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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뜻을 이루는 자는 언제나 냉정해야 해."


비스마르크는 말했다.


"허나, 모두의 사기를 위해서 우울한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되지."


그리 말하는 비스마르크의 표정은 비장했다.

진지하고 강인한 힘이 깃든 눈빛은 단순히 냉철하기만 한 것이 아닌, 자신의 비장한 각오와 의지 또한 비추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휘관. 또 나른한 얼굴을 하고 있잖아. 자, 얼굴 들고, 가슴을 펴고, 눈을 또렷하게!"


그녀가 지휘관의 어깨를 잡아 몸을 바로 세우고, 머리를 쓸어 넘겨 얼굴이 보이게 하며 기합을 넣었다.

그녀의 말에 따라 지휘관의 눈빛이 살아나자 그제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잔잔한 대해처럼 거대한가 하면, 용암이 들끓는 해저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눈빛.

비스마르크가 비서 업무를 보는 날이면, 함내에는 열혈의 분위기가 흘렀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해보자. 당신에겐 기대하고 있어."

"응."


지휘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비스마르크와 함께 복도를 걷는다. 그리고...


덥썩.


"흣!?"


엉덩이를 만졌다.


"뭐... 하는 거지? 멋대로 만지지 말아줘."


비스마르크가 살짝 허리를 틀며 거리를 벌린다.

지휘관은 그녀가 움직인 만큼 따라 붙으면서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제복 치마와 함께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엉덩이 라인에 그의 손가락이 파묻혔다.


"역시 철혈의 수장답네. 엉덩이의 음탕함이 철혈 제일이야."

"......."


비스마르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한참 입을 달싹이다가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나는, 감정 표현을 잘 못하는 것 뿐. 너무 놀리지 마...."


여러 의미가 포함된 말이었다.

지휘관은 집요하게 파고든다.


"잘 표현하지 못하는 거면,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는데?"
"......"


비스마르크는 눈을 감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럴수록 지휘관의 손은 점점 더 엉덩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의뢰팀이 돌아온 것 같네, 먼저 맞이하러 갈게."


비스마르크는 그의 손을 뿌리칠까 말까 수도 없이 망설였다.

그녀의 망설임이 쥐었다 펴는 주먹의 움직임을 통해 드러났다.

하지만 그녀가 선택한 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화끈거리는 두 빰과 자신의 감정을 느끼며 복도를 걸어가는데...


"왜, 왜 따라오는 거지...?"

"돌아오는 대원을 맞이하는 건 내 역할이기도 하니까."


지휘관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 번 엉덩이로 손을 뻗는다.

비스마르크가 눈을 감으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마치 오줌이 마려운 것처럼 허벅지랑 팔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데 엉덩이를 탐하는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


비스마르크가 살짝 눈을 뜬다.

지휘관은 웃고 있었다.


"너무 놀리지 말라고 했지. 미안."

".......지휘관, 노는 건 적당히 해."

"아하하! 미안, 미안."


지휘관이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 이번에는 성희롱이 아니었다.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귀엽다고?

비스마르크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곧 마음을 추스린다.

큰 뜻을 이루는 자는 언제나 냉정해야 한다라는 건 그녀가 직접 뱉은 말이었으니까.


"......뭐, 됐어. 그 정도 스킨쉽쯤이야.... 뭐든 경험해보는 게 좋겠지. 오이겐도 그렇게 말했었고."

"어? 그 말은... 혹시 기대한 거야? 비스마르크. 내가 이런 짓 해주길 기대했어?"


지휘관이 귓가에 속삭였다. 끈적끈적한 목소리와 숨결이 목덜미에 닿는다.


"....윽....."


비스마르크의 얼굴이 귀까지 빨개졌다.

그녀는 대답을 회피하고 거친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간다.

또각 또각. 빠른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휘관은 하하, 웃으며 뒤따라왔다.


'당신은 정말.....'


비스마르크는 혀를 차며 주먹을 꽉 쥐었다.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는, 그런 짓궂은 놀림이었다.

물론, 그런 감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귀엽다던 속삭임이 떠오르자 비스마르크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마음이 빠르게 차분해진다.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솔직히... 순수하게 기뻤다.

하지만 씁쓸함도 있었다.


'누구에게나 하는 립서비스겠지.'


지휘관의 곁에는 수백 명의 여자가 있다.

가지각색의 성격을 지닌 여자들이 지휘관의 사랑을 원하며 다가간다.

그중에는 비스마르크는 감히 상상도 못할 정도의 적극성을 보이는 이도 있다.

수녀마저 아예 대놓고 섹스어필을 할 지경이니까.


'그런 화려한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이런 장난은 일상일 거야.'


화려한 꽃이 가득한 들판에서는 잡초가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가슴을 까보이고, 둔부를 아슬아슬하게 드러내는 여자들 틈 속에 끼어 있는 지휘관에게 매사에 진지하고 웃음도 별로 없는 여자가 눈에 띨 리가.


그렇다고 좌절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큰 뜻을 둔 자는 매사에 냉정해야 하는 법.

허나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위해, 우울함을 보여서도 안 된다.

냉정을 되찾은 비스마르크는 평소의 강인함을 되찾았다.


'동요하지 말자. 내가 할 일은 하나.'


감정을 뒤로 하고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나 자신의 삶이 아닌, 전체의 승리를 위하여.

이 한 몸을 희생하는 것.

그게 철혈의 수장으로써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이었다.


"모두 수고했어. 쉬어도 돼."


그녀는 은은한 미소와 담백한 말투로 복귀한 의뢰조를 맞이했다.


그렇게, 하루가 시작됐다.







"후... 커피 좀 마시고 할까?"


지휘관의 업무는 항상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전투가 없는 평상시에는 각종 업무 처리가 한창이다.

그러니 옆에서 그를 보조하는 비스마르크의 업무도 자연히 서류를 처리하는 것이 되었다.


"당신은 잠깐 쉬고 있어. 내가 커피를 내올 테니."

"응, 고마워."

"일일이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모든 건 승리를 위해서니까."


비스마르크는 살짝 미소를 지어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


지휘관이 방에서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이 닫혔을 때.

지휘관은 서랍을 열고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반지 하나가 들어갈 만큼의 크기인, 작은 함이었다.


"후... 역시 떨리네."







"커피라."


커피를 타러 간 비스마르크는 계량기를 꺼내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설탕, 프림, 무엇 하나 더 하지도 덜 하지도 않는, 완벽한 비율로 만들어진 커피.

부드러운 향이 부엌에 잔잔히 퍼진다.


"좋아."


그녀는 커피의 열기가 식지 않도록 최대한 빨리 커피를 조달한다.

병참 수송에서 중요한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건 품질과 속도다.

최고의 품질을 가장 빠르게 유통하는 것.


그 두 가지가 유지되면 병사들의 생활 질이 올라가고, 둘 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병사의 사기가 떨어진다.

그건 지휘관도 마찬가지일 터.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사소한 커피 한 잔이라도 열과 성을 다했다.


"자, 지휘관. 마셔라."

"응, 고마워."


비스마르크는 커피를 건네고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자기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커피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저 지휘관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흡족한 미소, 또는 놀란 눈을 뜨는 것을 보며 스스로 만족했다.


'이번에도 지휘관의 사기를 충전시켜줬네. 좋아.'


그 사소한 성공이 그녀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비스마르크는 다시 업무에 집중한다.


한참 동안 종이에 펜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지휘관의 소리가 뚝 끊겼다.

비스마르크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지휘관은 업무를 보던 자세에서 턱을 괴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계속 날 바라보고 있는데, 내 얼굴에 뭐라도 묻어 있나?"

"예뻐서."

"으, 응..? 예뻐서...?"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어 비스마르크는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금 떠올린다. 언제나 냉정해야한다던 자신의 말을.


"음... 고, 고마워...."


그녀는 잡념을 떨쳐내려고 업무에 집중한다.

물론, 잘 되지 않았다.


"저기, 비스마르크."

"...왜?"

"아까 스킨쉽도 경험해봐야 좋다고 했지? 오이겐이 그렇게 말했다고."

"...그랬었지."


비스마르크는 부끄러움을 참고 대답했다.

한 번 뱉은 말을 되돌릴 수는 없다.

발뺌하는 건 철혈의 수장으로써 할 짓이 아니었다.


"그건 어디까지 허용되는 거야?"

"뭐, 뭐라고?"

"엉덩이에서 더 나아가도 되나?"

".....지휘관. 업무 시간이야. 업무에 집중하자."


비스마르크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나 지휘관은 물러서지 않았다.


"대답 회피하지 말고."

"......."

"단순히 육체적인 것만 묻는 게 아니야."

"그러면?"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데, 비스마르크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감이 잘 오지 않아서."

"...?"


비스마르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리지?"

"워낙 개성 넘치는 애들이 많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 태생이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지휘관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이런 진지한 모습은 흔치 않았다.


"난 비스마르크의 감정을 잘 못 느끼겠어.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애들은 그만큼 알기 쉬우니까 나도 마음 놓고 대할 수 있단 말이야.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고."

"......"

"하지만 비스마르크랑 함께 있을 때는 그런.... 걸 잘 가늠하기가 어려워. 아침에도 내가 엉덩이를 만졌잖아. 그때 비스마르크가 화를 냈던 건지, 아니면 더 나아가고 싶은데 먼저 말을 꺼내기는 부끄러워서 말을 삼킨 건지 잘 모르겠어."


비스마르크는 눈을 껌뻑였다.


"어, 음... 그런 고백은 정말로 의외네."

"비스마르크는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고 했잖아. 내가 네 마음을 꿰뚫어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부족함이 많아서 그게 어려워. 그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고, 과연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지 조금 망설여져."

"음....."


비스마르크는 당황했다.

저렇게 솔직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이번만큼은 그녀도 쉽사리 냉정을 되찾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도..... 몰랐어.'


그저 놀리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비스마르크가 항상 말하잖아.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냉정해져야 한다고."

"그랬지."

"그러면 비스마르크는, 승리하기 위해 내 성희롱을 참고 있는 거야? 내가 하는 행동이, 애정표현이 아니라 성희롱으로 와 닿고 있어?"


지휘관의 눈빛이 진지하다.

다소 어리광 같은 말을 뱉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진심이라는 게 느껴졌다.


"크흠....."


비스마르크는 헛기침을 뱉고 입을 연다.


"난.... 감정을 표현하는 게 서투른 편이지만. 그래도... 당신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난 당신의 곁에 있을 때 행복하다는 것을...."

"행복... 그러면 승리를 위해서만 내 곁에 있는 건 아니라는 거구나?"

"....그래."


비스마르크는 처음으로 인정했다.

비단 승리만을 위해 그의 곁에 있는 건 아니다.


"그럼 아까 엉덩이가 음탕하다고 했을 때도, 화가 나지는 않았어?"

"......."


비스마르크는 그를 쏘아봤다.

평소였으면 지휘관이 눈을 돌리거나 미소로 무마하려고 했을 거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개똥 같은 말을 뱉고 있지만 강인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귀엽다고 말해준 건... 솔직히 기뻤어."

"그래? 그럼 잠깐 할 말이 있는데."


지휘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휘관? 업무는?"

"진즉에 다 했어."

"어?"


자세히 보니, 지휘관은 업무를 중간에 내팽개친 것이 아니었다.

다 하고 나서 그녀가 끝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다가 말이 트인 김에 대화를 이어갔고.


"비스마르크."


지휘관이 다가와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비스마르크는 그의 손길에 이끌려 조용히 일어났고, 방 한 가운데로 가서 그와 마주 보고 섰다.


"저와 결혼해주세요."

"어....?"


지휘관이 작은 함을 꺼내어 연다.

석양에 비춰져 선홍색으로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있었다.


"저, 저기.. 지휘관. 너무 갑작스러운데....."

"아...? 미안, 나도 내가 먼저 다가간 건 처음이라..... 많이 서툴렀을 지도."


지휘관이 머리를 긁적인다.

생각해보면 그는 항상 적극적인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거의 알몸으로 젖을 흔들며 유혹하는 여자들 틈에 둘러싸여 있으니, 성희롱과 스킨쉽의 경계가 다소 허물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항상 받기만 했기 때문에, 먼저 다가가 주는 것이 서투른 것도.... 당연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갑자기 엉덩이를 만지거나 음탕하다고 내뱉는 모습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도 했다.


"그... 혹시 싫어....?"

"....."


비스마르크는 멍한 표정으로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평생 동안 감정을 죽이고 살았다.

전장에서 승리했을 때조차 기뻐하지 않았다. 그 기쁨이 방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슬픔도, 기쁨도, 환희도. 언제나 마음 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느끼지 않으려고 애써 외면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지금 느껴지는 감정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뜨거운 물줄기가 뺨을 타고 흐른다. 턱선을 따라 미끄러지며 턱 끝에 맺혔다.


"...비스마르크?"

"....지휘관, 이럴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


지휘관은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비스마르크도 그리 한다.


"웃으면... 되는 거야?"

"....응."


지휘관이 미소를 짓는다.

어쩐지 서글퍼 보이는, 하지만 동시에 행복해 보이는, 안도의 미소였다.


"웃으면 돼. 활짝 웃어줬으면 좋겠어."


그가 비스마르크를 꼭 껴안았다.

그 순간, 꾹 눌러 담았던 그녀의 감정이 폭발했다.


여자들 틈에 섞인 지휘관을 보면, 그녀는 항상 시선을 돌렸다.

지휘관이 모두와 시간을 보낼 때, 그녀는 업무에 매달렸다.

승리를 위해서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그러나 사실.

그녀도 그곳에 있고 싶었다.

그녀가 가장 행복한 때는, 바로 지휘관의 곁에 있을 때였으니까.


외면해왔던 염원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지휘관이 바라는 대로 환히 웃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울음이 터져 나왔다.

비스마르크는 지휘관의 옷을 꽉 움켜쥔 채 울음을 터트렸다.


"...더 빨리 눈치 채지 못해서 미안해."


지휘관은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아주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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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슴2 일러 준내멋지더라



벽람 그림, 단편문학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