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어둑어둑한 밤, 진한 한숨을 내뱉으며 하늘을 바라본다. 난잡한 서류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천장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는 점에서 무언가 꽉 막혀있다는 것은 동일했다.
과로 수준의 업무, 함선 소녀들의 컨디션 관리, 그 외 국가 사이에 끼어 고생하는 여러 사건까지.
번아웃일까. 아니면 단순한 스트레스일까. 최근 들어 회의를 느끼는 일이 잦아졌다.
그나마 서류 업무는 비서함이나 다른 함선소녀들이 도와준다 하지만, 함선소녀들의 컨디션 관리는 온전히 내 몫이다. 대체할 수 없다.
나는 그들 앞에서 언제나 의지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의 역할을 해야 하니까.
하지만 나도 힘들다. 억지로 웃고 있다만, 이젠 정말.
한계다.
“실례할게, 지휘관, 있어?”
거듭된 정신적 피로로 심연에 빠지기 직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늘 그랬듯이 나는 거짓 가면, 미소를 그린 채 시선을 옮겼고, 손에 커피를 들고 있는 쿠이비셰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새벽인데도 불이 켜져 있길래……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가져왔어.”
연기가 모락모락, 누가 보아도 방금 막 내린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보기만 해도 몸이 절로 따듯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지금의 나에겐 마찬가지로 답답해 보일 뿐이었다.
“아, 고마워. 그쪽에 놔 줘.”
“……응.”
짧은 대답을 표한 쿠이비셰프는 조용히 커피를 내려놓았고, 이윽고 내 옆에 앉았다. 굉장히 조심스러운 눈치였다.
“이 시간까지 안 자고 일한다는 건, 할 일이 아주 많다는 거겠지?”
“응. 그렇지.”
“최근에 잠도 별로 못 잤잖아. 괜찮겠어?”
“괜찮아. 정말로 괜찮으니까.”
적당히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며 그녀와 눈동자를 섞는다. 난 웃었고, 그녀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이거 봐. 다크서클이 이렇게나 진해.”
“며칠 푹 쉬면 괜찮아져. 이번 주만 바쁘니까 상관없어.”
“그 말, 저번 주에도 했던 거 기억 나?”
“……그랬나.”
의표를 찔린 걸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또 한 번 멋쩍게 웃어 보인 나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서류를 바라보려 했다.
“……역시 안 되겠어.”
“쿠이비셰프. 지금 무슨…….”
“빨리, 따라와.”
서류를 바라보려 했던 행동이 시도에서 그친 이유는 그녀가 서류를 넘기려던 내 손을 붙잡았기 때문이라, 곱고 가녀린 손이었지만, 의지는 굳건했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소파로 나를 이끈다. 저항할 힘도, 의지도, 능력도 없던 나는 가만히 그녀에게 끌려갔고, 이내 눕혀져 버렸다.
어느새 내 머리는 그녀의 허벅지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무릎베개의 자세였다. 뒤통수를 타고 올라오는 온기가 내 몸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지휘관. 알고 있어. 최근 들어, 아니, 예전부터 당신은 지휘관의 직책을 굉장히 버거워한다는 걸.”
“아니. 난 괜찮아. 단지 기우일…….”
“아니, 그렇지 않아.”
무어라 변명하려 했으나, 막혀버렸다. 쿠이비셰프의 목소리가 내 말을 끊어버린 것도 이유였지만, 그녀의 손이 내 뺨을 쓸어내리고 있다는 사실이 더 컸다.
“지금 당신은……이렇게나 힘들어하고 있는 걸…….”
쿠이비셰프의 얼굴은 근심이 가득했다. 미간은 좁혀져 있고, 목소리에는 미세하지만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리고 사락사락, 그녀의 섬섬옥수가 내 머리를 쓸어내린다. 제대로 정돈하지 못한 탓에 조금 거칠었음에도, 그녀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따듯했다.
“……나를 걱정해 주는 거야?”
“당연하지. 혼자 끙끙 앓는 당신이 걱정되니 새벽에 여기까지 온 거 아니겠어.”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간다. 이는 나를 향한 걱정이자 격려, 그리고 마음이었다.
그 따듯함이 내 마음까지 닿은 걸까. 아니면 그냥 순수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필요했던 걸까. 내 거짓 미소는 어느새 지워져 있었고, 남아있는 건 상처받고 지친 마음, 그게 전부였다.
“……쿠이비셰프.”
“응. 불렀어? 지휘관.”
“나는 모항에서 모두에게 의지 받는 사람이야. 그렇지?”
“당연하지. 부정하지 않아.”
“……그럼 나는 힘든 일이 생기면 누구한테 의지해야 할까.”
쿠이비셰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내 머리를 쓸어내리는 손에 조금 더 집중할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 쌓인 피로에 차츰 눈이 감겨 갈 무렵에서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왜 없어. 내가 있는데.”
“……뭐?”
당황에 목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그마저도 막혀버렸다. 이어지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 착하지, 착해. 아침에 눈을 떴을 땐 다시 모항의 모두가 의지하는 지휘관으로 돌아가도록 해.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내 곁에 계속 있어도 돼.”
“…….”
대답은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하지 못했다는 말이 더 옳았지만 말이다.
“지휘관, 마음에 명심해. 인생이 당신을 배신해도 슬퍼하거나 화내지 말아줘. 나는 계속 당신 곁에 있어, 눈이 그치고, 하늘이 맑을 때까지, 당신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줄 거야.”
그리고 목이 메여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던 나에게, 그녀는 쐐기를 박아 넣었다. 나를 괴롭히던 막힌 무언가가 뻥 뚫린 순간이었다.
마침내, 나는 가면을 벗었다.
“……응. 고마워.”
감정에 북받쳐 겨우 쥐어짜낸 목소리는 물기가 잔뜩 어려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그녀는 모든 걸 이해한 듯 조용히 미소를 그렸다. 아름다웠다.
“자, 천천히, 눈을 감는 거야. 내가 계속 지켜볼 테니까.”
마음이 풀어지니, 몸이 풀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나는 가만히 몸을 맡겼고, 천천히 그녀에게 의지했다.
차츰 무거워지는 눈꺼풀 아래, 내가 마지막으로 마주한 건 그 어떤 때보다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쿠이비셰프였다.
“응. 잘 자. 지휘관.”
쿠이비셰프 짱예쁘고 짱 착하고 짱짱 지존 짱짱인데 언급이 아예 없어서 짱 슬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