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쿠류한테 장난치고 싶다.'


며칠 전부터 지휘관의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이었다.


얼마전 거울 해역, 용궁을 공략하고 그곳의 주인이던 그녀가 합류하면서 모항은 한층 더 활기차게 되었다.


당당하면서도 호전적인 성격의 그녀는 다른 무투파 함순이들과도 대련을 통해 친분을 쌓아나갔으며 ㅡ비록 친목회는 다소 부담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였지만ㅡ 사나워 보이는 첫인상과는 달리, 나름대로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원만하게 모항의 일원으로 자리잡았다.


게다가, 중앵 최강급 항모라는 전력을 보유했다는 사실은 동료들에게 든든하면서 믿을만한 전우라는 생각을 심어주었고, 한층 더 쉽게 마음을 열수 있게 해주는 열쇠가 되었다.


지휘관도 그런 하쿠류를 의지하며 신뢰했고, 그녀를 지휘하면서 꽤 친밀감을 쌓았다.



그러던 와중, 지휘관은 하쿠류의 비밀을 목격하게 되었다.


누구보다 당당하고 강력하던 그녀가, 항상 들고다니던 칼이 없으면 누구보다 무력해지면서 나약해진다는 사실을.




'무슨 일이야, 하쿠류.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어?'


'읏?! 지, 지휘관! 그... 그것이...'


'왜 그래? 평소같지 않은데.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거야? 내가 도와줄 일이라도 있을까?'


'호 혹시  내 칼을 보지 못하였느냐 ? 내가 항상 들고 다니던 칼... 그것이 없어졌다….'


'그러고보니 그 큰 칼이 안보이네. 알았어. 같이 찾아줄게. 마지막으로 들고 있던 곳이 어딘지 기억 나?'


'이 근처였던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인다….  그, 그 칼이 없으면 나는.'


'어, 울지마. 내가 같이 찾아줄테니까. 자, 자. 뚝 그치고.'



울먹이던 하쿠류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지휘관은 희열을 느꼈다. 그토록 강인하던 함순이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그에게 의지하던 꼴이라니. 물론 평소에도 지휘관으로서 그녀와 다른 함순이들이 그에게 의지하곤 했지만, 그것과는 또다른 정복감이 그에게 전율감을 선사했다.


또한, 짧은 하의와 옆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복장도 지휘관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그래, 평소에도 지휘관으로서 나름대로 인망과 능력을 선보였으니 가끔 이런 장난 정도는 쳐도 괜찮겠지.


머릿속으로 위안을 하면서 비서함, 하쿠류를 호출했다.



"지휘관, 이 하쿠류를 불렀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냐?"


"."


지휘관은 짐짓 얼굴을 굳히고 심각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뭐, 뭐냐. 괜히 심각한 얼굴을 하고. 불렀으면 말을 해라."

"내가 왜 불렀는지 감이 안오는 모양이군."

"무, 무슨 말이냐. 알아듣게 얘기해보라고.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하쿠류가 긴장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안되겠군."


지휘관은 싸늘한 표정을 가장하면서, 다짜고짜 서랍을 열어 숨겨져있던 패널을 조작했다.


위이잉 철컥.


"히얏?! 내, 내칼이?! 도, 돌려줘!"


갑자기 천장의 구석이 열리더니 집게가 내려와 하쿠류의 칼을 빼앗아 갔다.

설마 천장에 저런 기능이 있으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하쿠류는 눈 깜빡할 사이에 칼을 빼앗기고 말았다.


"네가 저지른 실수를 자각하지 못하는 모양인 것 같은데. 이건 잠깐 받아두지.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면 돌려줄게."


사실 그녀가 별다른 실수를 한 것은 없지만, 지휘관은 하쿠류를 압박하기 위해 연기했다.


"내, 내 잘못...? 나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히끅!"


쾅!


"정말 아무 잘못도 없다고 생각해?"


책상을 내리치며 지휘관은 화를 참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그, 그것이... 나는... 내가 무슨 잘못을 했지..."


필사적으로 자신이 잘못한 것을 떠올리려는 하쿠류를 보며 지휘관은 마음속으로 웃었다.


'아 개꼴리네 진짜'


"호, 혹시... 지휘관실 냉장고에 들어있던 아이스크림... 마음대로 먹으면 안되는 거였나...?"


그러다 문득, 하쿠류는 소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


순간 웃음을 참지 못할 뻔 했지만, 지휘관은 필사적으로 정색한 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휘관실 냉장고에 있는 간식거리나 음료수들은 지휘관 본인이 먹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 비서함으로 고생하는 함순이들을 위해 채워놓은 것이었다. 당연히 비서함인 하쿠류가 먹어도 문제 될 것은 없다. 아마 비교적 최근에 모항에 합류한 하쿠류로서는 잘 모르는 사실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 꼴리는 찬스를 놓칠리 없는 지휘관은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또?"


"또, 또 뭔가 잘못한게 있다고? 으읏..."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하쿠류는 다른 실수(?)를 말했다.


"전의 연습전에서... 너무 과격하게 해서 의, 의장이 조금... 아니 조금 많이... 파손돼서... 만쥬들이 고생한 거 때문인가...?"


"......"


또 한번 웃음을 참지 못할 뻔 했지만, 입술을 깨물며 필사적으로 참았다.


다행이도 하쿠류는 긴장한 나머지 지휘관의 그런 모습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속으로 터질뻔한 웃음을 진정시키고, 지휘관은 최후통첩이라는 듯이 말했다.


"아무래도 정말 모르는 모양이군."


"히끅!"


겁에 질려서 뇌가 과부화 된 모양인듯 , 하쿠류의 눈동자가 팽글팽글 돌기 시작했다.


"저, 전에... 지휘관실 청소... 하다가... 그, 쓰레기 버릴 때, 무슨... 중요한 문서인지 모르고... 잘못 버린거 같은데... 우읏, 훌쩍..."


'아, 그 문서인가.'


이전에 상층부에 보고해야할 중요한 안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다 핵심부분이 있는 보고서가 뭉텅이로 사라진 적이 있었다. 제출 마감이 여유롭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잃어버린 보고서를 찾다가 결국 벨파스트와 몇몇 똑부러지는 함순이들의 도움을 받아 며칠동안 철야를 한 끝에 간신히 보고서를 제출할 수 있었는데, 이제 그 범인이 드러난 것 같았다.


본의 아니게 진짜 하쿠류가 저지른 잘못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보고서는 제출했기도 했으며, 시간도 지난터라 당시 느꼈던 짜증도 사라진지 오래이다. 게다가 다시 작성하면서 자료를 보강해 상층부로부터 치하를 받기도 했으니 결과론적으론 잘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아아앙! 미, 미안해... 내,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지휘관은 머릿속으로 당시 생각을 하느라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 모습이 화가 나서 참는 것이라고 생각한 하쿠류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지휘관은 그냥 하쿠류한테 장난 좀 치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면서 놀리다가 장난이라면서 칼을 돌려줄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면서 대성통곡을 할 줄은 몰랐다.


"자, 잠깐. 하쿠류. 진정해. 내가 장난친 거였어. 칼 돌려줄테니까 뚝 하자. 응?"


펑펑 우는 하쿠류를 쓰다듬으며 간신히 진정시는데는 30분도 넘게 걸렸다.

어느정도 진정되고서, 하쿠류를 품에 안은채로 지휘관은 말했다.


"그, 내가 하쿠류한테 장난쳐보고 싶어서 그랬어. 좀만 하려다 그만두려고 했는데 하쿠류가 귀여워서 멈출 수가 없었거든. 그렇게  무서워할 줄 몰랐어, 미안해"


"훌쩍, 그, 그러면, 내가 잘못한 건 없었던 거냐?"


"그래그래. 푸딩도 먹어도 되고, 연습전에서 의장이 파손되어도 만쥬들이 열심히 고쳐줄거야. 정 미안하면 만쥬들에게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던가."


"우읏... 나, 나는... 지휘관이 갑자기 그렇게 정색하는걸 처음 봐서... 내, 내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줄 알고..."


"미안해. 다음부터는 조심할게."


"응... 응?"


뭔가 뉘앙스에서 위화감을 느낀 하쿠류는 지휘관을 올려다 보았다.


거기에는 싱글싱글 웃고 있는 지휘관의 얼굴이 보였다.


"저... 지휘관...? 왜 그렇게 웃는거냐...? 뭔가 불안하다..."

"그러고보니, 하쿠류?"

"네, 네헤엣?!"

"너무 긴장하지마. 누가 보면 잡아먹는 줄 알겠어?"


긴장해서 삑사리가 난 하쿠류를 보면서 지휘관은 재밌는 걸 발견했다는 것 처럼 미소지었다.


"그러고보니, 그 보고서. 내가 꽤 고생했단 말이지."

"그, 그건..."

"뭐 사실 보고서는 이미 제출했고, 시간도 지나서 별로 화는 안났어. 너무 걱정하지마."

"그러면...!"


지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가는 희망을 발견한 듯, 화색을 띄는 하쿠류를 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잘못한 벌은 받아야지? 칼 3일 압수."

"그... 그런~~~~!!!"


희망을 짓밟는 것은 너무도 짜릿하다고.






며칠전부터 하쿠류한테 한남짓 하는 글 써보고 싶어서 쓸까말까 ㅈㄴ 고민하다가 못참고 써버림... 후 개운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