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https://www.pixiv.net/novel/show.php?id=20993179

작가님: ククリ


작가의 말: 멘탈이 한계인 박사가 로사에게 의존하는 것을 눈치챈 지마가 어떻게든 떼어 내고자 하지만

              결국 지마도 의존의 늪에 빠져가는... 느낌의 이야기


#명일방주 #박사(명일방주) #지마(명일방주) #로사(명일방주) #의존


역주: ・명일방주의 '우르수스의 아이들'의 사전지식이 있으면 읽을 때 더 몰입하기 쉬움. 추천함. ・#의존의 태그에서 보이듯 자극적임. 주의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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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페이지 

"어-, 음.......이런 때에 필요한 수치는 좀 전의 서류에 쓰여 있었지......어따 뒀더라......"


 박사의 집무실에서 지마의 혼잣말이 울린다. 평소에는 전선으로 출장 가는 그녀도 때때로 박사의 비서로서 서류 일을 돕기도 했고, 오늘이 그날이었다.

 장래에는 박사의 지위를 가져가겠다고 공언했음에도 박사는 개의치 않고 뽑아준데다가 조언까지 던져주기까지 한다.


 뭔가 얕보이는 것만 같아서 부아가 치밀긴 하지만, 좋은 경험이 되는 것도 사실이니 지마는 공사 구분해서 계속 비서를 맡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애초에 그녀는 몸을 쓰는 일이 익숙하다. 외근이나 하드한 훈련에서 오는 피로도 있기에, 오후는 뭘 어떻게 해도 머리가 둔해진다. 꾸벅거리기 시작한 그녀를 우연히 본 박사는 말을 걸었다.


"졸리면 쉬었다 와도 좋아. 내 방을 써도 괜찮아."


"그럴 수는 없지. 아직 일이 있는데."


"하하하. 사실 이 일은 아직 마감일까지 여유가 있거든. 그렇게까지 쥐어짜면서 일하지 않아도 괜찮은데다, 너는 평소에도 작전에서 힘내주고 있잖아."


 미리 준비해둔 형편 좋은 변명인가 싶기도 하지만, 안 도는 머리를 쓰면서 실수를 벌이면 그거야말로 손해다. 박사는 신경 쓰지 않겠지만, 자신의 프라이드가 용납하지 못한다.

 결국 지마는 그 말을 받아들여 수면실을 사용하기로 했다.


"조금 지나면 깨워줘. 이상한 배려는 필요 없으니까."


"잘 알겠어. 잘 자."


 지마는 마음 없는 대답을 수상하게 여기면서도 집무실에서 병설된 수면실로 걸음을 옮겼다. 문 하나만 두고 쉽게 왕래할 수 있는 이곳은 로도스에서 도는 풍문의 한 자리를 잡고 있다.

 박사의 일이 빠른 이유는 자기 방에 돌아가지 않고 선잠으로 때우고 있기 때문이라는 건데, 이 방을 사용하게 된 지마에게는 그 소문이 잘못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시트에 몸을 맡겨도 박사의 체취가 그리 나지 않아서다.


 만일 소문처럼 언제나 사용하고 있었다면 냄새도 배어있었겠지.

 그렇지만 냄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불을 뒤척이면 옅은 기척처럼 박사의 존재를 느낀다. 이상하게도 불쾌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도 채지 못한 채 눈을 감은 지마는 잠에 떨어졌다.






 깜빡 눈을 뜬 지마가 옆에 있던 시계를 보니 예정보다 시간이 꽤 지나있었다. 조금 쉬었다가 다시 일을 할 생각이었는데, 이래서는 거진 도움이 안 된 거다.

 일어나기 전에 눈앞의 문을 보니 살며시 열려있었다. 아마 박사가 상태를 보러 왔다가 자는 지마를 보고 안 깨운 거겠지.


"이상한 배려는 필요 없다고 했는데......"


 착취당하고 싶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애 취급당하는 것도 싫었다. 사춘기의 복잡한 심리를 가진 채로 지마는 침대에서 나와 집무실을 향한다.

 하지만, 단련된 그녀의 감각은 문의 저편에서 박사 말고 다른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누가 보고하러 온 건가......?"


 박사의 허가도 받았겠다, 자신이 수면실에 있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만 나가는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건 뭔가 상황이 안 좋다.

 그리 생각한 지마는 살며시 열려있는 문틈으로 조금만 얼굴을 내밀어 집무실의 상태를 살피기로 했다.

 마침 휴식 겸용 소파에 앉아있는 상대방이 보인다. 잘 알고 있는 얼굴이기도 했다. 우르수스에서 지마랑 행동을 같이하고 있던 로사다.


"왜 쟤가...... 어...... 대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봐버린 지마는 전표했다.

 로사가 소파에 앉아있다. 그건 괜찮다. 평범한 일 아닌가. 문제는 앉아있는 그녀에게 마루에 무릎을 꿇으면서 끌어안고 있는 그림자.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박사였다.


"로사...... 로사......"


"응. 난 여기에 있어. 안심해."


"아아...... 로사......! 네가 있어서 난 살아갈 수 있어......!"


 마친 신에게 구원을 바라는 신도처럼 박사는 로사에게 몸을 맡기고, 그녀의 하복부에 얼굴을 파묻듯이 하고서는 꿇고 있다. 그런 박사를 로사는 상냥히 안으면서 쓰다듬고 있는 거다. 자애로운 듯한 표정에서 박사를 향한 애정이 느껴진다.


 하지만 어떻게 봐도 평범한 관계는 아니다. 연인...... 이라기보다는 뭔가 기묘했다. 동요하면서도 관찰을 멈추지 않는 지마의 앞에 둘의 밀담이 이어진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별거 아닌데..."


"언제나 그러네. 내 앞에서 그런 신경 쓸 필요 없는데. 자, 솔직해지자?"


"......그렇지. 실은 저번 전투의 보고서가 올라와서 읽었거든. 우리 소속은 모두 무사했지만, 적의 사상자는 합쳐서 수십 명이라고 말이야. 또... 또 나는 몇십이나 되는 사람의 목숨을......!"


"그랬구나. 괴로웠지. 하지만 괜찮아. 박사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살아갈 수 있는 걸.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나만은 용서해줄게."


"아아...... 로사..... 고마워......!"


 그 모습은 죄를 고해하는 죄수와 같았다. 안고 있는 짐을 내린 박사는 정말로 구원받은 것처럼 로사를 올려다보았다. 로사는 어딘가 열이 담긴 눈동자를 바라보고서야, 깊은 마음속에서까지 안심했다는 듯한 미소를 보였다.

 ......박사가 저런 얼굴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지마는 몰랐다. 저도 모르게 문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자신을 붙잡으며 형용하기 힘든 감정에 몸을 떤다.


"뭔데...... 이게 대체 뭔데......"


 오늘 전투 보고서가 올라온 건 맞다. 하지만 그걸 본 적은 있지만, 박사는 평소랑 진배없이 태연히 있었다. 어딜 봐도 이상한 모습은 없었다. 적어도 저렇게 사람이 풀리지 않았다.


 자신의 앞에서 보이지 않는 모습을 로사에게는 보이고 있었던 건가. 마음이 휘갈겨져서 기척도 흐트러진다. 살며시 체중을 실었던 문이 살짝 움직여서, 작지만 틀림없이 소리를 냈다. 눈치챈 것인지 로사는 지마 쪽을 돌아보고 눈이 맞는다.

 아무리 로사라도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뜬다. 숨을 삼킨 지마지만, 그렇다고 뭐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지마의 훔쳐보기가 들킨 것도 아니다.


 왜냐면 로사는 박사에게 알리는 행위를 한 게 아니라, 지마에게 압박하는 행동을 취해서 그렇다.

 입에 검지를 대서 다물라는 지시를 내린 로사는 아직 안은 채인 박사를 쓰다듬으며 상냥하게 말을 건다.


"후후.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고 싶은 기분이지만, 슬슬 끝낼 시간 아닐까? 저 방에서 지마가 쉬고 있는 거지?"


"아. 그랬지. 언제까지나 이럴 수는 없지."


 그 말에 스위치가 바뀐 것처럼 박사의 표정이 평소와 같이 돌아왔다. 일어나더니 크게 기지개를 피고서 '세수하고 올게'라는 말과 함께 방을 나갔다.


 근처의 화장실이라도 간 거겠지.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쥐어짜면서 문을 열어 집무실에 돌아왔고, 방의 중앙에 가니 소파에 앉아있던 로사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된다. 말 없는 압박을 걸어도 쥐어짜면서 그저 바람이 불듯, 가증스러울 정도로 태연한 미소를 띤다.


"......아까 전에는 무슨 일이지?"


"아까전? 아, 내가 너를 도운 일? 아니면......"


"박사 일이지! 걔한테 뭘 한 거야!?"


"어머 싫어라. 나는 오히려 박사를 도운 거 뿐인데."


"도왔다고?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저렇게......!"


 시동이 걸리기 시작한 지마였지만, 무심코 방 밖의 발소리를 느낀다. 거기서 한 번 대화가 멈추니 예상한 대로 집무실의 문을 열고 방주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돌아온 박사는 지마의 모습이 조금 의외였던 모양인지, 곧바로 기쁜지 기분 좋게 말을 건다.


"어, 지마. 일어났어?"


"그런 넌 어딜 돌아다니다 온 거야?"


"하하하. 실은 꾸벅꾸벅 졸았거든. 눈 좀 깨자 싶어서 세수 좀 하고 왔지."


 후두부를 긁적거리면서 박사는 한 입으로 두말을 한다. 좀 전까지의 모습을 못 봤다면 이 말을 믿었겠지. 전장에서의 모습과는 다르게 로도스 선내에서의 모습은 박사님이라고 해도 칠칠치 못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비밀이다.

 하지만 지금의 지마는 솔직하게 끄덕이는 게 전부다. 그렇다고 이 거짓말을 꺼내는 것도 못하고, 지마는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닌 혀 차기를 하는 게 겨우었다.


"칫. 애초에 내가 일찍 깨우라고 했을텐데? 괜한 배려나 하고 말이야."


"나도 깨울 생각이었어. 하지만 말했다시피 졸았거든. 하하하."


"'하하하'는 무슨......"


 이런 대화는 여태껏 몇 번이나 해왔다. 칠칠치 못한 박사에게 질린 적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더 회화가 차갑게 느껴진다.


 대체 언제부터지? 언제부터 박사는 저렇게 로사에게 빠졌지? 어쩌면 지금까지 몰랐던 거지, 자신이 비서로서 일하기 시작한 때부터 둘의 관계는 이미 시작하고 있었던 건가?

 구운 돌을 삼킨 마냥 위가 무겁다. 원인의 반을 차지하는 로사를 보니 재빨리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그럼. 넘길 것들은 전부 넘겼으니까 휴식을 취할게. 남은 일도 힘내."


"응. 로사도 수고 많았어."


 박사에게서 수고의 말을 받고서 회화를 마치며 로사는 방을 떠나갔다. 자주 보는 광경이다. 그러니 위화감이 심하다. 여태껏 자신은 가짜 세상을 봐왔다는 걸 급작스레 깨달은 것처럼.


"쟨 뭐하러 온 거야."


"그야 평소같이 인사관계의 서류를 들고 와 줬지. 전에 후방근무를 하여서 그런지, 지금도 부탁하는 일이 있거든."


"그...냐."


 알리바이는 제대로 만들어둔 건가. 어떤 면에서는 빈틈없는 로사다. 저도 몰래 지마는 숨을 뱉었다.

 사실은 좀 전에 본 광경이 뭔지 박사에게 묻고 싶다. 하지만 그건 악수라는 사실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아마 박사의 정신에 꽤 민감한 화제일 것이다. 거기에 흙발로 들어가서는 날뛸 생각은 없었다.


 그럼 수단은 하나다. 또 다른 단서인 로사에게 직접 물으면 된다. 할 일을 정한 지마는 머리를 흔들고 마음을 다잡고서, 다시 사무작업에 착수했다.







 로도스의 구석에 있는 창고. 선내에도 인기척이 없는 곳에서 지마는 로사를 불러냈다. 과연 제대로 올 것인지 걱정은 있었지만, 얌전히 따르기로 한 모양이다. 심지어 지마보다도 먼저 와 있었다.


"오지 않겠지 생각한 게 진심이야."


"서로 비밀로 둔 채로 있는 것도 싫잖아?"


"그도 그런가."


 아무래도 내가 당했다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신경 쓸 일은 아니다. 가장 궁금한 건 하나다.


"박사 일은......어떻게 된 거지?"


"지마에게 말할 필요가 있나?"


"야......!"


"우후후. 농담이야 농담. 그러면 일부러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잖아?"


"안 웃기는 농담인데......"


 페이스를 상대에게 잡힌 현실에 속으로 이를 갈며 지마는 다음 말을 기다린다. 그 모습을 보고서 마음을 정했는지, 로사는 벽에 기대면서 말하기 시작한다.


"......계기는, 내가 치료를 받으면서 생겼어. 너도 잘 알지만, 우르수스에서 도망친 사람들은 정신에 부담을 지닌 경우도 많으니까...... 카운셀링이 붙는 일이 있잖아. 나는 카운셀러로 박사를 지명했고."


"그게 돼? 박사라고는 하지만 걘 의사가 아니잖아."


"박사가 어떤 사람인지는, 지마도 알잖아?"


"......칫."


 보나마나 박사는 지가 스스로 이 건을 받았겠지. 의료 오퍼레이터들도 평소에도 가까이 대하는 박사 쪽이 적임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홀로 생각에 잠긴 지마를 두고 로사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치료라고는 해도 간단한 거였어. 기본적으로 나의 이야기를 박사에게 들려주는 게 다야. 처음에는 두리뭉실한 것들뿐이었어. '훈련을 시작해보니 생각보다 힘들었다.', '쉬는 시간에 온실에 가보니 꽃이 피어 있어서 아름답다', 그런 거. 박사에게 품종을 물어본 적도 있고."


 여기서 끝날 리가 없다. 그걸 느낀 지마는 조용히 계속하라고 재촉한다.


"몇 번 치료하는 와중에 점점 본질적인 것도 들려주게 되었어. '우르수스에서의 경험', 그게 아직도 그림자처럼 들러붙지 않았는지. 입 밖에 내기는 힘들었지만, 그러니 입 밖으로 나오고서야 편해진 부분도 있었어. 그렇게 박사에게 들려주는 와중에 이상한 일이 벌어진 거야."


"......이상한 일?"


"응. 내가 거기서 겪은 일-다른 사람을 희생하고 살아남은 일-을 이야기하니, 박사도 괴로워 보이더라고. 처음엔 나에게 공감해준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더라고. 그러니까 마음을 굳히고 물어봤어. 처음엔 박사도 말하기 힘든 모양이었지만, 계속 설득하니 말해주더라."


"......그래서? 걔는 뭐라고 했지?"


 이게 분명 박사가 변모한 이유다. 그걸 눈치챈 지마에게 있어선 놓칠 수 없는 정보였다. 대답을 기다린 지마는 전투할 때와 같을 정도로 신경을 세웠다. 그걸 보고 옅은 미소를 띠며 로사는 말을 짰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할게. 박사는 작전 시에 커다란 충격을 받는 일에 조우한 모양인가 봐. 그리고서 자신에게 다른 이의 목숨을 뺏을 자격이 있는지를 계속 고뇌한 모양이야. 그 생각이 체르노보그의 내 얘기와 공명한 것 같고. 나도 비슷한 일을 했으니까."


"............"


"얘기를 계속하는 와중에 떨기 시작한 박사를 나도 모르게 끌어안았어. 오열하는 박사는 지금이라도 꺼질 것 같은 불이었지. '박사는 전혀 나쁘지 않아.', '그건 죄가 아니야'등등 필사적으로 전했어. 그건 내가 바랬던 말이기도 했고. 그렇게 스트레스 풀이를 겸해서 지금까지도 얘기를 들어주고 있는 거야."


 로사의 말이 끝나고도 지마는 아연해했다. 박사가 고뇌하고 있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전장에는 냉철한 지휘관이며, 로도스에서는 때때로 헛소리로 된 농담을 하는 박사가, 로사의 이야기에 나온 박사의 이미지랑 겹치지 않는다.


"정말...이냐? .......나에겐 그런 말은 전혀......"


"으~응. 증명하기 어렵지만...... 아. 박사는 자주 근무 중에 낮잠을 자잖아?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딱히......? 걘 간간이 적당한 부분이 있으니......"


"후후후. 정말 그게 다라고 생각한 거야?"


"너도 잘 알지만, 난 인내심이 짧거든? 빨랑 불어."


"어머나 미안해라. 낮잠 말인데, 단순한 이야기지만 박사가 불면증이어서 그래. 원인은 아까 말한 전장에서 받은 충격. 혼자 있으면 잘 못 자고, 친한 오퍼레이터의 기척이 있는 곳에서는 잠이 드나 봐."


"뭐......!"


"그러니까, 오퍼레이터가 곁에 없는 밤에는 아침까지 못 자니까 그사이에 일을 마치고, 비서가 붙은 시간대에 수면 시간을 확보하고자 하는 거지. 그러니까 우리들의 앞에서는 자는 거야."


"뭐 그런......!"


 부정하고자 하는 지마의 안에서 스스로에 대한 반론이 생긴다. 듣고보니 박사는 꽤나 높은 빈도로 쉰다. 그렇지만 일에 쫓기는 모습이 없는 게 묘한 일이다 생각했지만, 다른 시간에 처리했다면 납득이 된다. 돼버리고 만다.


"그렇지만...... 왜 그런 걸 네가 알고 있는 건데?"


"내가 그만큼 박사에게 신뢰받고 있으니까,는 부족한가?"


"하."


 코웃음을 친들 상대의 말이 허세라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전에 보여준 모습이 가장 큰 증거다. 로사의 이야기는 진실이겠지.

 하지만, 그런 가정이면 말이 안 맞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지마는 알고 있었다.


"그럼...... 왜 다른 의료 오퍼레이터들에게 안 맡긴 거지? 네가 말했지만, 로도스에 카운셀러는 산처럼 쌓여있는데?"


 당연한 의문이다. 하지만 말이 던져진 로사는 웃음을 띄웠다. 그걸 보니 지마의 뇌리에 경고가 울린다. 전장에서 적을 봤을 때 같은 긴장감. 아니면 함정을 밟았다고 눈치챈 때의 위기의식.


"우후후. 왜일까?"


"얘기가 퍼지는 게 무서워서?"


"설마. 로도스 오퍼레이터들의 직업윤리는 잘 알고 있지?"


"그럼 카운셀러들의 실력이 의뭉스러워서?"


"그거야말로 설마지. 신세를 진 적이 있는 아는 사이도 있고, 좋은 평판도 들었는걸."


"그럼 왜 입 다물고 있었던 건데?"


 로사의 웃음이 깊어진다. 지마를 감싸는 긴장 또한 최고치에 달했다.

 마침내 말이 내려진다.


"-그야, 그랬다간 박사가 날 의존하지 않게 되잖아?"


"......뭐?"


 듣고 잠시간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모르는 언어로 말이 걸려온 듯이 귀를 빠져나와서 머리를 맴돈다. 몇 초 지나서야 이해가 가니, 이미 몸은 내달리고 있었다.


"너 제정신이야!?"


 정신이드니 로사의 멱살을 잡고서 벽에 패대기치고 있었다. 로사를 향해서 살의가 치민 건 처음이었다. 미쳐 날뛰는 격정에 몸을 맡긴 채 목을 조르고자 힘을 넣지만, 로사는 평온한 얼굴이다.


"멈춰줄래? 무기를 쓰다면 몰라도, 단순한 완력 승부라면 너한테 이길 방법이 없잖아."


"뭐!? 그 입을 안 다물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줄까!?"


"할거면 얼굴이야. 박사가 걱정해주는 게 눈에 선하네."


"......!"


 충동에 몸을 맡겨 주먹을 지르고자 했던 지마의 움직임이 멈춘다. 여기서 주먹을 휘두른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악화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지마가 때렸단 사실을 박사가 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생각을 하니 못이 박힌 듯이 몸이 안 움직인다.

 그런 모습을 내려다보던 로사는 선언한 대로 힘으로 지마의 손을 뿌리쳤다. 주름진 부분을 고치니, 그대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을 건다.


"그러니, 듣고 싶은 건 다 들은 거라 생각하는데 만족했으려나 몰라? 그러면 난 슬슬 돌아가고자 하는데."


"......내가 카운셀러나 의료 오퍼레이터들에게 오늘 있던 일을 얘기하면 너의 계획도 끝이야."


"후후. 잔혹한 일을 하네."


"...뭐......!?"


 한 명의 오퍼레이터가 박사를 의존시키고자 계획하는 것이 노출되면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로사는 앞으로 박사를 향해 접촉이 금지될 것이고, 박사는 전문 직원에게서 제대로 된 카운셀링을 받게 되겠지.

 그런데 몰린 지마가 반격하고자 내놓은 제안도 로사에게는 전혀 아프지 않은 모양이다. 쿡쿡거리면서 웃더니 카드를 까는 듯이 로사는 읊는다.


"여태까지 계속 숨겨왔고, 비서를 할 만큼 친했던 너에게도 전혀 들키지 않았었잖아? 그걸 처음 밝힌 상대와 갑자기 떨어진다면, 박사는 어떻게 될까? 새로운 카운셀러에게는 진실을 말할 거라 생각하는 거야?"


"............"


 그 말을 듣고서 생각하니 이제서야 상상이 간다. 출장 가는 로사말고 누구에게도 본심을 밝히지 않았다. 박사는 솔직하게 상담하는 걸 절대로 고르지 않는다. 자기는 거짓말이나 하며 평소처럼 얼버무릴 거다.


 그러다 언젠가 스스로 망가질 때까지, 자기 안에 봉인된 선택지를 고르겠지. 만일 그러면 그 길을 고르게 한 건 나다.

 거기까지 눈치채면 행동도 못 한다. 이미 그 정도의 의존관계를 만들어 낸 로사쪽이 한발 빨랐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로사는 말없이 떠나간다.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어도 분함이 안 풀린다.


 그래도 뭔가, 뭔가 있을 거다. 이대로 박사를 로사에게 의존시킬 수는 없다.


"어떻게든 내가 도와줘야 해......."


 꽉 쥔 주먹과 같을 정도로 단단히, 결의를 다진 지마도 길을 돌아가며 사안에 잠긴다. 오퍼레이터로서 정당한 의분이다. 그 뒤에 비밀스러운 질투심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지마는 눈치채지 못했다.


 2페이지 

 아무리 날이 지나가도 잊을 수 없는 과거가 있다.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 과거라면 더욱 그렇다. 박사의 마음에 남아있는 죄의 기억.


 그 날은 조금 바람이 강한 날이었다. 부근의 황야에 잠복한 리유니온 잔당들이 주변의 사람들, 주로 도시에 물자를 나르는 상인을 습격했다고 해서 재류하고 있는 이동도시에서 의뢰를 받아 토벌하기로 한 거다.


 작전행동 자체는 잘 진행되었다. 불어오는 모래바람과 함께 기습. 적이 혼란에 빠진 사이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고, 상대가 태세를 다 잡는 때에는 이미 승기는 결정지어졌다.

 그럼에도 온 힘을 다한다. 만일 내버려둔다면 또 다른 피해를 줄 가능성이 있다. 잔당들을 전부 쓸어버리기 위해, 최소한의 인원만을 남기고 토벌로 향했다.


 그리고 임시 지휘소에서 사람이 줄고 몇 시간이 지났다. 생각보다 버티는 상대를 두고서 장기전을 하고자, 휴식을 위해서 지휘소의 주변에 나온 때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작전개시 시점부터 불던 바람이 멈추고, 조금은 확보된 시야 속에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모래로 더럽혀진 흰옷. 몇 번이나 대립하던 사이에 익숙해진 옷은 속도를 올려 여기를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려왔다.

 이변을 눈치챈 호위가 달려오지만 적이 더 빨랐다. 외치는 오퍼레이터들의 목소리보다도 똑똑히 들렸던 건 집념에 가득 찬 상대방의 노성이었다.


'아빠와 엄마의 원수!!'


 앞으로 몇십 걸음. 전투 상황에서는 지근거리라고 말할 수 있는 거리에서, 비통한 목소리와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운 좋게 곧바로 얼굴을 덮고서 충격에 맞추어 지면에 쓰러진 덕분에 중상을 입지는 않았다. 그보다도 직전까지 들린 목소리가 '젊은 것이' 신경 쓰였다.


 휘청거리며 일어나니, 지휘소에 남아있던 오퍼레이터들이 다가온다. 안부를 신경 쓰는 말들에 대답하지도 못하고, 그저 눈앞에서 벌어진 자폭 현장으로 걸어간다.

 폭심지에는 왜소한 리유니온 병사의 유체가 남아있었다. 하늘을 보며 쓰러진 몸에 다가가서 떨리는 손으로 가면을 벗겨본다.

 -가면 아래에는 스즈란이나 샤마르랑 그리 나이 차이도 없는, 천진난만한 소녀의 죽은 얼굴이 있었다.


 나중에 듣자니, 임시 지휘소의 방위선에는 말 그대로 허점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른이 지나갈 크기는 안 되니 순찰하던 오퍼레이터는 놓친 모양이지만, 거길 지나서 리유니온 소녀는 침입했겠지.


 그리고 작전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지휘소를 자신과 함께 날리고자 한 거다. 하지만 불량품이었는지, 부품에 문제가 있었는지, 폭발의 규모는 작은데다가 그녀만 목숨을 잃는 결과를 가져온 거다.


 순찰을 담당하는 오퍼레이터는 고개를 숙이면서 사죄를 했고, 전선에 나가 있던 오퍼레이터들은 연사 되는 활처럼 걱정의 말을 걸어왔지만, 대응하면서도 내 정신은 딴 데 팔려있었다.


 기억상실이지만 성숙한 육체를 가진 몸이다. 그럼 이 잔인한 테라에서,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살자고 생각했다. 로도스랑은 상관없는 개인의 이념이고, 그걸 위해 싸워왔다.

 그런 간판을 걸어봤자 자신은 다른 사람의 목숨을 뺏고 있다. 그 사실은 각오하고 있었고,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념이 죄악감에서 지켜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눈치채고 만 거다. 무도하다고 하는 리유니온도 가족이 있다. 부모님, 믿음직스러운 형제자매를 뺏긴 아이들은 어떻게 살면 좋은 것인가?

 그리고 지금까지 셀 수 없을 만큼 쓰러트려 온 리유니온 병사들. 그 가면 아래에는 오늘 이 아이처럼 어린 민얼굴을 숨긴 상대방도 있었던 것 아닌가?


 스스로를 또 비극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의 하나라고 인식한 순간, 마음에 둔 신념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로도스에 귀환하고서는 바빴다. 켈시에게는 잔소리를 들었고, 아미야에게는 포옹을 받았다. 그 밖에도 여러 일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게 뭔가 막이 한 겹 있는 듯이 흐릿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날부터 같은 광경을 꿈꾸게 되었다.


 로도스의 선내, 이동도시의 거리, 아카후라의 밀림이나 시에스타의 해변. 지금까지 봐왔던 꿈처럼 지금까지 들렀던 장소를 무대로 오퍼레이터들과 얘기를 하면 한 번도 빠짐없이 배경이 급변한다.


 어느샌가 주변은 황량한 풍경으로 바뀌고, 자신의 발에는 끝이 없는 늪이 있다. 걸어도 걸어도 빠지는 늪에서, 피 같은 새빨간 팔이 나와서 얽어온다.

 쳐내기는 커녕 그대로 댕겨져서 엉덩방아를 찧고, 등에서부터 가라앉는 나를 구해주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체념하듯 몸을 맡기면, 으레 그렇다는 듯이 진흙이 배 위에 뭉쳐져서 사람의 모습을 만든다. 그날, 눈앞에서 자폭한 소녀가 원한을 담은 눈동자를 그대로 짓고서 목을 졸라왔다.

 십초, 이십 초가 지날수록 숨이 갑갑해져 몸이 산소를 요구한다. 반쯤 반사적으로 버둥거리던 손이 늪에 삼켜져, 이제는 움직이지 못하게 됐다.

 무산소 상태가 계속되고, 시야가 좁혀져 오면서 기억에 남는 건 날 노려보는 소녀의 얼굴이다.


"푸하! 핫......크읍......하앗......!"


 이렇게 꿈에서 의식이 끊긴 뒤에, 언제나 거친 숨과 함께 눈이 떠진다.

 그 날 이후 아침까지 편히 잔 날이 없었다. 꿈과는 다르게 현실에서 죽지 않았단 사실에 낙담하면서 하루가 시작된다.


 그게 박사의 일상. 로사에게 구원받기 전까지 계속되던 일상이었다.







 지마가 박사의 사정을 알고서 며칠이 지났다. 결심이 무심하게도 박사를 로사에게서 떼는 작전은 전혀 잘 진행되지 않았다.


 우선 박사가 로사말고도 다른 사람에게도 고뇌를 상담할 수 있도록 환경을 정리하고자 생각했다. 가장 빠른 방법은 자신이 그 상대가 돼주는 거다.


 하지만 갑자기 '고민 없어?' 같은 말을 던지는 건 너무 의심스럽고, 설령 물어본들 박사는 감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시발점도 없다. 날이 지나가고만 있다.


 그런 사이에도 박사와 로사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오히려 더 깊어지기까지 한 느낌이 든다.

 지마가 휴식이라고 하고서 수면실로 돌아가면, 어느샌가 박사의 얼굴빛이 좋아져 있는 거다. 신경 쓰여서 자지도 못하고, 문에 귀를 대면 둘의 친밀한 회화가 작게 들려온다.


 그리고 분한 일은 지마가 수면실에서 돌아오면, 박사의 얼굴빛은 예외 없이 좋아져 있는 거다. 둘의 거리는 가깝고, 서로 기대듯이 같은 소파에 앉아 있기도 하고, 로사가 박사의 무릎에 앉아서 건방 떨듯이 어리광부리는 경우도 있었다.


 오퍼레이터랑 친하게는 지내도 일정한 간격을 지키는 박사라면 다른 상대에게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을 텐데, 제3자에게 그런 모습을 보일 리가 없을 터였다.

 하지만 로사에게만은 보여준다. 처음 지마가 그 모습을 목격한 때에는 뭔가 당황했지만, 그런 조우도 몇 번이나 반복하는 사이에 박사도 신경 쓰지 않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더욱 화나는 점은 로사가 여기를 볼 때의 표정이다. 완전히 이겼다는 듯한 웃음을 띠고서 박사에게 몸을 기대는 로사를 볼 때마다 이 안쪽이 바스러질 정도로 이를 갈게 된다.


 그야말로 악녀. 한시라도 빨리 박사에게서 떨어트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시행착오를 계속하는 지마는 잔혹한 진실을 깨닫는다.

 자신과 로사의 차이. 박사에게서 받는 대우의 차이다.


 박사는 작전지휘관이라는 직무가 있기에, 오퍼레이터들과 어느 정도 간격을 둔다. 친해지기 쉽고, 상냥한 성격을 보이면서도 연애건 유행하는 화제건 하나도 들은 적이 없다는 게 증거다.

 누군가의 편을 드는 것을 피하려고 어디까지나 상사와 부하라는 선을 긋고 있었다. 아무리 친하게 보여도 거기에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로사만 빼고.


 의존이라는 악랄한 수단으로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로사가 박사에게서 신뢰받는 것은 사실이다. 자신에게는 보이는 일이 없는,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웃음을 보이는 것을 생각하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생각이다.

 애초에 지마를 포함해서 로사말고 어떤 누구에게도 약한 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신뢰관계도 일방통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겠지.


 그리고 그걸 알고 있지만, 해결책이 떠오를 리가 없다. 막다른 길에서 고민하던 지마가 무심코 떠올린 게 있었다. 그건 로사와 나눴던 회화에서 로사가 했었던 말. 로사쪽에서 카운셀링을 부탁하니, 이윽고 박사의 고뇌를 꺼내는 것이 가능했다는 발언.


 들어본 적이 있다. 스스로 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으로 상대방의 신뢰를 얻는 경우도 있다고. 본래라면 숨겨야 할 일을 공유하는 것으로 결속을 높이는 거라고 한다.

 그럼 자신도 같은 일을 벌인다면 박사와의 심적 거리도 다소 가까워질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고민거리가 있는지 어떤지는 상관없다. 대충 만든 거라고 해도 상담한다는 행위가 중요할 터다.


 한줄기 빛을 찾아낸 기분이 든 지마는 조금 더 작전을 상세히 짜기로 했다.

 그리고 다가온 실행의 순간. 평소처럼 비서로서 도우면서, 휴식하는 타이밍에 박사에게 말을 건넨다.


"저기. 슬슬 쉬지 않을래?"


"그야 물론이지. 근데, 서류 일에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나 보네? 처음에 왔을 때랑 비교하면 처리 속도가 레벨이 달라."


"뭐, 계속하고 있다 보면 싫어도 익숙......아, 이게 아니지. 조금 부탁하고자 하는 게 있는데."


"부탁? 별일이네."


 박사의 곁에까지 가서 일어나, 그대로 손을 댕겨서 수면실로 들어간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다. 지마가 침대에 허리를 두니, 박사는 방의 구석에서 돌아다니던 스툴을 가져와 거기에 앉았다.


"부탁이 뭔데?"


"......그, 그건."


 박사를 유도했지만 정작 중요한 때가 되니 주저가 생긴다. 걱정하는 듯이 이쪽을 바라보는 박사. 앞으로 할 일은 그런 박사에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해야 하는 일인가?


"그건...... 그게...... 형용하기 어려운데......"


 주저한 채로 명료치 못한 말이 입에서 새어나온다. 박사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시선을 무릎에 둔다. 그럼에도 박사는 재촉하는 일 없이 계속 기다려준다.

 침묵이 이어지고, 몇 번 심호흡을 한 끝에 지마는 각오를 다지고 입을 연다.


"......사실, 최근 고민이 생겼어. ......굼이나 애들에게 할 말이 아니니까 다른 사람에게 상담하고 싶어서......"


 얘기의 내용은 사전에 짜둔 거지만, 매끄럽게 말이 나오지 못하고 몇 번이나 버벅거리고 만다. 다행히도, 그런 태도가 진실성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걸 증명하듯, 앞에서 실제로 듣고 있는 박사는 저도 몰래 숨을 삼킨다. 단숨에 스위치를 바꾸어, 평소와는 다르게 진지한 얼굴을 짓더니 온화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 상담역으로 나를 골라줬다고, 생각해도 좋은 거지?"


"............"


 지마가 작게 끄덕인다. 이제는 완전히 카운셀링의 분위기가 돌고 있다.


"상담내용에 대해서 들려줘도 괜찮을까? 당연하지만 가능한 범위만."


"내용은...... 그게, 내용은......"


 똑같은 말을 읊조리는 지마에게서 구체적인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그럴만하다. 사전에 생각한 거짓된 상담내용이 머리에서 빠져나간 것이다. 속으로 초조해하면서 어떻게든 생각하고자 하지만, 구름을 잡는 듯이 잡히지가 않는다.


 애매한 말로 시간을 벌어봤지만, 이것도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었다.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도 하지 않는 박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태도는 입에 담기 힘든 내용을 가지고 고뇌하는 모습이었기에 부자연스러운 곳은 없었다.


 지마의 무릎 위에 놓여 꽉 쥐어진 주먹 위에 박사의 손이 겹친다. 두 손바닥으로 상냥하게 감싸듯이 하면서 박사는 말을 건다.


"괜찮아. 무리하지 않아도 좋아. 입에 담기 싫은 내용도 있으니까 말이야."


"아니, 아니야......그런게 아니라......"


"아니, 괜찮아. 괜찮으니까. 진정해."


 박사는 절대 재촉하지 않았지만, 그게 지마가 초조해하지 않을 이유가 돼주진 않았다. 그리고 초조해할수록, 기억은 멀어져만 간다.


 어떡하지? 이대로 말 못하는 척하며 시간을 벌까? 하지만 박사가 쓸 수 있는 시간에는 한계가 있다. 오늘은 이걸로, 라고 말하고서 기회를 놓치면 용기를 쥐어짜서 박사를 속이려 든 의미가 없다.


 어떻게든 해야만 한다는 결의. 그럼에도 새하얀 상담내용. 초조함이 극한에 다다르자, 지마의 입에서는 자연스레 말이 새어나왔다.


"나...... 난, 로도스에 오기 전에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고......!"


"......!"


 상상밖의 내용에 전표 하는 박사. 하지만 그걸 들어내지 않고자 하면서 말을 이어달라고 촉구한다.


"여기 오기 전......리유니온 녀석들 때문에 갇혀있는 동안......식료품도, 물도 제한되어 있었어. 뺏어서 쟁취하는 게 당연했지......"


"그때 죽여버린 적이 있다는 거야?"


"......어."


"하지만 그건 극한상황에서 일어났다고 일컬은 거잖아. 죄로 물을 수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그렇지. 그럴 거야. 나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았어. 죽고 싶지 않았으니까, 같이 있는 녀석들을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도 않았어. 그건 필요한 일이었다고 선을 그으면 끝이었겠지."


 한 번 흘러나오기 시작한 말이 흐르는 물처럼 이어져간다. 말하는 지마조차 그 사실에 한 번 놀라고 있었다. 사실은 이런 말을 할 셈이 아니었는데.

 좀 더 적당한 말을 해서 박사의 관심을 끌고, 박사의 마음에 다가가면 충분했을 텐데. 하지만 지금 나온 고뇌를 남몰래 간직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지마 자신의 의식과는 별개로 말은 형태를 이루어간다. 마치 말이 입을 배신한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말의 내용은 결정적인 부분으로 이어진다.


"선을 그었다고 생각했는데...... 훈련에서 다른 녀석들...... 특히, 엘리트 오퍼레이터랑 싸우면 생각해버리고 말아. 힘은 상대를 쓰러트리는 게 다가 아니라고. 정말로 강하면 상대방을 죽이는 일 없이 항복시키는 것도 가능하다고......"


 뇌리에 떠오르는 건 자주 어울려주는 블레이즈의 모습이다. 술을 좋아하고, 칠칠치 못한 부분을 보이는 평소를 뒤집듯이, 전투하는 와중의 블레이즈는 가열차다. 중후한 무기를 손발처럼 다룬다고 생각했더니, 벽을 써서 벽차기를 하는 듯한 기동력을 보이고, 심지어는 아츠까지 다룬다.


 내 공격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받아넘기는데, 상대방의 반격은 폭풍과도 같다. 이윽고 가드를 비집어 열고서 무기를 튕기는 게 언제나의 일이다.

 거기서 맨주먹으로 덤빈 적도 있지만, 관절을 당해서 결국에는 항복하는 일도 있었다. 실력 차에 따라선 어떻게 발버둥을 쳐도 목숨을 서로 뺏는 일은 성립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잔혹한 진실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그때, 자신이 엘리트 오퍼레이터 같은 충분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때......내가 좀만 더 강했다면......그렇게 죽일 필요는 없었다고......죽이는 일 없이 끝났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안 사라진다고......!"


 뇌리에서 떠오르는 기억. 땅을 고르기 위한 망치로 상대의 두개골을 부술 때의 무게. 아니면 삽으로 연수를 파내는 감촉. 움찔거리며 떠는, 곧 있어 움직이지 못하게 된 같은 또래의 우르수스인.

 마비된 마음은 그걸 보고도 어떤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안전을 확보했다고 안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잠들었던 죄악감이 마음을 옥죄어온다.


 언젠부턴가 지마의 뺨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오열로 목소리가 떨리고, 얼굴은 부었다. 처음에 생각한 것처럼 일을 진행하지 못하고, 그것도 모자라 애초에 할 생각도 없던 약점까지 표출한 그녀는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을 후회하고 있었다.


 이렇게 끝없이 머릿속을 스스로에 대한 매도로 채우던 지마의 몸이 갑자기 감싸진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직한 그녀지만, 그 상대가 조금 전까지 눈앞에 앉아있던 박사라는걸 눈치채니 힘이 빠진다. 그대로 머뭇거리면서 박사의 몸으로 손을 돌린다.

 반면 박사는 포옹을 한 채로 입을 열었다.


"괴로웠을 텐데, 잘 말해줬어. 고마워."


"대, 대단한 일은......"


"네가 그렇게 생각했어도, 나에게는 감사할 일이야. 말하는 것만으로도 편해진다고 말하지만, 입을 내는 것 자체가 괴로운 일도 있으니까. 그 상대로 나를 골라준 게 기쁘고, 한 걸음을 내디딘 네가 자랑스러워."


"하지 마......이상한 칭찬은 하지 말라고......"


 등이나 머리를 토닥거리면서 가볍게 쓰다듬어져서, 부끄러워하면서도 지마는 저항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손을 털어냈겠지만, 지금만큼은 얌전히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대로 박사의 가슴팍에 뺨을 비비면서 묻고 포옹하기를 수십 분이 지났다. 마침내 박사의 몸에서 떨어진 지마는 그대로 이불에 쓰러져, 작게 신음하고 있었다.


'으으으....... 아아아아아......! 왜! 대체 왜 그런 부끄러운 짓을 한 건데......!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한창 수치심에 습격받는 중이었다. 기가 드센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이 약한 부분을 보이는 것만 해도 껄끄러운데, 거기에 어리광 피우는 듯한 행위까지 해버린 거다. 떠올리기만 해도 수치심에 죽는다. 그걸 얼버무리고자 신음을 지르는 것이다.


 침대의 끝자락에 앉은 박사가 그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뜨고자 일어난 순간, 박사의 소매가 당겨진다. 보자니 지마가 베개에서 슬쩍 얼굴을 내밀고서 이곳을 바라보며 소매를 잡고 있었다.


"......이대로 여기에 있어."


"아니, 그러고는 싶지만, 아직 일이......"


"어차피 필요한 양은 처리했잖아? 저쪽에서 낮잠 잘 정도면 여기에 있어."


"......그렇네. 조금 쉴까."


 다시금 침대에 앉아, 자리를 잡는 박사. 박사의 체중을 받아들인 침대가 그만큼 깊게 가라앉는다. 그 거리는 지금까지 보다도 가까웠다. 그 사실을 느낀 지마도 다시 베개에 머리를 맡긴다.


 몸의 거리와 마음의 거리는 같은 관계를 맺는다. 박사가 만들었던 벽을 마침내 한 장 뛰어넘은 것만 같아, 기쁜지, 좀 부족한지 싶은, 간질거리는 이상한 심경을 가진 채로 지마는 낮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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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날이 지나고서, 지마와 박사의 거리는 확실하게 줄어들었다. 둘이서 휴식하는 사이에 조금 떨어진 장소에 앉았던 박사도, 거리가 주먹 하나, 둘, 점점 가까워졌고, 언제부턴가 무릎을 지마에게 빌려주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다른 오퍼레이터들이 봤다간 의심할만한 거리감이 되었다.


 집무 사이의 휴식시간. 평소처럼 수면실의 침대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댄 박사. 누울 자리를 펴듯이 벌린 다리 사이에 지마가 수납돼,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듯이 박사의 가슴팍에 기대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할 일이 없어진 박사의 팔은 지마에게 유도돼서 어깨너머로 지마를 포옹하듯이 둘려졌다. 휴식 시에는 이 자세로 얘기하는 것이 일과가 된 거다.


"그래서 서류에 빠진 부분이 있다고 켈시에게 불려선...... 마침내 '이렇게, 윗사람이 미스를 하면 주변의 긴장감이 풀린다'라나 뭐라나 혼났어......"


"듣기만 해도 위가 아파져 오네."


"정말 그 말대로야. 정론이고, 내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만, 켈시에게 끝없이 지적받는 건 마음에 박힌다니까."


"평소의 얼굴과 말투인 채로?"


"어. 그게 또 데미지를 늘리거든......"


 가족이나 연인도 아닌 이성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밀착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대화는 이어진다. 전까지는 지마의 얘기를 듣기만 했던 박사도, 점차 자신의 푸념을 털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경우에 일에 관한 내용이니 지마로써는 추임새를 넣는 게 전부지만,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에게는 도움이 되는 모양이다.


 푸념을 듣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부담이 큰 행위지만, 지마에게 있어서는 그리 큰 귀찮은 일이 되지는 않았다. 박사의 푸념은 다른 사람에게의 악의나 혐오감을 뱉는 것 보다는 나날의 피로를 질질 나열하는 것 같은 일이기에, 어떤 면에서 학생끼리 회화를 나누는 것에 가까웠고, 무엇보다 자신이 인정받았다고 느껴져 기뻤던 거다.


 아무래도 박사는 이성적인 상사의 모습을 보이려고 마음을 다하는 듯하고, 실제로 부하 오퍼레이터들에게서도 나쁜 평판은 듣지 못했다. 그런 박사의 인간다운 부분을 눈에 담는 게 가능한 게 어딘가 특별하다는 느낌이 있어서 나쁘지 않았다.


 거기에 박사의 약점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여기도 따질 것 없이 약한 부분을 보일 수 있다는 소리다. 평소에는 다루기 힘든 곰처럼 주변을 살피는 지마도, 박사의 앞에서는 그 나이대의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지금이 되어서는, 박사와의 시간은 지마에게 있어서도 뺄 수 없는 일과인 것이다. 이 이상 발을 디뎠다가는 위험하다고 알고 있기에 조절하고자 했었다.


 박사와의 사이가 깊어지고, 로사에게서 떼어내겠다는 작전의 반 정도 왔다, 그래도 순조로운 추이일 거다. 되고 있다는 감도 있다. 등 너머로 느껴지는 박사의 존재와 열량이 그 증거다. 로사도 꽤나 친하게 지내지만, 자신도 또 가까워지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그리 머지않아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거다. 지마의 그 생각이 물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몇 주 지난 시점이었다.


 처음엔 로사가 단독으로 출장 간 일이다. 한 달에서 그쯤, 조금 떨어진 로도스의 사무소에 도움을 주는 모양이다. 일은 우르수스 귀족에 관련된 일이란 이유로 채용되었다는 모양이지만, 자세히는 듣지 못했다.


 지마들과 우르수스 학생은 다 같이 작전이 나가는 게 평상시의 모습이다. 그런 의미로 그녀만 단독으로 나가게 된 건 이레귤러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 점이 아니다. 만일 일시적이라고는 해도 로사가 박사에게서 멀어진다면 그녀의 영향이 줄어들거라고. 즉, 기회일 것이었다. 하지만 박사의 상태는 나아지기는커녕 악화되고 있었다.


 처음에 이상하다고 느낀 점은 일에 실수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평소의 집무에서 처리한 서류는 지마에게 넘겨지고, 그 시점에서 일단 체크를 하게 된다. 하지만 박사니까 대부분은 완벽하고, 혹시나 몰라서 체크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로사가 나간 뒤에 이따금씩 실수가 늘기 시작했다. 숫자를 잘못 적거나, 계산 실수, 미스펠링들. 단순한 것들이지만 주의를 줘도 줄기는커녕 늘기만 했다.


 아직 섬세한 실수라서 다행이지만 작전지휘에도 영향이 나오면 위험하다. 지마가 전에 보다 더욱 주시하게 되니 위화감이 여기저기서 보여왔다.


 어떤 것들이냐면, 잠깐 가지게 된 휴식시간. 서류를 정리하고서 잠시 쉬는 사이에, 전이라면 기분 전환하자면서 몸을 움직였지만, 지금은 책상 앞에서 멍하니 있는 게 다다. 유일하게 제정신을 되찾는 건 로사에게서 받은 페이퍼 나이프를 꺼내는 때뿐이다.

 그저, 애지중지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모습은 이상하기만 할 뿐이었다.


 겉모습에도 변화가 생겼다. 원래부터 그닥 겉모습을 신경 쓰지는 않았지만, 청결함은 신경 썼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래 입은 옷들만 입고 있다. 세탁하는 것조차 귀찮아져서 같은 옷을 계속 돌려 입는 것으로 보인다.


 결정타는 식사다. 일하는 사이에 고형 영양식과 보조제로 끝내는 게 전부고 다른 건 먹질 않는다. 매일매일 지마랑 함께 식당까지 가던 습관이 거짓말 같은 일이다.

 보다 못해 가자고 부른 적이 있다. 하지만 '어차피 맛이 안 느껴지니까 그닥.' 이라면서 거절당했다. 내용도 충격이지만, 직접 입에 그 말을 꺼냈다는 사실에 아연했다.

 평범하게 생각한다면 그런 말을 들은 지마가 어떻게 생각할지 잘 알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박사에게 그 정도의 주의력도 없다는 게 알 수 있다.


 날이 지날수록 야위어져 가는 박사. 그런데 박사 스스로는 자신의 몸 상태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한다. 아니, 신경 쓰지 않는 게 아니라 '모르는'거다.

 그 정도로 박사의 정신은 마모되어간다.


 로사의 존재는 옆에서 보면 독이고, 의존은 악덕이었다. 하지만 박사에게 있어서 확실한 치유였던 것이다. 그걸 잃어버린 박사가 조금씩 망가지는 것이 도리다.

 거기에 덤으로 말하면, 지마와의 만남으로는 잃어버린 치유를 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소 친해진 정도로 기뻐하던 자신이 우스웠다.


'그렇다고......이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자신이 미약한 힘에 지나지 않는다고는 해도, 그게 박사에게 손을 뻗지 않을 이유는 안 된다. 박사의 이상에 눈치를 챈 인간은 다소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원인까지 아는 사람은 제법 제한된다. 자칫하면 지금의 로도스 선내에 있어서 자기 말고 없을지도 모른다. 빨리 수를 쓰지 않으면 늦어버릴 가능성조차 있다.


 좋은거면 서둘러라. 각오를 다진 지마는 서류를 두고서 두 명 치의 홍차를 내리고, 근처 소파에 박사를 불렀다.


"야. 꽤 오랫동안 하고 있잖아. 휴식 좀 취해라."


"신경 쓰지 마. 너만 쉬어도 괜찮아."


"차가 식잖아. 빨리 와."


"......나 원. 어쩔 수 없네."


 평행선을 긋는 대화가 되었다간 귀찮다고 생각한건가, 박사도 얌전히 서류 일을 정리하고 소파에 왔다. 지마와 마주 보게 앉아, 컵 안에 든 내용물을 마시기 시작했지만, 변함없이 표정은 좋아지지 않는다. 찻잔의 안에 든 액체의 표면에 보이는 눈은 감동이 없었고, 빛이 없었다.


 그렇게 잠시간 조용한 시간이 지나고, 박사가 홍차를 완전히 마셔낸 시점에서 지마는 말을 걸기 시작한다.


"음, 요즘 어때?"


"어떻다니?"


"상태 말이야 상태. 몸 상태나 이것저것 어떠냐는 말이야."


"그러네...... 좋지도 나쁘지도 한 상황이지."


'거짓말쟁이....... 나쁘잖아......'


 곧바로 반론이 떠올랐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는다.


"그러냐? 곁에서 보기엔 잘 못 자는 것처럼 보였는데, 착각인 건가?"


 찌르듯이 말하니 박사는 한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곧바로 원래대로 돌아가고서 대답한다. 컵이 놓이면서 딱딱한 소리를 낸다.


"하하. 이거 들켰네. 실은 요즘 재밌는 책이 있어. 그거 읽으려고 밤을 새우다 보니 말이야."


"흐응."


 거짓말이다. 이 몇 주 동안 그런 화제는 한 번도 안 나왔다. 무엇보다 불면증의 진짜 원인이 뭔지는 이미 알고 있다.


"푹 빠져서 읽고 있는데, 널 걱정시켰다면 자제하는 쪽이 좋겠네. 앞으로는 시간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게."


 부아가 치밀 정도로 평범하게 박사는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내용은 거짓말이지만, 걱정하지 말라는 기분으로 꾸미는 거겠지. 그렇지만 지마에게 있어서는 고통이었다.


 너에게는 진짜 내용을 말할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고, 그렇게까지 신뢰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하는 것만 같아 분했다.


 그 뒤에도 매우 잘 짠 거짓말을 늘어놓는 박사의 말이 이어졌지만, 전부 한 귀로 들어와 한 귀로 빠져나간다.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괴로움만이 가슴을 태우다가 한계가 왔다.

 정신이 드니 지마는 식탁 테이블을 넘어 마주앉은 박사를 벽치기 하는 모습이 되었다. 박사의 발을 가볍게 무릎으로 누르고, 소파의 등받이에 오른손을 눌러서 박사가 일어나지 못하게 막는다.


"......난 그렇게 못 믿어워?"


"지, 지마......?"


"네가 전에 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거 때문에 못 자는지도 로사에게서 들었어. 근데, 나에게는 왜 안 말해주는데......! 로사에게는 말할 수 있지만 난 안 되냐고......!"


 말 할 생각이 없던 말이 새어 나온다. 진심을 꺼내게 하지 못했다는 현실이 자신은 선택받지 못했다는 해석으로 바뀌어 가슴을 찌르기에 나온 행동이었다.

 격정에 의해 입술과 함께 말이 떨리고, 따뜻한 액체가 눈가에서 넘친다. 못 참고 박사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자, 얼마 못 가 언제였는지 그랬던 것처럼 등이 쓰다듬어진다.


"그래...... 로사가......"


 비밀이 폭로되었음에도 박사의 목소리에는 분노야 실망은 없었다. 그거조차 로사에게 신뢰를 보이는 것 같아, 저도 몰래 지마는 박사의 옷을 붙잡는 힘이 늘어났다.


"그럼 조금 말할까. 듣기에 그다지 유쾌한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이런 서론을 하고서 박사는 과거의 일을 얘기한다.

 작전중에 리유니온 병사의 자폭에 휘말린 일. 그날부터 악몽을 보게 된 것. 언제부터인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살아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는 것.

 그리고 그 괴로움에서 구원해준 게 돼주진 것. 그녀가 근처에 없는 지금 다시 죽음을 바라는 게 몸이 달라붙은 생활을 보낸다는 것까지.


 지마로써는 상상 이상이었다. 불면증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죽음을 바랄 정도로 몰려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위화감은 있었다. 박사는 지휘관이지만, 실제 전투보다도 전술이나 전략을 담당하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전장이 얼마나 가혹한지는 알고 있을 텐데 그런 박사가 한번 습격받은 정도로 매일 밤 악몽을 볼 정도로 초췌해질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분명 박사의 목숨에 치명적인 일이 있었을 거다. 그리 생각한 지마는 얼굴을 들어서 눈가를 훑고서 박사의 눈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정말로 습격을 받은 게 원인이야? 다른 게 있지?"


"......날카롭네. 응. 정확히는 그것도 요인이지만."


 체념한 듯이 박사는 말을 잇는다. 그와 함께 박사의 눈도 점점 빛을 잃어간다.


"난, 사실 로도스의 일이 즐겁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어. 그야 그렇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주워져서는 기억상실이지만 능력이 있다면서 추켜세워져서 갑자기 윗자리에 앉혀지고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입장이 되었다고. 진짜 고생했지."


 아직 핵심이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알았다. 이것도 박사의 진심이다.


"그저, 살아가기 위해서 그 상태를 받아들이고 활동을 계속하는 와중에 희망을 가졌어. 그게 뭔지 알아?"


 박사랑 눈이 마주친다. 조금이지만 박사의 눈동자가 감정을 되찾고, 다시 사라져간다.


"너희야. 이 잔혹한 세계에서도 온 힘을 다해 살아가는 아이들. 커다란 가능성의 조각들. 그게 사라지는 걸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다면, 내 인생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


 굉장한 내용과 반비례하는 차가워져 가는 박사의 목소리.


"전에 자폭에 휘말렸다고 말했지? 그 병사는 너희보다도 한참 어렸어. 아주 어렸지. 그제서야 깨달은 거야.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나도 아이들을 죽이고 있다고. 내가 들고 있었다고 생각한 이상은 이미 그 손으로 부신 거라고."


 박사의 눈동자는 유리구슬 같았다. 색이 빈 텅 빈 넓은 공간.


"-지마. 이런 나에게 살 이유는 있어?"


 삶을 포기한 환자 같았다. 아니면 재판을 기다리는 죄인같이 조용한 박사의 말이다. 저도 몰래 반사적으로 지마는 대답했다.


"......! 있어! 당연히 있지!"


"어떤 건데?"


"그건...... 그게......"


 곧바로 대답하길 주저한 건 대답이 궁색해서가 아니다. 좀 전의 대답과 마찬가지로 반사적으로 내용이 떠올랐다. 입에서 머무는 건 대답의 내용 때문이다. 이 대답이라면 확실히 반응이 온다. 너무 확실히 올 것이다.

 그럼에도 각오는 다졌다. 로사가 박사의 과거를 용서했고, 지금을 긍정했다면 자신도 미래로 나아갈 이정표를 가리키자. 그것이 박사를 저주하게 될지 어도.


"그건...... 나야. 살아가는 의미가 없다면 내 안에서 찾아. 삶의 보람이 모르겠다면 날 위해서 살라고."


 너무나도 오만한 선언. 다른 이에게 인생을 바치라는 악독한 말. 과거에 악이라고 정의내린 의존이라고 하는 마약.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 인사를 하고, 함께 밥을 먹고 일을 해. 밤이 되면 자기 전에 '잘 자. 내일 또 보자'고 말하는 거야. 고작 그거지만 난 고작 그런 생활을 원해. 너한테 있어서 이미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상관없겠지만 난 싫어. 네가 죽는 게 싫다고."


 여기엔 지마의 본심도 섞여 있었다. 박사를 로사의 영향력에서 떼어내겠다는 것도 결국에는 지마의 개인의 감정이 관련되어 있었다. 상사로서 존경할 수 있고, 한 명의 인간으로써도, 뭐 그다지 싫지 않은 남자를 다른 상대에게 점점 빠지게 두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니까 넌 죽으면 안 되고, 그걸 위해선 작전행동에서 뭘 해도 괜찮아. 만일 누가 죽어도, 어떤 상대였다고는 해도 그건 전부 날 위해서야. 어쩔 수 없던 거지."


 박사가 죄악감으로 망가질 거라면 그 책임을 바꾸면 된다. 목표를 못 찾는다면 주면 된다. 참으로 우습게도 상대방을 긍정하고 의존시키는 방식은 로사의 방법과 매우 비슷했다.


 지마의 말을 듣던 박사의 얼굴에 감정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대로 나아지지는 않았다. 살며시 남아있던 이성이 걱정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건 스스로에게 든 걱정이 아닌 눈앞의 지마에게 든 걱정이다.


"하지만...... 그랬다간 네가 모든 걸 짊어지게 돼. 나를 편하게 하려고 널 고생시킬 수는......"


 그 말을 들은 지마는 속으로 저도 몰래 웃었다. 이런 모습이 돼서도 다른 사람을 걱정한다. 그런 박사니까 망가지지 않길 바랐다. 그리고 그런 박사니까 파고들 틈이 있었다. 도망칠 곳을 빼앗듯이 말을 잇는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니까 네가 날 지탱해줘. 내가 힘들 때, 기대게 해줘."


 뒤틀려서 쌓인 목공품과 같았다. 서로의 중심을 맡기고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쪽도 같은 운명을 맞이한다. 혹은 한 마리로는 날 수 없는 한 날개의 새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평소라면 거절당할 제안이겠지. 이성적인 박사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지금의 박사는 정상이 아니고, 아주 깊게 갈망하고 바라던 것도 지마의 손바닥 안이다.


 살아갈 이념을 잃어 괴로워하던 박사는, 새로 제시된 목표를 저항할 수 없다.

 만일 그게 의존을 부를 무언가라고 해도 그렇다. 전에 싫어했던 악랄한 수단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은탄 같았다.


"......괜찮아? 내가 네 인생의 짐이 되는 짓을 해도."


"쫑알거리고 시끄럽네. 내가 얘기를 꺼냈어. 자, 일로 와."


 박사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에 발과 무릎으로 땅을 딛은 지마. 팔을 벌리고 내려다보는 시야에 당황하는 박사의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매우 짧은 시간이었다. 곧바로 머뭇거리며 얼굴을 갖다 대는 박사를 끌어당겨 가슴팍에 감싸자 박사도 저항하지 않았다.


 로도스의 누구나 바라보는 박사가 자신의 팔 안에 있다. 자신에게 어리광을 부린다. 그 사실에 오싹 거리는 기쁨을 느끼면서 감싸는 힘이 강해진다.

 누군가가 올 가능성 같은 건 이미 지마의 머리에서 사라졌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처럼 강하게 끌어안은 채, 그렇게 잠시간이 지나갔다.







"~♪"


 매우 기분이 좋은 듯한 콧노래를 부르며 오퍼레이터 한 명이 로도스 선내를 걷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멀리 떨어진 사무소에 출장을 나갔던 로사다. 도중에 재앙과 만나는 일도 없었고, 중계했던 이동도시의 루트도 잘 맞물려서 예정보다도 빨리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니 몰래 돌아가서 서프라이즈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


 박사와 떨어진 시간은 로사에게 있어서도 고통의 시기였다. 박사가 로사에게 의존하듯 로사도 박사에게 기대고 있는 거다. 그러니 마침내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워서 버틸 수 없다.


 시간은 낮이 좀 지난 시각이다. 이전 스케쥴에서 보면 점심을 마쳤을 공산이 크다.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 집무실까지 발을 옮기니 익숙한 손놀림으로 주변의 단말기에 비밀번호를 입력한다. 그것도 박사가 알려준 거다.

 에러가 출력되는 일 없이, 정상적으로 입력된 것을 확인한 로사는 힘껏 문을 열었다.


"안녕 박사! 돌아왔...... 어라?"


 안타깝게도 방 안에 기척이 없었다. 박사만이 아니라 비서의 모습도 없다.


"설마 아직 점심을 먹는 중인 건가? 아니면......"


 방 안을 탐색하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박사의 책상을 보니 아직 작업하던 것도 아니고, 일단락을 맺은 모양이다. 그럼 역시 나간 건가?


 신경쓰이는건 박사의 의자 등받이에 걸려있는 박사의 웃옷이다. 밖에 나가는데 이게 남아있는 건 이상하다. 거기에 비서의 모습이 안 보이는 것도 묘하다.

 그 때 여자의 감이 속삭인다. 어쩌면 오늘의 비서로 지마가 일하는 것일 거라고. 그리고 지마가 박사와의 사이를 깊게 맺었다고.


"설마...... 이쪽인가?"


 집무실과 직접 연결된 수면실. 거길 지나는 문에 잠금장치는 걸리지 않았다. 머리에 하나의 가능성이 떠오르며 수면실 안으로 이동하니, 눈에 보이는 건 상상한 그대로의 광경이다.


"설마 싶었는데...... 후후. 조오금 질투심 나는데."


 방 안에 부피 대부분을 차지하는 결코 크지 않은 침대. 어느샌가 여러 장 준비된 모포. 평소라면 혼자 사용할 그곳을 박사와 지마 둘이 사이좋게 달라붙어, 서로 안아주듯 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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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보자마자 번역하고자 맘은 먹었었는데, 결국 차일피일 미루다 지금에 다다른 작품. 명방하면서 절망회로 돌리면 이런 스토리가 되지 않을까?


 사실 원래부터 그랬어야 했긴 했는데, 이번엔 검사기도 돌리면서 더 꼼꼼히 퇴고해보고자 했어. 그래도 뭐 이상하거나 하면 알려줘.


 벌써 한달이 지났네. 그래도 잘 지내고. 건강히 지내자. 다들 잘 지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