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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둑어둑한 공간, 한 여인이 걸음을 옮긴다. 느리지만 섬세하게, 난잡해 부글거리는 감정을 품은 채로.
아마 그 감정의 정확한 비율은 본인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표정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무덤덤했지만, 마음속은 흔들리다 못해 태풍이 몰아치는 와중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강인하게 굳어버린 심지가 그녀를 앞으로 이끌었다. 한 걸음, 두 걸음, 계속해서 나아가면, 그녀에게 있어 익숙한 모습이 눈동자에 담긴다. 마침내 여인의 걸음이 멈췄다.
“…….”
그 시선 끝에 존재하는 건 소파에 앉아 조용히 티비를 보고 있는 건장한 체형의 남성, 그늘에 가려져 명확한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여인은 그가 자신이 애타게 찾던 존재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 역시 누군가가, 자신이 알고 있는 여인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했으나, 어째서인지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애써 무시한다는 표현이 옳았다. 외면한다는 표현을 빌려오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 사내의 전부였다.
그런 모습을 보며, 여인은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또 한 번 감정이 역류했다. 불길한 기운이 되어 사내를 찔렀다.
그 선득한 기운을 인지한 것일까. 날카로운 기세가 공간을 가르기 무섭게 사내가 티비를 껐다.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마주했다.
사내는 능글맞게 웃었고, 여인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이를 악물었다. 까드득, 어찌나 힘을 강하게 준 건지, 그에게도 닿았다.
“널 증오한다.”
그리고 이것은, 두 남녀가 3년의 세월을 걸쳐 재회한 그 찰나에, 여인의 입에서 가장 먼저 울린 한마디.
2.
사내는 지휘관이었다. 그것도 지극히 유능하고, 또 다정한, 부하들의 애정을 잔뜩 받았을 정도로.
실제로 그를 사모하거나 그 이상의 감정을 품은 함선 소녀들이 절반, 아니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모두의 동경, 애정, 사랑을 받으며, 능력까지 뛰어나면서 마음씨까지 고운 사람, 무엇 하나 떨어지는 것 없는, 말 그대로 완벽했던 남자.
그리고 이를 구태여 과거형으로 서술하는 까닭은.
“오랜만이야. 체펠린. 잘 지냈어?”
지금의 사내는 지휘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
그런 사내가 마주하고 있는 여인은 함선 소녀, 그의 지휘 아래 움직이던.
또 조금 전 서술한, 그를 사모하거나 그 이상이었던 존재.
허나 지금은, 그를 증오하는 존재.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지?”
영문도 없이 사라진 그를 증오하는 존재.
“일단 앉아봐. 지금 우리 사이에 풀어야 할 매듭이 적잖게 많아 보이니까.”
가만히 반짝이는 잿빛 머리칼의 여인이 흉악한 기운을 내뿜고 있음에도 사내는 여전히 담담했다. 미약한 흔들림조차도 보이지 않는 모습은 어째 속세에 미련이 없는, 말 그대로 달관한 자의 모습처럼도 보였다.
싱긋, 무언가 결여된 미소까지 그려 보이니 더더욱.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그녀에게는 참으로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대로 착석, 내려다보던 시선이 풀리고 마침내 둘은 같은 눈높이가 되었다. 대화를 시작할 준비가 끝났다는 뜻이다.
“예의상 안부부터 물을게, 잘 지냈어?”
“지금 놀리는 건가?”
하지만 시작부터 삐걱, 톱니바퀴는 맞물리지 않았다. 여인의 이마에 힘줄이 격자로 솟아올랐다.
“전혀,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말이야.”
“지금 꼴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냔 말이다!”
쿵, 그녀가 격노하며 탁자를 내리친다. 압도적인 완력에 탁자는 무너지기는커녕 그녀가 내리친 부분만 정확히 파였다. 곧 그녀가 가진 분노의 크기였다.
그렇게 파스스, 탁자가 박살 나고, 와중 투명한 유리병 하나는 고고히 남아 자신의 위용을 뽐낸다. 사내는 오롯이 그것만을 바라보았다.
“묻겠다. 왜 우리를 떠난 거지?”
강압적인 분위기, 이미 무거워 기가 약한 사람이라면 당장이라도 혼절해도 이상한 상황까지 이르렀으나, 3년가량 묵혀온 체펠린의 감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왜, 나의 곁을 떠난 거지?”
토할 것만 같은 압박감, 지금 자리는 그라프 체펠린이라는 존재에 의해 짓눌리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비교적 표현이 아니었다. 사내의 옆에 있는 화분은 차츰 시들고 있었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변을 기어다니던 벌레는 전부 종적을 감춘 지 오래였다. 현재 이 공간은 그녀의 것이었다.
“…….”
하지만 사내는 그렇지 않았다. 고요히, 침묵이라는 답변을 택한 그에게서는 조금의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슬며시 올라간 입가가 유독 인상적이었다.
능욕하고 있다고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았으나, 그 정적이 막연히 이어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체펠린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사내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나가기 직전, 어떠한 사건 하나가 일어났지, 뭔지 기억해?”
예상대로, 침묵이라는 이름의 얼음이 박살 나는 것은 금방이었다.
“지금 무슨……!”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의문문, 의문문에 돌아올 만한 대답은 아니었다. 또다시 자신을 놀리고 있다 판단한 체펠린이 언성을 높이려 했으나, 그보다는 사내의 입이 조금 더 빨랐다.
“도미노야. 하나가 쓰러지는 순간, 연쇄적으로 와르르, 전부 무너지는 거야. 여태 쌓아왔던 모든 것이.”
아리송한 표현, 평범한 사람이라면 필히 멱살을 잡고도 남을만한 상황이었으나, 여인은 아니었다. 사내를 잘 알고 있던 여인은, 아니었다.
되려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와서 처음으로 벌어진 광경이었다. 웃는 사내와 당황하는 여인, 사내는 그곳에 쐐기를 박기로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가장 먼저 무너진 블록은 뭐였을까.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내가 모든 걸 내팽개치고 도피한다는 최악의 선택지를 고르게 된, 모든 사건의 첫 단추는 무엇이었을까.”
하나, 둘, 셋, 또다시 정적이 자리를 메우고, 이 공간은 사내의 것이 된다. 와중 여인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사내의 질문에 대한 답을 갈구했고, 현명한 그녀는 금세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반지.”
“딩동댕, 정답.”
경쾌한 목소리. 전혀 달갑지 않았다.
3.
“기억하지? 어느 날 상부에서 내게 선물이랍시고 서약 반지를 하나 내려준 건.”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사건은 모항을 떠들썩하다 못해 속된 말로 개판으로 만들었으니까. 그 중심에 존재했던 그녀가 잊었을 리가 없었다.
“나름대로 줄타기를 잘하고 있던 나한테, 갑자기 결혼 생각은 없냐면서 억지로 들이밀더라, 좋게 좋게 거절했는데 다음날 오니까 당당하게 배송되어 있더라고, 내 의견은 하등 신경 쓰지 않은 채로.”
사내가 말했다.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아마 나를 묶어놓을 수단을 만들어 놓을 속셈이었다고 생각해, 누군가와 언약을 맺는 순간, 나는 그 진영에 반쯤 종속되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마찬가지로 사내가 말했다.
“실제로 그 반지를 권한 양반도 이글 유니온이었고, 그날 이후로 열심히 이글 유니온의 장점을 마구 설파해 주시더라.”
이것도 사내가 말했다.
“하지만 하나, 그 멍청하고 등신 같은 양반이 고려하지 못한 게 있다면…….”
큭큭, 사내가 웃었다. 비릿하다 못해 허탈한 미소, 그녀의 입장에서도 처음 듣는 날카로운 단어 선택이 지극히도 인상적이었다.
당황의 감정이 표정을 넘어 목소리로 나타나는 건 필연적인 결과였다. 물론 사내는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고 푸하하하, 하늘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웃어젖힌다. 체펠린의 미간이 약간 좁혀졌다.
“이미 우리 모항은, 물이 가득 찬 유리잔이었던 모양새였던 거지.”
말하며, 사내는 책상 위에 고고히 서있던 잔에 물을 따르기 시작했다. 아슬아슬, 표면장력을 이용해 정말 넘치기 직전까지.
그리고 살며시, 그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잔 위로 떨어트렸다. 풍덩, 그 무언가가 들어가기 무섭게 물은 넘쳐버렸고, 이내 바닥을 적셨다.
“……그건.”
체펠린의 눈동자에 분노 대신 당황의 비중이 커진다. 놀랄 만도 했다.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물건이었으니까.
은색으로 반짝이는 원, 사내가 3년 전에 강제로 받은 반지.
체펠린도 원했던 그것.
4.
큐브 적성, 뛰어난 지휘 능력, 모두에게 우러러 받는 다정한 성격.
허나 그중 하나는, 단지 가면에 불과했다.
“무엇이든 과하면 독이야.”
하나, 사내가 가면을 벗는다. 은은한 미소 대신 비릿하여 이질적인 웃음을 품은 사내의 그것은, 체펠린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였다.
생판 다른 사람을 보는 듯했다. 단지 표정 하나 바뀐 것에 불과한데,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나에 대한 애정이 두터웠던 너희들은……내가 반지를 주문했다는 소문을 듣고 하나둘 자신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 감정이 전염되는 건 순식간이었어.”
아니, 아니다. 표정만 바뀐 게 아니다. 체펠린이 생각했다.
풍기는 기운도, 억양도, 행세도, 모두 바뀌어 있었다. 바뀌지 않은 건 그의 모습뿐, 그게 전부였다.
“자신이 아니라면, 차라리 부숴버려서 갖겠다는 그 끈적한 감정마저도.”
사내가 물이 가득한 잔에 손가락을 넣고 빠르게 돌렸다. 그 움직임에 따라 물은 차츰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고, 그 여파로 책상은 차츰 젖어갔다.
반복한다. 손가락은 점점 빨라지고, 잔 안의 소용돌이는 거대해져 이젠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휘말린 반지는 이리저리, 갈 곳을 잃은 채 넘실거리기만을 지속했다.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아마 도망치지 않고 계속 버텼다면 이렇게 됐겠지, 내 의사는 하등 상관없이.”
그리고 쨍그랑, 사내의 주먹이 잔을 내리치고, 박살 난다. 조각난 파편이 박혀 피가 흐르기 시작했으나, 그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소용돌이에 집어 삼켜져서 말이야.”
조심스레 톡, 톡, 박힌 파편을 뽑는다. 더 이상 악화되지는 않았으나, 상처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질식해 버릴 것 같았거든, 너희들에게.”
“그럼 그 소용돌이에서 나갈 때, 나도 데려갔어야지!”
체펠린의 눈동자가 붉게 빛난다. 피보다 진했고, 끈적였다. 그녀의 마음이었다.
“사라진 경을 찾으려, 내가 무슨 고생을 했는지 알기나 해?”
“모르니까. 이렇게 말하고 있지.”
이어, 사내가 웃는다.
“난 너희들에게 단 한 번도, 애정을 품은 적이 없으니까.”
“……뭐?”
쿵, 하고, 무언가 크게 가라앉는 느낌, 그라프 체펠린의 것이었다.
“솔직히 말할게, 난 너희가 두려웠어, 지휘관이던 시절 나는, 매 순간순간 가슴을 졸이며 살아야 했으니까.”
허탈한 목소리, 또 새로운 모습이었지만, 그보다는 사내가 뱉는 말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비수가 되어 날아왔으니까.
“차파예프가 나를 술자리에 불렀을 때, 아카기가 내게 달려들어 다른 여자의 냄새가 난다며 따지고 들 때, 론이 내게 요리를 해준답시고 나를 방에 불렀을 때, 전부.”
툭, 하고.
“하나같이 두려워 도저히 버틸 수가 없더라, 그래서 생겨난 게 이거.”
사내가 웃었다. 익숙하면서 다정한 미소.
가면이었다.
그것을 마주한 체펠린은 이제야 모든 사건의 전말을 이해했다. 처음부터 자신들이 두려워 가면을 쓴 사내, 무거운 사랑에 짓눌려 질식할 뻔한 사내, 그 기폭제가 된 반지.
끝내는 도망친 그.
“아하하하! 뭐야, 그럼 난 여태 받지 못할 애정에, 그저 미련한 사랑에 매달러 그렇게 시간을 낭비한 거야?”
그라프 체펠린이 웃음 그린다. 행복하거나 기뻐서 그런 게 아니었다. 단지, 작금의 자신이 너무나 우스워, 도저히 비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 명랑한 소리는 공간을 가득 채우다 못해 자리 너머까지 울렸으며, 실린 감정의 무게는 바로 앞에 있는 사내가 가장 먼저 알 수 있었다.
“맞아. 정답이야.”
또다시 울리는 그의 경쾌한 목소리, 마찬가지로 전혀 달갑지 않았다.
아하하, 멍청하기도 해라. 체펠린이 생각했다.
“아아……증오스러워, 나는, 나는, 지금 증오하고 있어.”
증오스럽다. 날 두고 간 당신이, 가면으로 날 기만한 당신이, 믿음을 박살 낸 당신이, 날 두고 사라진 당신이, 증오스럽다.
증오해서, 증오하고, 증오에 이르러 난 그를 증오한다.
“날 사랑하지 않는 경을, 당신을, 증오하고 있어.”
하지만 그 증오마저 사랑하기에.
사랑하기에 증오, 원망하기에 증오, 토악질 나오기에 증오, 구역질 나오기에, 잊을 수 없기에 증오.
강하게 박혀서 증오, 아프기에 증오, 뜨거운 것도 증오, 검은 것도 증오.
증오하고, 사랑하고, 원망하고, 사랑하고, 피를 토하고,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경을 증오하고.
그 이상으로 사랑하기에.
나는.
“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 경이 날 미워하든, 원망하든, 증오하든 말이야.”
끝에 결론을 내린 그녀가 입을 연다. 각오를 마친 자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지만, 반대편에 앉아 있는 사내에게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늘 그랬듯, 막연히 두려울 따름.
“내 애정은 일방향이어도 상관없으니까.”
한 걸음, 그대로 다가간 체펠린이 사내의 넥타이를 잡아당겨 시선을 맞춘다, 다리는 움직이지 않아 그녀가 내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고, 사내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에 맞춰 체펠린도 웃었다. 둘의 웃음은 뒤섞여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 냈다.
하, 하, 하.
아, 하, 하.
하, 하, 하.
토악질 나올 정도의 불협화음이었다.
쓰는 방식을 좀 바꿔봤는데 괜찮은 거 같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