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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라 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뜨거운 햇살. 축축한 대기. 에어컨과 선풍기. 시원한 계절 과일들. 수중 스포츠. 아이스크림. 연상할만한 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일하기 싫고 빈둥거리고 싶은 계절이라 할 수 있겠다. 솔직히 말해 사계절 가리지 않고 빈둥거리고 싶긴 하지만, 여름은 특히 하기가 싫은 법이다. 누가 저 온도와 습도를 좋아하겠는가? 하물며 에어컨 바람 쐬며 침대에서 아이스크림 먹고 TV를 보는 행위를 싫어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여름이 되면서 이 블랙기업 로도스 아일랜드에도 직원들의 리프레쉬를 위해 전원 휴가가 주어졌다. 그 기간은 무려 일주일. 심지어 휴일이 없는 수뇌부도 오전 근무만 하고 자는 파격적인 구성. 덕분에 언제나 시끌벅적했던 이곳은 한밤중에만 느낄 수 있던 고요함을 대낮에도 느낄 수 있었다.

사족을 붙이자면 그 이베리아 바보 듀오는 청춘이 뭐네 어쩌네 하면서 시에스타로 갔다고 한다. 더 많이 전화번호를 얻은 쪽이 진 사람의 머리를 밀어주는 내기라고 하던데. 참으로 할 짓도 없나 보다. 괘씸해서라도 돌아오면 추가근무를 붙여줘야지.

어찌 되었든 좀처럼 볼 일이 없는, 모두가 쉬고 있는 평화로운 로도스다. 물론 오전 근무만 하는 건 나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그래서 원래는 일주일 내내 근무 끝나고 잠만 잘 생각이었는데. 분명히 그랬는데.

"자. 힘을 빼고, 서서히 움직이는 느낌으로."

지금의 난, 요양 병동에서 조각을 배우고 있다.

"그래. 천천히… 흘려 넘기듯이."

뒤에서 여성의 유혹하는 것 같은 요염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업히듯이 양팔로 내 목으로 감으며, 자신의 우월한 모성을 과시하듯이 상체를 들이밀고, 그녀는 내 반응을 즐기듯이 청각을 간지럽혀왔다.

"그… 스펙터 양?"
"왜 그래? 박사?"
"좀 떨어져 주면 안 될깝쇼?"

내가 넌지시 물어본 말에 에기르 여성은 잠시 반응이 없더니, 살며시 거리를 좁혀 뺨을 밀착시켰다.

"왜? 이러는 게 싫어? 남자들은 이런 게 좋다던데."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그…"

당연히 내 이성이 무너져 내릴 거 같아서 그렇지. 라고 속으로 강렬히 딴죽을 걸었다. 냉방 시스템도 잘 불고 있고, 스펙터의 체온 자체가 일반인보다 낮은 편이라 딱히 덥지 않다. 기분이 나쁘냐고 묻느냐면 그건 당연히 아니다. 미녀가 밀착한 채 백허그를 해주는 시츄에이션을 싫어하는 남자가 상식적으로 있겠는가? 거기에 형용할 수 없는 좋은 향기가 지근거리에서 덮쳐오니, 하반신의 두뇌가 쓸데없이 활성화될 거 같다. 

대체 왜 이러고 있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나도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그저 요양 병동으로 옮긴 스펙터의 병문안 겸 이사 선물을 주려고 온 것일 뿐인데, 이리저리 말장난에 당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이렇게 조각을 배우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이렇게 밀착한 상태로 말이다. 

"집중해. 아직 칼 들고 있어. 잘못하면 손가락 베인다?"
"네가 떨어져만 준다면 베일 확률이 줄어들 거 같은데…"
"응? 내가 원인인 거야? 어째서일까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 스펙터는 더욱더 몸을 밀착시켜왔다. 고의적이다. 이거 분명 일부러 이러는 거다. 등에서 느껴지는 푹신한 두 개의 감촉이 척추를 타고 흘러와 내 전신에 전기가 찌릿찌릿 흐르게 만들었다. 내가 조각을 끝내기 전까지 절대 안 끝내겠지. 그렇다면 내가 빠른 속도로 조각을 마치는 것만이 이 말초신경의 수렁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완성! 완성했으니 이만 떨어져 줘!"
"어머.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남은 이성을 걸레 짜듯이 쥐어짜서 양손이 열심히 춤춘 결과, 10분 정도 걸려서 길이 15cm 정도의 작은 상어 모양의 조각을 완성했다. 조각칼을 사용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고, 뒤에서 스펙터가 방해공작을 벌인 것도 있어서, 모양이 상당히 어색하고 투박한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냥 못생겼다.

"흐음, 당신. 의외로 손재주가 좋네?"
"의외는 또 뭐야…"

가볍게 투덜거리는 걸 무시한 채, 스펙터는 내가 건넨 상어 모양 나무토막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대단히 만족스러운듯이 입가를 씨익 올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왜 그 많은 것 중에 하필 상어를 조각했을까? 혹시 나를 생각하기라도 했어?"
"그런 짓을 했으면서 왜 물어…"
"응? 그런 짓이라는 게 뭘까? 모르겠는데?"

예전에 켈시, 글래디아와 3자 대면을 했을 때 들어본 바로는, 어비설 헌터스는 서로의 코드명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 글래디아 본인의 경우 황새치를 의미하는 소드피쉬. 스카디의 경우는 범고래. 스펙터의 경우는 상어다. 확실히 전기톱을 활용해 공격하는 난폭한 공격 스타일은 예전에 본 공포 영화에 나오는 그 상어의 움직임과도 비슷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녀가 전투 시에 입는 옷의 배색도 그렇고, 여러모로 꽤나 어울리는 코드명이겠다. 

스펙터가 저리 장난스럽게 던진 질문에 답하라면, 솔직히 말해 아니라고 하면 분명 거짓말이다. 조각하는 내내 달라붙어 있는데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건 이미 목석의 수준을 뛰어넘은 무언가다. 아니, 애초에 조각을 가르쳐주는 건데 왜 밀착해 오는 걸까. 저 여름이 되어서 저 아가씨도 여름의 기분이 든걸까. 왜 최근 갈수록 거리감이 이상하리만치 좁아지는지 모르겠다. 계속 생각해봤자 뭐 생각날만한 것도 없고, 지금까지처럼 머리에 증기만 새고 끝날 거 같으니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이런 내 생각을 알기나 할까. 스펙터는 회전형 의자에 앉은 채 빙글빙글 돌며, 내가 조각한 상어 모양 나무토막을 이리저리 보며 말했다. 

"어찌 되었든 일주일간의 휴일일건데. 당신은 이런 조용한 병동까지 와도 되는 거야? 평소에 그렇게 피곤하다고 말하면서."
"수면 장애가 좀 있어서 말이야. 어차피 두세 시간이면 잠이 깨더라. 이렇게 조용한 로도스를 돌아다녀 보는 것도 나름 묘미기도 하고."
"흐음~ 그러니까 난 돌아다니는 김에 심심해서 보러 온 거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저렇게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빈틈을 찔러오는데 사람이 당황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만회할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스펙터는 휙 등을 돌렸다. 마치 자기가 삐졌다고 일부러 어필하는 것처럼.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유도하는 것처럼. 

원래 저런 장난에는 그에 알맞는 반격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걸 말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울 뿐. 애초에 아직 그런 관계도 아닌데 이런 말을 하는 게 맞는가 싶지만, 지금으로선 딱히 방법이 없다. 거기다가 은근슬쩍 저렇게 얼굴을 조금만 보여주며 빨리 말하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안 할 수도 없다. 이걸 말해야 되나 싶은 이성을 저 멀리 제쳐두고, 주먹을 꽉 쥔 채 이 장난의 정답을 말했다.

"그냥… 그… 너… 생각이 나서…"
"흐음, 잘 안 들리는걸? 좀 더 큰 소리로 말해주면 좋겠는데?"
"부끄러우니까 그만해 줘… 다 들은 거 알거든."
"후후. 그럼 이 정도로 해둘까?"

스펙터는 다시 몸을 빙 돌려 멀쩡하게 웃는 모습으로 날 반겼다. 역시 내 반응이 재밌어서 이러는 거다. 몇 번이고 장난을 걸어오고 그 장난에 몇 번이고 당하니, 참으로 답답한 심정이다. 

"잠시 산책하지 않을래? 박사. 창작의 영감은 가벼운 일상에서 시작하는 법이거든."

슬슬 장난치는 것도 질린 걸까? 테이블에 상어 모양 나무토막을 올려놓으면서 스펙터는 질문을 던져왔다. 어차피 환자실에 계속 있는 것도 뭐하겠다. 산책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럼, 잠시 실례할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신호를 보내자, 스펙터는 갑자기 내게 다가와 본인의 양팔을 내 왼팔에 걸쳤다. 흔히들 연인의 증표라고 자주 말하는 팔짱 끼기였다.

"저기, 스펙터 양…? 갑자기 뭔…"
"요즘 빈혈 기운이 잦아졌거든. 광석병의 영향일 수도 있다나봐~"
"빈혈이면 그냥 침대에 누워 있는 게… 아야!"

팔 안쪽을 집게로 세게 집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내 옆에 있는 여성이 가녀린 손에 알맞지 않은 괴력으로 있는 힘껏 내 살을 꼬집고 있는 것이었다. 코트 너머로도 이 정도의 통증인데. 맨살이었으면 살결이 찢어져 나갔을 것이다.

"그렇게 계속 눈치 없이 굴면, 당신을 원망할 거야."

평소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아닌, 다소 차가운 톤. 그것에 난 아무 말 없이 멍하니 그녀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방금 그 모습이 마치 신기루였다는 것처럼, 에기르 여성은 미소를 지으며 날 문 쪽으로 이끌었다.

"그럼, 밖으로 나가볼까?"



푸른빛 하늘에 서서히 주황색 물감이 물들기 시작했고, 모습을 감췄던 달도 조금씩 하늘에 얼굴을 드러냈다. 기온도 어느 정도 떨어져 선선하면서 살짝 습한 바람이, 우리의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경치 좋네."
"그러게. 좋은 영감을 주기 딱 좋은 광경이야."

우리 둘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들판 저 너머를 계속 바라봤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팔짱을 낀 채로, 서로의 체온을 나눌 뿐. 우릴 감싸는 모든 걸 보고, 듣고, 느꼈다. 함교 갑판에서 간만에 바라보는 광활한 지평선은 마치 답답했던 마음속을 송곳으로 뚫는 것 같이 상쾌했다. 전달자 출신 오퍼레이터들이 자주 말하던 일하면서 바라보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이런 걸까?

"어라? 저건…"

멍하니 대지를 바라보고 있을 때쯤, 스펙터가 뭔가를 인식한 듯이 말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대지 위를 감싸는 고요한 물결과 그 위에서 빛무리들이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지금 우리가 컬럼비아 위에서 정박 중이니, 방향상으로 봤을 때 이전에 사업차 파견 나갔었던 해변 도시, 시에스타일 것이다.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저곳에 있던 소동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리유니온 사태 이후의 첫 휴가로 간 곳. 메딕 오퍼레이터 실론과 스나이퍼 오퍼레이터 슈바르츠가 동료가 되어준 곳. 그리고, 화산폭발을 일으킬 뻔했던, 그 거대한 원석충과 격전을 벌인 곳.

시선을 살며시 돌렸다. 그 거대한 원석충, 폼페이를 쓰러트려본, 내 옆의 에기르 여성의 시선은 멈추지 않고 해변을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은 평소의 장난기도, 전투 시의 냉정함도 아닌,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애틋함과 그리움. 마치 한 편의 그림과도 같은 아름다우면서도 슬퍼 보이는 장면에,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비설 헌터스. 해저에 사는 에기르인들의 기술의 집약체이자, 최강의 인간병기. 그들을 만든 에기르는 현재 미지의 적에게 침략된 상태로, 지금으로선 그녀들이 유일한 생존 집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잃어버린 고향.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 그 고향의 생존자. 그 고통이 어떨지는 나 따위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애초에 체르노보그 이전의 기억이 모호한 나에게,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지금의 로도스니까.

"그… 스펙터."

괜한 참견이라는 걸 알고 있다. 어쩌면 그녀의 역린을 건드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를 돕고 싶다는 의지가, 내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고 있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날 보고 있는 여성에게 내 기분을 전했다.

"바다, 가보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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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수위가 올라가는 상어눈나 이야기. 최대한 요망함에 신경쓰면서도 일정 선을 안 넘게 쓰고 있는데 보는 사람 입장에선 이게 잘 전달됐는지 모르겠넹... 뭔가 이상하다 싶으믄 언제나 말해주믄 고맙겠음.


암튼 뱃사람 명붕이... 최대한 일주일에 한 번씩은 글 올리려 노력 중이긴 한데, 다음주는 심사가 있어서 글 올리기 힘들듯. 2주 후나 3주 후에 담편 올릴 거 같음... 봐주는 명붕이들 미안하다...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