떠올리는 걸까. 아니면 나에게 맞섰던 일을 떠올리는 걸까. 하지만 기척을 느꼈는지 나를 돌아보면서 가볍게 웃어보였다. 


"고마워, 박사. 잘 먹을게." 


"뭐, 도와줬으니까. 이것만으로는 모자라겠지." 


안젤리나도 아르바이트라던가 오퍼레이터 임금을 받고 있으니 보통은 각자 돈을 내지만 조금 전 일도 있어서, 이번에는 내가 사기로 했다.

최근 들어 입맛이 조금씩 어른스러워지는 것 같아 왠지 모르게 기특하다는 생각도 든다. 


"...." 


"...." 


하지만 한참 동안 나는 커피만 홀짝거리고, 안젤리나는 스푼으로 아이스크림만 굴리고 있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아까 그렇게 서로에게 맞서고 나니, 살갑게 이야기를 나누기가 힘들다. 


그래도 계속 가만히 있을 수는 없고, 잘못했다고 생각한 걸 먼저 들추자니 불편하다. 안젤리나도 영 눈을 마주치지 않고. 


"그....안젤리나." 


"....어? 왜? 어디 안 좋아? 혹시 아까 다쳤다거나...." 


갑자기 말을 건 탓인지 안젤리나가 깜짝 놀라며 나를 보고, 내 몸을 여기저기 살펴본다. 이 와중에도 걱정해주고 있었다니. 


"아까 일은 어쨌든, 구해줘서 고마웠어. 조금만 늦었어도 어떻게 됐을지 모르고....또 아츠 다루는 게 진전이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해." 


"응? 아, 아니야. 이제 와서...."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귀가 쫑긋 솟은 걸 보면 어쨌든 자신의 정진을 칭찬받은 게 기쁜 모양이다. 

쓰는 방법만 올바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다면 작전에서도 큰 도움이 될 거고,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대로 서포터 오퍼레이터로서 계속 있어도 좋고, 캐스터 오퍼레이터가 되어 더 많은 것을 배워도 좋겠지. 


"그래도 내 아츠가 박사를 지키는 데에도 쓸 수 있구나, 하고 마음이 놓였어. 박사가 실망하지 않게 잘 할게. 아까 나도....내가 마음 독하게 안 먹으면 박사가 무슨 짓을 당했을까 생각하니까 참을 수가 없더라고." 


만약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안젤리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도 서슴없이 선을 넘으려 했을까. 어쨌든 둘도 없을 사람을 잃을 뻔했으니. 


"근데 좀 생각해 보니 박사 말이 맞았던 것 같아. 어쨌든 박사를 지켜냈는데, 분풀이로 죽이겠다느니 짓누르겠다느니 했으니. 그러면 같은 감염자라도 자기들과 같이하지 않는다면 해코지하는 리유니온이랑 다를 바가 없잖아. 미안해, 박사. 로도스 아일랜드에 있으면서도 내 생각만 했어." 


밀어붙여 설득한 모양새가 되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리고 나도 다시금 사과할 게 있었지. 


"그리고....나도 미안해. 그 자리에 있으라고 했는데, 감염자가 발작한다는 말에, 같이 와서 봐 달라고 하는 말에 속아서 모르는 사람을 따라갔잖아. 앞으로 조심할게." 


"상황이 닥치면 그런 거 생각하기 힘들고, 그런 부탁이면 이러나저러나 거절하기도 뭐하지. 그리고 박사도 성미가 그런 성미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니 더더욱 거절하거나 의심하기 힘들었을 거라 생각해." 


안젤리나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다만 그 미소 안에 왠지 모르게 한 줄기 그늘이 드리운 것 같다. 


"....그래도 직접 그런 애들을 본 이상, 박사도 이젠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어쩌면 박사는 자료 같은 걸로만 접했을 수도 있고, 사실 보통 사람이 아니기도 하니까. 이런 일은 처음이겠지. 앞으로 데이트라던가 해서 이렇게 나오면 또 볼 수도 있고." 


"그런 애들이라면....감염자 애들?" 


"....이런 분위기에 별로 알려주고 싶은 건 아니지만." 


안젤리나가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굴리며, 떠올리기 싫은 걸 떠올리는 얼굴로 대꾸했다. 


"뭐, 언제 나선다 해도 알아둬야 하는 거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검은색으로 물든 아이스크림을 작게 한 스푼 입에 넣은 안젤리나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좋지 않은 일을 말하기 전에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은 걸까.

그렇게 보니 아포가토라는 음료가 지금 상황에 맞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박사. 감염자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알고 있지?" 


"이래저래 듣는 건 있으니까."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로도스 아일랜드에 감염자들도 많고, 들은 이야기도 많다. 


"그럼 나나, 조금 더 나가서 아미야 같은 애들이면서 감염자면 어떨까?" 


하물며 내전이나 큰 전쟁이 지나가면서 생기는 전쟁고아 중에서도 감염자가 있을 거고. 오히려 어른이라는 울타리가 없는 만큼 더 노출되기 쉽겠지. 


"생각해 보니 직접적으로 들은 적은 그닥 없는 것 같아. 스즈란이랑 버블은 가족들이랑 같이 있다가 왔고. 포푸카는 벌목장에 부모님이 버려놓고 갔다고 했고, 샤마르는 저택에 하인이랑 버려져 있었다고 했었지. 우타게는 유학 생활 중에 의사의 제안을 받고서, 키라라는 우타게가 보낸 편지를 받고, 그러고 너는 로도스 아일랜드 직원을 만나서 왔지." 


하나하나 꼽아 보니 오퍼레이터에 한해선 저 정도가 전부인 것 같다. 바꿔말하면 어린 나이에 감염자가 되면, 가족의 도움 없이는 로도스 아일랜드까지 찾아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건가. 신체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어른보다는 떨어질 테니 가족이 없다면 누군가에게 소개받거나, 로도스 아일랜드 직원을 만나서 오는 수밖에 없다. 그 숫자도 그리 많지 않다고 하면 나머지는 거리에서 헤매는 게 고작인가. 어떤 감염자들처럼 컬럼비아의 땅을 사서 제 2의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꿈에도 없겠지. 


"스즈란이나 버블처럼 가족들이랑 있던 애들도 있지만, 많은 애들이 감염자가 되면 부모님에게 버려지거나 잃어버려. 하물며 전쟁통이기도 하니까. 어른들도 자기 몸 간수하기 힘든 판에 아이들까지 신경쓰지는 못한다던가. 아까 그 애들은 그런 애들이야. 집에서 쫓겨나듯 나왔거나....나처럼 스스로 집을 나와버렸던가." 


안젤리나 나이대 애들인 우르수스 학생자치회는....의도치 않게 집에서 나오게 된 경우라고 봐야 할까. 가족들을 잃어버리고, 갈 곳이 없어져서.... 


"그럼 그 애들은 어떻게 먹고살까?" 


안젤리나가 나직이 물었다. 물론 안젤리나는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어른이 아닌 감염자라는 조건에 정확히 부합하고, 로도스 아일랜드에 들어오기 전에는 더더욱. 


감염자는 일자리 구하기가 어마무시하게 힘들다. 일하다가 죽으면 감염원이 되고, 직장에 직간접적으로 대미지를 준다는 이유에서다. 성인이 아니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물론 그럼에도 어떻게든 일할 곳을 찾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안젤리나도 펭귄 로지스틱스에서 아르바이트 형태로 일하고 있었고 지금도 그러니. 


하지만 기본적으로 감염자는 임금을 절반만 받는다. 일 시키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위험부담을 지기 싫다는 거겠지. 감염자에게도 나름대로 대우를 해 주는 로도스 아일랜드나 펭귄 로지스틱스가 특이한 거다. 하물며 안젤리나같은 희귀한 능력에 각성한 케이스는 당연히 드물 것이다. 


"물론 애들이고, 감염자이기까지 하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애들이니 쉽사리 일을 시키는 어른은 많지 않아. 그런 애들 중에 제대로 월급 주는 데서 일하는 애들은 열 명 중 하나....아니, 어쩌면 백 명 중 하나가 될까말까. 시라쿠사처럼 범죄조직이 있는 나라면 그런 조직에 들어가는 애들도 있고, 리유니온같은 국제범죄조직에 들어가는 애들도 있었고." 


어쨌든 먹고자는 문제는 해결되니 말이다. 물론 모든 구성원이 감염자였던 리유니온이 아니고서는 범죄조직 간의 싸움에서 화살받이가 되거나 몸을 던지는 테러에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그런데 내가 말하려는 건 그런 데에 들어가지 않고 먹고살 방법을 찾는 애들 이야기야. 달리 일자리도 찾지 않고." 


"그래서 그게...." 


"맞아. 그런 애들이야." 


ㅡ지갑하고 갖고 있는 것들 중에 돈 나갈 만한 거 전부 내놔. 


"무리를 지어서, 지나가는 행인을 속여서 끌고 와서는 협박하는 거지. 길거리 생활을 하면서 그런 애들을 많이 봤어. 극동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많아. 큰 도시의 뒷골목에는 그런 애들도 있는 거지. 남자애들은 무리지어서 둘러싸서 협박하거나, 직접 행인을 기절시키고 지갑을 턴다거나. 여자애들은 술 취한 행인을 턴다던지....아까처럼 유인해서 협박을 한다던지. 되게 딱해 보이는 여자애가 도와달라고 해도 일면식도 없는 애가 그러는데 쉽게 따라가는 사람은 없지만, 하나라고 없는 건 아니니까." 


마치 사냥덫처럼, 한 명만 걸려라는 느낌으로 계속 하는 걸 수도 있겠지.

경우에 따라선 의심받지 않게 몇 명이 돌아가면서 할 때도 있을 거고. 


"더구나 박사 지금....로도스 아일랜드 코트 입고 있잖아. 나름대로 이름이 알려진 제약회사니까 박사한테 약 좀 달라고 하면서 접근할 수도 있고, 광석병 때문에 쓰러진 친구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 되냐면서 보여주겠다고 불러들였을 수도 있어. 그렇게 불려서 따라가면 어떻게 되는지는 이제 잘 알고 있을 거고." 


아까처럼 흉기를 들이밀면서 지갑이나 돈을 내놓으라는 걸로 안 끝날 수도 있다.

그래서 안젤리나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구나. 


"그렇게 행인을 끌고 간 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많이 봤어. 돈을 내놓으라면서 흉기를 드는 애들은 애교고, 갑자기 비명을 지르고는 기다리고 있던 다른 사람이 나타나서 여자애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다 봤다면서, 돈을 내놓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자라크족 여자애가 자기들 무리가 있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럼 그, 최소 다섯 명이 돌아가면서, 최대한 극동인이 아닌 사람 위주로 말을 거는 걸까. 


"그리고 이건 극동 뒷골목에 있는 감염자 애들에게서 곧잘 보이는 특이한 점인데 그런 애들 중에 몇몇은 자의식이나 자존감도 낮아서 우연찮게 애인이 생기면 엄청나게 집착해. 없는 돈을 짜내서 꾸미고, 애인이 변심하려 하면 자해하거나 상대를 해치기도 하고." 


집착이나 상대를 해치려 하는 건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면 아까 그 애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봤을 땐 길거리의 아이라고 생각을 못 했을 정도로 꾸미고 있었다. 


"물론 감염자라 연애가 힘들긴 하지만 개중에서는 감염자끼리 만나기도 하고, 드물게 상대 쪽이 감염자에 저항이 적은 편이면 한 번 만나 볼까 하고 가볍게 시작되기도 하지. 그 끝이 가볍지 않아서 문제지만." 


거기서 안젤리나가 두려운 것을 떠올리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왜 그래, 안젤리나?" 


"....어느 쪽 이야기를 먼저 듣고 싶어? 나쁜 쪽, 덜 나쁜 쪽. 아니, 거기서 거기인가?" 


"뭐, 어느 쪽이든 네가 그런 표정 짓고 있으면 나빠 보이지만." 


안젤리나가 이쪽을 보고 건조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몇 번이나 접해서 알고 있는데도 등골이 서늘해지고, 양팔에 식은땀이 맺힐 정도로 냉혹한 일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걸 본 게 두 번, 오리지늄으로 어디가 됐든 찌르는 걸 본 게 세 번. 이거 아까 내가 말해줬던, 행인 낚아서 협박하는 애들도 포함해서야." 


"...."


오리지늄으로 당사자나 지인을 찌르겠다고 협박하는 것도 유효한 협박 방법이었을 것이다. 감염자가 되면 살아있으면서도 사는 게 아닌 것 같을 테니. 


"그리고 그런 것도 봤어. 그 안에서 서열이 가장 낮은 애가 정해지고, 그 애를 내몰아서...." 


하지만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왠지 모르게 아예 끊어져 버렸다. 이번에 시선을 피하면서는, 아까하고는 다르게 떠올리는 걸 극도로 꺼리는 것 같았다. 


"....아니, 아니야. 지금 건 잊어버려 줘." 


고개를 젓고, 시선을 피한 채로 다시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이리저리 굴렸다. 


무슨 이야기인가 싶었지만 아까 그 여자애가 말한 게 있어서 어떤 이야기일지 짐작은 간다. 


ㅡ오빠가 갖고 있는 돈이 모자라면 그 여자애가 몸으로 때우는 게 더 확실하지 않을까? 


다만 스스로 말하는 것도 꺼리는 모양이고, 직접 묻기엔 아까 들으면서 나도 기분이 나빠졌으니 그만두기로 했다. 


"나도 한참 방황할 때 갑자기 경찰에 잡힌 적이 있었어." 


한참을 조용히 있던 안젤리나가 갑자기 이야기를 꺼내서, 커피잔을 입에 대려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어? 너도 그럼 그렇게 생활한 적이 있어?" 


생각해 보면 이렇게까지 자세히 알고 있다면 안젤리나도 연루된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뭐, 내가 말한다 한들 박사가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진 않았어." 


"괜찮아. 믿을게." 


안젤리나도 어쨌든 자기 의견과는 다른데도 내 결정을 믿어주었으니, 나도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내 말에 안젤리나는 소박하게 살짝 웃고 말을 이어갔다. 


"사실 능력 덕분에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지. 아츠로 각성한 이 능력은, 어찌 보면 저주이면서 축복일지도 몰라." 


그 말과 함께 안젤리나의 눈앞에서 녹다 만 아이스크림이 검은색 커피에서 벗어나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녹아있는 액체도, 겉에 묻은 커피도 안젤리나의 중력 아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기묘한 파문을 표면에 그리고 있었다. 


"그래도 능력을 쓰는 방법을 어떻게든 익혀서, 길거리 생활을 했지만서도 좀 나은 생활은 할 수 있었어. 제대로 된 잠자리야 물론 없었지만 건물 위에서 비바람만 피할 정도면 됐었고. 근데 그 근처에 있던 감염자 애들이 사람을 죽였던 일이 있었다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잡더라고. 그때 나는 신문 배달하는 거 하고 있었는데,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지만 의심받으면서 일하던 데서도 쫓겨났어. 나중에 진짜로 죽인 애들이 잡혔다고는 들었지만." 


ㅡ그래서, 어떻게 해? 죽일까? 


안젤리나가 그 정도로까지 험하게 말한 데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구나 싶었다. 이전에 자신이 겨우겨우 잡은 일자리를 잃게 만들은 애들이고, 지금은 나를 끌어들여 협박하고, 죽일지도 몰랐을 애들이니.

같은 애들은 물론 아니겠지만 지난 일이 투영되었던 거겠지. 


"내가 그러니까 얼마나 놀랐겠어. 잠깐 어디 갔다 왔더니 박사는 온데간데없고, 근처 뒷골목에 들어갔나 싶어서 가봤더니 모르는 감염자 애들이 박사를 둘러싸고 있었으니까. 그래도....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다친 데도 없고. 잘 됐다." 


안젤리나가 살짝 웃었다. 누군가를 죽인다거나, 이 세상이 숨기고 있는 차가운 현실 같은 걸 모르는, 그 나이대 아이 같은 얼굴이라 속으로 안도했다. 안젤리나가 띄워올렸던 아이스크림은 다시 커피 속으로 조용히, 천천히 잠겨들었다. 


"아츠를 더 잘 쓰게 된 건 잘 됐다고 생각해. 앞으로도 더 노력하고...."


겨우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아 안심되면서도, 아까같은 골목 상황이면 아무리 전장을 봐왔다고 해도 몸이 반응하기 어렵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나중에 전방 오퍼레이터들에게 이야기해서 호신술 같은 거라도 익혀둬야 하려나. 호시구마랑 재키가 이쪽을 잘 안다고 했었으니.




"여기....제과점이잖아? 박사, 군것질 잘 안 하지 않았어? 조금 지나면 저녁 먹어야 할 텐데."


의상 전시회 구경이 끝나고 가게가 닫기 전에 안젤리나를 데려왔다. 전시회를 둘러본 여운이 아직 남아 있는지, 여기까지 오면서 아까 봤던 옷들에 대해 끊임없이 수다를 떨던 참이었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사실 오늘 날짜도 날짜고, 일부러 제과점에 온 걸 생각하면 안젤리나도 눈치는 채고 있을 것이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이제야 기억났다는 인상만 주지 않으면 좋을 텐데.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서 흘끗 안젤리나를 보았더니 그래도 기대는 하고 있는지 빙긋빙긋 웃으면서 배웅해 주고 있다.


"어서 오세요."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조화롭게 섞여서 나도 모르게 공기를 들이마신다. 극동식 과자부터 양과자까지, 다양한 과자들이 형형색색의 자태를 뽐내며 저마다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조금 더 사 가고 싶다는 유혹을 억누르면서 카운터로 가니 우르수스족 여자 직원이 한 번 더 인사를 한다.


"예약한 과자 찾으러 왔습니다."


"가게 문 닫기 전에 제때 와 주셨네요. 손님이 마지막 예약 손님이세요."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 보니까요."


이름을 듣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하고는 안쪽으로 들어간 직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상자를 하나 들고 나왔다.

우타게에게 보여주었던 사진 그대로, 둥그스름한 상자에 다양한 종류의 과자들이 둘이 딱 먹기 좋을 정도의 양만큼 들어 있다.


과자 하나하나, 한 과정 한 과정을 섬세한 노력으로 만들어냈다고 했던가.


"고맙습니다. 사진하고 똑같네요. 여자친구가 좋아할 것 같아요."


"밖에 기다리고 계신 아가씨인가 보네요. 극동 분이 아닌 것 같은데 극동 옷을 잘 소화하시네. 귀여워요."


점원의 말에 살짝 돌아보니 안젤리나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게 눈에 들어온다.

괜시리 귀엽다는 생각에, 내심 안젤리나가 칭찬받았다는 생각에 나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것 같다.


"고맙습니다. 매번 잘 챙겨주기도 해서 오늘 답례할 겸 사러 왔어요."


계산을 끝내고서 포장된 상자를 받아 밖으로 나오니 안젤리나가 가게 앞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들여다보다가 이쪽으로 돌아보았다.

가게 들어오기 전에도 짓고 있던, 기대감에 찬 미소를 보니 또 한 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아마 안젤리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일지도 모르겠다. 마침 안젤리나가 보고 있던 포스터도, 지금 종이가방에 들어 있는 과자이니.


거 참, 애도 아니고. 나도 진정 좀 하자.

물론 기뻐하면 나도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기다렸지, 안젤리나."


"볼일 다 본 거야?"


고개를 끄덕이면서 안젤리나에게 상자를 건넸다.


"항상 고마워, 안젤리나. 옆에 있어줘서, 매번 잘 챙겨줘서. '약소하지만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말하면서 건네주면 좋을까 고민해 봤지만 별로 떠오르는 게 없어서 나름대로, 반 장난삼아 사회인이 할 만한 인사로 대신했다.


뭐야, 왜 갑자기 존댓말로. 라며 킥킥 웃은 안젤리나가 종이가방을 꺼내어 내용물을 확인하고선,


"....응? 이거였어? 어떻게....?"


눈을 크게 뜨고는, 포스터에 그려진 그림과 지금 자기 손에 들려 있는 상자를 번갈아본다.

설마 싶었던 걸까. 아무리 그래도 이런 데에 어두운 내가 예약해야만 살 수 있는 과자를 건네주었으니 믿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뭐, 조금 도움을 받았지만 나름 알아봤었어. 그래도 받은 게 있고, 매번 해 주는 게 있었으니까 신경쓰고 싶었고."


"그래도 이렇게까지....물론 박사한테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잊어버리지만 않았으면 하고 있었는데....세상에, 과자 하나하나 실물로 보니 되게 예쁘다. 먹기 아까울 것 같아."


"최선을 다해 유통기한 지나기 전에 먹어야 의미가 있지 않겠냐."


안젤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종이가방에 다시 상자를 넣어 건네주었다.

우타게가 말했던, 아이가 서투른 손으로 과자를 만들어 엄마에게 줄 때 느끼는 나름대로 자랑스러운 감정이려나. 조금 알 것도 같다.


"그....그렇지. 고마워, 박사."


안젤리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내게 종이가방을 받고선, 한 번 가슴께에서 꼭 끌어안듯 했다.


"이제 가자. 아직 같이 가고 싶은 데가 더 있어."


안젤리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 대답은 맞잡은 손이 아니라 체중을 그대로 실어온 안젤리나 그 자체였다. 깜짝 놀라면서 저도 모르게 그 여린 몸을 두 팔 가득 안아버렸다.

한 달 전 그때처럼. 안젤리나가 어쨌든 바로 앞에 살아 존재한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심장이 주체하질 못하고 빠르게 뛴다.


쑥스러웠지만 그래도 이 감정이 전해졌으면 하는 생각에 안젤리나의 등을 도닥이며 한 번 더 힘주어 안았다.

주변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 뒤의 일정은 생각 이상으로 순조로웠다.


옛 천수각을 개조해 만들었다던 전망대에서, 해 지는 극동 시내를 둘이 나란히 서서 보는 것은 꽤나 특별한 경험이었다. 

안젤리나는 건물 위에서, 날면서 야경 같은 걸 몇 번이나 봤을 텐데도 왠지 모르게 조용히 들떠 보였다. 


식사하러 간 곳은 저녁도 맛있었고, 사람도 많지 않아 다행이었다. 날도 그닥 춥지 않아서 돌아오는 데에 지장도 없었다.

우여곡절이 좀 있었지만, 나름 처음으로 안젤리나를 리드했던 데이트는 그럭저럭 잘 해낸 것 같다.


로도스 아일랜드에 돌아와서는 같이 와서 좋았다면서, 다음에도 또 기회가 있으면 이렇게 나와 보고 싶다고 하고서 안젤리나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조금 더 스스로를 다듬어서.

안젤리나를 좀 더 자신있게 리드할 수 있게 되었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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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오류 지적 환영
어느정도 오리지널 설정도 있음. 피드백 환영    



쓰고 보니 이 커플은 밸런타인데이랑 화이트데이 둘 다 뭔가 마가 낀 듯 일이 생기는 것 같다
뭐 근데 그런 날 베이스라고 마냥 달달한 걸 쓰기에는 또 너무 밋밋하단 말이지







오늘도 기다려주고, 찾아와주고, 읽어줘서 고맙다


읽으러 시간내서 와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나도 힘내서 계속 쓰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