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처음은 역시……중앵이 낫겠지.”

 

6.9초라는 긴 시간을 걸친 뇌내 마라톤 회의 끝에 나온 결론은 다름 아닌 중앵특별한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고단순히 가장 가까워서 그랬다.

 

굳이 굳이 먼 곳부터 가고 싶진 않으니까나는 지금 한시바삐 이 안경의 위력을 테스트해 볼 심산이니상기한 즉시 방향을 틀었다.

 

걸음은 가벼웠고마음은 그 이상으로 가벼웠다물론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가시가 내 가슴을 쿡쿡 찌르고 있었지만그리 크진 않았다호기심 선에서 빠르게 제압되었다.

 

기대와 설렘그리고 긴장이 섞인 마음은 나조차도 그 비율을 가늠하기 어려웠다다르게 말하면 약간 흥분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설렜다마치 선물을 받은 아이가 포장지를 뜯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비유가 약간 변태 같았지만 하여튼.

 

분명 호감도는 0부터 100까지라 했었나.”

 

우선은 흐릿한 기억의 수풀을 뒤져 이 안경의 사용법과 상세 설명을 떠올렸다호감도는 0부터 100까지사용 방법은 상대방의 전신을 눈에 담는 것이라 말했다.

 

이때호감도 0은 남보다 못한나를 반드시 죽이지 않고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수준, 100은 당장 한 판 하자고 해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준이라 말했다조금 경박했지만이해하는 데는 참 편리했다.

 

그렇게 안경에 대한 설명을 상기하며 나아가니어느새 중앵 숙소 근처에 도달할 수 있었다허나 어째서인지내가 가장 먼저 본 얼굴은 중앵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주인님?”

 

매일 들어도 질리지 않는 반가운 목소리하지만 반대로 이런 곳에서 듣기에는 조금 이질적인지라약간 당황한 반응을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가장 먼저 머리칼약한 바람에 살며시 흩날리는 청아한 은발은 실로 아름다웠다시선을 빼앗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어서 보석보다 빛나는 푸른 눈맑고 푸르렀다더 볼 것도 없었다망설임 없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벨파스트.”

 

벨파스트는 대답 대신 행동으로 내게 반가움을 표했다살짝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낮추는 행위언제 보아도 기품이 넘치는 행동이었다.

 

평소라면 넋을 잃고 바라봤겠지만아쉽게도 지금 내겐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천천히집중하자 그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호감도: 152]

 

[이런 곳에서 주인님을 마주하다니기쁘네요.]

 

……?”

 

분명 호감도는 100이 최대라 했을 텐데시작부터 무슨.

 

행여나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닐까눈두덩이를 비벼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안경에 표기된 숫자는 152, 다른 건 없었다.

 

극히 짧은 시간크게 당황했지만결론을 내렸다이 안경이 가짜거나혹은 진짜로 벨파스트가 내게 품은 마음의 무게가 그만큼 거대하거나.

 

전자일 확률은 극히 낮았다애초에 금전에 극히 민감한 아카시가 사기를 칠 가능성을 없다는 것신뢰가 곧 생명인 거래에 그런 수작을 부릴 리 없었다단언할 수 있었다.

 

떄문에 아무래도 후자에 가능성을 두기로 했다그녀와 함께해온 시간은 특출나게 길었으니예상 범위를 한창 어긋나긴 했지만 정이 쌓이는 것도 크게 이상한 건 아니었으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주인님.”

 

……아니그냥 여기서 만난 게 좀 의외여서.”

 

와중벨파스트가 미세하게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물었다정말 자세하게 보지 않으면 모를 수준이었으나마찬가지로 함께 해온 시간이 길었던 나였기에 빠르게 눈치챌 수 있었다.

 

이어 답변은 적당히 둘러댈 수 있었다납득 갈만한 이유였는지 벨파스트 역시 빠르게 수긍하며 표정을 원래대로 돌려놨다.

 

그렇군요그럼 이번에는 혹시 그 안경에 대해 여쭤봐도 좋을까요.”

 

그냥 패션용으로밤에 휴대폰 많이 봐서 시력 낮아진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만점짜리 대답혹시나 혼날 수 있는 구멍까지 원천 차단했다.

 

[그나저나 안경도 생각 외로 잘 어울리시네요.]

 

[호감도: 153]


새로 갱신된 정보는 칭찬기쁘기 그지 없었으나그보다는 호감도가 올라갔다는 게 더 눈에 들어왔다.

 

고마워벨파스트.”

 

그래도 감사를 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싱긋웃음과 함께 말했다.

 

?”

 

하지만 그것이 실수임을 자각하는 건 순식간이었다그녀는 단순히 생각만 했을 뿐직접적으로 내게 안경이 잘 어울린다 표현하지 않았으니까.

 

아무래도 이런 물건은 처음 사용하는 것이다 보니사소한 불찰이었다빠르게 수습했다.

 

아니아니평소에 늘 신경 써줘서 고맙다고늘 고생하잖아.”

 

……그렇군요.”

 

벨파스트의 동공이 잠시 커지고이내 살짝 고개를 숙이고이어 웃었다아름다웠다빠르게 생각해 낸 변명치고는 깔끔했다.

 

[이런 주인님을 모시게 된 저도 참 운이 좋네요.]

 

이어지는 칭찬안경에 나온 대로그녀는 내게 높은 수준의 애정을 품고 있었다기뻤다누군가에게 그러한 감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내 웃음이 커지는 건 필연적이었다아무래도 호감도가 높은 건 맞지만아카시의 언급이 조금 과장되었던 거 같다.

 

[그나저나주인님은 아직 팬티가 사라졌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거 같네요.]


하고생각했는데.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는데아직도 들키지 않았어요주인님의 팬티아아어쩜 그리 황홀한지매일매일 반찬으로 삼고 있는데 질리지 않아요.]

 

……?”

 

[들키지 않아서 다행……아니들켰을 때 주인님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경멸할까요화를 낼까요뭐든 좋아요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주인님에게 다가가 강제로 해버린다면……아아…….]

 

뇌에 직통으로 때려 박힌 충격적이다 못해 정신 나갈 거 같은 정보행동이 멈추는 건 당연했고표정도 약간 멍청해졌다반대로 일절의 표정 변화 없는 그녀를 보며 한 차례 더 당황했다.

 

주인님표정이 또 안 좋으십니다만역시 무언가 불편한 것이…….”

 

아니아니괜찮아일단 나 들어가 볼게바쁜 일이 있어서.”

 

……알겠습니다.”

 

[아쉽네요이대로 자연스럽게 방으로 데려갈 수 있었을 텐데그리고 바로…….]

 

정상적인 말과 반대되는 속내에 한 번 더 충격받고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내가 멀어지는 와중에도그녀는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뭐였을까.”


걷기를 한참완전히 중앵 기숙사로 들어오고 나서야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드디어 정신을 가다듬을 틈이 생긴 것이다.

 

머리가 난잡했다또 혼란스러웠고당황스러웠다비슷한 수식어는 죄다 때려 박을 수 있을 정도로.

 

생각하며조심스레 안경을 벗었다정말일까벨파스트는 속으로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던 걸까?

 

되짚어보니확실히 속옷 몇 개가 사라진 거 같긴 했다보통 이런 건 내 부주의로 일어나는 일이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설마.

 

……당신.”

 

고뇌에 빠진 와중부드러운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안경을 쓸 틈도 없이 고개를 들었다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노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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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들 노시로 왤케 좋아함, 넣어 달라는 사람 많아서 잘 모르는데 일단 넣음 벨파도 한 표 있길래 걍 넣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