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타쿠 혐오는 이 사건 이전에도 조금씩 있었지만

이 사건을 기점으로 혐오 여론이 폭발적으로 생성되기 시작한다.




1962년 8월 21일 미야자키 츠토무는 지역 신문사를 운영하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출생 당시 미숙아였고 손에 기형이 있어서 손바닥을 뒤집지 못하는 장애 때문에 학창시절 집단괴롭힘을 당했다. 또한 집안의 엄격한 분위기 때문에 아버지하고 사이가 좋지 못했으며 그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오직 그의 할아버지 뿐이었다고 한다. 대학교 시절 좋아하던 동급생에게 고백하였으나 손의 장애 때문에 차이고 말았다. 이때 어린 소녀가 그를 위로해 주었는데, 이때부터 어린 소녀에 대해 집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손의 장애로 인한 이지메, 그에 따른 사회부적응이 연쇄살인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1988년 8월 22일 미야자키는 사이타마현 이루마(入間) 시에서 4살의 소녀 콘노 마리(今野真理. 1984년생)를 납치하여 살해한다. 이때 그는 사후경직으로 굳어진 사체에 시간을 하였고 이를 비디오로 찍었다. 여기서 시간이란 시체를 간음하는, 즉 이미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자신의 성적욕구를 해소하려는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를 한 까닭에 대해 처음 간이감정 문진기록에서 그는 "아무래도 2차원보다는 3차원이 좋았다" 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1차 감정에서는 기억이 안 난다고 대답하였고 최후 피고인 질문에서는 "갑자기 어린 시절이 그리워졌다" 며 오락가락했다. 그는 사체의 일부분을 절단해 벽장 안에 보관하고 나머지 부분은 도쿄 도 이츠카이치쵸(현재 아키루노시)의 숲에 버렸다. 


1988년 10월 3일 사이타마현 한노(飯能) 시에서 소학교 1학년 소녀 요시자와 마사미(吉沢正美. 1981년생)를 납치, 살해하였고 이번에는 곧바로 시간을 하였다. 동기에 대한 공술조서에선 "뭐라 이루 말할 수 없는 스릴이 있었다" 고 했다가 1차 감정에서는 역시 기억이 안난다고 대답하였다.

1988년 12월 9일 사이타마현 가와고에(川越) 시에서 4살 소녀 난바 에리카(難波絵梨香. 1984년생)를 납치 및 살해하였다. 이후 시신을 숲에 버렸는데 12월 15일에 나체의 상태로 발견된다. 12월 20일에는 죽은 난바의 부모 집에 엽서가 도착했다. 엽서에는 "에리카, 추위, 기침, 목, 휴식, 죽음" 등 소녀의 살해 당시의 정황을 연상시키는 단어들이 잡지에서 잘라낸 활자로 적혀 있었다. 부모가 사체라도 찾아 다행이라고 말한 걸 TV에서 본 그는 다른 소녀들의 사체도 부모에게 보내려고 계획하나 요시자와 마사미의 사체는 회수하지 못했다.

1989년 2월 6일 콘노 마리의 집에 골판지 상자가 배달됐는데 안에는 콘노 마리의 것으로 보이는 뼛조각과 치아, 문서가 발견됐다. 문서에는 "마리의 뼈, 불태움, 감정, 증명" 이라고 쓰여있었다. 이 뼛조각과 치아는 산에 버렸던 콘노 마리의 시신을 회수한 다음 화장하고 남은 것이었다. 2월 10일에는 이마다 유코라는 가명으로 아사히신문 도쿄 본사에 아이를 유산해 그로인한 스트레스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내용의 범행 성명을 보낸다. 그는 이러한 가짜 범행 성명을 11일 콘노 마리의 집에 3월 11일 요시자와 마사미의 집에 보내 수사에 혼란을 주려고 했다.

1989년 6월 6일 도쿄 도 고토 구에서 5세의 소녀 노모토 아야코(野本綾子. 1983년생)를 납치, 살해했다. 이때 그는 소녀의 시신 일부분을 훼손하여 직접 먹기도 했다. 이쯤이면 이미 인간으로서의 길을 완벽하게 포기하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11일 무참히 난도질 당한 노모토 아야코의 사체가 공동묘지에서 발견되었다.

미야자키의 정신나간 범죄 행위는 마침내 1989년 7월 23일 도쿄도 하치오지(八王子) 시에서 또 다른 소녀를 성폭행하려고 하다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공격당해 현행범으로 붙잡히면서 마침표를 찍게 된다. 경찰 조사에서 그는 이전에 저지른 모든 범죄 행위를 자백한다. 그가 범행을 자백한 지 하루만인 8월 10일 마지막 희생자인 노모토 아야코의 머리가 발견되었으며 9월 2일 검사가 기소에 착수하게 된다. 이후 미야자키 츠토무가 시신을 묻은 장소를 안내함에 따라 9월 6일 첫번째 희생자 콘노 마리의 손발이, 13일 요시자와 마사미의 사체가 발견된다. 그리고 조사 결과 그는 소녀를 살해할 때마다 집에 짚인형을 두고 방을 어둡게 한 후 머리에 머리띠를 두르고 양초를 여러 개 켜고 검은 옷을 입은 채로 손을 위 아래로 휘저으며 죽은 할아버지에 대한 부활의식을 벌였다고 한다. 

당초 범행 일체를 자백했던 미야자키는 공판이 시작되자 또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다중인격의 경우 정신이상자이므로 형사책임을 물을 수 없었고 여기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자주 벌인 점이 고려되어 그가 진짜 다중인격인지의 여부가 재판에 가장 중요한 변수로 떠오르게 됐다. 때문에 1990년 3월 도쿄 지방법원에서 시작된 심리는 판결까지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 중 절반은 두 차례에 걸친 미야자키의 정신 감정에 소모됐다.

1차 감정결과 '극단적인 인격적 편향(즉, 인격장애)' 으로 정신장애는 아니며 완전한 책임 능력이 인정되었으나 2차 감정의 경우 '다중인격' 과 '통합실조증' 으로 책임 능력이 일부 부정되었다. 이 경우 심신미약으로 분류되어 사형 선고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법원은 1차 감정 결과를 수용했고 1997년 4월 4건의 아동 유괴살인 혐의를 적용, 사형을 선고했다. 이에 변호인측은 재감정을 청구하지만 기각되었다. 10회에 걸친 피고인 질문을 실시한 끝에 2001년 6월 28일 도쿄 고등법원은 미야자키의 항소를 기각하고 사형을 선고, 이에 같은 해 7월 10일 상고를 하지만 2006년 1월 17일 최고재판소 역시 상고를 기각, 변호인 측이 판결 정정을 요청하였지만 2월 1일 기각하며 사형 판결을 최종 확정하였다. 그리고 2년 뒤인 2008년 6월 17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검거됨과 동시에 전국에서 화제가 되기 시작했고 그의 집에서는 5763개의 비디오 테이프가 있었으며 그 안에 높은 수위의 호러 영화와 로리콘 성인물 몇 편이 있었던 것이 밝혀지자 언론이 대대적으로 오타쿠=잠정적 범죄자란 등식을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미야자키 츠토무의 신상이 유포되어 그의 두 여동생은 직장을 그만두거나 파혼했으며 사건에 분노한 사람들로부터 편지와 전화로 폭언에 시달려야 했다. 심지어 본가는 물론이고 친가, 외가 친척들에게까지 사건의 여파가 미쳐 직장에서 퇴사하거나 이혼하는등 그야말로 두 가계가 풍비박산이 났다.  또 미야자키와 같은 이름이나 닮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전국의 오덕들과 독신 남성들이 괴물 취급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미야자키 츠토무의 아버지가 자살을 해버리는 일까지 발생하면서 큰 후폭풍이 불었다. 한국에서도 유영철이나 정남규 같은 흉악범죄인이 언론에 뜨면 그 범죄인과 같은 이름을 쓰는 사람들이 개명을 하려고 하는 것과도 같은 현상이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이미 인생 다 때려친 중범법자들이 범죄를 안 저지르지는 않았으니 대중의 복수심만 충족시켰을 뿐 별 효과는 없었다. 

미야자키 츠토무 이전에는 일본의 오타쿠란 존재는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존재이긴 했지만 세간에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신경을 안 쓰던 존재라고 할까. 그런 존재가 언론에 한 번도 소개가 안 되다가 이 사건 덕분에 가장 최초로 소개되었다. 그 충격이 오죽할까. 결국 일본의 오타쿠들이 따가운 시선에서 벗어나기에는 근 20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이것은 언론의 설레발이 작용한 점도 있는데 당시 기자의 고백에 따르면 미야자키 츠토무는 단순한 오타쿠이자 네크로필리아로서 5000여편의 비디오 중 문제가 될만한 건 40편 정도로 전체의 1%도 안 되었다고 한다. 대부분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이나 도카벤 같은 장편 야구 애니메이션의 TV 녹화 비디오였다고. 물론 1%의 문제가 되는 비디오가 있었던 건 사실이나 로리콘 동영상을 한두개쯤 보다가 걸리는 건 페도필리아가 아니라도 가능한데다 2015년 이전까지 일본에서는 아동 포르노 소지가 범죄가 아니었기에 이것만으로 페도필리아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보다는 살해 후의 시체를 촬영하여 수집한 비디오들 속에 숨겨놓으려 했다는 점에서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규범 의식의 부재가 범죄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의사들의 감정 결과도 소아성애자인 것은 아니며 노린 대상이 어린 아이들이긴 하지만 그냥 범행 대상으로 삼기 쉬워서 고른 것이라고 한다.  결국 사회적 멸시에 그의 뒤틀린 인간성이 더해져 사람 자체가 심각하게 비뚤어졌기 때문에 아동 연쇄살인이라는 사상 초유의 중범죄를 저지른 것이지 그가 수집한 작품들의 영향으로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소견 결과가 나왔기에 재판부의 사형 확정이 오히려 더 쉽게 내려진 측면도 있기는 하다. 차라리 페도필리아였으면 소아성애 때문에 정상적인 정신 상태가 아니라는 점을 근거로 들어 감형을 노릴 수 있었지만 오히려 페도필리아가 아니기에 더더욱 엄벌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일본의 미스테리 소설이나 관련 매체에서 많은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살육에 이르는 병 등이 있다. 일본의 추리 소설가누쿠이 도쿠로도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설 '통곡' 으로 데뷔를 한 바 있다.

그가 남긴 말 중 지금도 세간에 널리 쓰이는 말로는 '역시 2차원으론 안 돼, 3차원이 좋아' 등이 있다.

참고로 재판 도중인 1994년 미야자키의 아버지가 아들의 죄를 대신한다며 투신자살하였다. 그러나 미야자키는 이 소식을 듣고는 "아버지가 그렇게 되어 속이 시원합니다" 고 대답했다. 또한 재판 도중 내내 "깨지 않는 꿈 속에서 했던 느낌", "쥐인간이 나왔다" 며 헛소리를 했고 자신이 발언하지 않을 때는 그림을 그리는 등 재판에 관심조차도 없었다.

사건의 영향으로 미야자키 츠토무의 가족도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가해자의 가족이란 이유로 죽어라, 죽여버리겠다는 편지가 쇄도했고, 피해자들에게 보상하기 위해 많았던 재산도 처분했다. 결국 상술했 듯 아버지는 자살해버렸고, 형제와 자매들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은거했다. 상당한 규모였던 자택도 팔아버리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한다.

한국에선 이 사건을 MBC 실화극장 죄와 벌에서 다루었고 미야자키 츠토무는 방영 당시 토모야라는 가명으로 바뀌었다. 다만 일본과 달리 방송 당시 한국에선 오타쿠 문화가 정착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가 오타쿠였기 때문에 이러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보지 않고 선천적인 손의 장애, 그로 인한 이지메와 여자들에게 당한 무시, 엄격한 집안 분위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어난 범죄로 묘사하였다. 다만 가택수사를 해서 음란물을 수집했다는 사실은 공개되었다. 2003년 방송하던 시기는 미야자키 츠토무의 정신 감정 중이라서 그런지 다중인격설을 어느 정도 반영해 할아버지 흉내를 내는 그의 모습이 등장했다. 그리고 재연배우 이중성씨가 미야자키 츠토무를 연기했는데 나중에 그는 츠토무보단 천공교편의 이호섭 연기가 더 좋았다고 말했다. 참고로 둘 다 정상보다 약간 모자란 캐릭터였다.

다만 이런 미야자키 츠토무의 주장이 아예 틀리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게 코바야시 카오루는 명백한 소아성애자였지만 미야자키는 소아성애자라기보다는네크로필리아였고 이전에도 아동 성범죄를 저지른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2008년 검찰청 사형집행명령으로 사형이 집행 되었다. 간수장에게 마지막 남긴 말은 "아직 못 본 비디오가 있는데 말이지." 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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