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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놓은거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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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표면에 오리지늄 결정 분포. 의학 테스트 보고서 참고 결과, 감염자로 확인.-


....뭐야, 이게?

왜....왜?


내가 뭘 잘못했길래?

물론 잘못한 거라면 아마 수도 없이 많겠지.


학교 빼먹고 놀러간다던지, 공부 좀 하라는 부모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던지, 밤 늦도록 안 자고 친구랑 전화라도 한다던지.

하나하나 생각해 보면 부모님 속을 몇 번이고 태우고 남았으려나.


그래도 내가 잘못한 건 알았잖아.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나면 어떻게든 만회하고 싶었다고.

노력했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어.


그런데 왜?

왜 나인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감옥에 갈 정도로까지 나쁜 짓도 안 했잖아.

죽을 죄를 짓지도 않았잖아. 왜 하고 많은 사람 중에 나냐고.


그럼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럼 난 이제 뭘 할 수 있지?


학교는 다닐 수 있나? 

그래도 친구들은 만날 수는 있겠지? 

연애....는 되겠어? 누가 감염자 만나 준다고.


그러면 집에 있을 수 있어?

나는 언제까지 살 수 있지?

그보다 어른은 될 수 있고?


....아냐. 내가 집에 있으면 안 돼.

감염자가 이 집에 있다고 하면 아마 이웃들이 우리 집을 싫어할 거야.


그러면 엄마랑 아빠도 있을 수 있는 데가 없어지겠지.


그래선 안 돼.

내가 울타리 안에 있겠다고 엄마 아빠를 울타리 밖으로 내몰 수는 없어.


이게 그나마 내가 엄마 아빠한테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겠지.


....많은 게 필요하지도 않을 거야.


하나하나 엄마 아빠가 날 위해 사준 거니까. 많이 가져갈 수 없어.

필요한 게 있다면 밖에서 어떻게든 구해야겠지.


그래도 막상 나설 준비를 하니까....많은데.

잘 챙겨야지. 이제 나한테는 이거뿐이니까.


....안녕, 엄마. 아빠.

하나뿐인 딸이 이렇게 되어서 너무 미안해.



오른쪽 어깨가 아프다 싶더니 이쪽에도 결정이 자라잖아.

도려내려 해봤자 아프기만 아프고 칼도 안 들어가고.


집 나온지 얼마나 됐지? 스무 번? 서른 번 자고 난 뒤부터는 생각도 안 나네. 


집 밖은 무자비하고, 가차없는 것 같아.

엄마가 생일 선물로 사 주셨던 가장 좋아하는 옷은 어디 걸려서 찢어졌고. 옷도 이제 집에서 가져온 건 이거 한 벌 뿐이네.


그거 아니여도....세탁방에 넣어놓기만 하면 누군지 몰라도 귀신같이 가져간단 말이야.

지키고 있으면 감염자가 세탁방 쓰고 있다고, 나가라고 쫓아낼 거니까 있을 수도 없는데.


아껴 쓴다고 아껴 썼고 그것도 모자라서 친구들이랑 맞춘 우정반지도 팔았는데....돈도 얼마 없네. 세탁방을 좀 덜 왔어야 했나? 

그래도 옷은 깨끗하게 입고 싶은걸. 


점점 내가 나였다는 증거가 하나둘 없어지고 있어. 

살려고 하다 보니, 내가 나 자신이 아니게 되는 것 같아.


아, 그러네. 제대로 씻은 것도 꽤나 오래 됐구나. 끽해야 새벽에 어디 공원 수돗가에서 겨우겨우. 그럼 옷 깨끗하게 빨아봤자 의미가 없네.


아....샤워하고 싶다. 그냥 이 세탁기 안에 들어가면 씻겨지려나?

슬슬 추워지는 것 같은데, 잘 만한 다른 데를 찾아봐야 할까.


그보다 배고파. 살찐 것 같아서 몇 주 동안 저녁을 안 먹었던 때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괴로워. 

그날 길거리 애들한테 쫓기다가 시간 끌겠다고 비상식량을 내던지지 말았어야 했어. 안 그랬으면 그래도 오늘 좀 덜 배고팠을 건데.


역시 일을 해야 할까? 근데 감염자를 어디 써 준다고.


....지금에라도 집에 돌아갈까?

옛날에는 집이 간섭하는 게 그렇게 싫었는데. 지금은 뭘 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하니까 오히려 허전해.


집이라는 울타리가 이렇게나 높고 따스했다니.


◈◈


편하게 말해도 되는 거야?


챠오, 나는 시라쿠사에서 온 전달자 아지무 안젤리나라고 해.

박사....라고 부르면 되는 거야? 무슨 박사야?


어? 아지무가 성이고, 안젤리나가 이름이야. 안젤리나라고만 불러도 돼. 

나도 박사를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


응? 집 나와서? 달력 보니까 1년쯤 됐나.


어떻게 살았냐고? 그냥 이것저것 했는데. 최근에는 전달자 일 하고 있었고. 나 하늘을 날 수 있거든.

따로 지내는 데는 없었지. 그냥 일하고, 끝나면 어디 바람 덜 들이치고 천장 있는 데서 자고.


그래도 여기는 길거리에서 지내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

집을 나온 애인데도 편견 같은 거 안 갖고 봐주고 있고.


로도스 아일랜드라고만 듣고 왔어. 제약회사고, 감염자 구호단체라면서.

여기선 그럼 뭘 해야 되는 거야?


어? 밥 먹고 싶은 만큼 먹어도 된다고?

샤워는? 진짜? 혼자 방 쓰는 거야? 이불도 있어?


에이, 근데 공짜가 어딨겠어.

나 뭘 해야 되는데?


일은 전달자 일 계속 해도 돼?

오퍼레이터? 가끔 필요할 때만 있으면 된다고?


광석병....? 그거 늦출 수 있는 병이었어?

근데 약 비싸잖아. 낫지도 못하고. 그럼 약 먹는 거 의미가 있어?


전달자 일이랑 오퍼레이터 일 하면 알아서 계산해서 빼고 줄 거라고?

....어? 진짜? 그렇게 빼고 받아도 그 정도야?


....다 좋은데, 광석병이 늦춰진다는 건 좀 모르겠네. 어차피 죽을 텐데. 그런 거 늦춰서 뭐가 좋다고. 

그러느니 그냥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거나 실컷 하는 게 좋을 텐데.


◈◈◈


챠오, 박사. 불렀다길래 와 봤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전에 여기서 배운 거 복습 정도나 하고, 전달자 일 하고 있지.


밥도 맛있고, 오히려 양껏 먹다 보니 살찌는 게 아닐까 싶은 정도야. 한참 먹을 때니까 많이 먹으라고? 농담도 참.

친구도 생겼어. 나랑 비슷한 나이대인 감염자 애들도 있더라고. 이거 봐봐. 같이 놀러가서 사진도 찍었거든.

아, 그리고 이거. 일할 때 입으려고 새로 산 옷이야. 새하얘서 조심해서 입어야 되는데, 따뜻하고 가벼워. 잘 어울리지?


음? 출전....오퍼레이터라고?

나 잘 하는 게 뭐 없는데? 여기 온지 꽤 됐는데도 나 오퍼레이터로는 잘 안 불렀잖아.


중력 아츠를 써 달라고? 갑자기?

에이, 그런 건 나보다 잘 하는 사람들 많잖아. 아델 언니라던지, 엑시아 언니라던지.


그 둘이 못 나가? 어디 안 좋대?

그건 아냐? 좀 이상한데. 뭐야, 그 작전.


....어?

위기 협약이라고? 그게 뭐야? 처음 들어봐.


◈◈◈◈


챠오, 박사. 불렀다길래 와 봤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전에 왜, 작전에 나갔었잖아. 그때 같이 나갔던 오퍼레이터 분들이 정말 잘 했다고, 고맙다고 말해줬어.


이렇게까지 칭찬받은 거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 집 나오고 처음 아닐까?

내가 이 정도로 칭찬 받아도 돼?


된다고? 잘 했다고....이게 뭐야?

정예 오퍼레이터? 내가?


박사한테 필요한 사람이 된 거야?

그렇구나. 박사가 날 이렇게 믿어주는 이상 나도 지금보다 더 노력해야겠네.


그러면 한 번씩 비서 오퍼레이터 일 아니여도 놀러와도 돼?

박사가 뭘 해줄 필요는 없어. 나 수다떠는 거 좋아하거든.



오늘은 미노스에 갔다왔어, 박사.

하늘을 날아다니다 보면 유적 같은 게 많아서 되게 신기하거든. 일부러 그쪽으로 날아갈 때도 있어.


어 왜 요즘 안 돌아왔냐고? 아아, 요즘 배달할 게 많다 보니까. 이거 보내고 나면 그쪽 가는 김에 이것도 보내달라던가.

기껏 준비했는데 못 보내드려요, 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 요 며칠 동안은 높은 건물에 올라가서 잤어.


어디 들어가서 자라고? 그것도 한두 번이지.

정 불안하면 내가 쉴 때 어디서 쉬는지 보여줄 수 있는데.


....


말도 안 돼.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


박사 나랑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잖아.

가족은커녕 친척도 아니고, 그냥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나랑 오퍼레이터 분들 지휘하는 사람 아니었어?


한 번씩 찾아가면 코코아 내주고, 내가 이야기하면 들어주고. 그런 정도였잖아.


근데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거야?

무서워. 박사 이렇게까지 화 내는 거 처음 봤어. 


더구나 난 감염자인데. 어차피 무슨 일 생겨도 광석병에 걸렸으니 날 걱정할 사람도 없잖아.


아니, 더 이상 상관 없는 게 아닌 거야?

아직 내가 이 세상에 있었으면 하는 사람이 있는 거야?


....그게 박사인 거고?


....진짜?


◆◆


....거짓말 같아.

오늘 있던 일은 정말 믿을 수가 없어.


아무리 그래도 박사가 그렇게까지 나를 신경써 줬다니.

그 사진으로 뭐가 돌아올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박사가 나한테 마음을 써 준 거잖아.


왜 그렇게까지 해 준 거지?

아니, 어쨌든 그런 건 됐어. 박사가 그렇게까지 해 줬다는 거니까.


아까 울어서 그런가, 심장이 계속 엄청 뛰어서 잠도 안 오네.

내일도 일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새벽 세 시인데 잠이 오질 않아.


박사 손톱 잘라준 거랑, 박사가 도닥여 준 거랑, 사진을 건네주면서 불안해하던 얼굴도.

하나하나 꿈만 같아서 눈에 아른거리는 것 같아.


보고 싶다. 지금 찾아가도 사무실에 없겠지.

아니, 박사 옆에 있고 싶어졌어. 아까 도닥여준 걸로 그치지 말고, 꼭 안아주었으면 좋겠어.


....아, 그런데....나 감염자잖아.


아무리 감염자 구호단체의 수장인 사람이라지만 그래도 사람인데, 감염자한테 쉽사리 정을 주긴 힘들겠지.


정말로, 정말로 만에 하나 잘 된다고 해도 어느 정도 선 이상으로는 못 갈 거고.

거기다 그런 거 아무 상관 없는 사람도 이 배에 널리고 널렸는걸.


감염자인 언니들도, 비감염자인 언니들 중에서도 박사한테 마음 있는 사람 있는 것 같았고.

어린 나한테는 순서도 안 오겠지. 감염자니 더더욱 그럴 거고.


그래도, 착각이라도 좋으니까.

....박사도 나를 좋다고 해 주면 정말 좋을 것 같아.


....


....어? 나가자고? 성탄절에?

나랑?


◆◆◆


광석병에 걸려서 집을 나올 때만 해도 이런 건 생각도 못 했는데.

로도스 아일랜드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누가 내 물건 훔쳐간다거나 먹고 사는 걱정밖에 안 했는데.


내 방이 있고, 그 방에는 열쇠도 잘 걸려 있고.

춥거나 덥지도 않고, 비 맞을 걱정도 없고.


가지고 있는 걸로 한 끼 한 끼 아껴먹어야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좀 먹는 양을 줄여야 하나 싶고. 

박사는 많이 먹을 때라고 했지만 그래도 너무 살찌면 보기 안 좋잖아. 생각해 보니 코코아도 곧잘 마시고 있었지.


한 달 일해서 벌면 그래도 갖고 싶은 걸 살 수도 있고, 오늘처럼 박사랑 데이트를 나올 정도로 돈도 모이고.

선내 사람들이 구해 달라는 걸 구해 주면 부수입도 생기고.


생일에 박사랑 놀러 나갈 수 있었다니. 그것도 박사가, 일부러 오늘을 위해서 휴가까지 내서 맞춰줬잖아.

게다가 마지막에....잘 자라고, 키스까지 해 주고....


나 이렇게까지 행복해도 되는 거야?

근데 어떡하지. 이 이상 행복해지고 싶은데.


또 놀러 나가고 싶다. 아니, 또 보고 싶어.

지금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박사한테 밤을 새도록 말해도 부족할 것 같아.


이렇게 행복한 기분이 어느샌가 없어진다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은데....


◆◆◆◆


생각해 보니 우리 꽤 오래 만났는데 같이 맞춘 아이템이 없네.

역시....역시 반지일까.


이것저것 있겠지만 그래도 역시 반지가 먼저 떠오르네.

커플이니까 커플링 정도는 있을 법하고. 근데 박사 손가락 사이즈가 얼마나 되려나? 손대중으로 알 수 있으려나.


아, 이 반지 디자인 되게 예쁜 것 같다. 남자가 끼고 있기도 부담이 덜할 것 같고.

언젠가 그 반지가 결혼반지가 되는 날이 올까.


....어? 반지를 나중에 하자고?


그러고 보니 우리 사이, 아직도 다른 누구한테 이야기 안 했었지.

그럼 여전히 박사는 아직도 우리 사이를 숨기고 싶은 걸까.


왜? 숨어서 연애를 해야 할 정도로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정말 그런 거야?

내가 박사랑 만나는 게 그렇게나 위험하다고 하면 왜 고백을 받을 땐 이야기 안 했어? 그때 이야기했어도 나는 감수할 수 있었는데.


....


정말 왜 그랬던 거지? 혹시 우리 사이가 누군가에게 알려지는 게 부끄러운 일인 건가?

우리 둘만 서로 좋으면 되는 거 아니었어?


아니면 설마 나 몰래 누군가를 만나는 건 아닐까?

아니, 아닐 거야. 


하지만 나는 일하는 시간에는 로도스 아일랜드 밖에 있잖아.

그 사이에 누군가 만나고 있어도 이상하진 않을 거고.


아니, 그렇진 않은 것 같았어.

박사한테 달라붙으면 항상 익숙한 냄새였으니까. 조금이라도 낯선 냄새가 났으면 내가 알았을 거고.


그럼 지금까지 제대로 된 키스는 왜 한 번도 안 해 준 거지? 내가 몇 번이나 달라붙었는데?


먼저 밀어붙이면 당황할까봐 나도 먼저 해 보진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반 년 가까이인데.

내 생일에 키스하고 그 뒤로 한 번도 박사가 나한테 그 이상으로 진하게 키스해 준 적이 없는 것 같아.


그 이상 정을 주기가 싫어서는 아닐까?

박사도 연애 처음이라고 했었지. 그러니까 좀 더 눈에 차는 사람을 만나려고, 이제 슬슬 나를 정리하려고 하는 거겠지.


그래, 나중에 박사는 아이도 가지고 싶어할지도 모르잖아.

그럼 감염자 아닌 사람하고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싶겠지.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박사를 잡아야 할까? 아니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이 사람이 더 행복하도록 놓아줘야 할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박사도 그때 날 믿어줬는데 나도 박사를 믿어야지.


박사가 정말 그럴 거라는 보장도 없잖아. 그냥 내가 가장 안 좋은 생각을 하는 것 뿐이야.

그러니까 나도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 걸 하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이 정도로까지 밀려나고 있으면 박사가 정말 마음이 없는 게 아닐까.


수영복 차림에는 눈길만 주고 아무것도 안 했어.

바로 옆에서 무방비하게 자고 있는데도 손도 안 댔어.


술 마시자는 약속을 기억했으면서 정말 같이 술만 마셨어.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면서 덮치고, 일부러 옷까지 풀어헤쳐서 몸을 비볐는데도 껴안아주기만 하고 손도 안 댔어.


어제 밤 일을 기억하고 있을 텐데, 바보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것도 하루 종일 신호를 보냈는데도 모르는 척했어.

그리고 여자애가 하루 밤 더 재워달라고 하는데도 밀어내고 있어.


이 정도나 되면 이제 정말 박사는 마음이 없는 건가봐.


안 돼.

박사가 다른 사람하고 몸 섞는 걸 생각하니까 속이 뒤집힐 것 같아.


ㅡ데려다....


박사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


데려다 주겠다고?

아니면 데려다 주다가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서 나 데려다 주면?

내가 방에 들어오라고 하면 들어올 거야?


안 돼.

박사가 다른 사람하고 몸 섞는 걸 생각하니까 속이 뒤집힐 것 같아.


빼앗기기 싫어.


역시 감염자하고는 몸 섞고 싶지 않은 거야?....또 '스무 살'이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이번에도 또 뒤로 미룰 생각인 거야?


'박사'는 모두의 것이고, 로도스의 것일지 몰라.

그래도 여기 있는 '박사'는 나만의 것일 텐데.


그리고 나는....나는 박사만의 것인데.

아지무 안젤리나든, 오퍼레이터 안젤리나든.


나한테 모든 걸 전부 돌려준 이 사람한테 나는 지금 당장에라도 무엇이든 줄 수 있는데.


억지 부리지 말라고? 

나는 오늘까지 정말 끊임없이 고민했고, 혼자 얼마나 부끄러워했는데. 박사한테 말도 할 수 없었고.

어제오늘 같이 시간 보내면서도 혹시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까, 평소처럼 잘 있었을까 하고 걱정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여자애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이 사람은 이러고 있는 거잖아.

정말로 마음이 없는 거야?


가정도, 친구도, 일상도 전부 빼앗겨 버렸는데.

이 사람마저 빼앗긴다고?


안 돼. 싫어.

박사가 다른 사람하고 몸 섞는 걸 생각하니까 속이 뒤집힐 것 같아.


박사가 날 붙잡아 줬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왜 나는 박사를 밀어낸 거지?


박사도 내 마음을 좀 알아달라고?

사랑하는 사람이 밀어내면 얼마나 애가 타는지, 얼마나 안타까운지 이 사람이 백분의 일이라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어?


....아니. 아닐 거야.

내가....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박사. 박사?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흔들어도 깨어나질 않아.

숨은 쉬고 있어? 약한 것 같아.


미, 미안해. 눈 좀 떠 봐....내 말 들려?


막 위험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조금 있으면 일어날 수도 있으려나?


....혹시 잘못돼서 이대로 못 일어나면 어떻게 하지?


아니, 아니야. 그럴 리는 없어. 그래도 일단 뭐라도 해야겠지.

잘 못 하지만, 아츠 치료라도 어떻게든 될 수 있다면.


정 안 된다면 들킬 걸 각오하고 의료부에라도 데려가야겠지만 일단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이건 내가 잘못한 거잖아.


제발 눈 좀 떠 줘, 박사.

내가 잘못했어.


....아니, 박사가 눈을 떠도 되는 걸까?


더 이상 이 사람은 나를 바라봐주지 않아. 습관적으로, 모두에게 대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이니까 그랬던 것 뿐이야.

더 이상 가까이 해주지도 않아. 반 년 동안, 한 번도 이 사람은 나를 그 이상으로 원하지 않았잖아.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같이 보냈던 추억마저도 전부 부정당할 거야.


어쨌든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이대로 놔버리는게 나을까?


아니, 미쳤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살려야 하는게 당연하잖아. 이 사람은 나 말고도 많은 생명을 짊어지고 있어.


게다가 박사는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도 죽이지 말라고 했던 사람이야.

그런 말을 들은 내가 박사를 죽인다니, 말도 안 돼.


어지러워. 쉬지도 못하고, 아츠를 너무 많이 쓴 걸까?


ㅡ그리고 버려지는 게 당연하겠지.


맞아. 아츠를 써서 강제로 덮치려 했고, 내가 잘못했으면서도 오히려 언성을 높였고, 미안하면서 날 잡으려 한 사람을 아츠로 뿌리쳐 버렸으니.

아냐. 안 돼. 버려지고 싶지 않아.


ㅡ양심이 있어? 그런 짓을 하고 용서받길 바라는 거야?


그래. 버려져도 싸.

역시 나랑 박사는 잘 될 수가 없었어. 


이제껏 만난 게 정말 운이 좋았던 거야. 1년이나 이어졌잖아. 아마 평생 운을 다 썼을지도 몰라.

가끔 힘들어도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으니까, 이제 끝날 때가 됐을 뿐이야.


좋아하는 사람하고 함께했더니 혼자 하거나 친구들하고만 하던 것들이 두 배는 더 즐거웠어.


가끔 이 사람이 나를 위해 서투르게나마 무언가를 준비해 주면, 그 마음씀씀이가 너무 고마웠어.


정말 좋아하는 사람하고 첫키스를 하고 싶다는 소원도 이루어 주었어. 잊혀지지 않을 생일 선물일 거야.


하지만....


ㅡ이제 박사가 깨어나면 우리 사이도 끝나버리겠지.

ㅡ그리고 그대로 박사가 깨어나지 못해도, 전부 끝나버리겠지.


어떻게 되든 함께했던 추억도, 나눠온 온기도.


웃고 울고 떠들던 그 시간들도.


그래도.


나는 버려져도 괜찮아.


그러니까 제발 눈 좀 떠 줘, 박사.


ㅡ미안해.


깨어나서 나를 미워해도 좋고, 분풀이를 해도 상관없어.

나한테 실망했겠지. 집을 나오고서 따뜻하게 나를 맞아주었던 이곳에서 나를 쫓아내도 상관없어.


내가 잘못했으니까, 다 받아들일 수 있어.


ㅡ미안해, 박사. 미안해, 미안해....


무섭고, 아츠를 너무 많이 써서 숨까지 막혀.


이 사람이 깨어났을 때 내게 닥칠 일들이 너무 무서워.


아니, 이 사람이 깨어나지 않는다면 받아들여야 할 현실은 몇 배나 더 무서워.


ㅡ잘못했어. 잘못했어. 미안해. 미안해....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어. 

최소한 사과는 할 수 있게 해 줘. 


만에 하나라도 그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에.


조금만 더 박사랑 있고 싶어.

한 번만 더 박사한테 정말 사랑했다고 말하고 싶어.

박사 덕분에 내가 감염자인 걸 잊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어.

정말 즐거웠다고,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어.



그러니까 제발 눈 좀 떠 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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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및 오류 지적, 피드백 환영

오리지널 설정도 있을 수 있음.




안젤리나가 집을 나오면서부터 지금까지 있던 일들을 안젤리나 시점으로 훑는 편이 되었음.

그래서 시라쿠사 = 이탈리아가 모티브 = 로마 라는 이유로 넘버링을 로마자로 쓴 것.



2023.05.21. 추가


원래는 안젤리나가 박사한테 호소하는 부분이 앞편에서 썼던 거라 생각해서 안 넣고 바로 박사 구석으로 날려버린 장면으로 마지막 장면이 시작되었는데, 왜 안젤리나가 박사를 밀쳐버린 건가 하는 묘사가 부족했나 싶어서 조금 더 넣어봤음. 이게 안젤리나의 행동이 급발진이라면 박사한테는 말도 못하고 쌓아놓던 불안감이 터진 거고, 내용상 급발진이라면 전개에서 표현이 부족했던 거니까.


근데 이러나저러나 그런 설명이 필요했다면 내가 전달을 잘 못했던 거겠지. 요번에 쓰고서 좀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음.







오늘도 찾아와주고, 읽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