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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도스 아일랜드의 비서 오퍼레이터는 매일매일 바뀐다. 일정한 순서가 딱히 있어 보이는 건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사람이 눈에 띄게 많이 들어온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하루 일의 난이도나 강도가 휙휙 바뀌는 게 체감이 확 될 정도다.

물론 대부분의 오퍼레이터들이 성심성의껏 일을 도와주고, 어떤 사람은 빨리 하루 일 끝내고 자기 일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일처리가 느린 사람이 있기도 하고, 시키는 일은 성실하게 하는데 잔실수가 많은 사람도 있고, 그냥 농땡이 치는 사람도 있고....

"박사, 챠오."

"안녕."

정말 오랜만에 안젤리나가 비서 오퍼레이터다. 
평범하게 일을 잘 해 주기는 하지만 요즘 정도로 사이가 가까워져 있으면 안젤리나도 나도 일에 소홀할까 하는 걱정도 조금은 든다.

게다가 일한다고 평상복을 입고 온 게 아니라, 데이트를 하러 나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꾸미고 온 것도 눈에 띈다.

얼그레이색의 긴 머리는 풀어내려서 평소보다도 훨씬 풍성한 느낌이 드는 데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부각하는 화장과 어우러져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평상복 위에 걸치는 하얀 외투만 보면 흘끗 보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 안에 입은 남색 스웨터와 하얀색 치마바지는 무난한 색상임에도 잘 보면 안젤리나의 몸에 붙으면서 체형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이야 입고 있다지만 실내라서 외투는 벗고 있을 테고, 자연스럽게 색상보다 선이 더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거기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검정색의 긴 양말은 치마바지와 함께 얼마 드러나지 않는 맨살을 도드라지게 하는 느낌이라서, 얼굴 다음으로는 그쪽으로 시선이 가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남색 스웨터는 기억이 난다. 성탄절에 같이 컬럼비아에 나갔던 날 내가 사주었던 건가. 그렇게 보면 정말 안젤리나하고 오래 만나고 있었구나 싶다. 
아니, 다 떠나서 머리를 풀어내렸다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확 바뀌어서, 한참 안젤리나를 봐 왔는데도 새롭고 시선 마주하기가 조금 어려워진 것 같다.

"오늘 하루종일 박사랑 같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어제 잠도 못 잤던 거 있지. 데이트하는 것 같아."

"뭐, 놀려고 같이 있는 건 아니니까 오늘은 조금만 조심해 주라. 갑자기 누가 찾아올 수도 있고, 끝내 놔야 하는 일들도 있고. 퇴근 시간 지나면 좀 풀어줄 거니까 일과 시간 동안은 집중해 줘."

"네~"

조금 불안하다. 물론 같이 있는 시간을 나도 좋아하지만 일하는 시간은 구분해야 하니 말이다. 안 그래도 요즘 일거리가 끊이질 않아서 안젤리나랑 나가서 보낼 시간이 없는 판인데. 물론 안젤리나다 보니 늦게까지 일을 도와줄 것 같기도 하다. 가끔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 일 조금 도와주기도 했으니.

그래도 뭐, 일의 내용이야 평소하고 크게 다를 거 없고, 단순작업도 꽤 많다보니 내용을 몰라도 어렵진 않을 거다.
오늘은 아미야가 제발 오후에 일거리를 많이 가져오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안젤리나의 머리를 쓰다듬고, 탕비실로 들어가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설탕 두 숟가락이랑 크림 한 숟가락 넣은 커피 한 잔과 블랙커피 한 잔을 내리는 걸로 오늘 하루가 시작된다.



퇴근시간을 훨씬 넘었지만 안젤리나는 여전히 비서 오퍼레이터 자리에 있다. 아미야가 잠깐 사무실에 왔지만 이상한 건 못 느꼈는지 평소처럼 일을 한 무더기 더 얹어 준 정도 외에는 다른 오퍼레이터의 방문도 달리 없었다. 점심 식사도 안젤리나가 샌드위치랑 샐러드를 준비해 와서 차와 같이 간단하게 한 다음 같이 앉아서 이야기 좀 하는 정도였고.

그래도 일하는 시간이랑 같이 노는 시간을 잘 구분해 준 거랑, 지금까지도 남아서 일을 도와주는 게 정말 고마운 것 같다.

물론 정규 퇴근 시간 이후로는 좀 느슨해져서 단말기를 들여다 본다거나 가까이 다가와서 손을 만지작거린다거나 이야기를 하고는 있다. 지난번에 하던 다음 데이트는 어디에 가고 싶다거나, 한참 못 나간 대신에 돈이 많이 모여 있으니까 다음에 나가면 돈 걱정하지 말고 놀자는 이야기를 하거나.

뭐, 원래는 퇴근해서 쉬고 있을 시간이니 나도 뭐라고 하지는 않고 있다. 여기서 쉬면서 내키면 일 조금 하는 느낌이니.
내가 일 페이스가 달리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안젤리나가 손을 만지작거리고는 있지만 뭐 아주 긴 시간도 아니다.

저녁....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식당은 이미 닫았을 시간이고 안젤리나도 나도 뭘 준비해 놓지는 않았는데.

"...."

벌써 오늘만, 이렇게까지 지긋이 손을 만지고 있는 게 열....몇 번째지? 아무튼 가까이 올 때마다 못 해도 한 번은 손을 만지작거리고, 점심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더군다나 이상하게 손가락 하나하나를 만지고 있다 보니 손톱을 다듬어줄 때가 또 생각난다.

"....그, 안젤리나."

여덟 시쯤 되었으려나. 슬슬 방에서 간편식이라도 하나 들고와서 안젤리나한테 먹여야 할까 싶을 즈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음? 왜 그래?"

"오늘 이상하게 손을 잡는다기보다는 만지고 있다는 느낌인데."

"아....들켰어?"

안젤리나가 발그레하게 뺨을 붉히면서 되묻는다. 바뀐 분위기에 하는 행동이 그렇게까지 바뀌진 않았다 보니 역시 안젤리나구나 싶다.

"아....있잖아. 슬슬 커플링을 하나 하고 싶어서. 박사 손가락이 어느 정도인가 하고 보고 있었어."

"커플링 말이지."

내 말에 안젤리나가 수줍게 배시시 웃으면서 왼손등을, 정확히는 왼손 약지손가락을 내게 보여준다. 아무것도 끼워져 있지 않지만 나하고 같은 형태의 반지가 끼워져 있는 걸 상상하는 행복한 표정이다.
....심장에 안 좋을 정도로 귀엽다.

"우리 벌써 1년 가까이 되어가는데 아직 우리 둘이서 뭘 맞춰서 가지고 있던 게 없잖아. 커플룩이라던가 하면 좋겠지만 같이 나가서 데이트할 일도 많지 않고. 편하게 신을 수 있는 운동화도 좋다고는 하지만 뭔가 커플이라는 느낌은 아닌 것 같고, 신발 선물하면 도망간다는 말도 있으니."

들어본 적도 없고 설령 안젤리나에게 신발을 받는다고 해도 도망가거나 할 생각도 없지만 어딘가에는 있을 법한 이야기 같다. 징크스 같은 건가?

"반지라면 계속 몸에 붙어있으니까 잃어버릴 일도 없는 데다 뭔가 이어져 있는 느낌이라서 좋다고 생각했거든. 다들 곧잘 하기도 하고, 좀 더....의미도 있는 것 같고."

안젤리나 말대로 로도스 아일랜드 안에서 연애를 하거나 결혼한 사람들을 보면 반지를 끼고 있는 사람이 더러 있다. 가끔 일하다가 여유가 날 때 그 반지를 보면서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거나, 작전에 나가기 전에 반지를 보면서 스스로 용기를 북돋는 것도 본 적이 있다. 어쩌면 그 행위와 표정 모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을 떠올리면서 그 다음 함께할 시간을 기대하거나, 무사히 사랑하는 사람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는 거겠지. 안젤리나도 그걸 보면서 부러워했을지도 모른다.

좋은 생각인 것 같다. 나는 그런 걸 보면서도 막연하게 저런 사람도 있구나 정도의 감상이었는데, 오히려 이런 걸 안젤리나가 매번 먼저 제안해 주고 있으니 내가 미안할 따름이다. 무엇보다 안젤리나가 좋아할 것 같아서,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맞추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좋은 건 그만큼 준비를 해야 걱정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겠지. 더구나 아직 우리 사이를 밝힐 수도 없으니.

"그, 미안한데....커플링은 조금 더 있다가 맞추는 게 좋을 것 같아, 안젤리나."

나도 아쉽다고 생각하지만, 그 감정을 안젤리나에게까지 드러낼 수는 없다. 안젤리나가 자기 때문에 나에게 부담을 준다고 생각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반대로 이 감정을 안젤리나에게 드러내면 안젤리나가 괜한 짓을 했나 하는 식으로 오해할 수도 있으니.

"아무래도 반지를 끼고 있다거나 하면 주변 사람 눈에 띌 거고, 그러면 우리 사이도 쉽게 알려져."

애초에 나는 같이 일하는 비서 오퍼레이터가 매일 바뀌고 있는 입장이다. 아마 로도스 아일랜드의 수뇌부라는 내 손에 반지가 있다고 하면 보는 사람들은 높은 확률로 그 짝이 누군지 궁금해할 것이다. 아마 로도스 아일랜드 안에 있는 모든 여성 오퍼레이터나 직원들 중 반지를 가진 사람들을 전부 확인해 보고, 그들 중 짝이 있는 사람을 소거해 나가다 보면 결국 안젤리나라는 게 밝혀지는 것도 시간 문제겠지. 안젤리나가 그 반지를 숨길 리는 없을 테니.

"....아직도 우리 사이를 다른 사람들한테 밝히기 싫은 거야, 박사?"

설레어 있던 표정이 단 한순간에 눈물로 사그라들어 버린다. 그것만으로도 또다시 가슴속을 쥐어짜이는 것 같은데 내밀었던 손조차도 힘없이 떨어지듯 하니 도저히 안젤리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

역시나 싶은 반응이다. 성탄절에 안젤리나의 고백을 받았을 때도 내가 사람들에게 우리 사이를 밝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었으니.
더구나 그때 말했던 것처럼 우리 사이도 그때에 비하면 더더욱 가까워져 있다. 그래서 충분히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겠지.

알고 있었는데.
이 대답을 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안젤리나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알고 있는데. 그때도 이 얼굴을 봤었는데.

ㅡ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니까 좋은 거 아니야? 나도 하는 김에 박사가 내 사람이란 걸 알려주고 싶고.

ㅡ아직 그렇게 안 됐으면 하는 거야. 너도 공공연히 알려지면 나 만나러 오기 힘들 거 아니야.

그래도 시선을 피할 수는 없어서 미안한 마음에 안젤리나를 보고 있자니 안타까운 눈으로 보다가, 고개를 내려 시선을 피하고선 떨어뜨린 손을 보고, 다시 한 번 나를 살짝 보려다가 다시 시선을 피해버린다. 한참 동안 눈을 마주치지 못하던 끝에, 목을 꽉 막아놓은 무언가를 억지로 밀어내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박사....박사가 전에 말했잖아. 우리 사이가 좀 더 단단해지면 그때는 우리 사이에 대해 밝히자고. 벌써 우리 이렇게 만나는 것도 아홉 달....아니 그것보단 더 되니까....일 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아직도 안 돼?"

안젤리나의 심경을 다는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무슨 생각인지는 알 것 같다.
하루가 멀다하고 애정표현을 주고받고, 안젤리나는 전적으로 나를 믿고 따르면서 의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바깥을 나다니는 데에 지식이 없다시피한 나를 위해 데이트 준비를 해 준다거나, 아츠의 힘을 빌린다고는 해도 직접 나를 데리고 멀리까지 데려다 주기도 하고, 머리를 잘라주거나 손톱을 다듬어 주는 일도 주기적으로 해 주고 있다.

물론 내가 어떻게든 메꿀 수 있는 것도 있기야 하지만 대부분은 어떻게 대체를 할 수도, 갚을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데이트 준비를 내가 조금 나누어서 한다거나, 비용에 있어서 내가 그만큼 더 내준다거나, 안젤리나가 애정표현을 하는 만큼 나도 애정표현을 하고, 밀어내지도 않고 있다.
그렇지만 로도스 아일랜드 밖으로 데려다 주는 건 어떻게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마저도 최근에는 안젤리나하고 나가지를 못하고 있어서 더더욱 미안한 마음이다.

그런데도 안젤리나는 그런 쪽에서 내게 한 번도 불만을 표한 적이 없다. 그저 안젤리나는 나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그 많은 것들을 해 주고, 얼마 안 되는 휴일을 나에게 맞춰주면서 내 휴일이 날아가 버려도 아쉬워할 뿐 한 번도 투정을 부리거나 화낸 적도 없었다.

그런 아이의 제안을 솔직하게 받아들일 수 없어서 더 답답하다. 아니, 마음은 그러고 싶다고 하지만 현실을 생각하는 머리는 그래선 안 된다고 이야기하니 미칠 따름이다.

"아니면....나하고의 사이가, 그....부끄러운 거야? 내가 박사한테 모자라다고 생각해서....나하고 사이를 밝히기도 싫어?"

"아니, 그건 아니야, 안젤리나."

황급히 대답했다. 이게 이렇게까지 오해를 살 수가 있다니.

"그럼....대체 왜 그래? 언제가 되어야 우리 사이가, 내가 박사하고 만나는 게 다른 사람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어? 얼마나 더 지나야 되는 거야? 아니,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야?"

안젤리나를 부끄럽게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나이 문제만 없었다면 안젤리나는 오히려 나도 자랑하고 싶을 정도다. 설마 자신이 감염자라서, 내가 자신하고의 사이를 밝히기 싫어한다고 생각한 건가?

"그때 이야기했던, 우리 사이가 단단해질 때가 아직 아닌 거야? 대체 내가 뭘 더 해야 하는 건데? 뭐든 할게. 뭐든 할 테니까....!"

"네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라고 생각해."

"스무 살....? 그만큼 기다렸는데....?"

지금이 11월 말이니 반 년 남은 셈이다.

물론 스무 살이 된다고 갑작스럽게 안젤리나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도 된다거나 하는 그런 건 절대로 아니지만, 그때가 되어가면서 안젤리나가 하나씩 어른으로서 부딪혀야 할 현실을 조심해서 알려줄 생각이었다. 로도스 내에서, 우타게 외의 다른 사람이 우리 사이를 알아내는 것에 따르는 부담도 포함해서다.

"반 년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면 참 많이 남은 거지만, 어찌 보면 촉박한 시간일 수도 있어."

물론 그 현실에 맞부딪히게 되는 게 내가 생각하고 있는 타임리미트인 '안젤리나가 스무 살이 되는 때'보다 늦어진다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다고 했을 때가 문제다. 

그 시점에 이 사이가 알려지면 가볍게는 우리 둘이 시간을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제한될 뿐더러, 로도스 아일랜드 자체의 이미지에도 지대한 영향이 있을 터다. 

물론 사랑에 나이 차이 같은 건 아무래도 좋고, 최대한 플라토닉하게 만나고 있다고 아무리 안젤리나가 이야기해도 안젤리나가 감염자인 것도 있으니 '대외적으로는 감염자를 위한다면서, 실상을 보니까 지도자라는 사람이 어린 감염자에게 해선 안 될 짓을 한다'는 식으로 왜곡될 수도 있고. 그런 이목이 쏠리는 부담을 아직 어린 안젤리나에게 지울 수는 없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이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고. 애초에 몰래 만나야만 하는 것도, 그리고 저런 사정이 있다는 걸 말할 수 없는 것도 안젤리나에게 미안한 일이다.

그리고 내가 우리 사이를 아직 밝히고 싶지 않은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당시엔 안젤리나에게 할 수 없었던 이야기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안젤리나를 설득해야 하니,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안젤리나. 로도스 아일랜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내 집이 있고, 그리고 박사가 있는 곳."

서글픈 목소리로 명료하게 대답했다. 이 대답까지도 사실상 자신과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심장을 쥐어짜이는 느낌이다. 안젤리나는 정말 그야말로 마음을 전부 나에게 쏟아붓고 있는데.
어쨌든, 안젤리나가 잊고 있었을 일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너도 알겠지만 우리는 각국의 크고 많은 일에 엮여 왔어. 감염자 문제든 아니든 간에. 의료적으로든 군사적으로든 우리는 좋은 쪽으로 문제를 해결해 왔고, 그 덕분에 우리 편도 굉장히 많아졌지."

리유니온 일부터 시작해 살카즈가 엮인 빅토리아 내전, 월루몽드에서 일어난 일련의 일들과 카시미어에서 기사 스포츠와 니어 가문을 둘러싸고 일어난 암투 등.

셀 수도 없이 많은 사건들에 우연찮게 휘말렸지만 오퍼레이터들의 부단한 노력과 협력으로 많은 위기를 넘어 왔고, 그 과정에서 테라의 범국가적 단체인 위기 협약과도 전술 협정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안젤리나는 이 위기 협약이 주관한 작전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예 오퍼레이터가 되었고.

"이미 로도스 아일랜드는 테라 전체에서 작지 않은 존재가 됐고, 테라 곳곳의 많은 세력이 우리를 우호적으로 보고 있어. 하지만 아무리 로도스 아일랜드가 좋은 의도로 모든 일에 접근한다 하더라도 우리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세력도 있겠지."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책상 서랍에서 보고서 하나를 꺼내 안젤리나에게 건넸다. 보안 관련 문제는 전부 해결되었기에 사실상 경각심을 위해 각 부에 배포되어 있는 자료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게 뭐야?"

"로도스 아일랜드 본함이나, 로도스 아일랜드 소속인 외부 거점에 잠입하려다가 저지당한 적대 인원의 숫자야. 로도스 아일랜드의 의학 기술이나 제약 기술을 노리고 들어온 자들도 있고, 특정 인원을 암살하려 잠입한 자들도 있어. 그 암살 대상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겠지."

보고서를 받아든 안젤리나의 표정이 하얗게 질린다.

숫자는 빅토리아 사태를 기점으로 서서히, 완만하게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어느 날은 서로 다른 세 개의 세력에서 서로 다른 시간대에 인원을 침투시킨 적도 있다. 침입 루트나 방법도 굉장히 다양하다. 

"오히려 우리가 들키지 않고 새벽이나 밤에 공중으로 날아서 오갈 수 있었던 게 신기할 정도야."

다행스럽게도 그렇게까지 해서 침입한 경우도, 우리가 나간 타이밍에 침입했던 적도 없다. 하지만 중력 조작을 이용해 공중으로 오간다는 사실이 새어나간다면 그게 또 잠입 방법이 되겠지.

물론 대부분의 경우는 레드나 맨티코어를 비롯한 암살 요원이라던지, 에단과 에이프릴 등 은신에 능한 오퍼레이터들 선에서 무피해로 정리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일부 인원이 대응 중 부상당하거나 오리지늄 무기에 의한 자상으로 감염율이 올라간 경우도 있다.

아무리 전장에 나간다 하더라도 전면전에 보조로 나가는 정도이니 이런 소규모 침투 대응전이 일어난다는 건 몰랐던 모양이다. 게다가 은밀하게, 내부에서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교전이니 말이다.

"만약 네가 나하고 각별한 사이라는 게 외부에 알려지면 저들의 목표에 네가 추가될 거고, 십 대 아이라고 여겨서 더더욱 쉽게 해치려 들겠지. 너는 하물며 외부 일도 하고 있잖아. 만약 네가 잡혀서 인질이 되고, 로도스 아일랜드에 직접적인 피해가 되는 조건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너를 버려야 할 거야. 그런데 설령 입장상 내가 널 버려야 한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 못 해."

어떻게든 가장 피해를 적게 해서라도 이 아이를 구하려 하겠지만 그게 로도스 아일랜드에 옳다고만 할 수도 없고, 그 다음이 없을 거란 보장도 없다.

"아직 아이인 너에게 그런 부담은 어른으로서도 짊어지라고도 못 하고. 네 안전을 위해서야."

서류를 돌려받으면서 설명하자 안젤리나가 고개를 숙이고, 작은 주먹을 무릎 위에서 꾸욱 쥐고서 나직이 대답했다.

"그럼....그럼 내가 그만큼 강해지면 되겠네. 내 중력 아츠는 박사가 인정해 줬잖아. 그치? 당신을 위해서라면, 이 사람들에게 힘을 보태서 당신을 지키는 게 목표라면 나는 더, 지금보다도 더 강해질 수 있어."

안젤리나의 말도 사실이다. 제어력, 범위, 활용 방식 등. 안젤리나의 아츠 활용력에 대한 평가가 시간이 지나면서 면적 넓은 육각형을 완성해 가고 있다는 건 훈련 및 테스트에서 밝혀지고 있다. 안젤리나의 이 자신감....은 거짓도 허수도 아니다.

"아니, 아니지. 그걸론 모자라겠지? 서포터 오퍼레이터에서 만족하지 않고 정식으로 캐스터가 될게. 그러면 내가 내 자신을 스스로 지키더라도, 박사까지 여유롭게 지킬 수 있을 정도로 힘이 남아날 거 아니야!"

일단 못해도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방에서, 안젤리나와 나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력장을 펼쳐 안으로 그 누구도, 아무리 예리한 흉기마저도 들어올 수 없게 할 정도로까지도 기량이 올라가 있다. 저 정도면 캐스터가 되어도 충분하고, 소견서에 직군 변경을 추천한다고도 적혀 있지만 매번 거절하고 있다고 했지. 
아무튼 너무 기특하면서도 고마운 일이다. 

"내가 밖에서 전달자로서 활동하는 게 문제라면 그것도 그만둘게. 그 왜, 전에 선생님 되는 이야기 했잖아. 그거 준비하면 될 거야. 선생님이 되고서 로도스 아일랜드 안에서 근무하면 노려질 일도 없을 거고. 그러면 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젤리나의 호의에 무작정 감사하며 앞세울 수도 없는 일이다. 하물며 안젤리나가 자기가 하는 일까지 내팽개쳐 가면서 내 옆에만 있게 하는 건 더더욱 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도 애인으로서는 정말 고맙고, 어른으로서는 정말 기특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안젤리나. 나는 내 눈앞에서 동료가 죽는 걸 수도 없이 봤어. 내가 머리를 짜내어서 작전을 짜고, 대응을 하고, 나 혼자만이 아니라 더 많은 시야를 통해서 봤음에도 미처 못 본 게 있어서 누군가를 포기할 수밖에 없던 적도 있었고."

"...."

지휘를 하다 보면, 그리고 이런 일을 하고 있으니 자주 겪을 일이라곤 하나 로도스 아일랜드의 구성원이 한 사람 한 사람 죽어나가는 건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니 익숙해지면 안 될 일이다.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 사람은 살았을까? 조금 더 최선의 선택은 없었던 걸까?
로도스 아일랜드의 대의를 위해 그 사람이 죽는 게 옳았던 걸까?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몇 번이고 그 작전을 복기하게 되고, 죽은 사람들인데도 작전에 나가기 전의 결의에 찬 표정이나 별일 없을 거라는 듯 즐겁게 웃는 얼굴이 잊혀지질 않는다.

"이미 너는 나한테 동료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나를 지키겠다고 앞에 나서다가 내 눈앞에서 죽는다면, 그대로 미쳐버리거나 나도 더 살고 싶지 않을 거라 생각해."

"....박사...."

안젤리나가 조금 무서운 듯, 당혹스러운 듯 나를 불렀다. 물론 나도 안젤리나의 생각은 좋다고 생각하지만 바깥에 그 증표가 드러나지는 않았으면 싶었다.

"이런 것마저도 밀어붙여서 정말 미안해, 안젤리나. 사실 내가 먼저 이런 제안을 했어야 했을지도 몰라. 먼저 이야기해준 것도, 그만큼 날 생각해주는 것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반지....반지가 바깥에 드러나는 거니까. 그렇다고 그걸 맞추기만 하고 가지고 다니지 않으면 잃어버릴 가능성도 있고. 몸에 붙어 있으면서도 바깥에 덜 드러나고, 안젤리나가 원하는 느낌으로 우리 둘의 사이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면....

"같이 무언가를 맞추는 건 나도 좋다고 생각하니까...그 반지를 목걸이로 하는 건 어떨까. 우리 둘만 있을 때라거나, 시간이 충분히 지나면 목걸이에서 떼어서 끼고 있을 수도 있잖아."

"...."

목걸이, 라는 말에 안젤리나가 고개를 살짝 들고 나를 본다. 여전히 내키지 않는 듯, 하지만 제안에 달리 반대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내심 미안한 마음에, 떨리고 있는 안젤리나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미안해, 안젤리나. 하지만 우리 조금만 더 기다리자. 하나씩 하나씩, 현실에 충실해야 우리 서로에게도 충실할 수 있어. 우리 서로만 보고 있으면 정말 봐야 할 것을 못 봐서 우리 사이를 지금까지처럼 유지할 수 없게 될지도 몰라. 나는 그렇게 되는 것도 싫고."

이 변명 비슷한 말이 먹힐 거라 생각도 못했고, 사실 어떻게 보면 정말 기약도 없는 약속이다. 물론 안젤리나가 스무 살이 되어서 우리 사이에 대해 정식으로 밝힌다고 혼란이 없다는 보장도 없다.

"응....생각해 보니 박사 말도 일리는 있는 것 같아. 나도 박사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앞뒤 안 보고 행동했었으니까."

극동에 갔을 당시 이야기인 모양이다. 그때 안젤리나는 나를 해치려 했던 아이들을 보고, 내가 놀랄 정도로 무섭게 화를 내고 있었지.

"그래도 솔직하게 말하면, 그렇구나 하고 기뻐하기만 하기엔 조금 아쉬워. 박사 입장도 있지만 내 생각도 해서 이야기해 준 걸 텐데. 알고 있는데, 알고 있는데 마음 한구석이 걸리고 납득을 못 하는 걸 보면 아직 어른이 아닌 모양이야."

그래도 받아들여 준 게 정말 고마운데, 지금 안젤리나가 정말 바라는 걸 해줄 수 없으니 나도 답답할 따름이다.
원래 어른이라고 하면 굉장히 할 수 있는 것도 많고, 사람에 따라선 정말 아이 입장에서 봤을 때 초월적인 것들도 해낼 텐데. 

"뭐, 어른이어도 저런 이야기 듣는다고 다 납득하는 건 아니지만."

"박사가 켈시 선생님 잔소리가 싫은 것처럼?"

"그건....그건 누가 들어도 납득 못하지 않을까."

뭐, 내가 그렇게까지 못 살게 굴었으니 놀리는 것 정도는 애교로 넘어가 줄 수 있다.

그나마 조금 가벼워지고, 그런대로 화해하는 무드가 오가고서 다시 안젤리나와 함께 반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부정적인 이야기보다, 목걸이로 하자는 말을 먼저 하는 게 나았을 것도 같다. 호의를 받아들이면서도 나름대로의 이유라던가 사정을 설명할 수 있었을 텐데. 처음에 "반지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자"는 말을 하지 않았어도 거절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을 테고 이 정도로까지 안젤리나를 서운하게 하지는 않았겠지.

너무 사실만을 전하고 그걸 안젤리나가 받아들여주고 이해하기만을 바랬던 건 아닌가 반성하게 된다.

언제 그랬냐는 듯 빙긋빙긋 웃으면서 단말기의 화면에서 후보군을 좁히고, 내 의견을 묻는 안젤리나를 보면서, 그래도 다음에는 조심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위기를 탄 김에 안젤리나의 손가락을 지긋이 만져보고 있자니 정말 부러질 것 같이 얇다는 느낌이었어서 새삼 놀란 건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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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출장왔더니 글이 또 써진다

오늘은 글 써진김에 조금 빨리 올려봄






항상 귀한 시간 내어 읽어주러 와줘서 너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