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에는 해묵은 격언이 있다. 함장은, 군함의 배수량만큼의 술을 마셔야만 그 함선의 함장을 할 수 있다고. 물론 농지거리였지만 이 속에는 군 사회에서 더욱 엄격한 음주 문화, 업무 수행 능력뿐만 아니라 정치 및 사회생활 역량도 함장의 능력이라는 등 여러 의미를 포괄하고 있었다.
이 격언을 따르면, 모항의 지휘관은 말 그대로 술고래여야 했다.
하지만 상층 지휘부의 신뢰를 받고, 함선소녀들로부터는 경의와 존중의 대상이 되는 지휘관은 음주에 빠져 살지는 않았다. 단순한 이유였다. 모항의 지휘관은 많은 업무량에 시달렸다.
그렇지만 지휘관도 술을 싫어하거나 못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 역시 해군의 한 일원이며 어엿한 남자라는 듯, 참여할 수 있는 술자리에는 기꺼이 자리했고. 앞의 격언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어느 함선소녀보다도 많은 양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어쩐 일인지 검토 서류도 적은 날이었고, 저녁 즈음에 이세가 가볍게 한 잔 하자길래 흔쾌히 따라나섰던 오늘이었다. 비서함이 옅게 아쉬움을 표했지만, 일찍 돌아오면 된다고 여겼다.
그리고 술자리가 으레 그렇듯이, 한 잔은 두 잔, 한 병은 서너 병으로 증식했고. 이세뿐이던 술상대도 어느새 저들끼리 작당이라도 한 건지, 중앵이고 철혈이고 가릴 것 없이 북적북적했다.
결국 오늘의 비서함에게 말해놓은 시간은 지난 지 오래고, 취침 시간마저 훌쩍 넘기고서야 술자리가 파했다.
지휘관은 한적한 모항을 걸었다. 조명이라곤 나트륨 가로등의 주황 불빛뿐이었지만, 모항 구석구석은 눈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지휘관이었다. 방해요소는 비틀거리는 두 다리였다. 술기운에 달아오른 볼에 바닷바람이 싸늘했다.
으슥한 시간이지만 지휘관을 호위 – 라는 명목으로 단둘이 있을 기회를 꾸며보려는 시도는 없었다. 홀로 걸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 오직 지휘관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잠들어버린 몇몇은 차라리 양반이었다. 지휘관은 고주망태가 되어 이런저런 주사를 부리며 자리의 분위기를 돋구고, 또는 가라앉히던 몇몇을 기억했다.
지독하고도 괴로운 숙취와, 그것을 잠깐이라 축약시킬 수 있을 만큼의 끔찍한 수치에 시달리겠지.
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언어유희에 피식했지만 곧 웃음은 사라졌다. 지휘관은 걸음을 멈추곤 휘청거리는 몸을 진정시켰다. 모항 관사이자 집무실이 곧 눈 앞이었다.
지휘관은 큰 숨을 들이쉬었다. 비서함의 근무시간은 엄밀히는 야간까지긴 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깨어있을까? 통상적이라면 그렇지 않았겠지만, 지휘관은 괜히 불안해지는 마음을 달랠 수 없었다.
문을 노크할 필요는 없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출입문을 열었다.
끼이익-
평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소리지만 방안을 울리는 듯했다. 지휘관은 열었던 만큼 조심스레 닫으며, 날 밝는 대로 저 경첩을 바꿔 치워야겠다고 다짐했다.
달도 뜨지 않는 밤. 지휘관은 두 눈을 껌벅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방 안은 테이블 위 스탠드 불만 켜져 있었다. 자기가 대충 정리했던 서류가 그대로였다.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는 창가.
그리고, 집무실 한 켠에 비치한 그랜드 피아노의 건반에는 덮개가 내려져있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침실에 들어가 비서함이 자고 있는지 확인해야겠지만, 지휘관은 잠시간 억눌렀던 취기가 다시 부활하는 걸 느꼈다.
나른하고도 기분좋은 열기 속에서, 방금 술자리에서의 일화가 떠올랐다. 술자리가 점차 커지려고 하자, 비서함 핑계를 대면서 일어나려는 지휘관을 말리려는 말들이었다.
“으휴. 지휘관, 자꾸 그렇게 뺄 거야? 벌써부터 꽉 잡혀사는 거야? 남자가 말이야, 어?”
“흐흥, 그러게요 하는 꼴 보니까 마마보이가 따로 없네요…….”
이세였던가? 아니면 오이겐? 라피? 혀 꼬부라진 그 내용만 기억날 뿐 누군지는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 말에 지휘관도 오기가 생겨 자리를 지켰다는 것, 그리고 자기도 그말을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휘관은 누군지도 모를 함선소녀와, 그 농담과, 스스로를 비웃었다.
낄낄.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왔나보구나.”
지휘관은 순간 숨이 멎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신경쓰지 않았던, 분명 흐린 자기 두 눈으로는 아무것도 없다 생각했던 방 한 켠에서, 그림자가 천천히 스르륵 일어섰다.
깜깜한 방 안에서도 한쪽의 샛노란 안광이 지휘관의 눈과 마주쳤다.
“어…….”
“……후후. 얼마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지 궁금하구나.”
한 발짝 성큼 다가왔다. 지휘관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소리없는 걸음에 맨발인 듯 했지만, 그 키는 건장한 남성인 지휘관보다도 더 컸다.
“그, 저…….”
한층 더 가까워진 몸에서 세련되고도 중후한, 밤의 향기가 났다. 지휘관은 문득 제 몸에게서 술냄새가 얼마나 날지 뒤늦게 생각하고는 한걸음 물러서려고 했다.
“……많이 마셨나보구나, 아가야.”
“으, 응…….”
고혹적이면서도 한없이 너그러운 말투였지만, 자신에게는 준엄한 질책으로 느껴졌다.
지휘관은 고개를 푹 숙였다. 오늘의 비서함이자, 자기를 아가라고 부르는 전례없는 함선소녀이며, 철혈의 주력전함,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의 얼굴을 똑바로 처다볼 수 없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어서 씻고 자려무나.”
지휘관은 당연히, 그 말에 따라야겠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왜 자기가 그 말에 따라야하는지 불현듯 의문이 생겼다.
양가적인 감정에서, 혼동을 느끼던 지휘관은 가만히 서있었다.
“왜 그러니, 아가야?”
그 의문에 지휘관도 대답할 수 없었다.
왜 그런지 알지 못했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 어디 안 좋은 곳이라도 있는 거니?”
마찬가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어디가 안좋은지 정확히 짚을 수 없었다.
하지만 좋지 않았다.
“괜찮니, 아가야……?”
“……그렇게 부르지마.”
지휘관은 자신이 뭐라 말했다는 건 알겠지만 그 내용은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는 무슨 말을 들었다는 걸 알았지만, 그 내용을 얼른 이해할 수 없었다.
“아가야……?”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지휘관은 이제야 자기가 뭐라고 말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가야, 혹시 무슨 일이라도…….”
“내가 왜 네 아가야.”
여전히 굳어있는 지휘관이었지만, 목소리는 점차 커졌다.
“왜 안자고 있었어. 언제 오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려고?”
“……아가야, 나는 그저 걱정되어서…….”
“왜 네 아가냐고?!”
고함은 술김에 삑사리가 났지만 그렇기에 감정을 더 잘 전달할 수 있었다.
“나도 어른이야. 어? 모항의 지휘관이라고.”
“그, 그렇지만…….”
“네 아가가 아니라고! 왜, 왜 나한테 아가라고, 술도 함부로 못마시게 하고, 어? 식사도, 일하는 것도 다 참견하는 건데?”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는 한발짝 뒤로 물러났지만, 그 걸음엔 소리가 없어 둘 모두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 나는 그저 도와주고자…….”
“나 혼자 다 할 수 있다고! 그리고 또.”
지휘관은 한 팔을 거칠게 휘둘렀다. 그 방향성은 불분명했지만, 상대에게 위협을 주고 제 감정을 표출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한 곳에 곧게 뻗어있는 손가락은, 그 방향성이 미묘하게 어긋났지만 그 오류를 취하고 격양된 목소리로 보충했다.
“저, 저거! 저것도, 나한테 말도 없이 들여다 놓았잖아. 왜? 그냥 네, 네 취향이니까 그런 거잖아!”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는 그 손을 따라 뒤편의 피아노를 돌아보지 않았다. 철혈의 중진의 일원이자 전장에서 레퀴엠을 연주하는 지휘자는, 전에 없이 당황한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저거는, 전에 아가가 직접…….”
“아가라고 부르지 말랬지! 다 집어치워!”
지휘관의 비명에 가까운 고함에, 비서함은 너른 어깨를 떨었다. 지휘관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 즉흥곡의 마지막 장을 여는 데에는 큰 고민이 들지 않았다.
“나가! 비서함이고 뭐고, 어! 눈앞에서 꺼져!”
대꾸는 없었다.
그 무서운 침묵에 지휘관의 흥분과 열기도 조금 가라앉았다. 바닷바람의 냉기에 머릿속엔 마지막이 매조지는 여러 방법이 떠올랐다.
‘아가’라는 우스꽝스러운 호칭에 집중되어 가려져 감 있지만, 의장을 착용한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는 모항의 주력함선이었다. 평상시에도 대부분의 함선소녀보다 월등한 완력과 풍채,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다.
성격이 과격하고 재멋대로인 다른 함선소녀가 인간에게 위해를 가하는 사고가 종종 있었다. 그래도 순종적인 편에 속했는데, 혹시라도 그 태도를 지금 확 벗어던진다면?
술이 잔뜩 들어간 머리지만, 제 생각에 목덜미에 소름이 스쳤던 지휘관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샛노란 안광이 보이지 않았다.
“미안하구나.”
대답은 한 박자 이상 늦었다.
“내…… 생각만 한 것 같구나. 아ㄱ……, 지휘관.”
호칭의 번복에 지휘관은 자기의 외침이 받아들여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왜인지 얼른 기쁘지 않았다.
“……나가 있겠다.”
사라졌던 한쪽 눈이 다시 보였다. 하지만 지휘관과 달리 그 샛노란 눈은 너무도 차분했고, 빛을 잃었다.
“그래도, 시간이 늦었으니 얼른…….”
지휘관은 못다한 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왜 말을 다 마치지 않는지도.
“그, 그로세…….”
“미안하구나.”
어색하게 올라가던 지휘관의 팔은, 제 옆을 스쳐지나가는 비서함을 붙잡지 못했다.
자신의 어미를 자처하는 함선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로세……?”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는 자기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던 문으로 나갔다.
방 안 어둠에 제대로 보지 못했던 옷차림을, 바깥 조명에 비쳐 잠시라도 볼 수 있었다. 그 순간은 찰나였지만 지휘관의 망막에 오래도록 남았다. 검정 유카타. 언젠가 그게 잘어울린다고 직접 말했던 게 흐리멍덩한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밤바람은 차가웠다. 추울 텐데, 하는 멍청한 혼잣말을 입안에서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지휘관은 휘적이는 걸음으로 집무 탁상에 갔다. 특별한 의도가 아닌, 몸에 익은 행동이라 그랬다. 의자에 온몸을 던지듯 의자에 앉고는, 쓰려질 것 같은 윗몸을 두 팔로 받쳤다.
멍한 눈에 탁상 위 모습이 들어왔다. 아까는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대충 쌓아둔 서류가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보다 눈에 띄는 게 있었다.
꼭지까지 만취한 지휘관이었지만, 누가 책상 위에 피로회복제를 올려두었는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괴로웠다.
지휘관은 한 손으로 이마와 눈가를 감싸쥐었다. 욕지기가 느껴졌고, 그보다는 자기혐오가 느껴졌다.
“쓰레기새끼…….”
감싸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것만으론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취기의 고통 때문만으로 그러는 게 아니란 건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혼자인 게 확실한 방안은 너무도 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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짭선마망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