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박사, 받아라."


"뭔데 이건."


  뜬금 없이 켈시가 던지듯 건넨 물건을 받아들었다. 투박한 종이봉투를 대충 잡아서 건네는 꼴을 보니, 그다지 중요한 물건은 아닌 것 같아 받아들였다. 켈시가 나에게 물건을 건네주는 경우는 보통 둘 중 하나다. 버릴 물건이거나...


"누구한테 전해줄까?"


  잔심부름을 시키거나. 저 여자에게 있어 나는 딱 그 정도일테니까. 이런 일을 한 두번 당해본 게 아니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불만을 대놓고 표현하는 것이 무례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개의치않고 대놓고 표출했다.  할 이야기가 있어 누구를 찾으러왔다가 켈시를 마주친 터에, 가볍게 인사만 하고 도망치려 했는데 발목을 잡혔다.


  그리곤 별다른 말도 없이 잔심부름을 떠넘겨 받았으니, 이 정도 불만은 표출해도 될 거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켈시가 아니꼽다곤 해도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정도로 사이가 어긋나지는 않았기에 싫은 티만 내면서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하지만 켈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날 가만히 바라보았다.


"박사, 너라는 남자는 정말..."


"왜."


  시비조로 들어오는 말에 발끈해서 짜증을 냈다. 하지만 저 망할 녹색 고양이는 한숨을 내쉬며 가볍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니다. 그 물건은 네꺼다. 선물이다."


"선물? 갑자기?"


  선물을 줄 거면 좀 제대로 포장해서 주던가. 무슨 시장바닥에서도 안 쓸법한 투박한 종이봉투에 대충 담아서 건네주는 건 또 뭔데. 불만스럽게 봉투 안을 들여다보았다. 갈색의 불투명한 병이 보였다. 희미하게 알약같아 보이는 실루엣이 보인다.


"영양제다. 저번에 검진 결과를 보니, 피로가 쌓인 모양이더군. 피로 회복에 좋을 거다. 복용량은 식사 후에 2알. 하루에 1번만 먹으면 된다."


"....고마워. 잘 먹을게."


  하지만 선물을 확인하고나자, 방금까지 짜증을 부린 게 미안해질 정도였다. 놀랍게도, 최근에 내가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가 만성적인 피로에 시달리는 건 사실이었다. 어떻게 또 이런건 귀신같이 알고 이런걸 준비했대. 평소에는 달라고해도 주지도 않던 사람이.


"근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선물이야, 오늘이 무슨 날이야?"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딱히 오늘이 어떤 기념일은 아니었다. 다른 나라에서 챙기는 명절도 아니었고.... 켈시의 생일도 아니었다. 아니면 이 약의 임상실험이라도 하려는 걸까? 잠시 의심의 눈초리로 켈시를 째려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켈시의 차가운 눈동자 뿐이었다. 


"....곧 알게 될 거다."


  켈시는 한숨을 내쉬더니, 그 말만을 남기곤 순식간에 뒤돌아 저 멀리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복도 끝을 돌아 사라지는 녹색 고양이의 뒷모습을 놓치고 나서야, 켈시에게 내가 찾는 그녀의 행방을 물어보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하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타이밍을 놓치고도 한참이나 지났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사라진 켈시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켈시가 선물로 준 약병을 가만히 바라보다, 그냥 체념하고 직접 찾기로 했다.


  하, 걔는 어디로 가서 이렇게 안 보이는 거야? 그리고 켈시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걸 준 거지?



1.



  사무실이랑 사무실은 전부 뒤지고, 창고까지 해집어봐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쉬다가, 사무동에는 그녀가 없을거라고 결론 내리곤 혹시나 싶어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곧 저녁시간이다. 그녀도 밥은 먹을테니까, 겸사겸사 나도 밥을 먹으면서 기다리면 그녀가 나타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아까 일을 하면서 간식을 하도 많이 먹은 탓일까, 그다지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그래서 샐러드랑 빵, 딸기잼 정도만 챙겨서 자리에 앉았다. 간단하게 식사를 하면서 자리를 지켰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보면 오늘따라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샐러드를 나눠주던 굼도 뭔가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고.


"자리 비었나?"


  그리고 그녀 대신, 그가 나타났다.


"당연하지."


"그럼, 사양하지 않겠네."


  실버애쉬는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를 든 채 내 앞에 앉았다. 지글거리는 소리랑, 코 끝을 자극하는 고기 향에 나도 모르게 군침이 나왔다. 아, 그냥 나도 고기나 먹을까.


"먹겠나?"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른 고기를 권유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먹겠냐! 하며 태클을 걸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냥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그러자 실버애쉬는 자른 고기를 입에 넣었다. 역시 회장님이라 그런가, 스테이크를 써는 모습도 기품이 넘친다.


"오늘은 별 일 없었나?"


  그리곤 실버애쉬는 여느때처럼 내 안부를 물었다. 생각해보면, 그와 얼굴을 보는 것이 꽤 오랜만이었다. 못해도 2주 정도는 지났던 거 같은데.


"뭐 늘 똑같지. 오늘도 하루 종일 일만 했고. 할 이야기가 있어서 사람을 찾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고 있어."


"사람? 아, 그녀 말인가."


"응. 평소에는 안 찾아도 잘만 보이던 애가, 갑자기 오늘따라 어딜 간 건지. 로도스 함 바깥으로 외출한거 같지는 않은데. ...아, 실버애쉬 너는 본 적 없어?"


"미안하지만, 모르겠군."


  마침 잘 됐다 싶어 실버애쉬에게 그녀의 행방을 물어보았지만 실버애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뭔가 짐작이라도 했다는 듯 씨익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 속 한켠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씁... 점마 저거 아는 거 같은데.


  하지만 추궁해봤자 얻을 수 있는 게 전혀 없을 것 같아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수긍했다. 먹으면서 이야기를 했던 지라, 거의 다 먹은 샐러드를 비웠다. 빵에 잼을 바르고, 한입 크게 베어물고 있을 때 쯤 실버애쉬가 품 속에서 뭔가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의 꽤 작은 상자다. 


"이건 뭔데?"


"선물일세, 맹우여."


"선물? 왜?"


"........그대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가 보군."


"켈시도 그 소리 하던데. 오늘이 무슨 날인데?"


  실버애쉬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는 그대로 웃지 않는 척이라도 하더니, 이번에는 대놓고 웃고 있다.


"왜, 뭔데." 


"아, 뭐 특별한 날은 아닐세. 그냥, 나도 선물 받은 물건인데. 나보단 맹우에게 더 유용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럼 지금 열어봐도 되지?"


"물론일세."


  실버애쉬가 선물을 주는 것이 꽤 놀랍긴 했지만 특이하거나 드문 일은 아니었다. 실버애쉬는 생각보다는 자주 나에게 이런저런 선물을 주곤 했다. 그 보답을 준비하는 것도 일이라서 개인적으로는 너무 자주는 안 줬으면 했지만.


  아무튼 실버애쉬가 건넨 상자를 열어봤다. 그러자, 안에는 고급스럽게 빛나는 만년필이 들어 있다. 마침, 서류 작업이 많아진 차라 만년필 한 자루 쯤은 들고 다녀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 남자는 귀신같이 이를 알아챈 모양이다. 


"오...."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고마워."


"별 말씀을."


  실버애쉬가 선물한 만년필을 상자에서 꺼냈다. 손에 쥐어보고 몇 번 둘러보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엄청난 고급품 같았다. 이대로 내가 서류작업에 쓰는 게 아까울 정도로. 


  평소에 실버애쉬가 나에게 이런저런 선물을 자주 주고는 했지만, 그건 대부분이 가벼운 친교의 의미를 담고 있어 가치 있는 물건이 많지는 않았다. 대부분은 술 같은 음식이거나 쉐라그의 특산물 같은 자잘한 것들이었다. 물론 그것들이 가치가 없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만년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런 선물이면 어떤 걸 줘야 보답이 되려나.... 잠시 고민했지만 당장 구할 수 있는 물건 중에서는 생각나는게 없었다. 조만간 클리프하트하고 클로저랑 이야기를 좀 해봐야 겠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실버애쉬가 이런 고급품을 선물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선물을 주는데 왜 주는 거야? 하고 묻는 것도 실례인 것 같고.... 애초에 그가 시원스래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다.


  잠시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도, 실버애쉬는 스테이크를 전부 비웠다. 식사를 끝마치자마자, 실버애쉬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중에 보지. 좋은 시간 보내게, 맹우여."


"아. 만년필 고마워, 잘 쓸게."


  실버애쉬는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곤, 식당을 떠났다. 자신의 식기를 반납하고 식당 밖으로 나가던 그가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뭐 할 말이 더 있나? 싶어 그를 바라보니, 그는 내 앞에 커피 한 잔을 내려놓고는 한 마디 말을 남긴 채 다시 떠났다.


"그녀는 훈련실에 있을 걸세."


  그 말을 듣자마자, 실버애쉬가 준 커피를 한번에 들이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럽게 뜨거운 걸로 줬네, 저 망할 살쾡이가.



2.



"한심한 놈."


"어.... 미안?"


  식사를 끝마치고 훈련실로 달려갔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 대신...이라고 해야 할까, 조금 껄끄러운 얼굴이 대신 그 곳에 있었다.


"됐어."


  나를 째려보는 연보랏빛 눈동자가 매섭다. 왠지 근처에 서 있기만 한데 땀이 줄줄 흐른다. 이상하다... 분명 아츠는 안 쓰고 계시는 거 같은데...


"당신이 연락을 제대로 받을거라 기대한 내가 멍청이지."


  기대도 안 했다는 듯 내쉬는 한숨이 화살처럼 쏘아져 아프게 양심을 찌른다. 하지만 뭐라 할 말이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혼나려고 훈련실로 온 게 아닌데.... 하지만 이 말을 해봤자 그녀의 화를 돋구기만 할 것 같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어깨까지 닿는 붉은 머리카락과, 까칠해보이는 연보라빛 눈동자. 그리고 몸 전체에서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미미한 열기.


  로도스의 가드 오퍼레이터, 레바테.... 아니 수르트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날 째려보고 있다.


  수르트가 나에게 짜증을 내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그녀의 연락을 씹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


  뭐라 할 말은 없었다. 오전에는 일 한다고 휴대전화를 보지 않았고, 오후부터는 그녀를 찾아다닌다고 로드스 전체를 돌아녀서 내 사무실로 돌아가지를 않았다. 그리고 휴대전화는 내 사무실에 놔두고 왔다,


  그러니, 연락이 왔어도 봤을 리가. 그리고 정말 타이밍 나쁘게도 오늘. 수르트가 정말 드물게 나에게 용건이 있어 내게 연락을 보냈다는 것이었다. 이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그 까칠한 수르트가 몸소 나에게 먼저 연락을 보내는 날이 올 줄이야. 그것도 하필이면 내가 휴대전화를 놔두고 다닌 날에.


  타이밍이 나쁘다고 밖에 할 말이 없었지만, 어차피 그래봤자 변명이었다. 


"그래서.... 왜 찾은 거야?"


"하아? 그걸 몰라서 물어? 너,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


"몰라. 켈시랑 실버애쉬도 그 소리던데. 오늘이 무슨 날인데 도대체."


"..........."


  수르트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지고, 날 째려보는 눈초리가 더 날카로워졌다. 저 상태의 수르트에겐 무슨 말을 하건 매도의 말 밖에 돌아오지 않을 거다. 그래서, 더 이상 캐묻기를 관뒀다.


"그 녀석 말 그대로잖아."


  수르트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손을 올렸다. 


"됐어. 자, 이거나 받아."


  수르트가 어떤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지폐 같아보이는 물건이었지만, 용문폐는 아니었다. 그래서 받아드니, B로 시작하는 고급 아이스크림 가게의 쿠폰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수르트를 쳐다보았다. 수르트가..... 선물을?


  그것도 자기가 환장하는 고급 아이스크림 가게의 쿠폰으로????


  이 말이 턱 끝까지 튀어나왔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수르트의 레바테인이 나를 그대로 반으로 가를 것 같아서, 무서워서 참았다.


"선물이야."


  켈시, 실버애쉬에 이어 수르트에게까지 선물을 받았다. 이 쯤 되니 오늘이 무슨 날이긴 싶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렇다하게 떠오르는 날은 없었다. 진짜.... 뭐지?


"....고마워."


  하지만 그것보단 일단 선물을 해준 눈 앞의 수르트에게 감사인사를 하는 게 먼저였다. 그리고 겸사겸사 묻고 싶은 것도...


"아 그리고..."


"그 녀석이라면 니 집무실에 있어.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내 질문보다 수르트의 대답이 더 빨랐다. 내가 그녀를 찾아다니는 건 어떻게 알고 있었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가, 곧바로 정답을 깨달았다.


  그녀가 일부러 날 피해다니며 장난을 치고 있다. 


"빨리 가 봐."


  수르트는 더 이상 나를 잡아둘 생각이 없다는 듯, 등을 돌려 훈련실로 향했다. 그 녀석이 뭘 원하는 건지 전혀 감이 안 잡혀 수르트에게 좀 더 추궁해보려했지만, 수르트 주변에 피어오르는 열기와 아지랑이를 보는 순간 꽁지 빠지게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목적지는 정해졌다.



3.



  내 사무실의 불은 꺼져 있었다. 당연히, 내가 해가 떠 있을 때 쯤에 밖으로 나갔다가 한번도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사무실의 불을 켰다. 벌써 해가 다 져가는 저녁이었던 터라, 갑자기 켜진 불에 눈이 조금 부셨다. 하지만, 금방 돌아온 시야는 어렵지 않게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이야~ 오래 기다렸어, 박사."


  라플란드가, 숨을 생각도 없이 내 의자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었다.


  참으로 당당한 모습이었다. 내 의자를 완전히 뒤로 젖히고, 맨발을 책상 위에 올린 채 거만한 자세로 날 반기고 있다. 그 순간에도, 그녀의 깨끗하고 윤기가 흐르는 맨다리와 맨발로 향한 내 시선이 참으로 원망스럽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거 아냐? 도대체 어딜 돌아다닌 거야."


  라플란드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답지 않게 조심스럽게 다리를 내리곤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온 라플란드는 평소에는 훤히 열어놓고 다니던 코트 자락을 꼭 싸맨 체 내 앞에 섰다. 그리곤 마치 내 반응을 기다리는 듯 실실 웃고 있다.


  그 모습에 짜증이 확 올라왔다. 내가 하루종일 돌아다니며 자기를 찾았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훈련실에서 수르트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라플란드는 내 뒤를 밟았건, 아니건 내 행적을 따라다니며 교묘하게 숨었던 것이다.


  라플란드의 장난에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갔다. 최근에는 이런 장난을 치지 않아서,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내 잘못이다.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간 내 잘못. 몇 번 당한 전적이 있음에도 시간이 좀 지났다고 다 까먹어버린 내 잘못.


".....네가 불렀잖아!!! 데이트 하자며!!"


  그리고 망할 여자친구에게 속은 내 잘못이다.


"아니, 그렇다고 한 번도 여기로 안 올 줄은 몰랐지."


  그래도 짜증을 섞어 따져봤지만, 역시 돌아오는 것은 능청맞은 미소 뿐이었다. 그 미소를 보자, 화를 내는 쪽이 바보가 되는 것 같아 차올랐던 짜증도 팍 식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라플란드가 비킨 의자에 앉았다. 아직 그녀의 체온 때문에 따뜻하다.


"그래서. 오늘은 왜. 보통 이런 식으로 날 속일 땐, 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 거잖아."


  이런 식으로 라플란드에게 속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녀와 사귀기 시작한 후로, 이런 식으로 가짜 약속을 잡아서 날 해매게 하는 일이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언제나, 어떤 목적이 있었다. 가장 최근에는 나랑 데이트 하기 전에 텍사스랑 한판 붙겠다고 날 버려두고 갔었었지.


  그래서 조금은 짜증을 섞어 라플란드를 째려봤다.


".....아, 그게."


  라플란드가 드물게 말 끝을 흐렸다. 초점을 잃은 시선과 불안한 듯 움직이는 손끝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라플란드가 창문으로 향했다. 그리곤 커튼 뒤로 손을 넣더니....

  

"생일 축하해, 박사."


  꽃다발을 내밀었다. 갑자기 눈 앞까지 들이밀어진 꽃다발에 향기가 훅 퍼져나왔다. 익숙하지만, 꽃향기는 아니었다. 꽃향기보다는, 라플란드가 항상 뿌리고 다니는 향수의 향기가 났다. 


"....아, 진짜 안 맞네."


  라플란드는 나에게 던지듯 꽃다발을 떠밀었다. 라플란드의 창백한 피부가, 빨갛게 피어오르듯 물들었다.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이 퍽 신선했지만, 그것보단 라플란드가 말한 단어가 귓가를 맴돌았다.


"....생일....?"


"그래. 오늘, 네 생일이잖아 박사."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남의 생일만 항상 챙기고, 내 생일에 대해서는 평소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야, 켈시랑 실버애쉬, 수르트의 반응이 이해가 됐다. 세상에 자기 생일도 까먹고 다니다니. 그 세 사람은 내가 얼마나 어이 없었을까.


  하지만 퍽 의문이 들기도 했다. 내가 내 생일을 까먹고 있는 만큼, 내가 내 입으로 내 생일이 언제다 하고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그건, 연인인 라플란드에게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당신이 자기 입으로 나랑 생일이 딱 한달 차이 난다며. 그래서 대충 때려 맞췄지."


  ....그런 이야기를 했던가?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딱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피곤할 때 잠결에 그런 이야기를 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당신이 휴대전화를 놔두고 가서 다행이야. 오늘, 하루 종일 당신 휴대전화가 울리더라고."


  아, 내 휴대전화. 정말 자연스럽게 라플란드의 손에 들려있는 내 휴대전화를 잡아채서 화면을 켰다. 이런저런 문자가 꽤 쌓여 있었다. 하지만 내용은 거의 다 같았다.


[박사님, 생일 축하드려요!]


  아미야의 문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문자를 보낸 시간이 정확히 자정인걸 봐선, 내 생일로 날이 바뀌자마자 축하 문자를 보낸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저 문자를 확인 못했다. 그 이유야....


[아, 아미야. 라플란드인데, 오늘 저녁까지는 박사랑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박사 좀 빌릴게.]


  라플란드가 어느세 내 휴대전화로 수작을 쳐놓은 상태였으니까. 내 방에서 같이 잤으니, 내가 잠 든 틈에 휴대전화를 슬쩍한 모양이었다.


  이제야 확인했지만, 온 문자들 거의 대부분에 라플란드가 답장을 보내놓은 상태였다. 그 내용도 어찌나 한결 같은지, 밤까지만 나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내 생일이 축하받는게 싫었냐."


"이렇게 안 해놓으면, 네가 오늘이 자기 생일이라는 걸 너무 빨리 알아챌 거 같더라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결국 라플란드의 수작에 보기좋게 놀아난 꼴이 됐다. 그래도 딱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어차피 딱히 생일을 챙길 생각도 없었고, 라플란드가 저렇게 수작을 부려놨어도 이미 축하는 받았다. 그리고, 결국 라플란드도 내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이런 서프라이즈를 준비한 모양이었고.


  두 번은 당하기 싫지만.


  하지만 기본적으로 휴대전화를 도둑맞아놓고도 하루 종일 몰랐던 내 잘못이 가장 큰 지라, 별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둘이서 생일을 보내는 것도 괜찮았다. 어차피, 내가 올해가 끝나면 로도스에 없을 것도 아닌데.


"아미야가 널 위해서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중이야. 이제 슬슬 가면 될 거야. 내가 안내하기로 했거든."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스포를 당하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넌 그걸 또 말하고 있고."


  어이가 없어 라플란드에게 따졌다. 생각해보면, 오늘 기묘할정도로 아미야를 보지 못했는데 다 내 생일파티를 준비하고 있어서였구나. 하지만 그래도 아미야도 열심히 준비하고 있을 서프라이즈인데, 멋대로 이야기하는 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그래서 라플란드에게 따졌다. 


"하하, 당연하지! 아무리 아미야라고 해도, 널 놀래키게는 못하지. 그건 나만 할 거거든."


  라플란드는 씨익 웃었다. 날카로운 이빨이 잘 보이는 미소를 지어보이는 그녀의 표정이 먹잇감을 노리듯 음흉하게 빛났다. 

  

"너도 참 특이해."


"그런 날 좋아하는 네 취향도 참 특이하고."


  비겁하게 팩트로 승부하다니. 라플란드의 장난기 섞인 말에 웃음으로 대답하곤, 그녀에게 받은 꽃다발에 코를 가까이 가져갔다. 역시, 라플란드가 항상 뿌리고 다니는 향수와 같은 향이 난다. 꽃 자체는 조화다. 향기 하나 없는 꽃에 자기가 쓰는 향수를 잔뜩 뿌려놓은 모양이었다. 어찌보면 성의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참 그녀 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슬슬 출발하자. 아미야가 기다린다며."


"급할 거 없어. 1시간 정도는 여유가 있을 거거든."


  이건 나중에 방에 장식해둬야지. 꽃다발을 책상에 올려놓고, 의자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가려 했다. 꽃병이라도 하나 챙겨올까 싶었다. 라플란드가 가져온 꽃다발은 조화였지만, 그렇기에 꽃잎들이 정교하고 예뼜다. 장식용으로 쓰기엔 딱 제격이었다.


"잠시, 그럼 꽃병 가져올게."


  문고리를 잡자마자, 순간 움직일 수 없게 됐다. 별 다른 일이 생긴 것은 아니었고, 그저 라플란드가 날 뒤에서 껴안았다.


"말했잖아, 널 놀래키는 건 나만 할 거라고."


  솔직히, 깜짝 놀랐다. 그녀와 사귀기는 해도, 이런 식의 가벼운 스킨쉽은 의외로 많이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손을 잡고 다니는 일도 적었으니까. 그래서, 갑작스러운 백허그에 놀랐고 가슴이 뛰었다.   


"알았어, 금방 다녀올테니까 이거 풀어줘."


"싫어."


"또 왜."

"뭐긴, 선물 줘야지."


  꽃다발로 선물을 대신 할 줄 알았더니, 다른 선물을 준비해둔 모양이었다. 하지만, 라플란드가 이런 식으로 날 꽉 잡고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텐데... 라고 생각하고 있자니 라플란드가 손을 풀었다.


"뒤돌지 말아봐."


  라플란드의 손이 잠시 사라지더니, 뒤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다시 내 가슴을 감싸듯 그녀가 날 끌어 안았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코트 소매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그녀의 선물이 들려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내가 가지고 싶어 했던 게임 시리즈의 패키지가 들어 있다. 클로저의 입으로도 구하기 힘들 물건이라고 했으니, 분명 귀한 물건이 맞다. 용케도 구했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 만큼 놀라운 선물이었다. 


"...생일 축하해, 박사. 이건 내가 주는 선물."


"고마워. 나중에 같이 하자."


  게임 패키지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라플란드는 여전히 포옹을 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거세게 날 끌어 안았다. 그리곤 작게 중얼거리는 라플란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막상 하려니 부끄럽네. 라는 말이 분명히 들렸다.


  그런데 하나, 이상한 점이 보였다. 분명 라플란드는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지금 그녀의 팔은 소매는 커녕 실오라기 하나 보이지 않는다. 코트를 벗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등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은 뭐지?


"선물 하나 더 있어."


  라플란드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긴장한 듯, 아니면 수치심에 떨리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톤이 올라가 귀엽고 앳되게 들렸다. 


"....두 번째 선물은 나야."


  아미야에게는 미안하지만, 서프라이즈 파티에는 못 가거나 늦게 가야 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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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全編) 링크 :https://arca.live/b/arknights/73544803


예아 반갑소.


정말 뜬금 없이 쓴 단편 '오늘이 무슨 날인데?'


진짜 뜬금 없이 왜 독타 생일 축하해주는 글을 쓰냐고?


 

  

나 생일이야. 


생일 축하해주는 라플란드가 보고 싶은데, 커미션 넣기엔 시간도 없고 귀찮으니 자급자족 해야지 뭐.

켈시 은재 수르트는 그냥 편성창에 있길래 넣었어.


아무튼, 그렇다고.


이제 다시 퍼퓨머 2편 써야겠다. 아이린 루멘 어떻게 써야 할지 근대 좀 고민이 되네.


뭐 적당히 보고 싶은 캐릭터의 소재 같은거 받어.

IF는 '이러이러한 IF가 보고 싶어'

상담실은 '이런 캐릭터라면 이런 고민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같은 거.


아무튼 그래서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더 나은 글을 위해 언제나 피드백 받음.

그리고 댓글 보는 맛으로 글을 쓰는 파라, 댓글 많이 달아주면 하나하나 다 읽고 쥰내 열심히 글 적음.


댓글 달아줘 어서 

잔뜩 달아줘 당장





그 외에도 일단 단편 신청 받음.

이 글쟁이는 확정은 아니지만 일단 무료로 써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