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무형의 존재라 한들, 당신과 내 유대는 나름 깊다고 생각했어, 적어도 아무 말 없이 잠적해 버리진 않을 만큼.”
무미건조하다 못해 말라비틀어진 목소리가 느즈막히 울려 퍼진다. 이 공간에, 또 그의 마음속에.
눈꺼풀을 깜빡인다고 한들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크론슈타트는 어느새 그의 위에 올라탔고, 손목은 풀리지 않았다. 그게 전부였다. 다른 건 없었다.
“그런데……이거 봐, 지금 우리 둘을 이어주고 있는 건 유대가 아니라, 고작 이거야.”
손목에 달린 은색 수갑을 가리키며 하, 하, 하, 크론슈타트가 정확히 세 번에 걸쳐 웃었다. 사내는 웃지 못했다.
이내 손을 뻗어 은색 수갑으로 연결된 손을 맞잡는다. 손가락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끈적하게 휘감는다. 마치 흙에 뿌리를 내리듯, 그를 붙잡았다.
“당신이 생각해도 웃기지 않아? 그렇게 단단하리라 믿었던 신뢰, 유대는, 고작 금속 쪼가리 하나보다 못하다는 사실이.”
마치 연인이나 할 법한 다정한 행위였지만, 지금의 둘에게 다정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누가 보아도 그리 말했을 것이다.
이어 차갑고 날카로운 얼음과 같이, 크론슈타트가 얼굴을 들이민다. 바닥에 누워있는 그를, 그녀가 내려다본다.
그에 맞춰 머리카락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마치 커튼처럼 그의 뺨을 스쳐 지나간다. 이제 도망칠 곳은 없다. 그는 크론슈타트의 눈을 마주해야 할 의무가 생겼다.
무언가 결여되었다. 이 말 이외에 정확한 표현은 없었다. 별빛 서리처럼 빛나던, 흡사 맑은 호수와 같던 눈은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았다.
“할 말, 없어?”
무릇 침묵은 금, 웅변은 은이라 하지만, 적어도 작금의 상황에 통용되는 말은 아니었다. 사내도 인지하고 있었다.
허나 그가 입을 열지 못한 까닭은, 그 어떠한 말을 꺼내도 지금의 상황을 탈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에서 기인했다.
“…….”
때문에 침묵은 이어졌다. 째깍, 째깍, 천천히 움직이는 초침만이 울려 퍼지고, 한 바퀴, 두 바퀴, 사정없이 돌아간다.
크론슈타트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온몸의 감각을 그의 입술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내가 입을 열기로 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미안해.”
“…….”
그 정체는 사과의 한 마디, 짧디짧았지만,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단순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변명은 절대 아니었다.
허나 이미 얼어붙어 깨져버린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너무나 늦어 있었다.
“……당신이 사라진 3년간, 내가 뼈에 사무칠 정도로 통감한 사실이 있어.”
말하며, 크론슈타트의 오른손이 그의 가슴으로 옮겨갔다. 물론 왼손은 여전히 그의 손을 맞잡은 그대로였다.
쿵, 쿵, 긴장과 불안, 그리고 죄책감 등이 섞여 눈에 띄게 요동치는 심장이 그녀의 손을 타고 올라왔다. 그녀의 입꼬리가 쓰게 올라갔다.
“바로 무형의 존재는 일체의 가치도 없다는 거야.”
크론슈타트가 크게 웃는다. 그는 웃지 못한다. 그런 모습을 보며 여인은 더 크게 웃어 보이고, 사내는 더 크게 표정을 굳힌다.
소리 없는 웃음은 그의 심박을 더욱 가속시켰다. 쿵, 쿵, 쿵, 이젠 손을 대지 않아도 느껴질 수준에 이르렀다.
“예를 들면 신뢰, 우정, 그리고 또……책임감이 있지.”
필히 누군가를 겨냥한 말, 사내의 표정이 조금 더 일그러졌다. 물론 그녀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나는 보다 실재적인 것이야말로 진정한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해, 신뢰도, 우정도, 그리고 책임감도.”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드디여 말문이 트였네. 보기 좋아.”
크론슈타트가 고개를 더 숙여 그의 귀로 입을 옮겼다. 미려한 듯 거친 숨소리가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다시는 도망칠 수 없게, 당신을 위한 실재적인 책임감을 만들어주려고.”
그리고 얼굴을 원위치로, 아니, 이전보다 조금 더 가까이, 크론슈타트는 그를 마주보았다. 서로의 숨결이 맞닿는 지극히 좁은 거리, 점점 좁아지고 있는 건 그의 착각이 아니었다.
또 서서히, 그녀가 그의 입술로 얼굴을 들이민다. 어린아이라도 피할 수 있을 만큼 느렸지만, 지금의 그에게 저항할 도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너 지금 설마…….”
이상을 깨달은 그가 당황의 목소리를 내보았지만, 곧 다다른 그녀의 입술에 막혀버렸다. 비유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흡사 뱀과 같았다.
다음 행동은 뻔했다. 맞닿은 입술의 부드러운 감촉을 만끽하고, 크론슈타트는 남은 한 쪽 팔도 그의 손을 깍지 껴 붙잡았다.
멀리서 본다면 연인 사이의 그것을 연상시킬 행동, 허나 가까이서 본다면 그 실상은 크게 달랐다. 그저 잡아먹히는 관계, 그뿐이었다.
크론슈타트는 이 뒤의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꾸물꾸물, 서로의 혀가 뒤섞이는 건 이제 필연이었다.
반항하려 한들 이미 뿌리내린 손가락은 절대 풀리지 않았다. 다시는 그를 놓치지 않겠다는 비틀어진 의지는 쉽사리 벗겨낼 수 없었다.
아니, 뿌리내린 건 손가락이 전부가 아니었다. 다리도, 가슴도, 팔도, 모두 맞닿아 얽혀 있었다. 몸을 흔드는 게 고작일 뿐.
결국 그에게 크론슈타트의 망가진 애정을 받아들이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진하고, 진했으며, 또 진했다. 숨이 막힐 정도로.
그녀에게 배려는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애정을 주입하기 위한 일방적인 행세에 지휘관은 짓눌려 질식하기 직전이었다. 양손을 꼭 붙잡은 채로, 지독할 정도로 다정하게.
“푸하아…….”
무자비한 포식이 끝나고, 나타나는 것은 다발로 이뤄진 투명한 실, 그녀의 말대로 현재 그와 크론슈타트를 실재적으로 이어주고 있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 비단 그의 것이 아니었다. 두 남녀는 거친 숨소리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아마 이전의 나라면 이것으로 충분히 만족했을 거야.”
푸른 눈의 여인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사내는 그저 거친 숨소리를 몰아쉬는 게 고작이었다. 정확히는 잠시 공황 상태가 왔다는 게 더 올바른 표현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당신에게 조금 더 바라는 게 많거든.”
고운 손가락이 그의 입술을 훑어내린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하지만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게.
입술에서 내려간 손가락은 가슴에서 멈춘다. 여전히 두근두근, 그가 긴장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심박을 만끽한다.
“무형의 책임감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깨달은 날, 가장 먼저 다짐했어, 만약 당신을 다시금 만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실제로 존재하는 책임감을 만들어주자고.”
다시금 손가락이 내려간다. 가슴에서 복부로, 복부에서 차츰 하반신으로.
“그렇게, 실재하는 책임감으로 묶어버려, 다시는 놓아주지 말자고.”
우뚝, 사내의 고간으로.
“잠깐만, 너 설마…….”
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고, 그녀의 표정은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물든다. 손가락은 어느새 그의 몸에서 타고 올라가 그녀의 아랫배로 이동해 있었다.
“이젠 먼 과거가 된 시절, 철혈의 누군가가 말했지, 당신이 곤란해하는 모습이, 겁에 질린 모습이 사랑스러워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고.”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실재적으로 이어져 있는 두 사람의 신체가 더욱 단단하게, 그리고 기괴하게.
흐, 히, 히, 하고.
“그때는 몰랐는데……이젠 나도 알 거 같아.”
오른손이 움직여 그의 바지를 내린다. 이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지휘관이 가장 우선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잠깐만, 크론슈타트……크론슈타트!!!”
그러나 달리 조치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입술을 움직이는 것, 그뿐이었다.
“사랑해, 이젠 다시는 놓치지 않을 거야.”
“아니야……이건 아니야!”
닿지 않는다.
“사랑해, 이젠 더 이상 사라지게 두지 않을 거야.”
“멈춰! 크론슈타트! 그만!”
닿지 않는다.
“사랑해. 언제까지나.”
“크론슈타트!!!”
닿지 않는다.
크론슈타트는 웃는다. 이 세상 그 어떤 여자보다 행복한 얼굴로, 그녀가 웃는다. 곧 이어질 행동에 크나큰 행복을 느낄 그녀가 크게 웃는다.
“사랑해.”
찌직——하고, 그녀의 옷이 찢어지는 소리.
흑화는 꼴리지만, 사실 캐릭터 성격이랑 잘 안 맞는 거 같아서 올려도 되나 고민했읆…… 한 번만 봐주세요