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골 아파라.”
아픈 머리를 두드리며 눈을 뜬다. 보이는 건 개판이 된 침대, 또 이불, 그리고 팬티만 입고 있는 나.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방은 왜 이렇게 더러운 걸까. 나는 왜 팬티만 입고 있고 와중 이불만 왜 이리 깨끗하고 정갈할까.
생각하려 노력했으나, 소용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거지, 어지럽게 널브러진 빈 병을 바라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눈에 보이는 것만 일곱 개가 넘었다.
전부 내가 마신 건 아니다. 분명 어딘가에서 대판 술상을 벌인 것까지는 기억이 나니까. 지휘관실은 아니었는데, 2차로 온 걸까. 아마 그럴 거다.
……그래야 하는데.
-똑똑.
“실례합니다. 주인님.”
애꿎은 머리만 괴롭히며 고민을 반복하는 와중, 문이 열렸다. 등장하는 건 찬란히 흩날리는 흰색 머리칼이 눈에 띄는 아름다운 여성, 벨파스트였다.
벨파스트는 슬쩍 치맛자락을 올려 보이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로열 메이드의 메이드장 다운 품격 있는 인사법, 절도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개의 각도와 치마를 올리는 정도가 점점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말이다.
“……방 꼴이 영 아니지? 미안해. 빨리 씻을게.”
하여튼, 그녀가 왔다는 건 하루 업무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이불로 황급히 몸을 가리며, 나는 샤워실로 달려들었다.
“…….”
약간의 이질감과 함께.
***
찬물을 맞으니 정신이 한결 나아졌다. 머리도 더 이상 아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샤워는 끝났다.
적당히 옷을 챙겨 입고, 그대로 나선다. 또 놀란다. 말끔히 정리된 내 방에, 그녀의 능력에.
“매일 아침부터 고생이 많아. 늘 고마워.”
“아니요.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주인님을 보필하는 건 메이드의 본분이니까요.”
메이드로서의 벨파스트는 완벽하다. 이 단어 하나로 지칭할 수 있었다. 능력은 물론이요. 마음가짐까지 전부, 언제 봐도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하물며 아내라면 더더욱, 후후후.”
“……응? 지금 뭐라고 했어?”
“아닙니다. 어서 업무를 시작하시죠.”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는데, 본인이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그래. 벨파스트가 거짓말을 할 리도 없고, 빨리 일이나 해야지.
“아카시 좀 만나고 올게, 부탁한 게 있어서.”
“……아, 네. 다녀오십시오. 나의 주인님.”
오늘따라 깊은 눈빛에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웃으며 나올 수 있었다. 잘 보면 입꼬리도 살짝 올라가 있었는데, 무언가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걸까. 모르겠다.
대충 생각하며, 막연히 걸음을 옮긴다. 어제 한바탕 술 파티를 한 덕분일까. 복도는 평소보다 한산했다.
“허니~”
그렇게 생각했다.
“읏! 뉴저지구나.”
인기척도 없이 나타나 허리를 끌어안는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넘어질 뻔했으나, 시도에 그쳤다. 뒤에서 그녀가 잡아주고 있었으니까.
“놀랐지? 놀랐네. 후후, 놀라는 모습도 참 귀여워라.”
큭큭, 뉴저지가 웃음을 덧붙였다. 허리춤의 손은 여전한 채로, 정말 놔줄 기미가 없었다.
“그 뉴저지……? 나 지금은 좀 급해서.”
“응? 뭔데 뭔데, 나를 두고 갈 정도로 급한 일이야?”
오늘따라 유독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건 벨파스트뿐만이 아닌 걸까. 안 그래도 텐션이 높은 그녀의 텐션이 배는 높아져 이젠 감당하기 힘들 수준이었다. 하하, 멋쩍게 웃는 게 전부였다.
“아카시에게 볼일이 있거든, 부탁한 게 있어서 말이야.”
“……아하♡”
회심의 미소를 그린 뉴저지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서며 힘을 풀었다. 마침내 되찾은 신체의 자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만큼 적당히 손을 흔들며 물러서려 했다.
“허니!”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더라면.
“바람피우면 용서 안 할 거니까……알지?”
“어?”
“모르는 척하지 말고♪”
저게 대체 무슨 소리지, 달리 할 말이 없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뉴저지의 미소가 한층 커지는 순간이었다.
“다녀와!”
정말 뭘까.
“…….”
툭, 툭, 증폭되는 이질감이 머리를 두드린다. 아침에 비견 될 정도로 머리가 아려온다. 내가 어제 무슨 짓을 한 걸까.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박살 난 기억의 파편을 열심히 짜 맞춰 보지만, 될 리가 없다. 강해지는 두통, 그게 전부였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막연한 걸음을 옮기는 일, 다른 방법은 없었다. 가만히 앉아 머리를 싸맨다고 답이 나오는 게 아니니까.
“아, 지휘관님.”
생각하는 와중,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아카기구나.”
“후후후, 아침부터 지휘관님을 만나다니, 이런 행운이 또 있을 줄이야.”
아홉 쌍의 꼬리가 나풀거리며 시선을 끈다. 저토록 활달히 움직이는 건 처음 보는 데, 그녀 역시 마찬가지로 기분이 좋은 걸까. 아마 그럴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카기의 입꼬리가 저렇게 높이 올라갈 리가 없었으니까.
“마침 찾아가려던 참이었거든요. 수고를 덜었네요. 우후후…….”
“아, 아카기?”
아키가 손을 뻗어 가만히 내 뺨을 감쌌다. 평소에도 스킨쉽은 잦은 편이긴 했다만, 오늘따라 더 심했다.
특히나 저 꼬리가.
나를 감싸다 못해 품어버리는 꼬리는 참 아늑하고 포근했으나, 불안감이 치솟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그녀는 조금 위험한 편이었으니까.
“……이게, 무슨 냄새일까요.”
이런 식으로.
내 품에 안기려던 아카기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는 건 한순간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변화에 극히 당황했으나, 뒷걸음질 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내 몸은 그녀에게 붙들려 있었으니까.
“흐음……설마, 아무리 그래도 첫날부터 이럴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네?”
흉흉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온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 마른침을 삼킬 정도였다.
“말씀해 주세요. 지휘관님. 대체 무슨 짓을 하시는 거죠? 아니, 그 전에, 지금 어디에 가시는 거예요? 어디에 가는 거야?”
아홉 쌍의 꼬리가 나를 감싼다. 아까와 마찬가지였지만, 그 이유는 확연히 달랐다. 이것은 애정을 담은 포옹이 아닌, 포박이었으니까.
위험하다.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아무 말이라도 내뱉지 않으면 무언가 큰일이 일어난다. 내 본능이 그리 말했다.
“별일 없어! 그냥, 그냥 아카시 만나러 가는 길에 뉴저지가 갑자기 끌어안아서…….”
“……아.”
그리고 뚝, 아카기의 손이 멈춘다.
차츰 굳어가던 표정도 제자리로 돌아온 지 오래였다. 꼬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로서는 그저, 멋쩍게 웃어 보이는 게 최선이었다.
“우후후……아하하……그래요. 그런 이유라면……얼마든지 그럴 수 있죠. 지휘관님의 잘못이 아니니까요.”
“어, 응?”
“후후후……역시 지휘관님이에요. 아카기와의 약속을 위해……아아……상냥하셔라.”
알 수 없는 소리. 허나 이 위기 상황을 벗어나기에는 절호의 찬스라는 걸 이해했다. 여기선 적당히 넘어가는 게 최선이었다. 괜히 대꾸했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니까.
“그래도 이젠 임자 있는 사람이니……조심해주세요.”
‘나의 지휘관님.’ 아카기가 말했다.
“……응. 그래. 그럼 나는 일이 있어서.”
“그렇죠. 아주 중요한 일이죠. 우후훗!”
어느새 꼬리를 제자리에 돌려놓은 아카기는 조용히 한 걸음 물러섰다. 제 갈 길 가라는 뜻이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저 하염없이 나를 바라보는 그녀에게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다.
***
“아카시. 나왔어.”
“아, 지휘관, 표정이 왜 그런다냐.”
“……나도 몰라.”
피로한 정신에 나도 모르게 약간 날 선 말을 뱉고 말았다. 아카시는 그닥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어차피 돈으로만 굴러가는 사람이니, 그러려니 했다.
“하여튼, 부탁한 거, 준비했지?”
“당연하지, 덕분에 내가 먹고 산다냥.”
그리 말하며, 아카시는 작은 상자 하나를 건넸다. 오며 가며 자주 본 물건이었다. 바로 서약의 반지…….
잠깐, 반지?
“……아카시? 난 이런 거 시킨 적 없는데.”
“응? 무슨 소리냥, 어젯밤에 기억 안 나냥? 서약할 거니까 하나 주문하라고 말하지 않았냐. 여기 증거도 있다.”
그리 말하며, 아카시는 내게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서약의 반지, 가장 좋은 걸로.’ 수신인은 나였다.
“……그게 무슨.”
“그래서 누구 줄 거냥? 솔직히 나도 궁금한데, 몰래 알려주면 안 되냥?”
“……아.”
바로 그때, 쾅, 내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쳤다. 마침내 그녀들의 이상행동을 이해했던 까닭이다.
생각났다. 벨파스트는 나를 여보라 지칭했다. 마치 서약한 사이인 듯이.
뉴저지는 나를 허니라 지칭했다. 마치 서약한 사이인 듯이.
아카기는 나를 임자 있는 사람이라 지칭했다. 마치 서약한 사이인 듯이.
이건 서약받을 사람은 자기가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순도 100%의 확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마치, 내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고서야는 불가능한 그런.
“…….”
나는 어젯밤이 기억나지 않는다. 술에 만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망한다. 드디어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나는 인생 최악의 위기에 부딪힌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